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1977)

 

'''김상진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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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6'''
'''199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김성한(1982~1995)

'''김상진(1996~1999)'''

이대진(2000~2004)


'''이름'''
김상진 (金相眞 / Sang-Jin Kim)
'''출생'''
1977년 4월 26일[1]
'''사망'''
1999년 6월 10일 (향년 22세)
'''출신지'''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재뫼마을[2]
'''학력'''
광주서림초[3]-진흥중-진흥고
'''체격'''
178cm, 75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6년 고졸우선지명 (해태)
'''소속 팀'''
'''해태 타이거즈 (1996~1999)'''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시절
3. 위암 투병
3.1. 투병일지
4. 사후
4.1. 김상진의 저주?
4.2. 기일에 열렸던 타이거즈 경기의 기록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소속의 투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용봉초등학교 5학년 때 선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내성적이고 숫기없는 성격이었던 김상진은 "야구로 성공하면 선동열처럼 돈도 벌고 유명해진다"라는 감독의 말에 혹하여 곧바로 서림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어쩔 수 없이 야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진흥중학교 진학 이후 강의원 감독[4]의 지도 하에 실력이 급성장했다.
강 감독은 나중에 김상진이 진흥고로 진학하는 시기에 맞춰 진흥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6년간 사제지간으로 같이 야구를 했다. 러닝 위주의 훈련으로 박찬호에 버금가는 단단한 하체의 소유자가 되었고 고교선수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컴퓨터급 제구를 선보이며 야구인들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당시 1995년 고교 전국 대회에서 '''평균자책점 0.86을 달성'''했고, 커브, 슬라이더, 직구 평가가 상당히 좋았으며, '''최고 구속은 145km/h까지 찍었다.''' 지금이야 140km/h는 기본이라 생각되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교야구라는 점이다.''' 현재 고교야구에서도 140 이상을 던지는 선수는 흔치 않다. 거기다 당시 KBO 평균구속이 130 언저리에서 140대 초반이였던 걸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2.2. 프로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죠. 야구가 내 직업이잖아요. 야구말고는 살 길이 없어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명문 해태의 10승대 투수로 태어나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이어가겠다.'''

- 입단 당시 첫 훈련때의 출사표

1996 시즌 입단 동기들과 함께[5]
연세대 진학이 유력했지만 1996년 해태 타이거즈가 계약금 1억원을 제시하자 곧바로 프로로 선회했다. 가난한 집안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외환위기 직전 모기업 상황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해태가 제시한 1억은 다른 구단의 2~3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1996년 데뷔 시즌부터 선발진에 합류하여 5월 2일 롯데전에서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따냈고, 데뷔 첫 해에 9승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해 신인왕을 노려볼 만 했지만 현대 유니콘스의 괴물 신인 박재홍이 사상 최초의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맹활약 하면서 신인왕 경쟁에선 밀렸다.
1997년에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아쉽게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147이닝을 던지면서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0, WAR 3.25를 기록하여 시즌 내내 해태 선발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LG 트윈스와 맞붙은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 팀의 9번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웠다. 해태팬들은 새로운 에이스급 투수의 출현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김상진이 해태라는 이름의 마지막 헹가래 투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해태가 9번째 우승을 거두고 정확히 1주일 후에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3. 위암 투병


투병 중이던 김상진
1998년 시즌 내내 지난 해에 비해 다소 떨어진 구위를 보이며 121이닝에 평균자책 3.87, 6승을 기록하는 데에 그쳤고, 그 해 9월 1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목 통증을 호소하며 조기 강판했다. 그 당시 팀이나 주변이나 단순한 목 부상으로 알고 좀 쉬면 나아지려니 했지만, 시즌 종료 후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목뼈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의료진의 판단으로 정밀 조직검사를 실시한 결과, '''청천벽력 같은 위암 4기 판정'''이었다. 목뼈의 종양도 위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수가 이렇게 병이 악화되는 동안 구단에선 무엇을 했느냐며 팬들은 해태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사실 해태는 매년 선수들의 정기 건강검진을 실시했고 김상진 또한 내시경까지 받는 등 받을 검진은 다 받았다. 단지 '''암의 발원지가 내시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위벽 바깥'''이었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던 것. 위벽 바깥에 암이 생기는 것은 2021년 현재까지도 내시경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초기에는 '''MRI로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미리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평소 먹성이 좋았던 김상진은 자신이 위암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 변함없이 먹는 것을 즐겼다. 진흥고등학교 시절 학교 숙소에서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먹었는데, 큰 냄비 하나 가득 끓인 뜨거운 라면을 제대로 불지도 않고 거의 흡입하는 수준으로 먹어치울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6] 또한 자신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엔 형처럼 따르던 구단 트레이너 김준재[7]와 병원 부근 용산시장에 바람을 쐬러 가서 "형님, 저 순대 먹고 싶어요." 라고 졸라서 사준 순대 1접시를 뚝딱 비우기도 했고, 팀 선배인 홍현우을 사들고 문병을 오자 큼지막한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워 "아가야 천천히 먹어라 체하겄다."라고 다독이면서 목이 메어 혼났다고 후일 박동희 기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8] 이를 기억하는 김상진의 친구들은 그 왕성한 식성 때문에 암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한때 위암으로 투병했던 정현욱 또한 소싯적에 대단한 먹성을 자랑했는지라[9] 폭식하는 식성이 암 발병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져 기약없는 투병 생활에 들어간 김상진은 1999년 초까지는 상태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1999년 3월 종양에 의한 위벽천공으로 봉합수술을 받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그 해 6월 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22세. 죽기 전 부모님께 남긴 편지에 의하면 한국시리즈에서 완투승을 거둘 당시 '''이미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니 손을 쓰려고 해도 한참 늦은 셈이다.
그가 먼 길을 떠나기 얼마 전,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63빌딩에 가고 싶다고 간청해 휠체어에 탄 채 전망대에 올라갔고, 어딘가를 멍히 주시하고 있던 김상진에게 김준재가 어디를 보고 있냐고 묻자 김상진은 손가락으로 잠실 야구장을 가리키며 '''"형님, 저곳이 제가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뒀던 곳이죠...?" 라며 울먹이며 되물었다고 한다.''' 임종 직전까지도 그가 얼마나 선수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의 투병 과정은 1999년 4월 28일 방영된 KBS2 《영상기록 병원 24시》'희망은 힘이 세다' 편에서 다뤄졌다.

3.1. 투병일지


  • 1998년 9월 19일: 잠실 OB전서 2회말 투구 중 뒷목 통증을 호소하며 자진 강판
  • 1998년 10월 8일: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식사 도중 후두부 통증과 토혈 증세를 보여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
  • 1998년 10월 16일: 경추 3번 종양 제거 수술
  • 1998년 10월 23일: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위암 4기 진단
  • 1998년 10월 26일: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입원, 재검 결과 전남대학교병원과 동일 진단
  • 1998년 10월 30일: 방사선 치료를 위해 서울중앙병원 입원. 통원치료 받으며 4주 간격으로 항암제 투여
  • 1999년 3월 6일: 토혈 발생, 서울중앙병원 입원. 암세포로 인한 위벽 천공이 원인인 것으로 판명
  • 1999년 3월 8일: 위벽 봉합수술 실시
  • 1999년 6월 2일: 병세 악화,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의식 불명에 빠지며 산소호흡기로 연명
  • 1999년 6월 10일 15시 5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운명 (향년 22세)

4. 사후


  • 김상진이 타계하기 6년 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히로시마 도요 카프츠다 츠네미가 연상되는 비운의 투수.[10] 또한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2000년엔 같은 투수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지이 마사오폐암으로 사망했다.[11]
  • 모 신문사에서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을 '김상진 인생 마운드 강판' 이라고 적어놔서 '아니 젊은 청년이 불의의 병으로 죽었는데 거기다가 안 좋은 의미의 '강판'이라고 제목을 적다니 너무한거 아니냐?' 라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 다음주 해당 신문사에서 '그건 아니지 않냐' 라는 독자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도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한참 후에 '자기는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데 편집부에서 맘대로 붙인 제목이었다' 라고 해명하기도 했다.[12]
  • OB 베어스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동명이인 김상진과 두 번 맞대결해서 모두 이겼다.
  • 박동희 기자의 김상진 칼럼 - '天上飛愛' 해태 투수 고 김상진[14] 박동희의 베이스볼포엠 - 고 김상진의 비디오테이프[15] 참고영상 1, 2, 3

  • 2013년 9월 10일, 임창용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임창용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리포트"라는 칼럼에서 김상진 선수를 추모하는 내용의 칼럼을 쓰면서 팬들이 이 비운의 선수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16] 임창용 칼럼

  • 2016년 10월 김상진의 출생지인 재뫼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김상진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사

4.1. 김상진의 저주?


생전의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진흥고 직속 선배 이대진은 김상진이 세상을 떠난 후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한동안 등번호 11번을 달고 경기에 임했지만, 2004 시즌을 끝으로 스스로 번호를 반납해버렸다. 이유인 즉 자신의 성적이 너무 부진해서 하늘에 있는 후배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대진 역시 어깨 수술을 받고 타자 전향까지 하는 등 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대진이 11번을 반납한 이후, 2011년 시즌 손영민이 11번을 물려받기로 했었는데, 이범호의 FA 영입 보상선수로 친정 팀에 돌아간 안영명의 등번호이던 1번을 달면서 결번으로 남아 있다가 2010년도 신인 투수김대웅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김대웅이 방출되며 다시 결번이 되었다가 2012년 부터는 좌완 투수 임준섭이 달았고, 이후 임준섭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면서 반대급부로 KIA 유니폼을 입은 김광수가 11번을 달았다.
2016년에는 유창식이 물려받았지만 등번호를 더럽히는 초대형 사고를 쳤다. 이 말종은 한화 이글스에서도 레전드번호를 더럽혔다. 뒤이어 진흥고 후배 김진우가 11번을 받았지만 그도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2017년 시즌 후 육성선수 전환과 함께 반납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 때 해태의 강타자 김성한의 등번호이기도 했던 김상진의 생전 등번호 11번은 2018년 결번으로 남아 있다가 2019년에 박정수, 2020년에 이민우의 배번으로 정해지는 등 여러 모로 곡절을 겪고 있다. 2020년 시즌에는 이민우가 이 번호를 달았고 시즌 초엔 호투했으나 이후엔 부진하면서 선발 로테이션에서 아예 빠져버렸다.

4.2. 기일에 열렸던 타이거즈 경기의 기록


'''1999년 6월 10일 그가 하늘나라로 떠난 바로 그 날''', 수원 야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뛰었고, 소소경의 7이닝 4피안타 2실점의 호투, 그리고 입단 동기 장성호의 역전 타점과 쐐기 점수에 힘입어 10:2로 크게 '''승리'''했다.
매년 6월 10일이면 근조 리본을 부착하고 경기에 임하는 타이거즈이지만, 이 날 KIA의 승률은 0에 가깝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경기 연속으로 패배하다가[17] 2016년에 한 번 이겼다. 삼성이 고 장효조 선수 기일에 여는 추모경기와 딱 비교된다.[18]
2014년 6월 10일 경기에서는 난타 세례를 받으며 팬들을 폭발시켰다. 그렇잖아도 타어강 등 2013년 이후 처참한 성적으로 분위기가 살벌한 기아 팬들이었는데 이런 막장 경기까지 나오니 '''김상진 기일만 되면 지던 놈들이 이젠 아주 가지가지 한다'''며 분노어린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2015년에도 또 졌다. 이번엔 양현종의 등판 경기라서 많은 팬들이 승리를 기대했지만, 라인업에서 김기태 감독이 '''나지완을 좌익수 겸 1번타자'''로 기용하는 이상한 수를 뒀고, 결국 마무리 윤석민이 1.1이닝 2실점 불쇼를 보여주며 넥센 히어로즈에게 역전패했다.
2016년에는 드디어 이겼다. 광주 홈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이범호브렛 필의 홈런포를 앞세워 4-0의 스코어로 경기를 끝냈으며, 고졸 신인 정동현이 '''1군 데뷔 첫 선발승'''까지 거두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승전보로 김상진을 추모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다시 졌다. 광주 홈 경기에서 넥센에게 연패를 하며 당시 시점에서 NC와 불과 0.5경기차 1위라는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2018년에는 롯데 원정 경기였는데 4:0으로 끌려가다가 우천으로 노게임 선언이 되었다.
20주기인 2019년 6월 10일은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
21주기인 2020년 6월 10일은 kt 위즈와의 수원 원정 경기였고, 이른 장마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KIA는 10:0으로 5회 강우콜드 승리를 거두었다. 김상진의 기일에 거둔 네 번째 승리였다. 이날 경기는 7안타를 치고도 kt 마운드의 난조로 무려 '''10개'''의 사사구를 얻어 대량 득점에 성공했고, 애런 브룩스가 5이닝 무실점의 맹투로 완봉승을 거두는 등 여러모로 뜻깊은 날이었다.
22주기인 2021년 6월 10일은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 경기로 예정되어 있다.
'''연도'''
'''주기'''
'''상대팀'''
'''구장'''
'''스코어'''
'''승패'''
'''비고'''
2000
1
두산
잠실
5:4
''''''

2001
2
현대
수원
0:6
''''''

2002
3
경기 없음
[A]
2003
4
한화
무등
17:8
''''''

2004
5
삼성
시민
3:1
''''''

2005
6
두산
잠실
2:5
''''''

2006
7
경기 없음

2007
8
SK
무등
2:3
''''''

2008
9
우리
목동
2:10
''''''

2009
10
히어로즈
목동
2:4
''''''

2010
11
두산
무등
3:1
''''''

2011
12
LG
군산
7:6
''''''

2012
13
롯데
사직
3:6
''''''

2013
14
경기 없음
[A]
2014
15
한화
광주
16:15
''''''

2015
16
넥센
광주
4:3
''''''

2016
17
삼성
광주
0:4
''''''

2017
18
넥센
광주
8:4
''''''

2018
19
롯데
사직

'''취소'''
[19]
2019
20
경기 없음
[A]
2020
21
kt
수원
10:0
''''''
[20]
2021
22
삼성
대구



아래는 팀 간 전적이다.
''''''
'''전적'''
'''승률'''
삼성
2승
1.000
SK, kt
1승
두산
1승 2패
.333
롯데, LG, 현대
1패
.000
한화
2패
키움(전신팀 포함)
4패
NC
전적없음
통산 전적
5승 12패
.313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실점
자책점
사사구
탈삼진
WHIP
1996
해태
29
123⅔
9
5
0
4.29
115
62
59
55
64
1.35
1997
30
147⅔
9
10
1
3.60
135
60
59
71
91
1.28
1998
25
121
6
11
1
3.87
120
63
52
50
69
1.34
<color=#373a3c> '''KBO 통산'''
(3시즌)
84
392⅓
24
26
2
3.90
370
185
170
176
224
1.32
[1] 음력 3월 9일[2]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신안동[3] 용봉초등학교에서 전학[4] 제자 김진우의 활약에 힘입어 팀을 2000년 봉황대기와 2001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감독에서 물러나 진흥고 체육 교사로 근무했다. 아들 강하승도 진흥고를 졸업하고 고양 원더스에 입단 후, KIA 타이거즈로 스카우트 되었지만 1시즌 후 방출되었다.[5] 당시 해태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은 선수가 2명이 더 있는데, 김상훈은 고려대에 진학한 후 2000년에 입단했고, 서재응은 인하대에 진학했다가 중퇴 후 뉴욕 메츠와 계약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종국은 1973년생이나 고려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프로에 데뷔해서 입단 동기가 되었다.[6] 운동선수들은 다른 직업군보다 활동량이 많은 만큼 체력 소모가 크고 신진대사가 활발하며, 이 때문에 음식 섭취량도 많은 편이다. 즉 '''냄비 하나=봉지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게다가 양도 많은데 갓 조리되어서 뜨겁기까지 하다면 내장에 가해지는 부담도 그 양과 온도만큼 크다.[7] KIA로 바뀐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구단 트레이너로 활동하고 있다.[8] 홍현우는 문병 당시 김상진의 위암 투병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9] 피자 L사이즈 2판을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고 한다.[10] 김상진과 츠다는 팀에서 촉망받던 우완 파이어볼러였고, 암으로 인해 안타깝게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11] 이쪽도 똑같이 암으로 사망했고, 챔피언십 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으며(한국/일본 시리즈), 강속구 투수를 상징하는 불과 관련된(후지이의 경우는 "불꽃의 중간계투") 별명이 붙었었다.[12] 당시엔 기사는 기자가 쓰지만 편집부나 데스크에서 그 기사를 마음대로 편집하거나 제목을 붙이는게 일반적이었다.[13] 한때 회원수가 수백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십수명의 소규모로 축소되었다.[14] 네이버 스포츠로 발행된 컬럼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네이버에서는 삭제되고 박동희 기자 블로그에 원문이 남아있다.[15] KIA 타이거즈의 2009년 10번째 우승 후 박동희 기자의 컬럼. 김상진 선수가 V9의 마지막 승리투수라는 점에서 위의 컬럼과 함께 보길 추천.[16] 임창용이 김상진의 진흥고 1년 선배이다.[17] 2013년6월 10일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18] 장효조의 작고 후 삼성은 장효조의 기일이나 추모행사가 있는 경기에서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나 2011년부터 삼성을 맡은 류중일 감독이 장효조와 함께 꽤 오래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던 직속 후배여서 더더욱 이기려고 하는걸지도..[A] A B C 월요일이기 때문에 경기가 없다.[19] 4회말 우천 노게임[20] 강우 콜드로 5회까지만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