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1. 개요
2. 원인
3. 종류
4. 유목 대상
5. 고된 유목생활
6. 현재
7. 전통
8. 유목민의 특징
8.1. 전투력
8.2. 민족적 개념
8.3. 혈통에 대한 집착
8.4. 음식
8.5. 문자
8.6. 취수혼등 성문화
9. 세계의 유목민
9.1. 유라시아 대륙
9.1.1. 아시아
9.1.1.1. 중앙아시아
9.1.1.2. 동아시아
9.1.1.3. 북아시아
9.1.1.4. 서아시아
9.1.1.5. 남아시아
9.1.2. 유럽
9.1.2.1. 중부유럽
9.1.2.2. 동유럽
9.1.2.3. 남유럽
9.1.2.4. 북유럽
9.2. 아메리카 대륙
9.3. 아프리카 대륙
9.3.1. 북아프리카
9.3.2.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
9.3.3. 동아프리카
9.3.4. 남아프리카
10.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것들
11. 관련 문서


1. 개요


'''유목'''('''''', nomadism)은 가축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이가 될 풀밭을 찾으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 활동을 말한다. 양치기카우보이와도 겹치는 부분이 크다.

2. 원인


유목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장소에서 가축에게 풀을 뜯게 하다 보면 건조한 스텝이나 사막 지대에서는 풀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대지역마냥 비 한번 내려서 풀이 우후죽순 자란다면 이럴 필요가 없겠지만, 애초에 그런 열대지역에서 목축을 할 이유가 없다.[1] 처음부터 척박한 지대에 살아서 유목민이 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일부 유목민은 농경민 또는 수렵채집민이었다가, 이나 낙타 등 유목에 유리한 대형 가축을 도입하거나, 살던 지역이 황폐화되면서 별 수 없이 유목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가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유목민들이나 우량카이족[2], 카자크[3]이고, 후자의 경우는 베두인이나 고대 유대인[4]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대항해시대 이후로는 기존의 농경민이 타 대륙으로 이민을 간 뒤에 정착지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유목민이 된 사례도 있는데, 이 경우는 남아프리카공화국보어인이나 미국카우보이, 남아메리카가우초가 대표적이다. 이들이 유목민이 된 원인에는 주 거주지가 농업에 불리한 환경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다만 대형 가축의 도입 시기와 같은 몇몇 역사적 요인에 따라[5] 유목 생활에 적응하게 된 시기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열대 지방같은 비옥한 환경에는 유목민이 없으며, 이런 지역은 목축업이 주된 산업도 아니다. 냉대 기후온대 기후라도 독일이나 한반도같이 농업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농경 생활이 도입되지 않은 지역에서 수렵채집인 생활이 이어지다가, 농업 기술이 도입되는 순간에 바로 농경민이 되는 식이었고, 이런 곳은 유목 생활을 할 메리트가 전혀 없었다.[6]

3. 종류


학문적으로 볼 때 유목은 크게 Nomadism과 Pastoralism으로 나뉜다. 한국어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전자의 경우 일정한 장소없이 물과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하는 형태의 유목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정해진 거주지가 있으면서 여름과 겨울, 혹은 일정 시기마다 정해진 목축지를 오가며 이동하는 형태로 유목과 정착식 목축의 중간적인 성격이다. 교과서에서는 전자를 '''유목'''(遊牧), 후자를 '''이목'''(移牧)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뤽(Yörük)이라 불리는 터키의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산악지대에 올라가서 양과 염소를 치고, 겨울에는 하산해서 헛간 같은 곳에 양과 염소를 키우면서 여름내 만들어두었던 건초를 주는 식으로 유목을 한다.
전자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알려져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베두인들의 경우 자신의 부족들이 공유하는 여름 목축지와 겨울 목축지, 봄 목축지를 순회하면서 목축을 한다. 이는 딱히 영역의 구분이 없는 몽골, 투르크멘 유목민들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며, 몽골도 야크를 기르는 경우에는 유목이 아닌 이목을 한다.
[image]
여름이 되어 산악지대로 이주하는 요뤽 유목민들의 모습

4. 유목 대상


초원지대에서는 의 조합을 선호한다. 사막 지대에서는 낙타를 선호하기도 한다.
사헬 지대에서는 를 선호하며 툰드라에서는 순록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런 유목민들은 기마 유목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5. 고된 유목생활


'''"용사는 화살 한 발에, 부자는 한파 한 번에 끝장난다."'''

- 몽골 속담

로망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유목 생활은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유목을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그 소중한 가축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일이 빈발하다. 몽골에서는 이런 한파를 조드(Zud)라고 부른다. 기온만 떨어지는 블랙 조드는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지만, 눈이 목초지를 덮어버리는 화이트 조드 때는 유목민 재산 1호인 가축들이 고스란히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병들어 죽어 유목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대기근을 겪는다. 유목 생활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는 과거의 영화를 자랑한 몽골이 현대에도 나름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30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사실 영토만 클 뿐 농경민족이 이미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상황에서 그들은 변방의 사람이 살기 힘든 땅에서 활보한 것일 뿐이며 인구 수와 문화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되었다. 물론 이는 약간 편견도 있는데, 초원길은 주요 무역 루트였고 유목 민족들의 주변에 이란이나 중국처럼 부유한 농경 제국들이 존재하여 이를 기반삼아 대상들을 털며 도적질하며 살아가던 유목민들도 있어서 생각보다 부유한 유목민들도 존재했다. 유목민들의 생산력은 낮아도 이게 자산을 털어버리는 짓거리[7]라 유목민족들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유목민들 무장이 생각보다 중무장인 것도 고증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농경은 바로 고구려만주에서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만주보다 한반도, 특히 대동강유역의 평안도 지역에 집중한 이유이며,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차지하고도 오히려 중국의 문화에 휩쓸린 가장 큰 이유이다. 농경민족의 경우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한 방어선의 확립이나 군주의 정복 욕심에 대외정벌을 한 경우가 큰 데 비해[8] 유목민족은 정말 살기 위해 농경민족을 약탈하려는 목적으로 침략한 것이기에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 것이다.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는 만주가 그런 경우인데 공업과 상업이 발달해서 과거에 쓸모가 없었던 영토들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근대가 되기 전까지 이 땅은 차지해도 이득이 적고 손해가 많은 땅일 뿐이었다.[9] 특히 기후를 많이 타는 쌀농사. 현재 만주 지역에서 좋은 쌀이 나오는 곳은 지열 덕에 그나마 쌀농사가 편한 것으로 이마저도 대부분 구한 말 이후 조선사람이 건너가서 개척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현재 주로 생산되는 작물인 옥수수감자는 당시에는 없었다.

6. 현재


유목민의 직접적 후손을 자처하며 현대에 와서도 유목생활을 일부 유지하는 민족으로는 몽골족튀르크족 계열의 여러 민족 및 베두인족,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및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여러 민족[10] 등이 있고, 유목민 중심으로 현대적 국가를 형성한 나라로는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인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 있다. 그렇다고 ~스탄이 모두 유목문화권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은 먼 옛날에나 유목 문화권이었지 지금은 정주 농경 문화권이다. 공산주의 시대에 유목생활은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도 떠돌아다니며 유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들에는 적지 않다. 당장 몽골만 봐도 유목이 엄연히 1차 산업의 주류이며[11], 몽골에서의 시골은 농촌이 아닌, 곧 유목 지대를 의미한다.
몽골계와 튀르크계로 대표되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현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인 베두인족과 베르베르족, 투아레그족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은 애초에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녔던 곳이 국경으로 지정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단 통행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 되었지만 이것은 유목민족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할힌골 전투의 발단도 이런 갈등으로 발생한 셈. 유목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던 북방 영토가 소련이며 만주국이며 몽강국의 국경으로 나뉜것은 유목민의 사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그 밖에 마사이 족도 일부 유목생활을 하고 몽골이나 터키나 유라시아나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부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 유목민의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왜냐면 유목민들이 살고있는 해당 국가들의 정부가 정착하여 살기를 권장하고, 직업도 도시에서 구하는 데다 고된 생활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기 때문에 결국 유목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 또한 낙농업자와 목축업자들이 땅을 사서 농사와 목장을 짓는 곳에 유목민을 직원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유목의 역사가 늦어서 빨라도 16세기경부터 유목 생활을 시작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12], 유목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 하필이면 산업 혁명기와 겹치게 되면서 자신들의 땅에 철도를 놓으려던 미국인들과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13] 그래서 북아메리카 유목민들은 철도의 설치로 인해, 유목의 대상이던 들소가 열차와의 충돌로 인해 폐사하거나, 철도 공사를 명목으로 원래의 영토에서 추방당하는 등의 피해를 당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운동도 많이 일으켰다. 19세기 후반의 리틀 빅혼 전투나, 아파치족들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수우족을 포함한 몇몇 부족들에 의해서 유목생활의 흔적은 보존되었으나, 20세기를 전후해서 유목생활 자체는 전부 중단되었다.[14]
남아메리카 역시 이 처음 유입된 16세기 이후부터 이른바 가우초라고 불리는 유목민이 등장했는데, 본래 남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백인 무법자, 탈주한 흑인 노예 등, 남아메리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15][16] 이쪽도 유목 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서 20세기경에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유목을 거의 포기했다. 애초에 농사짓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면서, 유목 생활의 메리트가 비교적 줄어드는 요인을 무시할 수가 없다. 다만, 농경문화가 기본적으로 소작농이나 피고용인 같은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소가 다소 있기에, 유목을 포기해야 하는 심적 거부감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가우초들은 20세기를 전후해서 대부분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정주민이 되었는데, 이렇게 정착해서 농경민이 된 가우초의 대다수가 대지주들의 밭을 임대해서 부쳐먹는 가난한 소작농이 되거나, 대기업 소유의 농지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현재는 적잖은 수가 유목을 포기하고 정주 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가우초와는 달리, 많은 수가 아직도 유목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가우초들이 사는 아르헨티나남아메리카 최대의 농업국인데 반해, 중앙아시아 지역은 대다수가 사막화가 극심한 곳이라서 농경 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적지 않을 뿐이다. 사실 이곳의 유목민들의 상당수가 정주민화된 이유는, 소련 시절에 당국에서 유목 생활을 금지하거나, 유목민들을 대거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행위를 마구 저질렀기 때문이다.
중국의 내몽골 등 유목민들도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있는데, 가축들을 먹일 풀밭이 국유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땅값을 감당 못하고...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유목민들이 유목을 하고 있다.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툰드라 지역은 워낙 춥고 척박해서 농사는 커녕 포경, 수렵, 유목, 어업으로 먹고사는 곳인데다 경제권에서 거리가 멀어서 개발을 할래야 할 수가 없기 때문. 이곳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어업, 유목, 수렵에 종사하기보다 도시로 나가서 직장생활 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유목에 종사하는 유목민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
몽골의 최북단에는 유목민 일부가 남아있다고 한다.
EBS 다큐, 인류 원형 탐험 - 봄, 샤먼의 초원 몽골 다르하드족(Darkhad)


7. 전통


유목민들 대부분이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 유목민족이 사는 땅들은 대체로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땅이 많기 때문에 식당이나 호텔 같은 숙박업소 따위가 적재적소에 있을 리도 없고, 내가 도와줘야 다음에 내가 어딘가를 여행할 때도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상부상조 격의 행동으로, 광활한 땅을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한 상호간의 생존수단으로서의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유목민들의 삶은 대체로 각박한 데다 거칠었고[17], 이 때문에 각 부족 간의 대립과 분쟁, 약탈 역시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손님을 환대하거나 설령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손님을 공격하는 것을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기는 유목민들의 전통은 이런 상시적 대립 속에 있는 사회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손님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다수의 전력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부족의 영역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될 테고, 타 부족 간의 교류 역시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려워질 것이며. 이 때문에 결국은 부족사회 자체가 붕괴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이에 더하여 보통 폐쇄적이고 고립된 부족 중심의 사회에서 손님은 외부의 정보와 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였다는 점 역시 손님을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 자세한 분석은 접대의 관습 항목을 참조 해보자.
물론 각박한 현대사회에는 아무리 유목민족의 후예들의 나라들이라고 해도 이런 개념이 다소 약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도시를 벗어나면 현재도 꽤 통하는 편이다.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동베두인이나 투아레그족 등의 유목민 천막에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인 여행자가 대뜸 찾아가도 따뜻한 차와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식사, 천막 상석의 잠자리를 공짜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쉬다 가라고 잡아끄는 경우도 많다.[18]
물론 히치하이킹 등이 그렇듯 강도와 '''인신매매'''의 위험 때문에 대놓고 강추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풍습이 있는 것을 알고 몽골 서부의 버스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시골에 가서 한 달 동안 이렇게 공짜로 먹고 자면서 여행한 한국인 블로거도 찾아보면 있다. 몽골어 한마디 못 해도 가능하다. 이렇게 선뜻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유목민족에 따라 호의를 금전적 관계로 해석하는 실례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현지인 쪽에서 당당히 1박만큼의 대가를 원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서 가령 몽골 같은 경우 도시화나 현대화가 많이 된 곳일수록 돈을 받거나,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평범한 유목민 천막에서는 돈을 줘도 안 받으려 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어쩐지 목축(牧畜)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링크를 참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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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쉬라즈에서 유목을 하는 투르크계 민족 카슈카이족
보통 유목을 하는 사람들은 옷차림도 남루하고 화려한 것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도 많다. 하지만 실제 유목민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의상을 좋아한다. 특히 베두인과 같이 정해진 영역이 있는 유목민들은 대상(隊商, caravan)에 종사하거나, 잉여생산물을 인근의 정착민 마을에 내다팔아 사치품을 교환하는 식으로 상업도 겸했기 때문에 의외로 부유하다. 당연히 유목민들도 사람인지라 부유한 생활을 싫어할 리 없고, 단순 유목만으로는 국력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많은 유목민족들은 상업을 중시했다.[19] 게다가 유목민들은 정주민에 비해 집이나 가구 등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가 더 비중이 크다.[20] 유목생활을 하면 귀중품을 보관할 만한 잘 보안된 영구 거처가 없으므로 차라리 평소에 전재산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게 낫기도 하고.
허영만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연재할 당시 작품에 나오던 몽골 및 유목민들 귀부인 여성들 옷차림이 화려한 것이나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게 오류라고 주장하는 글이 여럿 있었다. 때문에 이 책 단행본에서 허영만이 몽골 취재로 가서 직접 찍은 울란바타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당시 여성 귀부인 사진을 싣으면서 유목민이 화려한 옷차림이나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건 편견이라고 일침을 가했다.[21]
신부 이야기에 나온 실제 아제르바이잔 쪽 유목 여성 옷차림 그림도 실제 옷차림을 보고 그린 것이다.

8. 유목민의 특징



8.1. 전투력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이들은 사냥과 말에 익숙한 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유목민들은 척박한 땅에서 맹수들을 상대하고 다른 유목민 부족들의 침공을 방어해야했기에 가족과 가축을 지키기 위한 승마술과 사냥술(궁술)이 생존을 위한 기본 수단이 되는 관계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기마 병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말타기나 사냥을 넘어 완전히 군사적 훈련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이 기병이라는 병과가 탄생시점부터 기관총전차가 등장하는 1900년대 이전까지 인류 최강의 전투 병과였다. 농경 민족은 이런 수준의 전사를 농사짓던 사람들 무장시킨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직업 군인을 양성해야 했다. 거기에 오늘날 소총수 훈련은 2주에서 4주면 끝인 데 반해, 고대에는 기마병을 훈련하는 데 최소 수년이 걸렸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궁병을 기르기 위해 걸리는 훈련 기간이 수년이 걸렸다.
반면 유목 민족에게 승마술과 사냥술은 일상생활이기에 전원이 궁기병이었다. 그로 인해 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유목민들의 군사적 역량은 위협적이었다. 규합하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규합만 했다 하면 정말 소수의 유목민에게 압도적으로 다수인 농경 제국이 매번 탈탈 털리기를 반복했다. 더구나 강력한 무력을 생산하기 쉬움+생산력이 떨어짐 이 두 가지 요소가 겹쳐서 대부분은 약탈민족[22][23] 성격도 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국들이라서 더 불리한 점들도 있었는데, 우선 영토가 너무 넓으면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워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교통·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싸우기도 전에 행군하다 보급이 끊기거나 토질병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은 역청야전술로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켜서 완전히 맥이 빠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처럼 바다를 끼고 옆에 광활한 지형이 적은 곳은 드물었고, 다른 지역의 세력이 침공할 목적으로 지도를 살피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기에 유럽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평야가 많은 다른 지역들은 개털렸다. 유목민들은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시무시할 만큼 극도로 성장하며 이것은 게르만족조차도 밀어버려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킨 훈족의 성장이나 거란, 몽골 제국 등 유목민족의 중국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졌다. 특히 몽골 제국의 경우 칸국들까지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중부 유럽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고대에 그들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개활지에서는 기병에게 더더욱 답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험한 지역에 주요 도시를 건설하는 민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경제력과 기술력 덕분에 건설한 크고 아름다운 성벽만을 본다면 인구와 병력이 엄청나 보이지만 막상 근대 이전까지는 병력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사훈련 및 장비에 드는 비용, 보급 문제까지 감안한다면 동원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최근과 꽤 가까운 시대이며 인구가 많았던[24] 명의 수도나 주요 도시마저 50만~100만 정도의 인구를 넘는 곳들이 거의 없었고, 총력전 이전까지 동원 가능한 병사가 인구비 1/100임을 감안하면 정주민의 군대가 유목민족보다 압도적인 물량을 과시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페르시아도 고작 만 명에 불과한 불사 부대의 활약이 컸다. 다른 예로도 명나라도 장부상으로는 330만 대군을 자랑했지만 임진왜란이나 명청전쟁에서 조선의 기록을 보면 병력이 장부보다 훨씬 적었다. 명나라 말기긴 해도 임진왜란 역시 적지 않은 돈을 사용한 큰 전쟁이었는데도 그렇다. 일본군 역시 임진왜란 때가 일본사로 봐도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쟁이었는데 그게 최대 20만 명이었다. 과학기술의 한계로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제대로 된 병력이면 그게 고작 만 단위라고 해도 적지 않은 숫자였을 수 있다.[25] 인도사 역시 그리스인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한 전쟁을 보면 진짜 농민들을 끌고 오지 않는 이상 그들 병력이 생각보다 적다.
위의 이유로 인해 유목민족은 정주민의 군대를 대등하게 상대하거나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기병 자체가 무장을 불문하고 일반 보병보다 우위를 점하기 쉬운 병종인지라, 무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병법에 따라 단순 전력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압도적인 전력을 투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세운 민족들 역시 정복이니 개척이니 하고 다녔던 상대들이라 생각보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며, 유목민족이 제아무리 기병 중심, 인구비례 병사 비율이 높았다고 해도 워낙 무장이 빈약했기에 정주민의 영토를 정복하지 못할 경우 결국 패배를 맛보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대통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중장기병같은 근접전에 특화된 병과 운용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26], 의외로 작정하고 나서는 정주민 군대에게 패배한 기록이 꽤 많다. 흉노, 오환, 돌궐 같은 유목 제국을 건국한 유목민족들도 결국 중국의 통일왕조에게 패배하여 무너진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전쟁에서 대패할 경우 그대로 부족 전체가 몰락하기 일쑤였다. 파르티안 샷이나 스웜 전술은 정주민 군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정주민 군대가 만만치 않은 기병전력을 갖추거나, 혹은 공성전같이 기동력 발휘가 어려운 전장에서 싸울 경우 유목민들의 기마부대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들은 대제국[27]을 건설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흉노가 그 시작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5호 16국 시대, , , 몽골, 과 같은 유목 제국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혼란기와 자신들의 팽창기가 겹쳤으며, 이 시기 정주민의 땅을 비교적 빠르게 점령하여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면서 경기병뿐만 아니라 중장기병들까지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을 정복한 것 역시 유사한 상황. 따라서 대개 어떤 지역의 제국을 깨뜨린 유목민들은 거의 세계 최강으로 봐도 될 정도였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박살을 내고 다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다만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돼 버리는 일이 흔하다. 원래부터 인구도 적은 데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어서 농경민족의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접하고 급속도로 동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민족성을 유지하겠다고 온갖 정책으로 막으려 들어봤자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 전체를 통제할 수도 없고 군주제의 한계 때문에 군주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거나 하여 결과적으로 패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먹혀버리기 일쑤. 동아시아, 특히 중국한반도의 역사는 농업이 정착된 후 이들 유목민족을 막거나 먹히는 역사로 점철돼 있다. 요나라, 원나라가 모두 이들의 역사이며 이들 민족의 기마 부대는 언제나 공포로 군림해 왔다.[28]
또 유목민족은 빠른 성장만큼이나 쇠퇴도 빨라서 거란의 경우 북송금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원나라도 그 엄청난 영토를 생각하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심지어 대제국을 이룬 청나라도 불과 100년 만에 자기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튀르크족 역시 한때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내어줬을뿐더러, 유목민들 중 거의 유이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된 마자르족불가리아인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유목민족인 수우족 역시도 리틀 빅혼 전투 이후로는 상당수가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았다.
심지어 근대 이후에도 기병들은 강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베두인 기병으로 오스만 제국의 근대적 요새들을 점령하기도 했다. 물론 이 양반은 영화 등에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아랍 부족들이 말 타고 설치며 영국군이 오기도 전에 오스만 군을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내는 활약을 했다. 이븐 사우드가 고작 40명의 병력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병빨이 좀 있다. [29]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창기병 같은 고전적 기병들도 활약했다. 기병 문서 참고.
유목민족들의 전투력의 비결과 원리,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해서는 스웜 전술 문서를 참고하자.

8.2. 민족적 개념


인구 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혼인 상대를 찾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 특징과 결속이 나타난다.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 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유목 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몽골의 역사와 국가 체제만 살펴봐도 이런 흔적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유목 국가의 흥망이나 부족 간의 항쟁, 기후변화 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된 탓에 고대 시절 갑툭튀해서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가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구대륙의 구석에서 살며 서로 피가 좀 많이 섞일 조건이 되었던 민족들이 아니면 농경 민족들도 이런 문제들이 좀 있다.
하지만, 농경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웬만하면 떠나지 않기 때문에[30],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인구 이동이 매우 드물었던 터라, 이런 문제가 유목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할 뿐이다. 단적으로 전형적인 농경민인 독일인만 해도 외국계 귀화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이 백인들 천지인데다 언어적으로도 모두 독일어를 쓰는 식으로 통일성이 짙다.
그에 반해, 본래 유목민이던 튀르크계 민족들은 똑같이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쓴다는 점만 제외하면, 야쿠트인[31]이나 키르기스인들은 거의 몽골인에 가까운 황인 외모인 반면에, 터키인이나 아제르바이잔인은 황인 외모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코카소이드계의 외형을 보여주는 식의 차이가 있다. 하플로그룹 상으로도 전자가 원시 튀르크인이나 몽골족에 가까운 반면, 후자는 그냥 튀르크계 언어를 쓰는 그리스인이나 이란인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유목민들이 부족한 인구를 채우기 위해 타 민족으로부터 인력을 강제로 끌어오던 역사와 관계가 깊다. 그래서 같은 계통이라도 형질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8.3. 혈통에 대한 집착


위의 민족적 개념과 다소 모순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혈통 자체에 대한 집착은 농경민보다 더욱 강하다. 부족 단위로 결속을 나타내고, 법률이나 규칙을 따로 글을 통해 남기는 경우가 적다 보니, 그 부족 내에서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혈통 자체였기 때문이다.

8.4. 음식


혹독한 환경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보르챠육포(肉包) 같은 보존 식품이 발전하였다. 고기를 말등과 안장사이에 끼워두면 압축효과와 마찰열로 쉽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또 안에서 불을 피우는 천막이라는 주거형태와 최대한 알뜰하게 동물을 활용해야 했던 관계로 내장, 선지나 스튜 형태의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이런 음식 문화는 동유럽부터 한반도까지 남아있다. 한반도가 유독 탕#s-1 요리가 발달 한 것이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탓일지, 원래 한반도의 문화였는지, 몽골지배 시절 유행하게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농경 문화에서 나타나는 흔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천막에서 항상 불을 피우는 주거 형태는 증류주 제조에도 유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주도 원형은 몽골 지배 시절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가축의 젖을 이용한 각종 유제품이 발달하였다.

8.5. 문자


부족 규모의 공동체 특성 때문에 유목민은 자연스럽게 문자의 발명과 기록의 역사를 남기지 못한 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유목민들이 사료를 남기지 않은 관계로 세계사를 다룰 때 그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끼친 영향에 비해 비중있게 다뤄지지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다뤄지는 유목민의 기록들은 대부분 중국과 이슬람 같은 피정복자에 의한 사료뿐이다. 그렇지만 이도 유목민 나름이라서 원조비사 같은 기록을 남긴 몽골[32]이나 거란, 당항(탕구트), 여진, 돌궐, 만주, 티베트처럼 국가체제가 갖춰진 이후에 문자를 만든 유목민들은 많았고, 헝가리나 베두인처럼 진작에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유목민도 있었다.[33]

8.6. 취수혼등 성문화


지역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목민은 혼인 시 여자가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신랑 측 집안에서 대가로 많은 선물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신부는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관계로 한번 취한 신부는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들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娶嫂婚)의 전통이 많다. 취수혼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족 간의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목적, 과부가 된 여성의 생존과 인권, 또 유목인 공동체의 와해를 막는 등의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34] 이웃한 부족 간 관계는 대체로 험악했고 이를 혼인으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취수혼의 전통은 유목민뿐 아니라 알래스카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농경 문명에선 보통 여자는 노동생산력이 없으면서 식량소모가 늘어나기 때문에 여자 쪽에서 혼수를 하는 풍습이 많지만 유목민에겐 여성도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데다 인구생산이 더 절박한 문제인 관계로 반대의 풍습이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장남이 신부를 데려오면 이후 형제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결혼을 못 하거나 좀 하자가 있는 여성을 싸게 데려오든가 형이 죽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 나오고 만다. 다만 이러한 풍습이 이누이트에게도 있다고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데 유목민이라고 죄다 이런 게 아님을 알아두자. 이누이트 인들은 보수적이라 취수혼 같은 건 없었다는 건 아니라 극히 일부 지역, 남자가 적어서 자칫하면 그 부족이 아예 절멸할 상황같이 어쩔 수 없이 이런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이고, 이런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면 많다. 포르투갈이라든지 파라과이 같은 나라도 전쟁이나 여러 이유로 남자 인구가 너무 줄어서 이런 상황이 되면 노예같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줘 여자들과 맺어지게 했다[35]. 허나 몽골 제국 수립 이후 칭기즈 칸 본인의 어머니가 취수혼을 당해 혈통 논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 이 풍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내를 이방인에게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나 이는 터무니없는 낭설으로, 애초부터 유목민들은 남녀의 주거 지역까지 나눌 정도로 성문화에 엄격하다. 애초부터 이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나온 말이나 마르코 폴로는 동방에 왔는지도 불확실한 인물이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

9. 세계의 유목민


등의 가축을 타고 이동하면서 목축업을 주로 하는 유랑민만 언급하도록 한다. 가축이 끄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와 이목(pastoralism) 생활을 하는 이들도 포함한다.

9.1. 유라시아 대륙



9.1.1. 아시아



9.1.1.1. 중앙아시아

  • 키메르(기원전 12세기, 코카소이드 유목민): 후에 스키타이에게 쫒겨나면서 유럽으로 쫒겨간 일부가 켈트족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참고로 기록에 남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이다[36].
  • 스키타이/샤카족(기원전 8세기 ~ 기원전 2세기): 중앙아시아동유럽, 더 나아가 북아시아알타이투바 지역에 거주하던 페르시아계 유목민.
  • 튀르크(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서아시아, 서북아시아, 동유럽, 동남유럽. 몽골 못지 않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목 민족.
    • 카자흐족, 우즈베크족, 키르기스족: 중앙아시아. 모두 튀르크계 민족들이며, 몽골족이 확장하면서 같이 발전한 이들이다.
    • 타타르인: 동유럽,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사는 곳에 따라서 크림 타타르, 립카 타타르[37], 볼가 타타르[38], 시베리아 타타르[39]로 나뉜다.
  • 토하라인(기원전 21세기 ~ 서기 9세기):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타림 분지 일대에 거주했던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었다. 놀라운 점은, 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은 산스크리트어페르시아어 등이 속해있는 인도이란어파 계열의 언어를 쓰던 이들이었는 데 반해, 토하리족은 그들과는 계보상 거리가 멀고 오히려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과 같은 켈트계 민족이나,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같은 라틴계 민족과 계보상 깊은 연관을 지니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아직 켈트-이탈리아-토하라어파 설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 가설을 포함한 아르메니아 가설이 주류 학계에서 유력한 가설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40] 고대 흉노 연맹과 전쟁을 벌였던 월지는 고대 중국어로 “토콰르”를 음차한 것이라 한다. 9세기 이후에는 위구르족에 동화되어 소멸했다.

9.1.1.2. 동아시아

  • 갈족(4세기 ~ 6세기): 오호십육국시대에 나타나 활약한 코카소이드계 또는 황백혼혈계 유목민으로, 튀르크계나 인도유럽어족계 또는 예니세이어족계로 추정된다.
  • 저족(3세기 ~ 6세기): 사실상 반농반목에 더 가깝다.
  • 거란(4세기 ~ 12세기): 동아시아의 옛 유목민. 다만 일부는 지역에 따라 농업을 하는 부족들도 있었다. 현재의 다우르족들도 유목민에 해당된다. 이들이 바로 10세기 경에 요나라를 세운 이들이다.
  • 강족: 고대 토하라인 유목민으로부터 인도유럽어족 청동기 문화와 밀(식물), 말, 양을 전수받아 한족에게 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연 관계에 해당하는 저족과는 달리 현재도 중국 공산당이 공인하는 56개 민족들 중의 하나로 존속하고 있다.
  • 몽골: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목 민족으로, 지금의 만주 서부 지역에서 발원하여 몽골 고원으로 진출했다가 몽골 제국 시기에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나갔다[47].
    • 부랴트인: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몽골인들 중에서 러시아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북원의 멸망 후에 발흥한 몽골계 유목민인 오이라트인의 직계 후손들 중 하나다.
    • 오이라트인: 동아시아. 몽골의 허브드 지방과 오브스 지방에 주로 거주하며, 중국에도 간쑤성칭하이성에 일부가 거주한다. 위의 부랴트인과 아래의 준가르인칼미크인들이 이들과 갈라져 나온 자매 민족이다. 참고로, 영가의 난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최악의 굴욕 사건인 토목의 변[41]을 일으켰으며, 냉전 기간에 몽골의 지도자가 된 욤자깅 체뎅발이 오이라트 출신인 등, 중국과 몽골 양국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민족이다.
    • 준가르: 동아시아.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했던 오이라트계 유목민이다. 한때는 준가리아 칸국[42]을 건설하여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기도 했으나, 강희제 시기부터 건륭제 시기까지 진행된 준가르 원정으로 인해 패망하고 준가르 인구의 대부분이 학살당하면서, 오늘날에는 위구르 지역의 튀르크계 토착민인 위구르족이나 같은 몽골인 계통인 오이라트인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여담으로 몽골계 민족들 중에선 최초로 농경 생활을 시도한 이들이다[43].
    • 칼미크인: 동유럽. 몽골인 중에서 러시아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위의 준가르족과 마찬가지로 오이라트인의 직계 후손격 민족인데, 특이사항으로 유럽의 민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 민족이다. 이들이 주축이 된 나라인 칼미키야 공화국[44]도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다.
    • 차하르족: 동아시아. 몽골인 중에서 중국령인 내몽골에 거주하는 이들로[45],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과 도시에서 정주 생활을 하는 이들로 나뉜다.[46]
  • 선비족(기원전 2세기 ~ 서기 7세기): 고대 만주에 살았던 민족인 동호의 후신인 두 민족들 중 하나로[48][49], 기록 상으로는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유목 생활을 시작한 서기 2세기 경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주역이었던 민족들 중의 하나로, 이때 중국 대륙에 유입된 선비족 귀족들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당나라 초기에 상류층으로서 영향을 행사한 관롱집단이 되었다. 초기에는 유목과 수렵채집 중심 사회였다가 후기에 한족 등 농업을 하는 민족들로부터 서서히 농업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모용부의 삼연, 탁발부의 북위, 우문부의 북주, 선비족에 동화된 한족과 선비족 중심의 북제가 세워졌다.
  • 오환족(기원전 2세기 ~ 서기 4세기): 위의 선비족의 자매 민족이며, 서기 2세기 경에 본격적으로 역사서에 등장하여 중국의 북부 지역을 위협했으나, 이 시기에 있었던 조조[50]의 토벌 작전으로 인해 세가 크게 위축되었다[51].
  • 티베트: 야크를 유목하고 보리 농사를 짓는 반농반목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농업 기술의 개선으로 벼농사도 짓는다 한다. 하지만, 티베트 동부의 캄 지방에서는 여전히 순수 유목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
  • 퉁구스: 주 생업은 수렵이지만 유목도 많이 하였기에 준유목으로 본다. 세부적으로 따지면, 읍루는 수렵채집민에 더 가깝고, 말갈족이 제대로 된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의 여진족이나 만주족은 농경민에 더 가까운 편이다.

9.1.1.3. 북아시아

  • 흉노(기원전 4세기 ~ 서기 4세기): 단일부족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샤카족 기마 유목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여러 북방계 민족들의 연맹체로 생각되고 있다. 흉노라는 이름은 지배민족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9.1.1.4. 서아시아

  • 아리아인(기원전 3000년경 ~ 기원전 1500년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유럽. 아래의 원시 인도유럽인에서 직접 분리되어 나온 이들로, 인도이란어파 계열 민족들의 직계 조상이자,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의 자매 민족이다[54]. 기원전 3000년경부터 출몰하기 시작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하거나 발원지인 캅카스 지역에 남으면서 훗날의 스키타이인이나 사르마티아인이 되었고, 나머지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아래의 이란계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가장 남쪽으로 이주한 부류는 오늘날의 인도 아대륙 북부에 정착하여 정주 농경민이 된 후에, 현지의 드라비다계 민족들과 융화하여 갠지스 문명을 세웠고, 그 후로 현대까지 살아남아서 드라비다계와 함께 인도를 건설하고 그 주역이 되었다.
    • 이란계 민족(기원전 2000년경 ~):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정확히 말하면 투란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살던 아리아인이란 고원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이들로, 현대 이란인타지크족, 파미르족인도 북부의 아리아계 민족들로 분화되어 현존하고 있다. 현대에는 중앙아시아로 간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정주민족화 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물과 유적에 유목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등, 이란계 민족이 본래 유목민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 중 일부는 쿠르드족, 발루치족과 같이 유목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 사르마티아(기원전 3세기 ~ 서기 3세기): 동유럽. 동일한 기원을 가진 스키타이와 융합하여 아래의 알란인이 되었다[52].
      • 파르티아: 본래 페르시아인과 별개인 유목민이었으나, 언어적으로 비슷해서[53] 나중에 가면 페르시아인과 동화되었다.
  • 계열 민족: 서아시아
    • 유대인: 서아시아. 현재의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유목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 산악 유대인: 동유럽.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캅카스 지역의 동부 일대에 드넓게 분포한 유대인의 일파로, 비록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라 반농반목 생활을 하긴 해도 현대까지 유목 생활을 하는 유일한 유대계 민족이다[55]. 그래서 예로부터 이들은 강인한 기마 민족으로 명성이 높아서 자주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 베두인: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쪽은 독자적인 민족이라기보다는 정착민들인 아랍인들 중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류를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 정확히는 아라비아 반도 내륙 지방에 거주하던 고대 아랍인 농경민들이, 중동 지역의 사막화로 인해 농경 생활이 불가능해짐에 따라[56] 오늘날의 베두인이 된 것이다.

9.1.1.5. 남아시아

  • 에프탈: 위의 토하라인[57]들이 소수의 튀르크계와 혼혈한 뒤에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인도 아대륙 일대로 흘러들아가서 형성된 민족이다. 근대 이전 파슈툰족들은 주변 민족들에게 압달(Abdal)이라 불린 것을 보면, 파슈툰족의 직계 조상 중 하나로 추정할 수도 있다.
  • 자트족: 남아시아. 인도파키스탄의 국경 지대에 거주하는 반농반목의 유목민으로[58], 펀자브인의 분파 내지는 사촌뻘되는 민족이다. 우수한 기마 전술로 유명했기 때문에 영국령 인도 제국 시절에는 영국군 내에 자트족 출신자로 구성된 자트 연대(Jat Regiment)라는 창기병 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 브라후이족: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란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국경 지대에 거주하는 유목민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드라비다계 유목민이다[59]. 주로 이슬람을 믿으며, 낙타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한다.

9.1.2. 유럽



9.1.2.1. 중부유럽

  • 켈트(코카소이드 유목민, 기원전 1200년 ~ 기원전 700년): 할슈타트 문화를 기원으로 갖고[60] 이후 전 유럽으로 퍼지나, 모두 로마 제국에게 복속되고 문화가 융합되었다. 이 중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켈트족은 유목생활을 중단하고 농경민이 되었다[61].

9.1.2.2. 동유럽

  • 원시 인도유럽인(기원전 7000년경 또는 기원전 3500년경): 동유럽, 중부유럽, 서아시아. 위의 키메르인이 기록상 최초로 언급되는 유목민이라면, 이쪽은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밝혀낸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이다[62]. 주로 이나 등의 가축을 키워서 목축을 하였으며, 마차를 이용하여[63] 유목 생활을 이어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말을 가축화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 목록에서 언급되는 스키타이, 토하라인, 사르마티아인 등의 인도유럽어족계 유목민들의 공통 조상이다.
  • 훈족(370 ~ 453년, 흉노 + 스키타이의 후손으로 추정): 동유럽~중부유럽
  • 사르마티아(기원전 3세기 ~ 기원전 1세기): 동유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 전설의 기원이 된 민족으로, 이란계 유목민이었다. 남녀가 서로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탓에, 사르마티아인 기마병 중에는 여군이 많았고 여성이 군주나 추장으로 옹립되는 일도 꽤 있어서[66], 이런 특징이 그리스에 알려지면서 여인국 아마존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67].
    • 알란(기원전 1세기 ~ 서기 5세기): 동유럽서유럽. 위의 사르마티아인의 후손격 민족으로, 로마 제국 시기에 로마군의 포로가 되거나 자발적으로 로마 영내로 이주한 이들이 대거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이후에는 훈족의 침공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대거 유입된 서고트족과 함께 서유럽 지역에 정착하였으나[64], 곧바로 이들을 추격해온 훈족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바람에 인근의 서고트족들에게 동화되어 멸망했다. 이들 중 로마 제국의 영토로 이주하지 않고 발원지인 캅카스 지역에 남은 이들이 오늘날의 오세트인의 기원이 되었다[65].
  • 아바르(6세기 ~ 9세기): 동남유럽. 슬라브족의 이동을 촉발시킨 민족으로 유연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 불가르(7세기): 동유럽. 현대 불가리아인의 기원이 된 민족. 정확하게는 불가르족이 발칸 반도 현지의 슬라브족을 정복한 뒤에 이들에게 동화되어 이루어진 민족이 현대 불가리아인이다.[68]
  • 쿠만(11세기 ~ 13세기): 동유럽. 오늘날에 우크라이나 일대에 정착하여 유목 생활을 영유했던 튀르크계 민족이며, 전성기 때는 그들의 숙적인 루스계 공국들을 침략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히거나, 동로마 제국에 의해 자주 용병으로 고용될 정도였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발흥하면서 쿠만인들을 정복해버리자, 유럽의 기록에 따르면 이를 견디지 못한 대다수의 쿠만인들이 헝가리로 망명했고, 거기서 현지인인 마자르족에게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이 사라졌다[69]. 쿠만인들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카자흐인들의 기원이 된다.
  • 하자르(7세기 ~ 10세기): 동유럽. 서기 7세기 경부터 10세기 경까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번영했던 튀르크유목제국으로, 특이하게도 유대교를 국교로 했다. 하자르 칸국의 멸망 이후에 쿠미크인, 카라임 유대인, 크림차크 유대인 등이 자신들이야말로 말로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70].
  • 코사크(15세기, 슬라브족 유목민): 동유럽. 카자크족이라고도 하는데, 위의 카자흐족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다[71]. 특이하게도 중세 블라흐인과 마찬가지로 농경민족이 다른 유목민들의 공격에 대처하기 의해 유목민으로 돌변한 경우에 속한다. 현재의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에 속한다.
  • 페체네그(10세기 ~ 11세기, 튀르크화한 스키타이계 유목민으로 추정)

9.1.2.3. 남유럽

  • 요뤽: 터키아나톨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유목민이며, 정확히는 유목 생활을 하는 터키인을 요뤽이라고 한다. 요뤽과 아래의 사라카차니같은 남유럽계 유목민들은 위에서 말한 이목(Pastoralism)[72]을 주로 하는 이들이다.
  • 사라카차니: 그리스 북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유목민이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 기간에 유입된 터키계 유목민들이 그리스인에 동화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9.1.2.4. 북유럽

  • 사미족(북유럽), 네네츠(동유럽~북아시아), 마자르족(동유럽) 등의 우랄어족 계열 유목민: 이들은 주로 순록을 키워서 먹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73], 마자르족같이 좀더 남쪽에서 사는 이들은 알란족, 오노구르족과의 혼혈 이후 순록 대신 말을 이용한 기마 유목민이 되었으며, 이들은 뒷날 헝가리를 건설하게 된다.[74]

9.2. 아메리카 대륙


  • 수우족: 북아메리카. 수우족이나 코만치족 같은 북아메리카 유목민들은 16세기 이후에나 유목 생활을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농경 생활을 주로 했었다.[75]
  • 쇼쇼니: 북아메리카. 오늘날의 미국 아이다호 주 일대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계 유목민이다. 흔히 서부극에서 등장하는 원주민들의 원추형의 가죽 텐트인 티피가 바로 쇼쇼니족의 전통 가옥이다[76].
  • 코만치: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깃털 장식을 하고 활을 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미지가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 가우초: 남아메리카팜파스 대초원지대. 원래 이들은 메스티소거나 물라토였지만, 순수 원주민도 있었고 때로는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출신들도 있었다. 독특한 판초 의상과 모자, 그리고 남미풍 기타 음악 등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무기는 벨트 뒤에 감추면서 휴대하는 긴 칼, 볼레아도라스 혹은 볼라스라고 하는 던지는 사냥돌을 사용하였다. 현재는 가우초라는 말은 미국의 카우보이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77].

9.3. 아프리카 대륙



9.3.1. 북아프리카



9.3.2.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


  • 하우사족: 서아프리카중앙아프리카.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는 하우사어를 사용하며[78], 반농반목의 생활을 주로 한다.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는 다른 아프리카 민족들에 비해 유목 생활의 비중이 좀더 큰 편이다.
  • 풀라족: 서아프리카.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정주 농경민이 되었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유목생활을 유지하고 있어서, 2020년 현재까지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들 중에선 가장 인구 규모가 큰 민족이다[79]. 19세기에 오늘날의 나이지리아기니 등지에 있던 졸로프 왕국바마나 제국을 정복하여 소코토 칼리프국을 건설하기도 했고, 현대에도 이때 서아프리카의 해안 지대로 이주한 풀라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기니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9.3.3. 동아프리카


  • 바까라족: 북아프리카동아프리카. 대부분의 아프리카 유목민들이 낙타를 이용해서 유목 생활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한다. 주로 말과 을 길러서 먹고 살며, 과거에는 코끼리기린 사냥을 하기도 했다[80]. 보통의 경우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비옥한 곳에 기장이나 수수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가 이곳을 다시 지나갈 때 수확해서, 유목 생활로 얻은 가축의 고기나 젖과 함께 먹는 방식을 택했다.
  • 베쟈족: 동아프리카. 위의 베르베르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목민으로, 기원전 2천 년경부터 관련 기록이 등장했다. 계절에 따라 일정 지역 내에서만 유목 생활을 하는 이목을 주로 했으며, 이 때, 겨울[81] 거주지인 지역에 수수를 뿌려놓았다가 겨울이 오면 이를 수확해서 먹는 식으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 오로모족: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는 반농반목의 민족으로, 주로 낙타를 이용해서 유목 생활을 하거나, 천연 소금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 : 동아프리카. 등의 짐승을 타고다니는 기마 유목민 생활을 하지않고, 도보로 이동하면서 유목 생활을 한다. 그래서 관점에 따라선 유목민이 아니라, 단순한 목축민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남수단의 누에르족, 딩카족과 생활 양식이 흡사하다.

9.3.4. 남아프리카


  • 보어인: 남아프리카 유일의 기마 유목민으로[82], 정확히는 반농반목 생활을 주로 했다. 17세기에 오늘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짐바브웨 등지로 이주하여 정착한 네덜란드개신교인 이주민들의 후손이며, 영국보어인 간의 무력 분쟁인 보어전쟁을 전후하여 스칸디나비아계나 영국계 이주민 및 케이프타운을 포함한 희망봉 주변 지역으로 이주한 인도인이나 말레이인의 피도 일부 섞였다.[83] 나미비아의 보어인들은 나미비아가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독일계와 혼혈되기도 했다. 주로 가 끄는 마차를 이용해서 유목 생활을 했으며, 일부는 농업에 유리한 지역을 발견하면 정착하여 도시나 마을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84] 20세기 이후로는 영국의 남아공 지배와 보어 전쟁 이후 대부분이 유목 생활을 중단하고 정주 생활을 하였으며, 이 와중에 남아공 사회의 상류층이 되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희대의 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1994년에 넬슨 만델라가 집권한 이후로는 상당수가 기득권을 상실하고 하층민으로 전락했다.[85][86]

10.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것들



11. 관련 문서


[1] 의외로 이런 현상은 초보적인 농경민에게도 흔히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가 화전이다. 숲에 불을 질러 경지를 확보하고 지력이 고갈될 때까지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고갈되면 이동하는 생활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최소 20년 이상 주기를 두고 휴경하기 때문에 숲의 파괴는 크지 않다.[2] 오랑캐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몽골계 민족[3] 우크라이나인의 사촌뻘되는 슬라브계 유목민[4] 기원전 시기에 잠깐동안 유대인들은 유목 생활을 했으며, 성경출애굽기에서 언급되는 40년 간의 광야 생활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 부분으로 추정된다.[5] 일례로, 북아메리카의 유목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이 없었던 관계로, 유럽에서 말이 도입된 16세기 이후에나 처음 유목 생활을 시작했다.[6] 대표적인 사례가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아웃백으로 불리는 내륙 사막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구가 농사가 가능한 해안가 지역에 주로 거주했는데, 때문에 이곳은 농사 기술이 도입될 때까지 수렵채집인 생활이 주를 이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저서인 총, 균, 쇠에 의하면, 유럽인의 침략만 없었다면 18세기 쯤에 이곳에서 자력으로 농업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컸다고 한다.[7] 까고 주요 마피아나 마약상 등을 조사하면 그들 자신의 생산력은 낮아도 남의 자산을 강탈하여 부유한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영국 등 역시 해적질로 스페인 등의 자산을 털어 본래 가진 생산력보다 훨씬 부유한 정부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다.[8]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아소카 대왕의 사례가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조선 초기의 여진족 정벌이 있으며, 그로 인해 압록강두만강이 국경선 역할을 하게 된 바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있다.[9] 중국의 동북3성이 왜 20세기 들어서야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북방에 많은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의 항구도시들에 밀리고 있다. 사실 남부지방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중국 경제를 지탱할 정도로 이 지방은 중국 경제권에서 매우 멀다.[10] 아이마크인, 파슈툰인, 발루치인, 브라후이족[11] 정확히는 독립국가인 외몽골 한정.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와 러시아의 부랴티야 공화국은 현재 유목이 아닌 방목을 한다.[12] 아메리카이 없었던 까닭이 크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유목의 역사는 이들의 영토를 침공했던 유럽인들이 데려온 말을 훔치거나, 축사에서 탈출해서 야생화된 말을 다시 길들이면서 시작됐다.[13] 서부극 장르 자체가 원래 이 시기를 소재로 하는 장르이다.[14] 참고로 수우족은 본래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셈이다.[15] 동유럽슬라브계 유목민인 코사크족도 가우쵸와 비슷하게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소작농들이나, 범죄자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말 등의 가축을 키우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던데서 비롯된 민족이었다.[16]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장편 애니인 라틴 아메리카의 밤3인의 기사에서 가우초의 생활상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17] 물론 농경민족들도 살기 어려운 것은 다를 게 없었지만. 보릿고개가 대표적인 예다.[18] 심지어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자기 부인과의 잠자리(!)까지 제공해주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그 부부가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야 하므로, 사실상 매춘과 비슷했다. 물론 진짜 매춘처럼 다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서도 언급되는 풍습이다.[19] 칭기즈 칸몽골을 통일한 후에 눈을 돌린 부분이 타국과의 무역이었다. 이미 몽골 통일에 많은 국력을 소비했다고 생각한데다, 언제까지고 주변국의 어그로를 거하게 끌면서까지 약탈로만 일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호라즘 제국으로 대규모 상단을 보내어 무역길을 트려고 했다. 다만, 일이 꼬여서 상단이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자, 순식간에 교역로가 침략로로 바뀌었을 뿐이다(...).[20] 한족 왕조였지만 선비족 등 유목민족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던 당나라한푸, 청나라 만주 귀족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화려했던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한족 왕조들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옷을 입는 데 있어 검소함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일단 전형적인 정주민족 왕조이다 보니 집이나 가구 등에 대한 중요도가 매우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의 비중이 줄어든 면도 있다.[21] 중장기사로 유명한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모히 전투에서 이긴 몽골 군대만 해도 갑옷을 잘 갖춰입었으며, 당대 몽골군의 갑옷은 만주족의 청나라와 고려를 계승한 조선의 갑옷들과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 두정갑 참조.[22] 그들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만큼 상당히 권위적이었다. 몽골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사람으로 헛소문이 퍼진 칭기즈칸도 노예를 사용했으며 https://books.google.co.kr/books?id=dYSYBgAAQBAJ&pg=PT125&lpg=PT125&dq=&source=bl&ots=Q8YxVvTx8l&sig=ACfU3U2C3Aluj1DJ3hq1PtJGzZ7h-lnVEQ&hl=ko&sa=X&ved=2ahUKEwjV892hoLjqAhVEw4sBHUX0C4A4ChDoATACegQICRAB#v=onepage&q&f=false 만주인들은 오히려 만주인들이 그들 귀족에게 노예를 자칭했다. https://baike.baidu.com/item/%E5%A5%B4%E6%89%8D 청나라를 정탐한 서호수의 일기에도 만주인들이 스스로 노예라 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23] 사실 귀족주의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죄다 권위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유목민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24]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6천만이었지만 실제 인구는 2배가 넘는 1억 5천만이었다.[25] 실제로 삼국지도 정사는 제대로 된 병력 숫자가 적고 중국사에서도 제대로 된 병력이 15~20만 명 있으면 그걸 가진 사람은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한 편이며 결국 중국 전체의 지배자가 되기도 한다.[26] 왜냐면 중장기병은 돈이 많이 드는데 유목민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유목민 군대에서 경기병이 주력인 거만 봐도 답이 나온다.[27] 문명의 요람에서 세계 4대 문명으로 알려진 곳들은 물론 아랍, 이란이나 그리스(오스만 1세오스만 제국 참조)까지 유목민들에 의해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덕분에 문명화가 빠르기는 했지만 처음 출발은 청과 비슷했다. [28]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과 여진족의 후예이면서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은 농경과 목축, 그리고 물고기 잡이를 겸업하였고 심지어 여진족은 해적질로도 악명을 떨쳤다.이들의 거주지가 초원이 아닌 삼림지대였기에 순수한 의미로서의 유목민족과는 꽤나 다르다. 이러한 민족들을 어렵(漁獵)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29] 청나라 역시 몽골 고원에서 준가르를 상대할 때 이와 비슷했다.[30] 중세 유럽의 농노들이나, 전근대 시대 일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던 시대에 자기 영지의 경제력을 보전하려고 영주가 농민들의 이주를 불허하던 영향도 있지만, 새로 땅을 개간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모든 삶의 터전이 고향에 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31]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 중 하나인 사하 공화국의 주요 민족이다.[32] 다만 현대 몽골에서는 몽골문자는 실생활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데 1930년대 초중반 모 독재자의 문자개혁으로 키릴문자로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문자는 중국령인 내몽골에서 훨씬 더 쓰인다.[33] 그러나 헝가리돌궐의 일파에서 분리된 이웃한 민족들인 불가르족, 하자르족, 페체네그족 등이 쓰던 돌궐 문자에서 파생된 로바쉬 문자를 사용했고, 베두인들은 정착민들인 아랍인의 일파였던지라, 아랍 문자를 그냥 받아들였다. 즉, 유목민들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 쓰는 경우는 있어봤자 베르베르인 정도밖에 별로 없었다.[34] 지금은 이런 경우 법으로 해결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프리카 등에서는 아직도 부족들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칼과 창 대신 총을 들고.[35] 파라과이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하면서 남자들의 수가 크게 줄어서 일부다처제를 정부에서 용인해줄 정도였고, 포르투갈대항해시대를 맞아서 남자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탐험이나 무역에 종사하여 여자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해진데다, 이들이 더러 항해 도중에 사고나 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상류층이라도 백인 아니면 어떠냐, 남자 구실만 하면 그만이지하는 식으로 타 인종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파라과이는 자기들이 정복했던 과라니족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만큼, 인종 문제에 있어서 남아메리카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역시 인도계 사람수상으로 등극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인종차별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다.[36] 아래에서 언급되는 베쟈족이나, 베두인, 베르베르, 투아레그족이 키메르인들보다도 역사는 더 오래되었지만, 키메르인이 등장했을 시기에 이들이 유목민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유목민임이 분명하다고 밝혀진 민족들 중에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유목민은 이들이다.[37] 벨라루스리투아니아, 폴란드에 거주하는 타타르인이다.[38]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들 중 하나인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주류 민족이며, 일부가 동투르키스탄중국에도 거주한다.[39] 러시아튜멘 주 일대에 사는 타타르인이다.[40] 토하리족상나라 시대의 한족과 접촉한 적도 있었는데, 그 흔적이 바로 한자 蜜이다. 한자 ' 밀' 자는 고대 토하리어인 ḿətə에서 왔는데, 이게 벌꿀술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mead와 어원이 같다.[41] 명나라 황제인 정통제오이라트 원정 중에 오이라트군에 체포된 사건으로, 중국의 황제가 외국 군대의 포로가 사례 중의 하나다.[42] 참고로 인류 역사상 최후의 유목제국이다.[43] 물론 인구의 대부분은 유목 생활을 했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더운 사막 지대고 오아시스 주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준가르인의 일부가 농경 생활을 시도했다.[44]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자치 공화국 중의 하나다.[45] 참고로 독립국인 외몽골에 거주하는 몽골인할하족이라고 한다.[46] 유명한 격투기 선수인 아오르꺼러가 바로 차하르족 출신이다.[47] 다만, 대부분의 몽골인은 유목민이지만, 몇몇 몽골계 민족들은 유목민이 아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몽골계 무슬림 종족인 둥샹족보안족, 그리고 선비족의 먼 후손인 토족은 몽골계 민족들 중 단 셋 뿐인 농경민이며, 사준사구의 일원인 제베수부타이의 출신 민족인 우량카이족은 수렵채집민이다.[48] 나머지 하나는 오환족이다. 참고로 동호는 유목민이 아니라 수렵채집민이었다. 이들의 후신인 오환족과 선비족은 동호를 정복했던 흉노의 영향으로 유목민이 되었다.[49] 참고로 선비족몽골계로 추정되는데, 몽골어족튀르크어족이 공통 조상을 갖는 자매 언어군이라고 추정하는 언어학자들은 선비족이 쓰던 언어인 선비어를 두 언어군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가설 상의 어족준몽골어족(Para-Mongolic languages)의 일원으로 본다.[50] 삼국지의 주역들 중 하나인 그 조조다.[51]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을 별거 아닌 것처럼 간략하게만 다루는데, 실제로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를 1세기 뒤로 미뤘다고 할 만큼,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52] 캅카스 지방의 인도이란어파 계열 민족인 오세트인의 직계 조상이 된 민족이다.[53] 파르티아어페르시아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인도이란어파이란어군에 속한다.[54] 다만,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사라카차니와 같은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면, 유목민이었던 적이 없는 순수한 정주 농경민이다.[55] 정확히는 이미 농경민화한 유대인들이 캅카스 지방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여러 유목민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이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때문에 유목 생활로 되돌아간 경우다. 산악 유대인을 제외한 현대의 유대인의 분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순수한 정주 농경민이 되었다.[56]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화의 원인은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력시되는 원인으로 과도한 목축과 더불어, 오랜 기간에 행해진 농업때문에 지력이 크게 감소한 것이 거론된다. 하지만, 베두인의 친척 뻘되는 유대인이나 페니키아인은 상대적으로 물을 구하기가 쉬운 레반트 지역에 거주한 덕택에 20세기까지도 농경 생활을 얼추 유지할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민족들도 같은 이유로, 몽골군의 침략으로 인해 농경지가 황폐해진 13세기 이전까지는 멀쩡하게 농경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57] 이전 서술에는 에프탈인들이 이란계 민족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란인같은 인도이란어파 계통 민족들과는 엄청나게 촌수가 멀고, 오히려 현대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아일랜드인과 더 가까운 민족이다. 다만, 에프탈인이 순수한 토하라인인 것은 아니고, 절대다수의 토하라계 주민들이 이란계 및 튀르크계 민족들과 혼혈하여 형성된 민족이다.[58] 2020년 현재 인도에 거주하는 자트족은 대부분 시크교를 믿으며,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자트족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다.[59] 동시에, 외국으로 이주한 이들을 제외하면, 가장 북쪽에 거주하는 드라비다계 민족이며, 유일하게 이슬람을 주로 믿는 드라비다계 민족이다.[60] 위의 키메르인들이 중부유럽서유럽 일대로 쫓겨가서 형성된 문화다.[61] 유목민에서 농경민이 된 이들로선 가장 농경 생활에 적응한 이들이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던 갈리아인이었다. 이들을 정복한 로마 제국이 거꾸로 농사를 배워갈 수준이라서, 라틴어의 채소 관련 어휘의 60%가 갈리아어에서 차용된 것이다.[62] 한때 원시 인도유럽인의 일파로 간주되었던 아나톨리아어파 계열 민족들은 농경민이고, 이들이 살던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인도유럽어족의 발상지라는 학설인 아나톨리아 가설의 대두로 인해, 한때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농경 생활을 중단하고 유목민이 되면서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이 나온 바 있었다. 그러나, 2018년에 아나톨리아 농경민들의 유골을 발굴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의 DNA에서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발원한 인도유럽어족계 유목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나톨리아 농경민은 인도유럽어족계 민족의 일파가 아니라, 이들의 분파에게 동화되어 형성된 자매 민족일 가능성이 커졌다. 이 연구 결과가 맞다면, 원시 인도유럽인은 순수한 유목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63] 정확히는 이들이 처음 마차를 만든 이들이다. 이들이 등장했을 때는 아직 을 가축화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말이 인간의 무게를 직접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주로 수레를 끄는 데에 말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사람이 타기 좋게 개량한 이들이 이들 원시 인도유럽인의 직계 후예들 중 하나인 아리아인인데, 이들이 마차를 이용하는 대신 직접 올라타서 이동하던 모습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목격한데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64] 일부는 오늘날의 영국잉글랜드 지역인 로마령 브리타니아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아서 왕 전설의 주인공인 아서왕이 잉글랜드에 정착한 알란로마인이라는 설정으로, 2004년에 미국의 영화 감독인 앤드류 퓨콰아서 왕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65] 조지아령인 남오세티야러시아령인 북오세티야에 주로 거주하는 민족인데, 조상인 알란인들과는 달리 유목민이 아닌 정주민이다.[66] 이는 고대 시대의 인도유럽어족 계열 유목민들의 특징이기도 했다.[67] 역시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반인반마의 괴물들인 켄타우로스사르마티아스키타이 출신의 남자 기마병들에 대한 목격담이 와전돼서 생겨난 것이다. 남유럽의 농경민인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리스의 지리적인 특성 상, 유목민과 조우할 일이 잘 없었으므로, 그들의 존재만 알고 있던 이들에 의해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이다.[68] 불가르족들 중에서 원 거주지이던 볼가 강 인근에 잔류한 이들은 뒷날 볼가 불가르로 불리게 되었고, 이들은 러시아볼가 타타르, 바시키르인, 추바시인의 기원이 되었다.[69] 일단 헝가리쿠만인들은 망명지에서 농경민으로 전환하여 17세기 경까지 정체성을 유지하긴 했다. 하지만 이후에 헝가리 영토의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그나마 남있던 민족 정체성에 직격탄을 맞은 바람에, 헝가리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70] 이들 중에서 실제 하자르인들의 후예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이들은 카라임 유대인들이다.[71] 카자흐족은 튀르크계이고, 코사크족은 슬라브계 유목민이다. 그러나 둘 다 어원이 튀르크계 제어의 어휘인 kazak로 같다.[72] 일정 영역 내에서만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방식의 유목 생활을 말한다.[73] 루돌프 사슴코에서도 나오는 산타클로스의 썰매가 이들의 순록 썰매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74] 다만 마자르족헝가리 건국 후에 유목생활을 중단하고 농경민이 되었다.[75] 그러나 수우족과는 달리, 코만치족은 유목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는 호전적인 민족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이들 민족의 이름부터가 먼 친척뻘되는 민족인 우트족이 이들에게 당한 울분에 "저들은 적이다!"라고 외친 데서 유래했을 정도다. 심지어 이들은 본격적으로 유목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미국이나 멕시코의 백인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유용한 물건들을 마구 약탈하는 통에 미국이나 멕시코와 전쟁까지 벌이는 북아메리카의 깡패로 군림하기도 했다. 서부극에서 원주민들이 악랄한 약탈자로 묘사되는 게 마냥 백인 우월주의적인 편견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도 호전적이었던 코만치족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반영됐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하면 깃털 장식을 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게 이들에게서 유래한 이미지다.[76]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목민들은 빠른 이동을 위해 텐트 형식의 가옥을 선호했다. 쇼쇼니족의 티피 이외에는 몽골이나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게르가 대표적이다.[77] 미국카우보이가우초와 같은 독자적인 인족 집단으로 간주되지만 않았을 뿐, 주로 을 이용한 유목 생활을 했다. 이들도 혈통 상으로는 잡탕 수준으로 마구 뒤섞여있어서, 대부분은 백인 이주민이나, 멕시코 출신의 히스패닉 부랑자들로 구성되어있었지만, 극소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끼어있던 데다, 심지어는 흑인 카우보이도 있었다.[78] 다만, 형질인류학적으로는 흑인(니그로이드)에 더 가까운 민족이다. 정확히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북아프리카에 확산되면서, 현지의 반투계 주민들이 이들에게 동화되어 형성된 경우다.[79] 풀라족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300만 명에 달하는 수가 유목 생활을 영유하고 있다.[80] 현대에는 코끼리기린이 멸종위기에 몰린 탓에 더이상 사냥하지 않는다.[81] 겨울이라고는 하는데, 엄청나게 무더운 사막 지대인 북아프리카동아프리카 지역의 특성 상 여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늘해지고 추워지는 기간이지, 한국이나 러시아의 겨울에 비하면 엄청나게 뜨거운 날씨다. 단지 밤이나 한파가 닥치는 날에만 서리가 내리는 수준이다.[82] 동시에 인류 역사상 유일의 게르만계 유목민이다. 고대 게르만족도 양이나 염소 같이 전형적인 유목민의 가축을 키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목민이 되지는 않았다. 스위스알프스 산맥이 있는 곳의 게르만계(독일계) 목동들도 유목민과는 거리가 멀다.[83] 이 외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에서 컬러드라고 불리는 혼혈인들은 17세기에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보어인 남성과 코이산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의 후손들이다.[84] 대신 이 끄는 마차를 이용했다는 점만 빼면, 미국카우보이도 이런 식으로 유목 생활을 했다. 다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보어인반투계 및 코이산흑인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곳에서 소수민족으로 있던 만큼 엄연히 독자적인 민족 집단으로 분류되는 데 반해, 카우보이는 자기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므로 독자 민족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보어인은 미국카우보이보다는 남아메리카가우초와 더 유사하다.[85] 물론 대다수의 보어인들은 남아공을 떠나거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음이 정상참작되어, 재산을 지키고 부유층으로 남긴 했다. 하지만 넬슨 만델라의 퇴임 후에 들어선 역대 정권들이, 흑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보어인들이 겪는 경제적 위기를 방치하다시피하면서, 보어인 중산층들이 대거 몰락하고 이른바 '화이트 스콰터(white squatter)로 불리는 극빈층으로 전락했다.[86] 짐바브웨보어인들은 짐바브웨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로버트 무가베의 집권 이후로 전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살 길을 찾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나미비아 등으로 대거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