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
1. 개요
- 등장 작품
- 은하영웅전설 외전 2권 <별을 부수는 자> 7장
- 시기 : 우주력 668년, 제국력 359년 표준력 5월
2. 발단
은하제국의 제24대 황제 코르넬리우스 1세는 선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의 사촌동생이자 훗날 양자로 책봉된 인물이었다.[1] 코르넬리우스 1세는 즉위 후에도 선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신임하던 중신들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내정에 대해서도 전임 황제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충실하고 탄탄한 치적을 쌓아갔다.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선제와는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해 다곤 성역 회전에서 당한 참패의 굴욕을 씻어내기 위해, 또한 단순히 국가간 균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전 인류 사회를 다시금 골덴바움 왕조의 깃발 아래 재통합하기 위해서 자유행성동맹과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다곤 성역에서의 참패가 전략적인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보았고 만전을 기한 전략이 수립된다면 승리란 필연적이라 여기며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편으로 원정에 나서기 앞서 양식이 있는 군주로서 아량을 보이고자 자유행성동맹에 세 차례에 걸친 특사를 파견, 항복을 권유했다.
황제의 특사가 동맹 정부를 상대로 어떤 제의를 했는지는 작중에서 전해지지 않으나 자유행성동맹에게 '복종'을 권유했다고만 전해진다. 정황상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려고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하제국의 기록으로는 다곤에서의 승리에 도취된 동맹정부는 황제의 권유를 거부하는 것을 물론, 특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기술되어있다. 이로써 황제로서의 도량을 충분히 보였다고 생각한 코르넬리우스는 "다곤의 보복"을 외치며 친정을 개시했다. 제국력 359년, 우주력 668년 5월, 28세의 청년 황제는 다곤 성역 회전 때 출동했던 병력보다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제도 오딘을 출발했다.[2]
은하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던 황제의 친정은 훗날 여러가지 논란거리를 파생시켰다. 특히 '''무려 58명의 원수'''가 황제를 따르고 있었던 점에서 후세 역사가들의 조소를 사기도 했는데 이렇게 원수 칭호를 남발한 것은 코르넬리우스 1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최고사령관은 물론 '''소규모 분함대 지휘관에게까지 원수 칭호를 하사했다.''' [3]
3. 연전연승의 원정군
다곤에서의 참패를 교훈으로 삼아 철저하게 준비된 은하제국군과는 반대로 자유행성동맹군은 다곤에서의 대승에 도취되어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고 링 파오와 유수프 토패롤과 같은 명장들도 존재하지 않았다.[4]
오만해져있던 동맹군은 자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은하제국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깨졌고 20명의 제국원수를 전사시키긴 했으나 몰려드는 제국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자유행성동맹은 다곤 성역에서 승리을 거둔지 불과 30여년도 안돼 다시금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4. 내부로부터 날아든 비수
코르넬리우스 1세는 불과 몇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사회의 재통합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은하제국 수도성 오딘의 황궁에서 '''궁정 쿠데타가 발생했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장기간 오딘을 비우자 물 밑에서 때를 기다리던 반역자들이 행동을 벌인 것이다.[5]
황제는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역자들이 제국을 장악할 우려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황제가 공들여 준비한 보급로가 차단되어 원정에 차질이 빚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반역자들과 자유행성동맹에게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결국 황제 코르넬리우스 1세는 울분을 억누르고 원정 함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으며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자유행성동맹은 남은 전력을 모두 결집시켜 퇴각하는 제국군의 후방을 타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코르넬리우스 1세는 돌아오는 길에서 15명의 원수를 잃었지만 오딘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할 수 있었다.
5. 결말
원정군이 입은 피해, 원정 과정에서 소모된 물자가 막대했던 탓에 황제는 다시는 원정에 나서지 못했고 공세에 나설 여력조차 없던 자유행성동맹측의 사정이 겹치며 한동안은 대규모 전투 없이 크고 작은 교전이 접경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은하제국은 약 70여년이 흘러서야 다시금 대규모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반면 제국군의 침공을 막은 자유행성동맹에는 새로운 신년인사말이 추가되었는데, 바로 "올해야말로 승리와 평화를!"이다. 친정 다음해 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6. 의문점
은하제국 역사상 첫번째로 동맹을 정복할뻔한 사건으로서 작중에서는 그 영향력은 그리 크지는 않아도[6] 의미는 있는 사건이지만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 어느 루트로 침공했는가?
- 어떻게 지리 정보를 얻었는가?
- 그 외에
[1]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많았거나 황위계승을 위해 나이차를 무시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막시밀리안 요제프에게는 헤르베르트와 리하르트라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사망년대를 보면 이 둘이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사촌으로서 계승하면 정통성이 취약했을 것이다.[2] 선제가 신임하던 중신, 법무상서 오스발트 폰 뮌처는 이 원정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황제가 뜻을 돌리지 않자 전격 사임하였다. 황제는 원수 칭호를 내려 뮌처를 달래려했으나 '당연히' 소용없었다. 게다가 뮌처가 워낙 강직한 인물이기에 제국원수가 아니라 제국군 3장관직을 줘도 안 받아들였을듯[3] 120여 년 후인 프리드리히 4세 시대의 제국 원수는 단 6명이었다. 당대 제국군의 규모는 대략 20만 척에 달했고 6명의 원수, 그나마 1명은 예비역, 다른 하나는 비전투 분야를 담당하는 원수였으니 '''제국군에는 단 4명의 원수만이 필요했다'''는 결론이 나온다.(전장에 나서지 않고 군정과 군령을 담당하는 군무상서와 통수본부총장은 부재나 유고 시 차선임자가 임시적으로 직무를 대행하고 후임자를 채우면 충분하다. 야전사령관인 우주함대 사령장관의 경우 부재나 유고 시 차선임자의 계급이 휘하 제독들과 같아 군령이 서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차선임자인 부사령관에게 원수 계급장을 준다고 한다면 이상할 것은 없다.)[4] 이때 이제르론 회랑으로 침공했는지 페잔 회랑으로 침공했는지 애매하나, 이제르론 회랑으로 진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르론 회랑에서 희대의 패전 다곤 성역 회전이 있었기는 하지만, 페잔 회랑으로 침공했다고 보기엔 제국 내에서 페잔 회랑을 통한 침공의 사례로 든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5] 후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자유행성동맹을 침공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미 정치적 반대파인 문벌귀족을 싹 정리해놨고 남아있는 이들은 전부 라인하르트에게 충성하는 이들뿐이라서 가능했다.[6] 반면 수십년 전 있었던 제2차 티아마트 성역 회전은 본편 시간대에도 심지어 작품이 끝나는 그 순간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7] 이는 앞서 말했듯 라인하르트의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이전에는 최대의 성과였다. 그나마도 버밀리온에서 죽을 뻔한 라인하르트와 비교해보면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는 거의 대등한 성과다.[8]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 제국군은 페잔의 항로국 지도를 얻었다고 했는데 페잔의 페잔 자치령은 설립 때부터 중개무역 등으로 발전했기에 제국, 동맹 양측에 대한 항로도가 있는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