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 10조
1. 개요
訓要十條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대의 왕들을 위해 남긴 10가지 유훈.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943) 계묘년에 기록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려국왕의 행동 지침서쯤 되겠다. 그러나 몇몇 당연한 말들을 제외하면 훈요 10조의 대부분 항목은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다. 정확한 이름은 훈요(訓要)이며 후대에 첨삭되어 십조인지 원래부터 십조인지는 알 수가 없다.
2. 내용
○ 二十六年 夏四月 御內殿, 召大匡朴述希, 親授訓要, 曰 “朕聞, 大舜耕歷山, 終受堯禪, 高帝起沛澤, 遂興漢業. 朕亦起自單平, 謬膺推戴. 夏不畏熱, 冬不避寒, 焦身勞思, 十有九載, 統一三韓, 叨居大寶二十五年, 身已老矣. 第恐後嗣, 縱情肆欲, 敗亂綱紀, 大可憂也. 爰述訓要, 以傳諸後, 庶幾朝披夕覽, 永爲龜鑑.
▷ 26년 여름 4월. 왕이 내전(內殿)으로 나가 대광(大匡) 박술희를 부른 다음 친히 「훈요(訓要)」를 내렸다.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위대한 순(舜)은 역산에서 밭을 갈다가 결국 요에게 자리를 물려 받았고, 고조(高祖)는 패택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한나라의 업을 일으켰다.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 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2.1. 첫째, 삼국통일의 위업이 모든 부처의 보호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왕건이 비록 고려를 다스리며 국가의 통치 체계로 유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당시 대부분의 호족들은 독실한 불교국가 신라에서 이어진 시대로 불교도였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매우 중요하게 받들고, 이후 조선시대나 현대 대한민국에 비교할 수 없이 일반인들의 생활 전반에 깊이 유착된 사상이었다. 따라서 국론과 백성들의 결집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其一曰,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故創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各治其業,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
▷ 그 첫번째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업(大業)[1]
은 틀림없이 여러 부처께서 지켜주시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만들고는 사람을 보내 살면서 지키게 하고, 향불을 피우고 불도를 닦게 하여 각기 그 대업을 다스리게끔 하였으니, 훗날 간신이 정권을 잡아 돌아가며 중들이 청탁을 하여, 제각기 사원을 계승하면서 서로 주고받고 빼앗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단연코 금지해야 한다.
다만 그의 후손인 성종대에는 일시적으로 널리 유학을 권장하고 불교 행사인 팔관회나 연등회 등을 폐지시켜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물론 이는 중앙집권화와 관료 체제를 통해 국가의 통치 체계를 다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탄압하는 일은 없었고, 성종 다음에 팔관회와 연등회는 곧 원상복구되었다.
그만큼 불교가 당시 고려에서 중요시되었다는 것이다. 오항녕의 경우, '조선의 힘'에서 훈요 10조의 첫번째 조항이 불교에 대한 언급이며 마지막 조항이 유교에 대한 것임을 들어 유교보다 불교가 우선시되었던 고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구라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가 중시되자 그만큼 불교계의 폐단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심각해졌고, 훗날 고려를 승계한 조선이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는 제1근거가 되었다.
2.2. 둘째, 제멋대로 절을 더 창건하지 말 것.
신라는 너무 절을 많이 지어 망했다면서 현재까지 세워진 절들은 모두 도선이 정한 것이므로 함부로 절을 더 짓지 말라는 것.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경계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其二曰, 諸寺院, 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 妄加創造, 則損薄地德, 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 各稱願堂, 或增創造, 則大可憂也, 新羅之末, 競造浮屠, 衰損地德, 以底於亡, 可不戒哉?
▷ 그 두번째로 말하기를,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과 물의 순역[2]
을 헤아려 살펴 보고서는 시작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자세히 살펴서 정한 이외에 함부로 더 창건한다면 척박한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祚業)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ㆍ공후ㆍ후비ㆍ조정의 신하들이 각기 원당[3] 이라 말하면서 행여나 더 창건한다면 크게 근심스러울 것이다. 신라의 말기에 부도(浮屠)[4] 를 앞다투어 짓다가 지덕을 손상시켜 내부에서 망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훈요 10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을 새로 만드는 것이 고려시대가 신라 때보다는 비교적 줄어들긴 했는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8년 5월 11일 기사를 보면 연산군이 새로운 사찰 창건은 고려 때가 많았는지 신라 때가 많았는지 물어보는데 이극균은 신라 때가 더 많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저게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대답인지는 몰라도, 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렇게 정확하게 하려면 적어도 옛날부터 저렇게 알려져 있었다고는 볼 수 있다.
고려사 최유선 열전엔 최유선이 이 구절을 언급하며 문종에게 흥왕사 건설을 중단케 했다.
2.3. 셋째,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자격이 없을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우선 적자 적손에게 나라를 전하라는 구절은 장자였던 견신검을 무시하고 견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가 패가망신한 견훤의 전례를 보았기 때문에 내린 유훈인 듯 하다. 왕건 본인도 견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외가 가문의 세력이 별로 시원찮았던 장남인 왕무를 정치 공작을 통해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다 굳이 견훤의 예가 아니더라도 장자상속이 확립되지 못한 왕조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충분히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다.○ 其三曰,嫡子嫡孫,傳國傳家,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凡元子不肖者,與其次子,次子皆不肖者,與其兄弟之中,群下推戴者,俾承大統,
▷ 그 세번째로 말하기를, 적자(嫡子)ㆍ적손(嫡孫)에게 나라를 전하고 집안을 전하는 것이 비록 평상시의 예법이라고들 말하지만, (요의 아들) 단주가 못나고 어리석었으므로 요는 순에게 물려주었으니, 실로 공정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무릇 맏아들이 못나거든 그 다음 아들에게 주고, 다음 아들들이 모두 못나거든 그 형제 중에서 뭇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에게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문제는 적자적손 원칙을 밝힌 그 뒷부분에 요 임금이 사위 순 임금에게 왕위를 계승한 사례를 들며 '장남이 무능하면 그 이하 형제가 계승해도 좋다'라고 해석될만한 말을 덧붙였다는 거다. 당연히 비판의 소지가 있는 부분으로 이 조항 때문인지 고려는 신라나 조선 등 다른 왕조와 비교해 유독 아들, 그 중에서도 장남을 내버려두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사례가 많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대로 왕건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해 겨우 왕위에 올린 혜종이 동생들의 무자비한 왕권 도전에 시달린 끝에 왕위를 뺏기다시피 내준 사례가 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반란과 유혈사태들이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안 붙이느니만 못하다란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이 "장자가 불초할 때~"의 문구는 아마 왕건이 붙이고 싶어 붙인 문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 고려는 왕건 개인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접착제 삼아 각지의 유력 호족들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형태의 국가였다. 고려 개국 일등공신 4명, 이등공신 7명인데, 삼등공신이 수천명이나 되는 것도 이 때문으로 고려 개국에 따른 각 지역 호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온전히 그 지역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봐서 초기 고려는 후대의 조선은 커녕, 오히려 통일신라의 전성기 때보다도 퇴보했던 상태였다. 고려 초기의 호족은 조선시대 권력층처럼 관직이나 왕의 총애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식이 아닌 자신이 기반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면서 형성한 세력[5] 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즉 사실상 군벌이라고 봐야 할 이런 호족들이 연대한다면 왕위찬탈은 물론이요 아예 국가 전복까지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왕건이 괜히 부인을 29명을 둔게 아니다.
반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고려 초기 중앙 관제가 군사-행정 양 면에서 왕의 뜻을 받는 기관(내봉성-내의성과 병부)과 호족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기관(광평성-순군부)으로 양분돼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고려는 호족들의 발언권이 강력했다. 고려사(高麗史)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서술되다 보니 고려 왕에 대한 기록이 많고, 고려 신하들에 대한 기록은 대거 축소되었는데, 이는 절대 왕정인 조선 왕조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실제 고려에서 호족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왕건이 복잡한 혼인관계와 개인적인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이를 연결시켜 놓았다해도 생전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의 사후에 그 연결이 유지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고려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하기 위해 장남인 혜종을 차기 후계자로 내정한 것도 왕건이 살아있을 당시엔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겠지만 왕건이 승하한 후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왕건은 혜종에게 후견인으로 문-무 양면에서 당시 최고위 신하였던 왕규와 박술희를 붙여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언으로까지 '장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라고 못박아버린다면 호족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즉 굳이 쓸데 없이 덧붙인듯한 '장자가 불초할 때에는~'이란 문장은 후사 문제에 관해 왕건이 실시한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립서비스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 진행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왕건의 입장에선 자신이 직접 혜종을 다음 왕으로 공인했고 거기에 보완책으로 왕규와 박술희라는 당시로선 최선의 후견인을 내세웠으며 혜종 본인도 전쟁터에서 활약한 능력있는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면 왕요와 왕소를 앞세운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6]
따라서 이 정도로 호족들을 견제해놓은 상황에서 굳이 유훈인 훈요 십조에서까지 장자계승을 못박는다면 호족들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왕건 본인의 예상으론 혜종이 왕위를 굳건히 지킬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당시 호족을 달래기 위해 사족같은 둘째 이하가 계승 가능한 경우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상당 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치는 동생들을 냉정하게 처단하지 못한 혜종[7] , 왕요 - 왕소세력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외려 역적으로 몰려버린 왕규, 군권은 장악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끝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멸한 왕규와 연합하지도 못한 채 귀양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술희.[8] 이렇듯 왕건이 기대했던 셋 모두 왕건의 기대를 정확히 저버리면서 왕건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유언으로 맏아들의 자리를 뒤흔든 못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 왕조의 경우도 대체로 이 항목대로 움직인 왕이 있는데 정종-태종 두 왕이 대표적이다. 실은 조선왕조도 동생승계를 초기에 했었다. 그리고 고려 왕조의 경우 인종의 등극만봐도 지켜지지 않다가 원 간섭기에서는 더욱 이 항목이 지켜진 예가 드물었고 공민왕이 사실상 충정왕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다시금 발생했다.[9] 하지만 공민왕 또한 자신의 나이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사실상 못을 박았다.
2.4. 넷째, 중국의 풍속을 굳이 따르지 말고 거란 등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殊方異土 人性各異 不必苟同(수방이토 인성각이 불필구동). 즉, "나라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서 사람의 성품이 서로 다르니 구차하게 같게 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은, 훈민정음의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와 함께,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
▷ 그 네번째로 말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당(唐)나라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도를 지켰으나, '''나라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서 사람의 성품이 서로 다르니 구차하게 같게 할 필요가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의 나라이고 풍속이 같지 않으며 언어 역시 다르니, 부디 의관(衣冠) 제도를 본받지 말라.
또한 거란을 짐승의 나라라고 한 이유는 당시 고려가 거란에 대해 맹렬한 적대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세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인 발해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처럼 여겼다. 정작 고려가 발해의 멸망을 방관했던 감안하면 이런 고려의 적대의식이 기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발해의 멸망을 방관했던 것은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 발해가 멸망할 당시 최대의 적국이었던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상태여서 원군을 보낼 여유가 없었던 데다, 발해가 망한 것이 겨우 보름만이라 시간적으로도 도움을 주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이런 적대의식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발해 유민들에 대한 포섭이었다.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했는데 이들은 숫자도 엄청났던 데다 그 중에 왕족, 귀족, 고위무사 같은 엘리트 계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의 국력을 급격하게 팽창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양질적으로 어마무시했던 인적자원이었던 까닭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어떻게든 포섭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려 조정이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주는 것과 별개로 선택한 것이 이들의 반거란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국을 멸망시킨 거란을 맹렬히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을 보여주고 복수를 약속한다면 이들을 확실히 고려의 세력으로 편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고려 조정의 계산이었다. 만부교 사건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의 문제와 별개로, 고려 스스로도 거란과 적대할 이유는 매우 많았다. 고려는 북진정책으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고토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였다. 즉, 장래에 고려가 거란과 서로 적국이 되어 영토분쟁을 벌일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도 이미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거란도 마찬가지여서 중원 진출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하려는 속셈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갈등이 점점 고조되던 양국은 후에 여요전쟁을 통해 마침내 충돌한다.
2.5. 다섯째, 서경(西京: 평양)을 중시할 것.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니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12] 역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못지 않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왕건은 서경을 여진족들로부터 되찾은 이후 애지중지하며 화려하게 재건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 왕건은 서경을 통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서경을 북벌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를 보면 거란 배격 정책과 마찬가지로 서경 중시 정책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북진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脉之根本,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 그 다섯번째로 말하기를, 짐은 삼한(三韓) 산천의 드러나지 않는 도움을 받아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평양)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계절이 넘어갈 때마다[11]
행차하여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고려의 초기 왕들은 서경을 개경에 이은 제 2 수도처럼 중시했다. 온갖 국가 중요 시설들이 서경에 건설되었고, 분사제도를 통해 서경에 개경의 정치체제와 유사한 독자적 정치체제가 구축되기도 하였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하고자 시도했지만 무리한 계획이였고, 당시 백성들 및 신하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다. 이렇게 서경의 위세가 수도인 개경 만큼이나 높아지다보니 개경파와 서경파로 국론이 분열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결국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거치면서 서경의 분사제도는 폐지되었다.
2.6. 여섯째,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위의 1조인 불교의 숭상과 맥을 함께 하는 유훈이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모두 불교와 관련된 행사로,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이러한 대규모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결속력을 높일 것을 권한 것이다.○ 其六曰,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減者,切宜禁止,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
▷ 그 여섯번째로 말하기를,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 명산과 큰 강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신이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금지해야 한다. 나 역시 애당초 마음에 맹세하기를, 모이는 날은 나라의 제삿날[13]
을 범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러이 이를 따라 행해야 한다.
성종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놀음이다'''라며 깔끔하게 폐지시켜 버리고 일시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다다음 현종 때에 가서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 현종에게 팔관회 부활을 건의하여 성사시킨 인물이 최항이다. 당시 현종의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팔관회를 부활시킨 인물이기 때문에, 훈요 10조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과 맞물려 최항이 훈요에 어느 정도 손을 대지 않았겠느냐며 의심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관회는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다 조선 건국 직후에 폐지됐고 연등회도 규모는 축소되는 등 난항을 겪었지만 연등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실질적으로 고려왕조나 조선왕조 그리고 지금의 훈요 10조에서 실질적으로 사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현재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현재에도 불교의 부패와 권력투쟁이 극심해지니 대체로 이것에 대해서 많은 돈 낭비라고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고 반면 불교계의 경우는 옹호론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성종의 불교개혁과 조선왕조의 불교개혁을 근거로 비판을 가하고 있으나 불교계의 경우는 오히려 현종,문종의 치세는 불교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유교와 관련된 행사는 과거의 합격한 뒤 그 합격자들이 시험관을 스승으로 삼고 예의를 표하는 행사도 과거제의 지공거 행사와 다르지 않는 문화라고 한다. 반면 2항의 근거를 들며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대체로 고려의 경우는 불교-유교-도교 3교가 공존했기에 2항과 6항의 내용이 각각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2항과 6항을 조합해 중간점을 찾으면 될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조항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고 2항을 따른다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조항을 따른다. 이는 대체로 이차돈의 논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실은 불교계도 유불습합 즉 유교+불교 사상이 섞인 불교신자들이나 초기 불교 시각에선 많이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두 행사가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행사고 특히 팔관회는 동사강목의 918년 팔관회 개최 기록에서 그 진행방식과 행사 내용이 신라의 고사(故事)였다고 되어있어서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팔관회를 세세한 부분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개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당부하는 6번 조항은 앞서 고구려 계승성을 나타낸 5번 조항과 더불어 신라 계승 의지도 함께 나타낸 조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7. 일곱째, 왕이 된 자는 쓴 충고에 귀기울이고 아첨은 멀리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것.
○ 其七曰,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徭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古人云,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賞罰中,則陰陽順矣,
▷ 그 일곱번째로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요컨대 간(諫)[14]
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15] 를 멀리하는 것에 있을 따름이니,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럽게 되고, 참소는 꿀과 같으나 믿지 않으면 저절로 그치게 된다. 또한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납세를 적게 해 주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준다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로운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물고기가 매달려 있고, 상을 중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앞에는 반드시 새들이 피해감이 있고, 사랑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들어맞으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이다.
2.8.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車峴以南, 公州江外'''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여러 의견들이 있다. 크게 5가지인데..○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口+衘)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강 바깥은 산의 형태와 땅의 기세가 등지고 거슬러서 나란히 달려나가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밑에 있는 지방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종친이나 외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여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혹여 합병당한 원한으로 임금을 시해하려는 소동을 벌이기도 할 것이다. 또 과거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津)과 역(驛)의 잡척[17] 들이 권세가들에 아부해 신분을 바꾸거나 요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종실이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문란케 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 첫번째는, '차현(車峴)'은 지금의 금북정맥(錦北正脈) 제6구간에 해당하는 차령고개[18] 를 뜻하므로, '차현 이남에서 공주에 있는 강의 바깥까지의 지역'을 말한다는 것. 바로 위의 지도가 그것이다. 다만 그 뒤에 나오는 '산과 땅의 형세가 거꾸로 등을 지고 있다'는 설명에 부합하지는 않는 점, 이 당시 고려 초기에 저 지역에 큰 고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비판받는 지점이다.
- 두번째는, '차현 이남'은 보통 차현을 지나야 공주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꾸미는 말으로써 표현한 것이며 '공주강외'는 '개성을 중심으로 할 때 공주강(금강을 말한다)의 바깥'을 말하는 것으로, '차현 이남에 있는 그 지역 금강[19] 의 바깥'을 뜻한다는 것. 즉, 지금의 '공주시'를 말한다. 이 지역은 '산과 땅의 형세가 거꾸로 등을 지고'[20] 있으며, 또한, 합병당한 원한이 있는 백제의 옛 수도이기도 하다.
- 세번째는, '공주강'을 '금강 전체'로 보아서 금강 전체의 바깥에 있는 공주, 부여, 논산, 군산, 익산, 전주를 걸친 평야지대를 말한다는 것. 단, 광주와 나주지역은 영산강 유역이므로 제외한다. 즉, 김제평야 주변 지역의 여러 고을들을 뜻한다. 이 지역 고을들 역시 풍수로 볼 때 강은 북쪽, 산은 남쪽에 있어서 뒤에 나오는 설명과 부합하며, 이 지역 전체가 백제의 옛 땅이기도 하고 후백제의 땅이기도 하다. 특히,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이다.
- 네번째는, '차현(車峴)'을 차령고개를 포함한 금북정맥(錦北正脈) 전체로 보고, '공주강(公州江)'을 금강(錦江) 전체로 보거나 또는 '공주강(公州江)'은 말 그대로 공주(公州)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보고, 금북정맥 이남과 금강 또는 공주강 북쪽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는 것. 이 경우 충북 청주(靑州)가 포함된다. 특히 칠장산(七長山)은 금북정맥이 시작하는 곳으로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는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위치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금북정맥 이남에 있다.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신호철 명예교수는 "궁예는 어려서 지방에서 숨어살게 되는데, 그곳이 청주로 추정되며, 청주는 궁예 세력의 온상 같은 곳"이라고 하였다.
- 다섯번째는, '차현'은 '차령산맥'을 뜻하므로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이라는 것. 이는 '차령산맥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일제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해명할 수가 없으며, 왕건이 나주 지역을 극히 아꼈던 사실과 반대되므로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즉,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이라는 제8조의 이 대목은 '차현 남쪽 공주강 바깥쪽'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공주강 외(外) 즉, 바깥이라 함은 당시엔 성을 중심으로 외와 내가 명명 되었다. 지금도 청주시를 가로지르는 공주강 줄기인 미호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강외면(현 오송읍)과 남쪽에 있는 강내면의 경우처럼 여기에서 외는 공주산성을 중심으로 바깥쪽인 공주 위쪽의 청주 부근이다.
특히 차현의 해석을 두고 이제까지 차령산맥인지 아닌지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훈요 10조상의 차현은 '''지리교과서 상의 차령산맥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산맥은 지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도입된 현대지질학적 개념으로 겉으로 보이는 산줄기가 아니라 산줄기가 형성되는 지하의 일직선상의 지맥을 일컫는 말인데 당연하게도 고려시대에는 지질학이 없어서 산 밑 지하의 지질학적 지맥을 파악할 수가 없었는데 왕건이 무슨 수로 20세기부터 도입된 차령산맥 개념을 알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당연히 겉으로 보이는 산줄기만으로 지형을 파악할 수 밖에 없으니 차현의 범위를 넓게 잡는다 해도 산경표 상의 금북정맥으로 봐야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문단을 '''오늘날 청주시 일대에 있던 친궁예 세력에 대한 경고'''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앞서 산과 땅의 형세가 배역하다는 것에 대해, 청주-조치원-증평 일대의 미호천 평야는 주변이 백두대간과 금북정맥 금남정맥 등의 산줄기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21]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수도인 개경이나 인근 지역에서도 감지나 진압이 어려웠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청주계 호족들이 왕건에 대한 불만을 품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들을 볼 때, 이 항목은 청주와 공주를 중심으로 한 '친 궁예 반 왕건 세력'을 조심하라는 권고로 보아야 한다. 8항에 나오는 왕을 시해하려는 소란을 일으킨다는 부분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태조로 즉위를 한 직후부터 약 1년 동안 환선길,[22] 임춘길, 이흔암, 배총규, 청주수(靑州帥)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 등 왕건을 시해하려는 모반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이들과 연계되었던 주모 세력들의 출신지가 청주이거나 청주 인접 지역들로 왕건이 즉위 1년이 되어 맨 처음 방문한 곳이 청주였으니 왕건은 자신을 시해하려는 배후 세력의 근거지를 청주로 보고 회유하려 노력하였다. 『고려사』에는 청주를 지목하며 '쥐떼 두목으로 반역의 기회만 엿본다(首鼠順易)'며 왕건의 청주 순행 배경을 설명하였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청주 지역과는 혼사를 맺지 않으면서도 인근 진천(鎭川) 즉, 당시 진주(鎭州)에서 왕건이 10번째 왕비[23] 와 며느리를 얻고, 충주(忠州)에서 3번째 왕비을 얻음은 청주에 대한 견제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점차 나라가 안정되고 친 궁예-반 왕건 풍조가 사라지자 왕들도 이 항목은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게다가, 차령산맥은 '''20세기에나 들어서야 파악'''된 지하의 지질학ㅋ적 직선형 지맥을 일컫는 말이지 겉으로 노출된 분수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차현이 금북정맥일 수는 있어도 차령산맥일 수는 없다. 금북정맥 이남을 범위로 잡을 경우 충청도 북부 일대 역시 이에 포함된다. 특히,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왕건은 과거 후백제의 잔당 혹은 옛 태봉 세력인 궁예의 친위세력으로, 새롭게 권력을 잡은 왕건 일파에 저항을 거듭한 청주 지방을 상당히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사람들은 변심을 잘하므로...청주가 반칙(反側)을 할까 두려워...고려사 열전 견금전, 청주인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고려사 태조 원년 무인년, 청주는 반역을 저지를지 말지 궁리하며 그릇된 언사를 많이하므로...고려사 태조 2년 기묘년'.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정할 때, 청주 민호 1천호(戶)가 철원으로 이주했을 만큼 친 궁예 지역이 바로 청주이기도 했다. '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삼국사기 궁예 열전'
요즘도 차령산맥을 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맥을 넘는 줄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산맥이 존재감이 없다. 결정적으로 2004년에서 2005년까지 국토연구원에서 인공위성과 과학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측정한 결과, '''아예 차령산맥 자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심지어 지하에 있는 줄 알았던 지맥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우리나라에 '산맥'이란 개념이 생겨난 데에는 1903년 일본인 '고토 분지로'[24] 라는 학자가 인부 4명과 당나귀 6마리로 14개월 동안 한반도 산맥을 측정해서 산맥 체계를 만들었고, 이후 100여 년 동안 배웠던 차령산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낮은 구릉 지대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런 차령산맥을 훈요 10조 중 8조에 나온 차현으로 알고, 억지로 꿰맞춰서 해석했으니 공주강 이북을 공주강 이남으로 억지 해석을 하거나 아예 생략했던 것이다.
해당 주장은 '''공주강 북쪽이라는 뜻'''의 공주강외라는 부분을 아예 무시하거나 공주강 이남으로 왜곡하고 있다. 애초에 공주강 즉, 금강 자체가 차령산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차령산맥 남쪽으로 범위를 잡아놓고 굳이 공주강 남쪽이라고 동어반복을 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강외'란 말의 당시의 사용 방법을 따르면 행정구역, 성벽, 강처럼 인공물, 자연물의 경계를 따지는 경우일 뿐인데, 강의 경우엔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공주성은 공주강의 남쪽에 있었기에 강 밖이란 말은 강의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된 청주시의 경우도 강내면과 강외면(현 오송읍)의 경계가 서강, 즉 미호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원래 각각 청주목 서강내이면과 서강외일면으로 행정기구가 있던 청주읍성(청주 도심) 기준으로 강의 서쪽을 바깥으로, 강의 동쪽을 안으로 보았다. 또 다른 예시로 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 4월 28일 戊午 2번째 기사를 들 수 있다.
만일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강의 내외 기준이 수도 개성이라면, 명백히 대동강에서 수도 개성 방향 쪽인 재송정을 대동강 밖이라고 볼 리가 없다. 대동강 북쪽에 면한 관할지역 행정기구 소재지인 평양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대동강 이남의 재송정을 대동강 밖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대동강이 평양 남쪽을 흘렀으므로 대동강 이남이 대동강 밖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주강은 공주시의 북쪽을 돌아 흐르기 때문에 사료 상의 공주강외는 공주강(금강) 이북의 지역이 된다.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 4월 28일 戊午 2번째기사
...發掘'''大同江外裁松亭'''畔百年前纍纍衆塚...
...발굴'''대동강외재송정'''반백년전누누중총...
...'''대동강 이남 재송정(현 평양특별시 낙랑구역 정오이동 소재)''' 강가의 백 년된 여러 개의 무덤을 파헤쳐 드러내어...
셋째, 서남해 지방의 후백제의 잔당을 경계하라는 뜻일거라는 주장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 왕건은 끝까지 대놓고 왕건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는 한 되도록 각지의 호족들을 유화적으로 대했다. 호족 개인으로서는 제일 심하게 왕건에 반대했던 강릉의 김순식도 항복 한방에 왕씨 성을 하사해줬던 게 왕건이다. 게다가 멸망 당시의 후백제는 내정이 혼란하고 내부분열이 극심했으며 '''태조이자 태상황제인 견훤이 고려에 망명해버리는 바람에 국조의 정통성마저 고려에 넘어가버린 상태'''에서 항복으로 망했기 때문에 호족들이 반항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별 없었다. 여기에 같은 호족 출신이던 왕건이 딱히 궁예나 견훤처럼 호족들을 쥐어짜는 타입도 아니었고, 굳이 고려에 반항해봤던들, 고려 황제가 상보로 모시는 태조의 황위를 찬탈하고 절간에 감금한 패륜아에게 찬동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후백제 부흥운동 같은 걸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후백제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인 승평군(현재의 순천시)의 대호족이자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가 후백제 멸망 후에 고려에서 큰 대접'''을 받았던 사례도 있다. 박영규는 승평군(순천)의 호족들 중에서 제일 영향력이 강했던 사람이었고, 후백제가 멸망하던 과정에 있어서 태조 왕건에 내응해 협조하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부인인 국대부인 견씨는 견훤의 적녀로서 후백제 왕통의 직계이자 신흥 전주계의 핵심 인물이라는 점이 강하다. 왕건은 이러한 박영규의 집안과 겹사돈[25] 을 맺은 것인데, 만약에 왕건이 후백제인들을 경계하려고 했으면, 자신과 아들에게 순천-전주계 후백제 집안의 사위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전라도 지방이 고려 왕조로부터 실제로 차별을 받았다면, 이들은 고려 왕조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고려 왕조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낸 적은 드물었으며, 특히, '''지금의 나주시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지역은 태조의 제2왕비이자 혜종의 모후가 되는 장화왕후 오씨 집안의 지역'''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아무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의 고려 왕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2차 여요전쟁이 벌어질 때, 통주 전투에서 강조를 비롯한 고려군의 주력이 궤멸당하자 현종은 몽진 장소로 나주를 골랐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호위 병력 대부분이 도주하고, 지채문과 일부 병력만 남아 각지의 호족에게 핍박당하고 때로는 습격도 당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용겸이 왕(현종)의 일행을 억류하려 하였으나, 지채문이 저지하다.
임오.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야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는데,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옛 백제(百濟)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겨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가서 묵었다. 이날 저녁에 조용겸이 왕을 머물게 하여 옆에 끼고 위세를 부리고자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흰 깃을 관모에 꼽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아왔는데, 지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게 하자 적들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함께 말을 타고 역의 청사(廳事)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채문은 지붕에 올라가 묻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이와 같이 하는가. 유승건이 왔는가 안 왔는가.”라고 하였다. 적들이 말하기를, “왔다.”라고 하자 다시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라고 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너 역시 누구냐.”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다른 말을 하니 적당이 말하기를, “지(智) 장군이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하기를, “네가 친종(親從) 마한조(馬韓兆)로구나.”라고 하고는 이윽고 왕명으로 유승건을 불러들였다. 유승건은 말하기를, “당신이 나오지 않으므로 나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유승건을 불러 어가 앞으로 데려가자, 유승건이 울면서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조용겸이 한 짓입니다. 신은 알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왕명을 받들어 조용겸을 불러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유승건은 밖으로 나와 도망쳤다. 왕이 양협(良叶)에게 명하여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도록 하였는데,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지채문은 꾸짖어서 그만두게 하고 이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움직이게 하였다가 이후에 전주로 되돌려 보냈다.(고려사절요)
그러나 이것 또한 훈요 10조에 대해 고려보다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학자들의 오해'''일 가능성이 높으며, 백제(百濟)를 직접 언급한 걸로 봐서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高麗)와 서로 패권을 다투던 백제(百濟)에 대한 단순한 견제의 의미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왕건의 훈요 10조에 언급되면서 동시에 태조 왕건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도선대사와 태조 왕건부터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한 신료이자 천문관이던 최지몽도 구 백제령이면서 나주 인근인 영암군 출신'''이였으며, 왕건은 한번도 이들을 출신으로 차별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한국사 역대급 공신 신숭겸'''또한, 그 고향이 당시 무진주라고 부르던 광주 인근인 곡성군 태생인데 퍽이나 왕건이 그를 출신지역으로 모욕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왕건은 자기 황후부터 서남해 사람이고 황태자도 반은 서남해 사람'''인데 "서남해 사람을 차별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리도 없고, 설령 발언했다 해도 그것을 유언으로 받을 가능성도 없다! 비단, 태조 왕건 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훗날 무신 정변시 고려 왕실의 큰 어른으로써 이의방, 정중부 등 초기 무인 집권자들에 맞서면서 위태로웠던 왕실을 지키려고 했던 공예태후(恭睿太后)도 전남 장흥군 출신이다.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후손(後孫)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百濟)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6일 병신 2번째기사
동국통감에서는 훈요10조 8항에 대해서 별다른 논평은 없는데, 이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 중 최부는 본시 나주 출신이다.
그런데, 박영규를 일반적인 후백제 출신의 인물들과 같게 볼 수는 없다. 박영규는 후백제의 왕인 신검을 배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왕건과 내통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 공로로 왕건으로부터 밭 1,000경을 하사받고 개국공신까지 되었으니,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라와 왕을 잃은 후백제계의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후백제의 실세였던 능환, 후백제의 왕자였던 양검과 용검은 비참하게 처형당했고, 후백제의 왕인 신검은 왕건에게 관직을 하사받긴 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삼국사기에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업고 견훤을 유폐까지 시켰던 3명의 후백제 왕자들은 결국 모두 벌을 받아 죽은 것으로 기록된다. 이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후백제 왕 신검 즉 견신검은 견훤의 아들이다. 이미 일리천 전투 당시 견훤은 왕건에게 투항하여 고려군 좌군 선봉에 서있었다. 명길, 효봉 등 후백제 장수들도 견훤에게 충성했으므로 견훤을 따라 모조리 투항한다. 특히, 박영규는 상술하다시피 견훤의 사위로서 장인어른인 견훤을 따른 박영규가 일반적인 후백제 출신 인물들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나주 지역의 경우, 후백제에 속해 있었던 기간은 고작 3년(900~903년)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왕건에게 점령당한 903년부터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의 기간은 무려 33년이다. 나주지역에 대한 우대를 내세워 후백제 세력에 대한 견제가 없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희박한 것이다. 거란의 침공으로 현종이 나주로 몽진을 가게 되었을 때, 전주에 대하여 "태조 왕건이 싫어했다."는 언급이 나온 위의 고려사 기록에서 그 발언을 했던 박섬이란 인물은 놀랍게도 나주 옆에 자리한 무안군 지역 출신이다. 이를 통해 33년간 후백제에 대항하여 싸워온 나주-무안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후백제계와는 다르게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나주 일대는 고려 왕건의 세력 기반이고, 전주는 후백제 견훤의 세력 기반이자 후백제의 수도였으므로 정서상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차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다. 또한, 이를 감안하면 8항에 나오는 '통합을 당한 원망을 품은 지역'은 정황상 왕건의 고려와 다투던 백제의 본거지를 가리킬 수 있고, 이럴 경우 왕건의 오랜 세력 기반인 나주 일대는 제외되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이 된다.
게다가 고려 초 한림학사,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전주 출신 류방헌(柳邦憲)같은 인물 등 전주가 차별받은 적도 없고, 김경손으로 대표되는 전주 김씨는 전남의 장흥 임씨처럼 고려 왕실과 혼인이 가능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주 김씨는 고려 건국 300년 동안 경주 지방에 있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1254년에야 전라도 전주 지역으로 이주한 가문이고, 장흥 임씨는 고려 3대 왕 정종대에서야 송나라에서 이부상서를 지내다 귀화한 임호(任顥)를 시조로 두고 있기에 후백제 계열과는 관련성이 전혀 없다. 그런 식이면 고려를 세운 왕건의 왕씨(王氏) 성은 조상이 중국에서 와서 고려와는 관련이 없으니 그럼 고려의 정체성은 사라지는가. 성씨(姓氏)라는 제도의 유래가 중국이다 보니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거나 관직을 받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당대 유행하던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2.9. 아홉째, 모든 관료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공적으로 정해줄 것.
○ 其九曰,百辟群僚之祿,視國大小,已爲定制,不可增減,且古典云,以庸制祿,官不以私,若以無功人,及親戚私昵,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恤,量除徭役,每年秋,閱勇銳出衆者,隨宜加授,
▷ 그 아홉번째로 말하기를, 여러 제후들과 뭇 관료들의 녹봉[27]
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이미 제도가 정해져 있으니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공로에 따라 녹봉을 규정하고, 관직과 작위는 사사로운 정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인데도 친척이나 사적으로 친분 있는 사람들이 헛되이 하늘의 녹봉[28] 을 받게 된다면, 아래로는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이 그치지 않고 또한 복된 녹봉을 길게 누리지 못할 것이니, 단연코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은 더 보살피고 도와줘서 이를 헤아려서 부역을 덜어주어야 하며, 매년 가을에는 용맹하면서 민첩함이 뛰어난 자들을 가려내어 즉시 벼슬을 올려주어야 한다.
2.10. 열째, 널리 경전과 역사서(사기: 史記)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왕건은 각 훈계의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 속에 간직할 것)라는 말을 붙이게 해서 반드시 이것을 지킬 것을 상기시키게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 최측근이었던 재상 박술희를 불러 이를 전수하고 천수를 마쳤다.○ 其十曰,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十訓之終,皆結以中心藏之四字,自是嗣王,相傳爲寶。
▷ 그 열번째로 말하기를, 나라가 있고 집안이 있으면 '근심이 없는 것'을 경계하여야 하니, 널리 경전과 역사서(史記)를 보게 하여 옛 것을 거울삼아 오늘날을 경계하라. 대(大) 성인이신 주공(周公)께서도 '무일(無逸: 게으르지 않음)' 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그림을 벽에 걸어서 출입시에 보고 반성케 해야한다.
열가지 훈요의 끝마다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로 끝을 맺었다. 이로부터 왕위를 이은 왕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3. 훈요 10조 날조설
고려 태조가 정말로 훈요 10조를 직접 지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여덟째 항목은 당시 고려의 상황과 관련되어 여러 모순점이 보인다.
지역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훈요 10조에 대해서는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현종시대(1009-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기존에 권력 중심에 있던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경주 지역 출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근거중의 하나로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 이런 추측에서 훈요 10조를 날조한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바로 최제안과 최항(배향공신) 그리고 현종.
그 증거로 훈요 10조가 왕건의 유훈이었다면 왜 후대 왕들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는것. 특히 사찰 건립을 제한한 것을 지킨 왕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태조 왕건부터가 충청도 충주 출신 호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나주 출신 왕무에게 기어코 왕위를 물려준 점이 그러하다. 만약 태조가 훈요를 직접 남겼다면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고려사에 훈요 10조가 기재되게 된 경위가 수상쩍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함에 따라 사초가 불타서 사라져 버려 고려사-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야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서기 10세기 말 이후로 현재까지 훈요 10조로 전해지는 글은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그의 사망 연도인 1046년 이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다 (고려사93 열전6 최승로). 어떤 왕에게 바쳐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제안은 현종·덕종·정종·문종 치세에 조정에 봉직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시기상 현종의 정변에 의한 즉위를 구실로 침공을 받아, 개경이 약탈당한 거란의 두 번째 침공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문서가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뒤 새로 짓는 국사 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성종 대에 폐지시킨 팔관회를 독실한 불자인 최항이 현종 대에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훈요 10조 팔관회 관련하여 더욱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더욱이 「훈요 10조」는 나주 출신의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5조 다섯왕조를 비평한 최항로의 옹사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내용의 언급이 없다. 현종 즉위 직전까지 훈요 10조는 고려왕조 내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문종 대에 최유선이 흥왕사 건립을 반대할 때 언급했다지만 문종 역시 현종 이후 왕이다. 이 외에도 태조의 유훈이라며 등장하는 기록들을 보면 전부 현종 이후에 등장한다. 성종 대에 최승로가 불교에 대해 비판하며 심지어 광종의 친불교정책까지 비판하지만 여기서 최승로가 훈요 또는 태조의 유훈을 언급한 적은 없다. 즉 현종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설령 이전에 훈요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원래 훈요가 5조만 있었는지 훈요7조인지 훈요10조인지 알 수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최항이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거나 하는 가필을 했는지 안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현종은 집권과정이 파란만장했던 왕이다. 태조 왕건의 적통인 목종이 피살되고, 사생아 출신인 현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는 거란 2차 침입의 명분이 되었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는 거란군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반역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당연히 현종은 정통성이 취약하였으며 민심도 잃었으니 거란 침입시 피난길도 험난하였다. 집권과정도 험난했지만 특히 현종은 왕의 향리(鄕里) 즉 왕의 지역적 세력기반이 없었으므로 권력기반이 취약했다. 강조는 나이 어린 현종을 대신하여 1년여를 섭정하였으니 당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신라계 최항은 현종 즉위 후 현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국정 자문역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이르기를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라계의 희망사항이 섞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현종은 신라계의 기대와 지지를 받는 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라도 나주 출신 2대 혜종의 적통을 이어받은 왕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8대 현종을 기점으로 고려 왕실의 권력 기반이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중요한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충주 일대에서 바뀌게 된다.
즉 현종 때 최항이 훈요에 조작을 가했다 하더라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극히 일부 지역을 견제할 목적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격변을 거치며 왕위에 오른 현종의 정통성 즉 고려 왕실의 정통성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은 현종 이후 현종의 자손들로 후사가 이어지는데 현종은 그 정통성을 태조 왕건에 이어 2대 혜종으로부터 잇는다. 혜종의 모후 장화왕후(莊和王后)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태조 왕건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무(王武) 또한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현종이 거란침입시 급박한 상황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간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2대 혜종이 되는 왕무(王武)의 휘 무(武)는 고려조에서 피휘되었고[29] , 태조 왕건과 함께 혜종은 고려 왕실 종묘의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오르게 되니 태조 왕건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고, 또한 현종은 그 정통성을 잇게 되니 그 위상은 감히 넘 볼 수 없는 것이다.
'''태조 왕건이 훈요를 남겼던지 또는 현종 대에 최항이 조작을 했던지 간에 두 경우 모두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이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지만, 또한 공주강 외(外)를 공주강 남쪽으로 억지스럽게 해석한 사람도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류는 차령산맥이 1903년에 새로 생긴 산맥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차령산맥과 차현을 동일시하여 해석하려니까 공주강 외(外)를 억지스럽게 남쪽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마니시 류는 그렇게 해석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며 사족을 덧붙이기는 하였다.
3.1. 날조설에 대한 반박
우선 날조설에서는 최항이 훈요 10조와는 관련이 낮다고 보는데, 오히려 최항은 훈요 10조 문서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보필한 측근이자 스승으며, 선왕인 목종이 직접 최항에게 후계자인 현종을 잘 보필해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훈요 10조 원본을 목종에게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사찰건립 금지 조항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 최승로의 상소를 보면 직접 훈요 10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훈요 10조 2조와 비슷한 내용을 인용해서 사찰 건립을 비판하고 있다.
아무리 일국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신성하고 큰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후대의 왕들이 이를 무조건 100% 따랐으리란 법은 없다. 최유선은 훈유십조 중 2조를 인용해 문종에게 흥왕사를 짓지 말라고 했지만 문종은 결국 지었다. 다른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도 태조가 자신은 함흥 땅에 묻어달랬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그 외에도 후대에 전왕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조선시대 이후에도 훈요 10조의 내용을 비판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의 진위 논란은 없었으며,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된 사료나,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고 주장한 사료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한 국가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실제로는 조작되었다는 사소한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통성을 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하다 못해 그런 의혹이라도 가졌어야 정상인데 그 조차 없다는 것은 조선의 학자들도 훈요 10조 조작설이 의미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30] 8조의 내용이 현대인의 지역감정을 심히 자극하는 부분인지라 이에 대한 방어논리로 조작설이 등장했을 뿐, 역사학적으로는 의미없는 가설이다. 그리고 '''훈요 10조의 내용이 사실이어도, 그것이 현대의 지역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마니시 류의 조작설 자체가 오히려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시키려는 식민사관의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마니시 류의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반박한 사람 중 한 명이 친일파로 알려진 이병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