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미 브라운
1. 소개
前 NBA 출신 농구선수.
21세기의 모든 1픽 중 모두가 인정하는 '''21세기 최악의 드래프트 1번 픽이었다.'''[1]
2. NBA 입성 전
조지아 주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 전국 최고의 빅맨으로 평가받으며 활약하다 2001년 플로리다 대학의 장학금 제의를 거절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당시 워싱턴 위저즈의 구단주였던 마이클 조던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 1번으로 지명된다.
2001년 드래프트는 대학생 중에는 특급 유망주가 없었기에, 캘리포니아 출신의 센터 타이슨 챈들러, 일리노이 주 출신 센터 에디 커리(現 중국리그 소속)등 고졸 빅맨들이 강세를 보였다. 흔히 그래도 위저즈가 오로지 브라운의 포텐셜만을 보고 그를 1번으로 지명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 결코 그렇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고졸 열풍. 당시 코비, 가넷의 폭풍 성장으로 인해 고졸 루키에 대한 기대감은 거의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당장 3년 정도만 키워도 정말 쓸만한 포텐셜이 터질 거라는 믿음이 NBA에 팽배해 있었다. 만일 실제로 콰미를 뽑은 것이 그렇게 쇼킹한 일이었다면 2픽과 4픽에도 고졸 빅맨이 뽑힌 것은 위저즈, 클리퍼스, 불스 구단 관계자들만 단체로 약을 빨은 결과일까? 간단히 말해 결국 누구라도 저 당시에는 저걸 최선의 결과로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는 전체적으로 수준 낮은 대학 선수들. 앞서 언급되었지만, 당시 2001 드래프트를 신청한 대학선수들은 대학에서 보여준 것이 너무 적거나, 기대하기 힘든 상태였다. 훗날 디펜스 1인자로 거듭난 셰인 베티에나 올스타 가드로 거듭난 조 존슨이 있긴 했지만, 당시에는 뭔가 1픽감으로 뽑기에는 아쉽다는 평가가 중론이었다.[2][3] 그 바람에 구단들은 어차피 즉전감도 없을 듯 한데 포텐셜 있어보이는 놈으로 몰빵하자(...)라는 분위기가 대세가 되버린 것. 셋째로 워크아웃이 문제였다. NBA 각 구단들은 드래프트 대상 루키들이 NBA 구단 관계자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워크아웃을 시행한다. 그런데 문제는...여기서 콰미는 너무 우수했다(...) 막상 콰미는 같은 고졸 루키 중에서도 챈들러나 커리보다 상대적으로 무명인 상태였다. 그랬는데 워크아웃을 한번 해보니 기술은 다재다능, 신체적 능력은 환상, BQ까지 우수, 모든 면에서 준수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던 타이슨 챈들러나 에디 커리[4] 를 씹어먹을 정도로. 왜 하필 여기서만 잘했을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상황이 어우러지며 콰미는 드래프트 전부터 1픽 대세로 여겨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콰미가 1픽에 뽑힌 것을 놓고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뻘짓을?"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누구라도 그럴 만 했다. 결과적으로 대삽질이자 레전설이 되었지만.
한편 이로 인해 위저즈가 지나친 선수들 중 가장 아까울 만한 인물을 꼽자면 3번픽으로 멤피스로 간 파우 가솔[5] 정도.[6]
하지만 포텐셜이 터졌다 안 터졌다 여부를 떠나서 브라운의 NBA 커리어는 1번픽 출신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초라했다.''' 워싱턴에서는 근성을 가지고 그를 4년 동안 열심히 키웠는데, 2001/02 시즌 개막전 때 탁월한 운동능력을 발휘한 걸 빼곤 점차 부진해 덕 콜린스 감독과 마이클 조던 등 선수진들과 불화가 잦았고, 워싱턴 지역언론으로부터도 압박을 받았다. 이에 찰스 오클리가 변호하기도 했으나 결국 참다 못해 LA 레이커스로 보냈고, 레이커스에서도 신인 센터 앤드류 바이넘에 철저하게 밀려서 버려졌다. 이후 파우 가솔을 레이커스로 데려온 트레이드에 끼워져 멤피스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는 멤피스가 그를 필요로 해서 영입했다기보다는 계약 만료를 앞둔 그를 영입해서 샐러리캡 여유나 좀 벌어보려던 의도가 강했다는 게 정설(...). 이후 저니맨으로 이런저런 팀을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필라델피아에서 뛰다가 방출되어 NBA에서 모습을 감췄다.
파우 가솔과의 트레이드 당시 유명한 스포츠 언론인 스티븐 A. 스미스로부터 포풍 디스를 당했다. 스미스 특유의 격양된 어조와 '''콰~메 브라운'''이라는 간드러진 발음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눈물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캐스터: LA가 '무르다'[7]
고 평가받는 플레이어를 영입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내준 건 아닙니까? 물론 그는 평균 19점-9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이는 리그에서 가솔 외에 11명만이 찍는 스탯이지만요.스미스: 장난합니까?[8]
LA가 내준 건 '''콰~메 브라운'''이라고요. 아무렴 어때요?스미스: 일단 첫 번째, 플레이오프에 근접한 상위권 팀에 있어 1라운드 픽은 별로 의미가 없죠.[9]
스미스: 하지만 그것보다도 두 번째, 레이커스가 '''콰~메 브라운'''을 쫓아냈어요! LA는 앞으로 우승을 하건 말건 지금 축제 분위기여야 합니다! 이 녀석은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찌질이라고요! 농구를 못해요! 악의가 있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솔직히 말해서 농구를 전혀 못한다고요!
스미스: 기름손에다가[10]
스텝도 안 좋고 활동량은 넓은데 머리가 나빠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익숙한 포스트업 기술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수비도 못하고, 멘탈도 후달리고, 열정도 없고... 근데 너무 많이 내줬다고요?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참고로 이 유투브 비디오에는 콰미 브라운의 사칭인물의 댓글이 예술인데 "많은 사람들이 저와 코비가 2006년 토론토 랩터스 전에 둘이 합쳐 84점을 득점했다는 사실을 모르죠."라는 댓글을 달았고 베스트에 올라왔다[11] .
콰미가 프로 초반 적응을 못하고 자기 기량을 펼치지 못한 것은 마이클 조던의 지나친 갈굼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조던은 자기가 직접 뽑은 콰미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그를 많이 질책했고 선수로 복귀해서 함께 뛸 때도 그를 매섭게 몰아부치곤 했는데, 내성적인 성격의 콰미 브라운이 이런 조던의 성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위축되었다는 것.[12][13] 조던이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콰미가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콰미가 경찰서에서 '''"조던이 절 죽이려 들 거에요ㅠㅠ"''' 라며 벌벌 떨었다는 소문이 꽤 많이 퍼졌다.
이 때문인지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꾀병을 부려 연습에 불참하는 등 인성에도 문제가 많이 생겼다. 2007년에는 로니 튜리아프와 함께 LA의 한 쇼핑몰에 들렀다가 그를 알아본 팬이 사인을 부탁했는데, 그 때 갑자기 콰미가 그 팬의 일행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초콜릿 케이크를 빼앗아 그 사람에게 던져버리고(...) 사과없이 가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사과는 했지만 이 때문에 콰미는 '''초코콰미'''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었다.
[1] 21세기가 아니라 NBA 역사를 통틀면 1989년 퍼비스 엘리슨이나 1998년 마이클 올로워칸디 등 몇몇 최악의 후보가 있으나 21세기, 즉 20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콰미가 독보적'''이었다.''' 대항마로 부상 때문에 제대로 뛰지도 못한 2007년 드래프트 1픽 그렉 오든이 떠올랐다. 이후 2013년 드래프트 1순위인 앤서니 베넷도 거의 최악수준, 아니 베넷은 2년만에 계약이 해지되는 등 콰미 그 이상이다. 물론 앤서니 베넷 같은 경우는 그 해 드래프트 풀 자체가 최악이었다는 점이었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케빈 러브 영입 당시 조기에 처분에 성공한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그래도 G리그에서까지 평범한 선수가 되어버린 베넷보단 콰미 브라운이 낫긴 하다.[2] 이 드래프트는 좀 특이한 것이 뽑힌 선수중 최고의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은 당시 기준으로 모두 저평가되거나 아직 기량을 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력에 비해 낮은 순위에 지명되었다. 잭 랜돌프는 애매한 사이즈와 체중문제, 멘탈 문제로 19위까지 밀려났으며 길버트 아레나스는 "포인트가드의 사이즈를 지닌 슈팅가드"란 점에서 31위까지 밀려났다. 당시는 2000년대 중반 이후를 휩쓴 듀얼가드 열풍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포지션이 애매한 선수들은 저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28번 픽으로 뽑힌 토니 파커는 19세에 불과한 어린 프랑스 가드였기 때문에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아직 스타급 실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 드래프트 최고의 선수라고 할 만한 파우 가솔은 당시만 해도 토니 쿠코치나 페자 스토야코비치같은 장신 스몰포워드라는 심각한 오해를 받았다. 물론 가솔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고(3순위로 뽑힘) 유망주 풀도 얕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NBA에 비해 수준이 확연히 떨어진다고 평가받던 유럽 리그 출신의 21세 유망주를 1순위로 뽑는 건 전례가 없었다. (유럽선수들의 성공이 이어지자 결국 06드래프트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안드레아 바르냐니가 1순위로 뽑히고...망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기준으론 전부 "고만고만한 놈들"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그런데 당시 슈퍼스타로 쭉쭉 성장하고 있던 케빈 가넷을 연상시키는 콰미가 갑자기 튀어나오자 구단들이 현혹된 것이다. 이때 고졸열풍이 얼마나 심했냐면 시카고 불스는 데뷔하자마자 2년 연속 평균 20점 10리바운드라는 엘리트 빅맨급 기록을 낸 엘튼 브랜드를 아직 데뷔도 안한 고졸신인 타이슨 챈들러와 맞바꿀 정도였다. 게다가 70년대 스펜서 헤이우드 이후 대학 중퇴생들이 NBA에 진출을 시작한 이래 8,90년대를 거치면서 NBA갈 가능성이 있는 대학선수들은 보통 1,2년, 아무리 많아봤자 3년만 대학에 있는게 대세가 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4년을 꽉 채운 선수들은 "실력 없어서 못 나온 선수들"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셰인 베티어는 대학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수비수였지만 일찌감치 드래프트에 나온 선수들보다 성장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았다.[3] 여담이지만 이런 고졸 열풍 때문에 기본기가 크게 부족한 유망주들이 NBA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리우스 마일즈, 조나단 벤더 등 성장가능성은 컸지만 실력이 부족해 높은 순위로 뽑히고도 NBA에서 자리잡지 못해 사라지는 선수들을 넘쳐나게 되자 NBA는 고졸직행을 금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부작용은 소위 말하는 "one-and-done" 관행으로, 특급유망주들이 대학에 가서 1년만 다니고 바로 프로로 가는 것인데, 하도 이런 선수들이 많아지다 보니 대학리그가 망가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4] 더 웃긴 건 에디 커리는 고교 랭킹 1위였다. 하지만 얘를 뽑았다면 위저즈는 더한 욕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챈들러야 지금은 오오 수비 오오 하지만, 정작 불스는 그를 4~5시즌 동안 키우기만 하다 떠나보냈다(...) 뭐 그래도 지금은 제일 성공했지만.[5] 한편 가솔의 경우도 골때리는 측면이 있었다. 아무리 유럽이라도 엄연히 유럽 최고 명문팀의 프로 선수인데도 당시 가솔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는 엉망이었다. 미드레인지 게임을 하는 빅맨이라고 설레발치다가 시즌 개막 후 끝내주는 운동능력과 신체로 림으로 돌진해서 덩크를 날려대는 통에 팬들이 멘붕할 정도. 이래저래 참 묘한 드래프트였다.[6] 참고로 이해 1라운드 전체 9번으로 지명받은 로드니 화이트는 2005년까지 NBA에 남아있다가 2006년부터는 해외리그에서 뛰었고, 2011년에는 한국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뛰기도 했다.[7] 가솔이 백인이라 피지컬이 떨어지는 것을 표현한 것. 물론 가솔은 피지컬이 답 없이 후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걸 커버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8] 질문 자체가 좀 황당하긴 하다. 말했듯이 뛰어난 빅맨이 점점 더 희귀해지는 리그에서 가솔은 19-9를 찍는 엘리트 빅맨이고, 당시 레이커스가 내준 건 2라운드 쩌리 선수들과 별 가치도 없는 1라운드 지명권(당시 레이커스는 플옵권 팀이고 가솔 영입 이후 더 강해질 게 분명한지라 1라운드라고 해도 하위픽이 될 게 뻔했다), 그리고 '''콰~메 브라운'''뿐이었다. 트레이드 당시 길버트 아레나스같은 선수나 그렉 포포비치같은 감독들이 "사기 트레이드다" "리그에서 이런 트레이드는 방지해야 한다"고 난리치고 레이커스 팬들이 단장인 미치 컵첵을 "컵첵신"이라고 칭송한 게 괜히 한 게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 2라운드 쩌리라고 생각한 마크 가솔이 리그 수위급 선수로 성장하긴 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로또에 가깝고 트레이드 자체가 엄청나게 불공정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9] 실제로 이때 멤피스가 받아온 픽은 레이커스의 준우승으로 인해 28번픽이 되었고, 이 픽으로 지명된 단테 그린이라는 선수는 NBA에서 4시즌 뛰면서 별볼일 없는 성적을 거두고 사라졌다.[10] 당시 콰미 브라운은 다른 선수보다 상대적으로 손이 작은 편이었다는 것이 기름손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케이스 때문에 이후 스카우트 팀들이 선수를 뽑을 때 손이 큰 선수를 선호하게 되었을 정도라고 하니.[11] 이게 왜 웃기냐면 콰미의 사칭인물이 말하는 경기는 2006년 1월 22일 토론토 랩터스와의 경기로, 코비 브라이언트는 '''81점'''을 득점했고 콰미 브라운은 '''3점'''을 득점했다.[12] 근데 만약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콰미와 마찬가지로 유순한 성격이라 조던으로부터 갈굼당한 선수는 과거 시카고 불스, 올랜도 매직 등에서 뛴 호레이스 그랜트가 있다. 그런데 그랜트는 이로 인해 조던과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꾸준히 성장해 수준급 선수가 됐다. 한국과 달리 NBA 선수들은 '''합숙도 하지 않고 출퇴근하는 데다 선배가 후배 집합시키거나 때리는 문화인 것도 아닌데''' 선배가 좀 갈군다고 제대로 뛰지도 못할 정도의 순두부 멘탈이라면 답이 없다. 결정적으로 조던은 콰미랑 단 2년 뛰었을 뿐인데 이후 콰미는 조던의 갈굼 없이 10년이나 뛰면서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조던 탓할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마인드가 형편없었던 것.[13] 게다가 당시 콰미와 신인으로서 같이 입단했던 이탄 토머스가 훗날 밝힌바에 따르면 조던은 딱히 콰미뿐 아니라 팀 전체를 휘어잡거나 그러지도 않았고 팀 분위기를 잡은건 찰스 오클리 같은 다른 베테랑, 콰미를 갈군건 감독이었던 덕 콜린스였다고 하니 조던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