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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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서씨 3대 배향공신'''
'''정민공 서필'''
'''장위공 서희'''
'''원숙공 서눌'''

'''고려국 내사문하성 내사령
고려국 태사
서필
'''
'''시호'''
'''개국정민공(開國貞敏公)'''
'''삼사'''
'''태사(太師)'''
'''본관'''
이천 서씨
'''이름'''
필(弼)
'''아들'''
서희, 서영, 서렴
'''생몰연도'''
900 ~ 965
1. 개요
2. 역임 관작
3. 상세
4. 기타
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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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 광종 대성대왕 대의 문신. 경기도 이천시 출신으로 이천 서씨 재상가를 시작한 인물.

2. 역임 관작


'''서필의 생전 관작'''
'''향직 품계'''
대광(大匡)
2품 1등위 품계.
'''직위'''
내의령(內議令)
내의성의 명목상 최고위직.
'''서필의 사후 관작'''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최고위 품계.
'''직위'''
태사(太師) - 내사령(內史令)
태사는 삼사 직 중 하나, 내사령은 내의성이 내사성으로 바뀌면서 내의령의 바뀐 직함이다.
'''시호'''
정민공(貞敏公)
광종 대성왕의 배향공신이다.

3. 상세


광종대왕은 그동안 왕을 칭한 선왕들과는 다르게[1] 대내외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불렀다.
광종은 권력을 쥐고 조정을 압도하니 '철혈 군주'였다. 고려사 광종 세가에 명시되었을 정도로 신하들은 광종을 두려워했는데 유일하게 서필만이 철혈 군주에게 직언을 올렸다.
고려사 서필 열전에 따르면 서필은 하급 관리 출신이었다고 한다. 유력 호족 출신은 아니었을 확률이 높은데 점차 승진을 거듭해 2품 1등위 대광 품계를 가지고 장관급인 내의령 직위에 봉해졌다. 서필이 남긴 일화는 배짱이 매우 두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본궐 소유의 말이 죽었다. 광종은 말 관리를 제대로 못한 담당자를 처형하려 했는데 서필은 공자의 예를 들며[2] 광종에게 반대 의사를 드러냈고 결국 명령을 거두었다.
  • 광종이 서필 등 중신들에게 귀한 그릇을 하사했다. 서필만이 거부했는데 이유는 비싼 그릇은 오로지 임금만이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든 광종은 "경이 보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나는 경의 말을 귀히 여기겠소."라 대꾸했다.
  • 광종은 호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귀화인들을 중용하였다. 호족을 길들이기 위해 호족 출신 신하들의 을 뺏어 귀화인 출신 신하에게 주었는데 서필이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통째로 바치겠다고 아뢰었다. 광종이 이유를 묻자 서필이 이렇게 말했다. "귀화인들이 오니 재상의 집은 모조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 집은 누추하나 가져가시고 저는 은퇴할 때 봉급을 모아 작은 집을 사서 늙겠습니다." 광종은 이를 듣고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호족 누르기가 과해졌다고 여겼고 집 뺏기를 멈추었다.
  • 서필이 광종에게 "공이 있는 자에게만 상을 주셔야 하고 공이 없는 자에게는 상을 뺏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광종이 듣고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는데 다음날 측근 몇 명을 서필에게 보내 '공이 있는 자'와 '공이 없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서필은 "공이 있는 자란 호족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중앙 정부의 통치가 닿게 한 신하 식회(式會)를 의미하오. 공이 없는 자는 당신들이니 이 말 그대로 아뢰시오"라 말했다. 당시 제 일을 하는 신하들을 광종의 측근들이 모함하고 시기한 것을 면전에서 대고 직언을 올린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광종에게 클레임을 걸며 직언을 올렸지만 광종은 서필의 목숨을 거두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중용했고[3] 이에 서필도 직언을 거듭 올리며 광종의 개혁에 일조했다. 광종 재위 16년차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받아 사후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아들인 서희와 손자 서눌까지 재상이 되는 영예를 누리는 것은 물론 성실히 고려를 이끌어 나갔다.

4. 기타


서필의 먼 후손인 서공(徐恭)[4]의 묘지명이 현존하는데 서공 묘지명에서는 서필이 '태조성조공신(太祖聖朝功臣)'이라 밝히고 있다. 태조성조공신은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그려진 삼한공신들을 의미하는데 이천 서씨 가문이 후삼국 전쟁 때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예지 태묘조에 기록된 배향공신 중 개국공신에도 임명된 신하는 시호에 개국(開國) 미칭이 붙어있다. 서필은 시호에 개국이 붙어 있어 그가 고려 개국에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5. 대중 매체에서


제국의 아침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도선 대사 역으로 유명한 이대로가 열연했다.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 그대로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노신으로 묘사되며 그릇 하사를 거부한 일화는 극중에서 재현되어 나왔다. 드라마 초장부터 왕규 일파가 실행하는 정책들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로 맞서며 반대하는가 하면 왕식렴정종이 서경 천도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자 이에 대해서도 극렬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5] 후에 광종 역시 서필의 직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도 많았지만 짜증을 내거나 환관들에게 명하여 쫓아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처형하려고도 했지만 측근들을 비롯한 대신들의 만류로 참형 직전에 명을 거둔 적도 있다. 마지막화인 94화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하는데 갈등을 빚은 적도 많았으나 내심 직언을 서슴치 않던 서필을 아꼈던 광종은 슬퍼하며 친히 장례식장으로 행차했으며, 장례비용까지 전액 지원해주었다.

[1] 흔히 고려를 외왕내제라고 하지만 실은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한 적도 광종이 잠깐 칭한게 유일하다. 외왕내제라 하는 것은 황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모든 형식을 황제식으로 해서 사실상 황제처럼 행동했기에 황제로 치는 것일 뿐이다.[2] 논어 향당편에서, 공자가 출타한 사이에 마굿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가 돌아와 이를 듣고 “혹시 사람이 다쳤느냐”라고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했다.[3] 사실 광종의 숙청 대상은 왕권에 반감을 드러내는 유력 호족들이었지, 자기 할 일을 잘하는 관료들은 아니었으며 호족들의 숙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재위 말기에는 지속적으로 과거를 실시하여 본격적으로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4] 서필 → 서희 → 서눌 → 서유걸 → 서정 → 서균 → 서공 순이다.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5] 조회에서 끝까지 서경 천도에 반대하자 당시 집정이었던 왕식렴이 직접 그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했다. 그러나 서필은 얼른 차만 마시고는 앞서 자신과 같이 왕식렴과 독대한 후 향리로 돌아간 염상과는 달리 본인은 머리를 내 놓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반대할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서필의 강직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