오차노미즈여자대학

 


1. 개요
2. 연혁
3. 전공
4. 부속학교
5. 일본 황실과의 인연
6. 해외 대학과의 교류
7. 출신 인물
7.1. 부속학교 출신 인물


1. 개요


お茶の水女子大学 / Ochanomizu University
일본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국립대학. 약칭은 오차다이(お茶大), 오차죠(お茶女). 처음에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학교로 개교되었다가, 오늘날과 같은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한국여자대학이 모두 사립학교인 것과 달리, 일본에는 국공립 여대들도 있다. 국립여대는 2곳만 있는데, 간토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고, 간사이나라여자대학이다.
패전 후인 1947년에 학제개편 논의과정에서, '여성교육을 진흥한다'는 명분하에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여자제국대학으로 승격한다'는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제국대학 7곳에 더해 호쿠리쿠, 주고쿠, 시코쿠 3곳에 신설될 10개교의 국립종합대학을 제외한 모든 관립 고등교육기관[1]을 지방 도도부현 공립학교로 이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GHQ에 의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결국 이 두 여자고등사범학교를 모체로, 유이한 '''국립'''여대인 오차노미즈여자대학과 나라여자대학이 설립되었다.
오차노미즈여대는 일본에서 명문 여자대학으로 명성이 높으며[2],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국제적인 평가로는 QS세계대학순위 2019에서 801-1000위를 기록했다.
학교 홈페이지

2. 연혁


  • 1885년 남녀사범학교 통합으로 도쿄사범학교에 통합되어 여자부로 편제.
  • 1949년 신학제 시행에 따라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모체로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설립.

3. 전공



4. 부속학교


부속보육원[3], 부속유치원, 부속초등학교, 부속중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를 두고 있다. 중학교까지는 남녀공학이지만, 고등학교는 여고이다.
보육원은 본래 어린 자녀를 둔 교직원, 학생, 연구원 등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2005년에 유아의 발달과정을 연구하기 위한 시설로서 대학 부속이 되었다.
1947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부속고등여학교가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이 되었지만, 고등학교는 여전히 여학교 체제를 유지했다. 오차노미즈여대가 명문인 것처럼,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여고도 명문 여고로 꼽힌다.[4]

5. 일본 황실과의 인연



5.1. 히사히토 친왕


2006년 9월 6일, 일본 황실에서는 히사히토 친왕(17세)이 태어났다.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늦둥이 장남(셋째)인 이 아이는, 41년 만에 태어난 남자 황손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1965년 11월 30일 후미히토 친왕(58세)이 태어난 이후로 황실에는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고[5], 나루히토 황태자도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만 두고 있어, 이대로라면 장래 천황직을 계승할 수 있는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사히토 친왕은 암묵적으로 황태손 대우를 받으며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과 어머니 키코 비도 황태자 부부를 제치고 주목받으며 인기가 높아졌다.[6]
2010년 4월, 히사히토 친왕은 전통적 황족 학교인 가쿠슈인유치원이 아닌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유치원에 입학하여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도록 하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마침 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여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기도 했고. 같은 시기 히사히토 친왕의 큰누나인 마코 공주도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국제기독교대학으로 진학하여, 남동생과 함께 화제가 되기도 했다. 3년 후인 2013년, 히사히토 친왕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유치원을 졸업하고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내부진학했다. 이전에도 가쿠슈인 유치원에 다니지 않은 공주들은 몇몇 있었지만, 가쿠슈인 초등과가 아닌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한 황족은 히사히토 친왕이 처음이다.
그런데 (위에도 서술했듯이)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는 여고라서, 히사히토 친왕이 다닐 수 없다. 이에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논의되었으나 동문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고, 총장 무로후시 키미코(室伏きみ子)부터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들을 쭉 거쳐 오차노미즈여대 이학부를 졸업한 사람이라, 부속여고의 남녀공학 전환을 반길 리 없었다. 부속남고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무산되었다.
2017년, 새로운 방안이 나왔다. 오차노미즈여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국립 쓰쿠바대학과 협정을 맺어,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 학생 몇 명을 선발, 무시험으로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로 진학시킨다는 것이다. 히사히토 친왕 및 그와 친한 아이들 몇을 뽑아, 함께 쓰쿠바대학 부속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려는 듯하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학교와 쓰쿠바대학 부속학교 모두 합격하기 힘든 명문학교이기 때문에, 노골적인 특혜로 보이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당연히 좋지 못하다.
그러나 히사히토 친왕을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무시험으로 진학시키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2019년 2월 히사히토 친왕의 중학교 진학 계획이 확정 발표되었는데, 2019년 4월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 무시험 진학 계획이 취소된 이유는, 히사히토 친왕의 큰누나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인해 차남 일가에 대한 시선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가족들뿐 아니라 히사히토 친왕 본인에 대해서도, 학교에 잘 등교하지 않는다는 등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그래서 일단 중학교는 내부진학으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 보내고, 고등학교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려는 것.
2019년 4월, 히사히토 친왕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했고, 1학년 국화반에 편성되었다. 입학식에서 히사히토 친왕은 114명의 신입생을 대표하여 선서하며 (좋지 않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또한 4월 26일에는 히사히토 친왕을 노린 흉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학년 국화반 교실에 있는 히사히토 친왕의 책상에, 누군가 흉기를 놓아둔 것. 범인은 곧 잡혔지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역시 황족은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것이 맞다", "가쿠슈인 중등과(남중)로 전학시켜라", "키코 비의 주작이 아니냐"는 등등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히사히토/중학교 참조.)

5.2. 키코 비


키코 비는 오차노미즈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문학박사 학위 논문은 국회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고, 오차노미즈여대에서도 비공개(열람 금지)라서, 여기에 대해서도 의혹의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6. 해외 대학과의 교류


한국, 중국, 태국, 베트남, 대만, 미국, 영국, 캐나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스웨덴, 핀란드,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호주, 뉴질랜드, 이집트의 여러 대학들과 교류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 중에는 숙명여자대학교(2000.2.14), 이화여자대학교(2000.2.28), 동덕여자대학교(2005.3.30), 한국예술종합학교(2011.1.17), 경북대학교(2011.6.22), 부산대학교(2012.3.21), 계명대학교(2013.7.9), 건국대학교(2014.3.21), 고려대학교(2015.2.24)와 교류하고 있다.[7]

7. 출신 인물



7.1. 부속학교 출신 인물



[1] 관립대학, 관립구제전문학교[2]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와 비슷한 포지션이다. 단 이화여대는 사립대학, 오차노미즈여대는 국립대학이라는 차이가 있다.[3] 일본에서는 어린이집 정도에 해당하는 보육시설을 보육원이라고 부른다.[4] 편차치 78로 전국 2위이다.[5]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54세), 1981년 12월 20일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42세), 1983년 10월 25일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40세), 1986년 3월 8일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3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35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33세), 1991년 10월 23일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32세), 1994년 12월 29일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29세), 2001년 12월 1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2세).[6] 반면 아키히토 덴노의 큰며느리인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을 낳지 못한데다, 오랫동안 일본 황실과 여러 문제로 갈등한 끝에 심신의 병(적응장애)을 이유로 칩거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7] () 안은 교류협정을 체결한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