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타타르
1. 개요
크림 반도의 튀르크계 민족 크림 타타르인은 러시아령 크림 공화국의 주된 소수민족이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볼가 타타르인들이 16세기부터 러시아인들과 동화되었던 것과 다르게 크림 칸국은 18세기 후반에야 러시아 제국에 의해서 토벌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민족성이 강하다. 볼가 타타르인들이 볼가 강을 중심으로 한 과거 불가르 칸국 주민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것처럼, 크림 타타르인들은 몽골의 침공 당시 헝가리 및 중부 유럽으로 이주하지 않고 중세 흑해 근방에 잔존하다 킵차크 칸국의 이슬람화 이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쿠만족과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에 정착하여 무슬림이 된몽골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친척으로는 노가이인이 있는데 노가이인은 크림 타타르나 볼가 타타르인들과 다르게 몽골계 황인 형질이 뚜렷하다.[2]
2. 규모
위키백과의 크림 타타르인 문서에서 명시된 인구수는 크림 반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각각 24.6만명, 23.9만명이고 크림 반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만명부터 최대 9만명이며 터키에 거주하는 크림 타타르인의 경우 집계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 15만명에서 최대 600만명으로 추정된다.[3]
3. 역사
수세기 동안 이들 크림 타타르의 주요 수입원은 다름 아닌 '''노예무역'''였는데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신종하면서 오스만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크림 타타르들은 동유럽 일대를 휘저으며 마음껏 노예 사냥을 벌여 잡아온 노예들을 카파의 노예시장을 통해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들로 팔아치웠다. 크림 칸국에서는 약탈자들에게 군마를 빌려준 후에 약탈자들이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받는 비즈니스가 번성했었다 한다. 밑천을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것.[4]크림 칸국이 러시아한테 멸망할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수백만 명이 노예로 잡혀갔는데 당시 노예 사냥의 주요 피해지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연 평균 2만 명이 노예로 잡혀갔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비옥한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이 이들의 노예 사냥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말그대로 공백지역이 되는 바람에 일부 농노들이 영지를 탈출하여 이 공백지역으로 들어오고 노예 사냥을 하는 크림 타타르에 대항할만한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면서 카자크가 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굳이 기독교 국가만 약탈한 것이 아닌 무슬림 체르케스인들도 자주 노예로 납치하였는데 이는 체르케스인 노예들이 군인 노예로 비싼 값에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주요 피해국이었던 러시아 역시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크림 타타르의 노예 사냥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1574년에는 수도인 모스크바가 털리고 10만 명의 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러시아에게 있어서 크림 칸국은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철천지원수'''였지만 뒤를 봐주고 있는 오스만 때문에 이만 뿌득뿌득 갈고 있었는데 18세기경부터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크림 칸국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둘 사이의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러시아에게는 그동안 크림 타타르에게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할 겸 흑해의 부동항을 얻고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1768년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고 여기서 승리한 러시아는 1774년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봉신관계를 단절시키고 1783년 전적으로 크림 칸국을 합병했다.
크림 칸국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숙적의 앞잡이이자 수세기동안 자국민을 사냥해 노예로 팔아치운 철천지 원수인 크림 타타르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수많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오스만으로 도망쳤고 러시아는 이들이 떠난 빈자리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을 정착시켜 1783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 직후 98%였던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인 비율이 100여 년 후인 1897년에는 34%까지 폭락했다. 크림 타타르의 친척뻘인 볼가 타타르가 러시아 질서 아래에서 나름대로 대우[5] 받으며 산 거에 대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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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무자비한 노예 납치 및 약탈을 일삼았던 크림 타타르인들의 후손들은 어른의 사정으로 현재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외모 차이가 별로 없는 편이다. 크림 타타르 가운데 슬라브계 외양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만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도 튀르크계 황백혼혈 외양을 가진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다.[6] 오늘날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들이 사실상 자신들이 친척이라고 생각하기 망정이지, 과거 크림 칸국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체르케스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노예무역 때문에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크게 터질 가능성도 있다.
3.1. 현대사
크림 타타르의 처우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선 이후 더 악화되었다. 1920년대 초반 전시경제체제로 인한 기근과 1920년대 후반의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 15만 명 이상의 크림 타타르인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독소전쟁 후반부에 소련이 크림 반도를 수복한 1944년 5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 조치" 운운하며 크림 타타르인 전체를 중앙아시아(특히 우즈베키스탄)로 강제이주(Sürgünlik / Сюргюнлик)시켜버렸다. 이 때 20만에 달하는 크림 타타르인을 전부 기차 화물칸에 집어넣는데 딱 3일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8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유배지에서 대부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시당하며 살던 이들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혐의를 벗긴 했지만 소련 당국은 배상이나 귀향 지원 같은 조치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가 되어서야 크림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4. 현황
우크라이나에서는 크림 타타르인들의 강제 이주를 추모하는 기념일이 존재한다. 2014년 5월 16일에는 대통령령으로 5월 18일이 '크림 타타르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날(День боротьби за права кримськотатарського народу)'로 제정되었으며, 2015년 12월 12일에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5월 18일을 '크림 타타르인 집단학살 추모일(День пам'яті жертв геноциду кримськотатарського народу)'로 제정한 바있다. 관련 기사. 다만 기념일이 성립된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크림 타타르인들이 탄압받는 것을 동정한다기보다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한 것을 항의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러시아/소련의 크림 타타르인 탄압을 부각해야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크림 반도에 대한 지분권이 높아지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도 러시아인 인구 비중이 높은 크림 반도를 함부로 우크라이나에 돌려줬다가는 보리스 옐친 시절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7]
5. 같이 보기
[1] 고대 튀르크인의 고유 문자인 '탐가(Tamğa)'에서 따온 것이다. 크림 칸국을 통치한 게라이 가문(Geraylar)의 상징이기도 하다.[2] 첼라빈스크의 나가이바크족 제외.[3] 터키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의 숫자에 대해 최대 600만명이 추정이 아닌 사실일 경우 크림반도와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들보다 터키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의 수가 많을 가능성이 있다. 터키에 거주하고 있는 크림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크림 칸국에서 아나톨리아로 건너온 크림 타타르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4] 출처: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허승철 역)[5] 물론 볼가 타타르인들도 항상 좋은 대우만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1921~22년도 당시 볼셰비키가 타타르스탄 일대의 식량 공급을 먼저 끊어서 수십만여 명이 기아로 사망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에서 대우를 받은 이유는 크림 타타르인들이 비방하듯 이들이 얍삽하게 러시아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와의 무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의 세수를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6] 코사크들이 크림 타타르족들을 포로로 잡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노예로 붙잡혔다 돌아온 우크라이나인 부녀자들이 크림 타타르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7] 다만 러시아가 크림 반도와 비슷한 논쟁이 벌어지는 지역인 노보로시야마저 크림 반도처럼 자국령으로 합병한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도로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노보로시야의 경우 친러 성향에 러시아어가 많이 쓰이고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것과 별개로 크림 반도와 달리 러시아계 주민보다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 합병만으로도 다른 나라들한테 충분히 까이는 상황에서 비슷한 짓을 했다가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특히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과 전쟁까지 하고 이후 크림 반도와 노보로시야의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본토로 추방당하여 두 지역 모두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지배 하에 놓이는 소탐대실의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