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뒬하미트 2세
1. 개요
''"이 망할 녀석(압뒬하미트 2세를 지칭)은 바란다면 갑자기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조국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주변의 적들도 흩어놓을 수 있지. 조국과 나를 포함한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이 새끼는 몇 년간 피를 처먹는게 익숙해졌어. 그리고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수록 그 놈이 대단한 놈으로 보이더군. 그래서 나는 그 놈이 사라져 버리는 게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 이스마일 엔베르
오스만 제국의 제34대 황제이자 113대 이슬람 칼리파. 오스만 제국 최후의 중흥자 및 몰락의 자초자. 오스만 제국 역사상 제대로 통치를 행사한 사실상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3] 재위 초기에는 자유쥬의적 정치를 펼치며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와 복지에 힘썼으나 크레타 전쟁 이후 흑화하여 모든 정치세력을 억압한 폭군으로 돌변하기도 했다."100그램의 지혜 가운데 90그램은 압뒬하미트에게, 5그램은 내게, 나머지 5그램은 다른 정치가들에게 있다네." - 오토 폰 비스마르크[2]
2. 유년기
압뒬메지트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모인 티리뮈즈간 술탄(Tirimüjgan Sultan)이 압뒬하미트가 10세 되던 해 죽자, 아버지의 후궁이었지만 자식이 없던 페레스튀 카든 에펜디(Perestü Kadın Efendi)의 품에서 자랐다. 페레스튀 카든 에펜디는 압뒬하미트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아버지인 압뒬메지트가 1861년에 사망하자 제위를 이어받은 압뒬하미트의 삼촌인 압뒬라지즈(Abdülaziz)는 형의 자식인 압뒬하미트와 다른 황자들을 자기자식처럼 키웠다. 황제 압뒬라지즈가 1867년에 유럽을 순방할 때 압뒬하미트 또한 함께 했으며, 압뒬라지즈는 조카들에게 서구식 교육과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탄지마트 이후 입헌군주제 체제로 전환한 오스만 제국에서 압뒬하미트는 서방에 대해서는 중립정책을, 동방에 대해서는 이슬람주의적인 정책을 실행했는데, 이 또한 삼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압뒬라지즈가 암살당하고 1876년 5월 30일 형인 무라트가 압뒬라지즈의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중증 정신질환자였던 그가 93일 만에 폐위되면서 다음 후계자로써 술탄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3. 재위 초기: 관용과 자유주의의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즉위할 당시 오스만 제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삼촌인 압뒬라지즈가 암살당하고, 큰형인 무라트가 즉위했으나 3개월만에 정신병을 이유로 퇴위당했다.[4] 그리고 그가 즉위하자마자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2차 동방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했고, 불가리아가 여전히 명목상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잃고, 영국이 중재의 대가로 키프로스를 가져가 버렸다. 동부전선에서도 러시아에 의해 카르스와 아르다한을 잃어버렸다. [5] 전쟁과 선대의 황제들이 벌여놓은 각종 사업으로 인한 재정위기로 오스만 제국은 파산을 선언해야 했으며, 또한 불가리아의 학살을 피해 코스탄티니예로 몰려든 100만여명의 난민들로 인해 코스탄티니예의 치안도 불안해졌다.
압뒬하미트 2세는 이러한 개막장 속에서 즉위했고, 이미 불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제국을 통치해야 했다.
즉위 초기 압뒬하미트 2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총리대신인 미트하트 파샤(Mithat Paşa)의 주도로 이루어진 1876년 입헌혁명을 통해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제국 의회의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이전 같았으면 황제를 비난하거나 중상하는 행위를 대역죄로 다스렸지만 압뒬하미트 2세는 관용을 베풀었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 초기 오스만 제국은 영국, 프랑스의 도움으로 공장을 늘리고 철도를 확충해 나갔다.[6] 이스탄불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왔으며,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그리고 코스탄티니예에서 메카까지 철도가 놓인 것도 그의 치세의 일이다. 군제의 근대화 또한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치세에 들어 오스만 제국은 잠수함, 철갑함, 기관총 같은 신무기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여성에 대한 정책도 근대화되어 과거 집안에서 조신하게 처신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여성들에게 신식 학교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졌다.[7] 압뒬하미트 본인도 프랑스어에 능했으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8]
하지만 입헌혁명을 통한 자유주의 바람은 제국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왔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으며, 황제는 튀르크인이고 무슬림이었지만 제국 내에는 튀르크인 무슬림 이외에도 여러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각 민족들이 독립을 꿈꾸던 상황 또한 비슷했다. 빈 체제 시기 메테르니히는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공포정치로 일관했지만, 입헌혁명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 그 안전망을 풀어버린 상황이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아랍인 장교들은 오스만 제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아랍인의 국가를 포함한 체제로 만들고자 했고, 오스만 제국 내의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국가를 이루기 위해 지하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편 튀르크 민족주의자들 또한 서구에 휘어잡혀사는 오스만 제국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4. 크레타 상실과 함께 시작된 독재
결국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입헌혁명 체제는 1년만인 1877년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이유로''' 폐지되었다. 압뒬하미트 2세는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전제군주제 체제로 복귀한 이후에도 압뒬하미트 2세의 정책은 여전히 자유주의적이었다. 탄지마트 이후 발달하기 시작한 자유언론은 미트하트 헌법의 폐지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1897년 그리스-오스만 전쟁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1833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지만 북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서트라키아 지방)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 도서지방은 압뒬하미트 2세 시기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1896년 크레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스는 이들을 지원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자체는 그리스가 패배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서구열강의 개입으로 크레타를 '크레타 자치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켜야 했다. 문제는 이 전쟁의 원인은 그리스였고,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보상금도 지불했지만 정작 전쟁에서 이긴 오스만 제국이 자국의 속령인 크레타를 떼어줘야 하는 상황에 튀르크인들이 매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독립한 크레타 자치국은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지만, 국가원수가 그리스 왕국의 세자이고, 총리는 에노시스 운동의 거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라는 점에서 사실상 크레타는 그리스로 넘어갔다고 보았다. 오스만 제국 언론들은 연신 황제의 졸속외교를 비난했으며, 코스탄티니예에서는 시위가 이어졌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기간동안 상실한 영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중재에 대한 대가로 영국에 키프로스를 넘김.
-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 바툼(Batum), 아르다한(Ardahan), 카르스(Kars), 올투(Oltu), 카으즈만(Kağızman)을 러시아에게, 코투르(Kotur)와 근교는 페르시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할양.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역시 독립을 인정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 불가리아는 자치국화 되었으나 이후 독립함. 또한 불가리아 남부지역에 동루멜리아 주(Şarkî Rumeli Eyaleti)가 성립되었으나 이 지역은 훗날 불가리아에 합병됨.
- 1881년, 그리스 왕국의 요구 및 열강의 압력으로 싸우지 않고 엘라소나(Ελασσόνα/Alasonya)를 제외한 테살리아(Θεσσαλία/Teselya) 전체와 아르타(Άρτα/Narda, 현재의 이피로스 지방에 위치한 옛 지명, 근처에 프레베자 해전으로 유명한 프레베자가 위치해 있다.)을 그리스에게 넘김.[9]
- 1881년 프랑스 제3공화국, 튀니지를 보호국화.
- 1882년 영국, 이집트를 보호국화.
- 1897년 크레타 전쟁의 결과 크레타 자치국이 세워지면서 사실상 독립. 발칸 전쟁 시기 그리스 왕국으로 합병됨.
모든 세력이 크레타 상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가를 주장했고,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들조차도 열강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비난했다. 개혁성향의 학생운동으로 시작된 청년 튀르크당(Jön Türkler)의 전신인 통일과 진보 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도 1889년 비밀결사로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5. 붉은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초기 자유주의 및 입헌주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서구열강의 개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안으로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자유롭게 풀어준 결과를 초래했다. 압뒬하미트 2세는 근대화를 위해 처음에는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프랑스가 튀니지를 병합하고, 영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중재하는 대가로 키프로스를 뜯어가더니, 나중에는 사실상 명목상 오스만 제국령이긴 했지만 이집트를 보호국화 하는 등 유럽 세력이 직접 오스만 제국과 맞닿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관계는 동지중해에까지 파고든 영국과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확보한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우방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을 버리고 독일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제개혁, 철도 부설에 있어서도 독일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형성된 군부 내 친독파들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압뒬하미트 2세는 자꾸만 기어오르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했다. 제국에 반대하고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상, 그리고 산업화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에서도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사회주의를 탄압하는 한편,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로써의 권위를 이용해 전 세계 무슬림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병행했다. 압뒬하미트 2세 시기에 오스만 제국 바깥에 거주하는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금전적, 사상적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중국 위구르족을 포함해 조선과 일본에도 밀사가 파견되었다. 베이징에 세워진 이슬람 학교도 압뒬하미트 2세의 지원 아래 설립되었으며, 특히 1900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완성된 다마스쿠스와 성지 메카를 잇는 철도 프로젝트인 히자즈 철도(Hicaz Demiryolu)는 전세계 무슬림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진 압뒬하미트 2세 시기 범이슬람주의를 대표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10]
압뒬하미트 2세는 이을드즈 궁전에 칩거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밀경찰과 사진사들을 활용해 제국 내의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는데 이용했다. '붉은 술탄' 이란 압뒬하미트 2세의 별칭은 그가 반대파들을 극심히 탄압해 피칠갑을 했다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었다.
6. 퇴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는 그나마 성공이라도 거뒀으면 다행인데,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범이슬람주의는 이미 민족주의가 정착한 시대에 씨알도 안 먹히는 주장이었고, 압뒬하미트 2세는 범이슬람주의를 위해 오스만 제국의 공용어를 터키어가 아닌 아랍어로 지정하려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에는 터키어로 작성되던 칙명이나 정부문서들을 아랍어를 병기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산업화 또한,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평가했듯 '황제의 투으라(서명)가 아닌 독일, 프랑스, 영국의 회사 이름을 단 기차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달리는 모습'은 제국의 위대한 진보라는 의미보다는 서구열강에 뒤처지는 제국의 모습만을 보이며 패배주의를 심어주고 있었다. 더이상 제국은 위대한 국가(Devlet-i âliyye)가 아닌, 저무는 태양에 불과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대 서방정책 또한 열강의 경제적 이권에 휘둘릴 뿐 오스만 제국의 자체적인 산업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908년 7월 3일, 지금의 테살로니키인 셀랴닉(Selânik)에서 아흐메트 니야지(Ahmet Niyazi, 1873-1913) 소령을 중심으로 한 제3군단 청년장교들이 주동한 쿠데타로 압뒬하미트 2세는 미트하트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선언해야 했고, 이듬해 퇴위했다.
7. 퇴위 이후의 삶
퇴위 이후 압뒬하미트 2세는 셀랴닉에 위치한 별궁에서 칩거하며 지내다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으로 셀랴닉이 그리스로 넘어가자 이스탄불로 돌아왔으며, 베일레르베이 궁전에서 조용히 목공예와 자서전 집필에 몰두하다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사망했다.
1차대전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청년 튀르크당이 전쟁에서 삽질하는 꼴을 퇴위 후에 계속 봤고 보태서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참전. 그것도 동맹국으로 참전하는 것에 극히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8. 비판
우선 압뒬하미트 2세를 변호하자면, 그가 파디샤(황제)로 즉위한 시대의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서구화 개혁을 마치고 근대화 되었지만 그 근대화로 인해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고 오스만 제국은 외국으로부터 빌린 부채의 이자를 상환하느라 급급한 시절이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인 압뒬메지트 1세가 지어놓은 돌마바흐체 궁전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파산한 경험이 있었다. 압뒬하미트 2세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자국 산업을 육성하려 했지만, 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돈도 결국 유럽 열강들에게서 꾸어야 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이 산업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빚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군사적으로 압뒬하미트 2세는 당장 직면한 적인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최신식 무기는 죄다 도입했지만 이는 대한제국의 군대와 형식상으로는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11] 일단 돈이 엄청 깨지는 것도 그렇고, 여기에 보태서 여기저기서 좋다는 무기는 죄다 사 오는 바람에 무기마다 탄 규격이 맞질 않아 보급이 어려웠으며, 그 최신식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하기라도 하면 좋은데, 당시 빚에 허덕이는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많이도 구입할 수 없었다. 가령 유럽 국가 기준으로도 상당히 최신무기인 잠수함은 달랑 두척만 운영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은 오스만 제국에 비하면 여전히 약소국인 그리스를 상대로 할 때에는 여러모로 활약을 했지만, 단 두척의 잠수함으로 전쟁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압뒬하미트 2세의 반민족주의 정책은 내부적으로도 민족주의의 유입으로 인해 분열직전에 다다른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과라도 있으면 좋은데, 이에 대해 내놓은 정책인 범이슬람주의는 그가 퇴위하던 1908년 당시까지만 해도 제국 의회의 절반이 비무슬림인 판국에 비무슬림은 아예 배제하고 무슬림만 데리고 간다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믿던 무슬림들도 튀르크인과 아랍인 등으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리던 판국이었고, 제국에서 그나마 쪽수가 있는 아랍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국 공용어를 아랍어로 하려는 정책은 튀르크인마저 반기를 들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정책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그 이후에도 계속 추진됐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제국의 신민으로써 민족,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이상은 결국 터키 공화국의 수립 이후에나 가능해졌고, 이를 위해서도 상당한 피를 보아야 했다.
9. 재평가
청년 튀르크당 출신의 인물들이 주축이 된 공화국 수립 이후 압뒬하미트 2세는 반동개혁과 수구적인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말아먹은 원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이후,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중흥, 서구화와 전통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 노력한 지도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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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취미 항목을 보면 의외로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왕답지 않은 취미를 많이 갖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압뒬하미트 2세의 취미 또한 독특했다. 특히 목공과 승마, 수영에 뛰어났는데, 자기가 직접 쓸 가구까지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쓸 정도이다. 그가 말년에 거주한 베일레이베이 궁전에는 압뒬하미트 2세가 생전에 사용하던 비밀번호 장치가 되어있는 책상이 보존되어 있는데, 자개를 붙이는 솜씨부터 디테일한 장식까지 모두 손수 그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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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슬람주의를 강조한 칼리파였지만, 서구 오페라를 광적으로 사랑하며 오페라를 감상하며 위스키와 브랜디를 즐기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도 그렇지만, 무슬림들의 관점에서도 술은 오직 포도주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는 쿠란에서 금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껏 마셨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심히 이해되지 않지만(...) 사진 속의 극장은 압뒬하미트 2세가 이을드즈 궁전 내에 세운 전용극장으로 황실 가족들과 신하들을 초대해 연극과 오페라를 관람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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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거주하던 이을드즈 궁전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직접 만들기 위해 공방도 세웠다. 프랑스 세브르 양식의 디자인과 화사한 색감이 특징으로 오늘날에는 터키 국회 소유가 되어 국영공방이 되어있다. 주로 국빈방문시 선물로 증정하기 위한 고급자기들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일반에도 판매되고 있다.
탐정소설에 탐닉했으며, 특히 셜록 홈즈 시리즈의 애독자였다. 역사상 가장 지위가 높은 셜로키언중 하나로, 신간이 나오자마자 영국에 사람을 보내 책을 사와서 신하들에게 터키어로 번역시켜 읽게 하기도 했으며, 본인이 스스로 영어도 연습할 겸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셜록 홈즈가 1920년대 이스탄불에서 활동했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에 대한 팬서비스 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압뒬하미트 2세의 영향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탐정소설들이 크게 유행했다.
여러가지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정책들과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인다. 범이슬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외정책도 그렇고, 대 서방정책도 유사하고, 군비증강이나 개혁, 그리고 빚잔치(...)에 있어서도 유사하다.
11. 관련 매체
근대 오스만 제국 시대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높은 확률로 이 황제의 재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으로 치면 헌종이나 철종보다 고종이 훨씬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터키 방송국 TRT는 압뒬하미트 2세 재위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드라마 필린타(Filinta)와 압뒬하미트 2세가 주연인 사극 드라마 파이타흐트: 압뒬하미트(Payitaht: Abdülhamid)(영어자막판)를 2014년부터 연이어 방영하고 있다.
[1] 체르케스의 일파.[2] 겉으로 보면 칭찬하는 말로 보이지만 비꼬는 말이다. 그만큼 음흉한 인물이라는 의미.[3] 이후에 즉위한 메흐메트 5세 레샤트는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옹립되었고, 제위기간 내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으며, 마지막 황제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협상국에게 휘둘려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4]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압뒬하미트 2세가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게 되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압뒬하미트 2세가 즉위하고 나서 아버지가 지은 돌마바흐체 궁전을 버리고 훨씬 협소한 궁전인 이을드즈 궁전으로 이궁한 것도 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5] 이 지역은 이후 바투미를 제외하면 터키 공화국 시기에 돌려받는다.[6] 당시에 놓인 철도들 중 대부분은 복선화 혹은 전철화만 하고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7] 다만 당시 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학교에서 강의하는 남교사는 커튼으로 가려 여학생들을 못보는 상태로 강의를 하거나, 여학생들이 얼굴을 가려 남교사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8]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도 상류층 사이에 프랑스어가 공식언어처럼 쓰였으며, 황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압뒬하미트의 프랑스어 실력은 이를 감안해야 한다.[9] 1897년 크레타 전쟁 당시 테살리아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열강의 압력으로 도로 뱉어내야 했다.[10]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히자즈 철도는 정작 10년도 채 쓰지 못한채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노선의 상당부분이 파손되어 운행이 중단되었고, 아랍국가들의 독립 이후 각국의 철도체계에 편입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1] 물론 직접 비교는 어려운 것이,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 제국이 맘만 먹으면 식민화할 수 있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던 반면 오스만 제국은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최소한 1차대전에 당당히 동맹국의 일원으로 참전할 만큼 강대국으로는 인정받고 있었으며, 독일이 참호전에 빠져 외부 지원을 할 여력이 없어지고 오스트리아가 삽질을 하는 사이에도 일단 자기 전선은 지키다가 전쟁 끝나기 직전에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 아닌 독일식의 휴전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