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케스인

 



1. 개요
2. 분류
3. 문화
4. 역사
5. 현황
5.1. 이스라엘의 체르케스인


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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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게어
Адыгэхэр, Черкесхэр
카바르다어
Адыгэхэр, Шэрджэсхэр
러시아어
Ады́ги (Adýgi), Черке́сы (Cherkésy)
터키어
Çerkesler, Adığeler
영어
Circassians

러시아 남부 북캅카스흑해 연안 지역의 주된 선주민족이다. 1763년부터 1864년까지 발생한 러시아의 캅카스 침략과 대규모 학살의 여파로 오늘날에는 러시아 영내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2. 분류


체르케스라는 표현은 주변의 튀르크인이나 러시아인들이 부르던 타칭이다. 스스로는 바닷가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이란 뜻의 '아더가(Адыгэ [aːdəɣa])'라고 칭했다.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는 체르케스인을 통칭하여 '아디그인(Ады́ги)'이라 한다. 세부적으로 아디게야의 체르케스인에 대해서는 '아디게인(Адыгейцы)', 카라차이-체르케시야의 체르케스인은 국명과 같이 '체르케스인(Черкесы)',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지역의 체르케스인은 '카바르다인(Кабардинцы)', 흑해 연안의 체르케스인은 '샵수그인(Шапсуги)'으로 나눠서 구분한다. 현재의 소치 일대에 거주하던 우비흐인(Убыхи)도 체르케스인에 포함되었지만 이들은 러시아인들에 의해 캅카스 지방에서 추방돼 대부분 터키인에 동화됐다. 우비흐인과 가까운 압하스인도 체르케스인에 분류되는데 이들은 정교도의 비율이 높다.

3.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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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케스인의 상징기. 아디게야 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하다.
열두 개의 별은 체르케스인을 구성하는 전통적인 열두 부족을 의미한다.
체르케스인들은 서북캅카스어족에 속하는 체르케스어를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서쪽의 아디게어(Адыгабзэ, Адыгейский язык)와 동쪽의 카바르다어(Адыгэбзэ, Кабардино-черкесский язык)라는 두 표준어가 존재한다. 이들 언어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자음수에 비해 한정적인 3개의 모음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아더가 하브자(Адыгэ Хабзэ)라고 하는 종교를 믿었으나, 오늘날에는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며 무슬림이 대다수이다.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국가무신론 체제의 소련 치하를 거치다보니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종교적이지 않아 여성에게 히잡이나 니캅을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들은 서구적으로 산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없는 건 아니어서 아더가 하브자[1]를 부활시키려는 신이교주의자들이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체르케스인의 전통 중에는 접대의 관습이 있어 손님이나 방문객들에게 음식을 항상 후하게 베푸는 걸로 유명했다. 타인이 적일지라도 남에게 음식을 베풀어준다던지 체르케스인들이 사는 지역은 돈 없이 다니더라도 절대 굶으며 여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이 남아있다. 이들의 요리는 러시아보다는 터키와 흡사하다고 한다.
체르케스인은 무슬림식 인명을 쓰지만 체르케스어 고유어휘를 인명으로 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샵수그인인 '샤라틀러크와 터그워저크와 커즈바치(ШэрэлӀыкъо Тыгъужъыкъо Къызбэч [ʃaraɬʼəqʷa təʁʷəʐəqʷa qəzbatʃ], Тугужуко Шеретлуко Кызбэч, 1777년 ~ 1840년)'가 있다. 요르단 출신으로 체르케스인 민속 문학에 대해 연구한 '자머흐와 암자드(Жэмыхъуэ Амджэд, Амджад Джаймуха, 1962년 5월 1일 ~ 2017년 10월 7일)'는 자신의 아들에게 산잘레이 서사시에서 유래한 '산잘레이(Сэнджэлей)'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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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경 흑해 동쪽 연안에 자리 잡은 스키타이계 부족 중 하나인 신드족(Σινδοί)이 기원전 5세기경 '신디케(Σινδική)' 또는 '신디카(Синдика)'라는 국가를 세우고 흑해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들과 무역한 것을 이들의 시초로 본다. 이들은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사르마트 같은 유목민들과 꾸준히 통혼하면서 오늘날의 체르케스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10세기 서북캅카스의 체르케스인 부족연맹이 크림 반도와 인접한 타만 반도에서부터 오늘날의 투압세(Туапсе)시와 인접한 네쳅수호(Нечепсухо)강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다. 부족연맹은 흑해 동부 연안의 샤차(Шъачэ, 현 소치)를 수도로 삼아서 아더가 하쿠(Адыгэ Хэку) 또는 체르케시야(Черкесия)라는 국가형태로 발전했다. 체르케스인들은 서기 6세기 이전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웃 나라인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는 다르게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아더가 하브자'라 불린 토속 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했었다. 15세기에 이들은 이슬람계 크림 칸국의 약탈과 노예 사냥을 막을 목적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크림 타타르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이들을 침략했으며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노예가 되었다. 특히 체르케스인들 중에는 미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의 하렘에도 체르케스 여성들이 많이 들어갔지만[2] 체르케스인들은 맘루크 왕조의 맘루크로 더 유명했다. 크림 타타르족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크림 타타르족의 선조인 쿠만족들이 이들을 계속 습격하고 약탈하여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중동에 노예로 팔려가 노예 군인 맘루크가 되었다. 흑해와 캅카스의 출신 맘루크들은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대패시켰으며 아크레야파의 십자군 잔여세력을 전멸시켰다. 체르케스 맘루크들은 이집트에서 부르지 맘루크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노예 사냥에서 살아남은 16세기 체르케스 부족연맹은 루스 차르국이반 4세와 결혼 동맹을 맺고 타타르인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체르케스인들은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을 공격하던 루스 차르국에 지원군을 보내 이 지역들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데 기여하였으나, 이는 순망치한이 되었다. 물론 당시 체르케스인 입장에서는 동쪽에서는 사파비 제국 서쪽에서는 크림 칸국으로부터 약탈을 당하는 와중이라 이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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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케스인 촌락을 공격하는 카자크[3]
18세기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체르케스인들과 이들이 거주하던 체르케시야 지역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곳의 광활한 자연과 이국적인 체르케스 문화가 러시아 군 장교로 복무하던 러시아 고전 작가들의 정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베트남전 관련 영화가 많은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제국과 체르케스인들과의 전쟁은 실제로 체르케스인 입장에서 매우 참혹한 재앙이었다. 1763년부터 1864년까지 거의 1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체르케스인 400만명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고 오스만 제국으로 난민이 되어 흩어졌다.[4] 1804년~1813년, 그리고 1826~1828년부터 러시아 제국이 카자르 왕조와 벌인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러시아가 캅카스 전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카자르 왕조 시절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복수한다는 명분하에 정작 기독교인을 별로 괴롭힌 적도 없는 체르케스인들을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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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5일 이맘 샤밀의 항복
1859년 다게스탄 김리 출신의 이맘 샤밀(Имам Шамиль, Imam Shamil)이 이끄는 최후의 체르케스인 저항 세력이 축출당하면서 약 60만여명의 체르케스인들이 러시아 제국군의 학살 및 난민 생활 와중에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결국 1864년 캅카스의 체르케스인 생존자들은 러시아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캅카스 지역의 체르케스인들은 백년간의 전쟁 동안 인구가 4분의 1로 감소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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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케스 무슬림 여성들은 여러 러시아 문학가들의 소설에서도 매력적인 미인으로 묘사되곤 했다.

5.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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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케스인 학살과 강제추방에 대한 추모 행사를 벌이는 요르단의 체르케스인들
총 인구수는 최소 400만 이상으로 추산되나, 본래 터전인 러시아 영내의 북캅카스 지방엔 72만여 명만이 거주하고 있고, 대부분은 주로 터키(최소 100만)나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등의 중동 국가들에 거주하고 있다. 요르단 왕국의 체르케스인들은 기골이 장대하다는 이유로 왕실 근위대로 활동한다고 한다. 이라크 등에 거주하던 체르케스인들은 오늘날 독일 등으로 망명을 가는 편이라고 한다. 원래 북캅카스 산지 지역에서 부족 단위로 나뉘어 살고 있다가, 17세기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18-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전쟁을 거쳐 체르케시야 지역을 정복한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체르케스인들은 터키로 추방당하거나 학살당했다. 2010년 통계 기준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체르케스인 인구는 0.3%에 불과하고, 아디게야(25.8%)나 카라차이-체르케시야(11.9%) 내에서도 소수민족이다. 다만 카바르디노-발카리야(57.2%)에서는 체르케스인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

5.1. 이스라엘의 체르케스인




[1] 카라차이-체르케시야에서는 인구의 12%, 카바르디노-발카리야에서는 인구의 3%가 이 종교 신자이다.[2] Circassian beauties.[3] 왼쪽에 검은 색 털모자와 제복을 입은 병사들[4] 심지어 오늘날의 시리아와 요르단, 이스라엘에도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