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역사

 


1. 고대
2. 중세
3. 근대
4. 현대
5. 관련 항목


1. 고대


기원전 9000년 무렵에 아나톨리아에서 사람이 넘어가 석기 시대 문화가 생겼으며, 원시적인 도시 유적도 발굴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독자적인 문자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넘어오면서 그리스 초기 문명인 미케네 문명과도 관계를 맺고, 성경에도 배경 지역으로 등장한다.
대체적으로 그리스-동로마 문화권이었으나 레반트와 인접한 위치에 교통의 요지라는 점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었는데 아시리아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로마 공화정 시절에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 선물로 이 섬을 떼다 주기도 했다. 이후 다시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2세기에는 대규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었다. 대체적으로 올리브유와 포도주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2. 중세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등을 상실했고 키프로스도 650년경 이슬람의 침입을 받았다. 688년 동로마와 이슬람이 키프로스를 300년 간 공동으로 지배한다[1]는 내용의 전례 없는 조약을 체결한다. 그 뒤로 서로 대립한 두 세력도(특히 717-718년의 콘스탄티노플 포위전) 이 조약만큼은 잘 지켰다. 조약 체결 직후 동로마 제국이 섬 대부분의 지배권을 얻었으나 조약은 파기되지 않았으며 동로마 제국이 섬을 완전히 손에 넣은 건 약속된 300년의 기한이 거의 지난 965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964~965년 동로마의 킬리키아 탈환의 직접적인 결과였는데, 킬리키아 지역이 키프로스와 가장 가까운 육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200여년간 다시 로마령으로 있다가,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폐위 및 앙겔로스 일가의 제위 장악 등 중앙정부의 혼란상으로, 키프로스의 지배자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2]가 독립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사키오스는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키프로스에 표류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고 물자를 약탈했으며 리처드의 누이까지 포로로 사로잡으려 해서 리처드 1세를 극도로 분노하게 했다. 리처드 1세가 포로와 물자 반환을 요구해도 이사키오스가 듣지 않자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영토로 삼았다.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 왕위를 놓고 다투던 중에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지원을 받기 위해 리처드 1세가 뤼지냥의 왕위를 빼앗아 콘라드에게 주는 과정에서 보상으로 키프로스를 뤼지냥에게 주었다. 이후 뤼지냥 왕가는 키프로스 왕국을 세워 200년 간 키프로스를 지배했다.
키프로스 왕국의 인구 대부분은 그리스 정교회 신도였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이른바 라틴인들은 키프로스 인구의 4분의 1을 넘지 않았으며 주로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프랑크 기사와 귀족들은 대부분 니코시아에 살았고 이탈리아 상인들은 파마구스타에 몰려있었다. 1270년대부터 1280년대 십자군 국가가 맘루크 왕조의 침공으로 수세에 몰리고 최후의 보루였던 아크레마저 함락당하자 십자군 패잔병들이 키프로스로 몰려들었다. 십자군의 보조부대로 봉사하던 마론파아르메니아인,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리아인 일부도 이 당시 키프로스로 피난하였는데 이들에게는 산기슭을 개간하고 정착할 권리가 주어졌다.
키프로스 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조금씩 종속되다가 1489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 합병된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 기지로 여기며 착취했다. 1571년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다시 오스만의 영토가 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터키계가 이주했다.

3. 근대


오스만 제국 시절 키프로스에는 키프로스 원정 당시 원정에 참가했다가 정착한 군인들과 토착민의 후손들이 함께 거주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초기에는 중과세에 항의하여 이 원정군과 토착민이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키프로스의 무슬림과 정교인들은 마을별로 모여 살았으며, 비록 종교는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했다. 이후 민족 의식을 각성한 키프로스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독립 전쟁의 영향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이것을 진압하면서 양측이 갈등한다.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영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했다.[3] 그나마 명목상 오스만의 속주였으나 실질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의 경우처럼 세금의 일부라도 계속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도록 했지만 영국이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갚지 못한 부채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거부해서 형식적으로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어버린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자 정식으로 합병된다.
키프로스에서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은 '에노시스' 운동이었다. 에노시스(Ένωσις)란 그리스어로 '하나되기', '통합'을 뜻하는 단어인데, 에노시스 운동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을 만들자는 스상이다. 1898년에 크레타가 크레타 정부(Η Κρητηκη Πολιτεία)로 독립했을 때도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두개의 국가는 있을 수 없다며 크레타 정부와 그리스 왕국의 합병을 주장했으며 결국 크레타 정부는 그리스에 합병되는 식으로 사라졌다.[4] 키프로스에서도 에노시스 운동이 일어났다. 1923년 터키 독립전쟁 때는 터키군이 이 지역을 재정복하려 하다가 국력의 한계로 인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대국민회의에서 영국과 협상을 벌여 이 지역을 포기하기로 타협했다. 아타튀르크는 키프로스가 독립할 경우 터키 본토에서처럼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터키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영국과 합의하고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민족주의자들은 키프로스가 그리스라고 주장하면서 섬 전체에서 파업과 강력한 투쟁을 했다. 에노시스 운동을 최초로 주장했던 그리스 최초의 대통령 이오아니스 안도니오스 카포디스트리아스(Ιωάννης Αντώνιος Καποδίστριας, 1776~1831)의 조상이 키프로스인이었다는 것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5] 키프로스 가문 출신이 그리스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키프로스는 곧 그리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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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국기를 걸고 시위하는 키프로스인들 (1930년, 현수막에 쓰여있는 글자는 '통합 만세!' 라는 뜻이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키프로스인들의 움직임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키프로스인들이 조국으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영국은 키프로스를 딱히 진압할 만한 구실도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그리스로의 병합 요구는 더 거세졌다. 1950년 1월 15일부터 22일까지 있었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5.7%가 독립이 아닌 그리스 왕국으로의 병합을 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노시스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요구 사항이었으며 섬에 거주하는 터키계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터키계 주민들은 아타튀르크가 키프로스를 포기하겠다고 영국과 협상한 순간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과 협조하려고 했다. 이미 터키계 주민들은 터키 독립전쟁 이후 그리스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이 재산을 모조리 압류당하고 터키로 추방당한 것을 보았고, 그 이전에 크레타가 독립했을 때도 섬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은 모조리 추방당했다. 때문에 터키계 주민들은 그리스계를 적대했다. 결국 로국은 1960년 키프로스를 그리스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않고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독립시켰다.

4. 현대


초대 대통령이자 정교회 사제기도 한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1913~1977)는 독립 전에는 열렬한 에노시스 지지자로서 에노시스 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이었으나 키프로스가 독립한 후에는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공존을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면서 터키계들에게 관대하게 대우하면서 키프로스에서 이슬람인 자치 구역을 허용하고 이 구역에선 자유롭게 권한을 행사하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독립 직후에는 터키계나 터키에서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고 꽤 평화롭게 지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그리스계가 점차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그리스계 주도 하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섬 전체에 흩어져서 그리스인들과 같이 지내던 터키계 주민들은 점차 게토화되기 시작했다.다농경지가 많은 섬 북쪽 지역에서 쫓겨나 키프로스 정부가 지정해주는 곳으로 옮겨 살았는데 터키계 주민들은 전부 구릉 지대나 고원 지대로 옮겨져 버린다. 터키에서는 키프로스의 터키계 주민들이 핍박받는 것이 언론을 탔으며 그리스계와 터키계, 나아가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계 강경파들의 반발로 군사 반란이 벌어졌고 여기에 그리스 군사정권이 자국의 독재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돌리고 키프로스를 합병하고자 1974년 7월 13일, 군대를 보내어 마카리오스 대통령을 그리스 민족주의를 침해한다는 근거없는 죄로 축출하고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 - 1935~2001)을 대통령으로 앉혀놓았다. 터키는 터키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7월 20일 파병을 시작했고 그리스계 구역을 폭격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터키군이 빠르게 쳐들어오면서 당황한 키프로스군이 아군인 그리스로부터 들어오던 수송기를 격추시켜 버리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키프로스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터키는 영국군이 파병한 아야 나파 지역을 제외한 곳을 재빠르게 장악했다.
이전에 터키군의 침공을 두고 그리스나 키프로스 측은 터키군 따위는 자발적인 시민군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다. 정작 그 시민군은 터키군의 초반 폭격으로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기고 달아났다. 무장과 병력 수, 모든 것에서 불리한 일개 시민군이 터키군을 막을 순 없었다. 미국과 유럽이 중재하여 터키군이 일부 물러났으나 불과 한달도 안되어 키프로스는 1974년 8월 중순,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 패배로 그리스 군부 독재도 끝나고 민주화를 이루었다. 남키프로스는 뒤늦게 마카리오스를 다시 대통령으로 앉히고 마카리오스는 북키프로스로 가서 다시 키프로스를 합치고 과거처럼 지내길 요청하지만 그리스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로 터키계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마카리오스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난다. 1983년에는 북쪽이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고 분리를 선언하지만 터키 이외에는 인정하는 국가가 없었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으로 쳐들어 오자 터키는 레바논에 거주하던 이슬람인들이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바로 북키프로스로 대피시켜 정착하게 했다. 덕분에 북키프로스에선 아랍계와 다양한 이슬람 거주민들이 대거 늘어났으며 이들의 거주로 아랍 연맹에서 키프로스를 신경쓰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아랍 연맹을 키프로스의 갈등에 끼어들게 한다고 비난했으나 터키는 아랍 연맹과 우호 관계인 그리스가 레바논 피난민을 받아주지 않아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고 비난을 했다.
2008년 3월 수도인 니코시아를 나누던 분리 장막을 33년만에 해체했고 장막이 있던 레드라 거리에 터키계와 그리스계 공무원이 상주하는 가운데 개방되었다. 현재는 남북 키프로스인들이 여권없이 자유롭게 상대방의 지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분단 이전의 키프로스 국적을 보유한 그리스계, 터키계 키프로스인 당사자와 자손들에게만 해당되며 그 외에는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여권을 요구한다.

5. 관련 항목



[1] 이를 공동통치령(Condominium)이라고 한다.[2] 요안니스 2세의 아들의 딸의 아들이라서, 좁은 의미의 부계 콤니노스 일가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앙겔로스 가의 알렉시오스-이사키오스 형제 또한 알렉시오스 1세의 딸의 아들의 아들들이라서 서로 모두 친척이었다.[3] 1878년에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끝내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한 영국, 독일 제국 등이 개입하여 러시아가 오스만에 강요했던 조건들을 일부 완화하거나 폐지했다.[4] 당시 크레타 정부의 수반이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부터가 오스만 제국 시절 크레타 의회의 의원이었을 때부터 강력한 에노시스 지지자였다(...) 그리고 이후 베니젤로스는 그리스로 건너가 그리스 총리로 활약, 발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크레타를 조국의 품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한다.[5] 정확하게는 모계국으로 키프로스 혈통이다. 카포디스트리아스 본인은 이오니아 제도 코르푸 출생으로 부계는 베네치아 공화국 카포디스트리아 출신의 그리스화된 베네치아 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