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회담
'''Tehran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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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모여 연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다른 회담과는 다르게 한국사에선 별다른 비중이 없으나 [1] 세계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꽤나 큰 의의를 지닌다. 이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바로 유럽 대륙에서 혼자 독일군을 상대하는 소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소위 '''제2전선'''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처칠은 지중해 연안에서 상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논의 끝에 스탈린이 주장한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되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자세한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 참고.
또한 이 회담에서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의 의지를 표명하고 이란의 독립과 주권·영토의 보전을 약속했다.[2]
1941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미국, 소련은 어떠한 군사적인 제휴관계도 맺지 않는 상태였으나 같은해 6월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12월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한 배를 타게 된다. 이에 따라 전후 처리,[3]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4] 큰 틀에서의 전쟁 구상[5] 등을 놓고 삼개국 사이에 의견을 조정할 필요가 점차 커지게 됐다. 이에 따라 각국 정상들 사이에 특사들이 오고가기 시작했지만 전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정상이 직접 만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빠르게 개진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은 비행기를 타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역시 장애인이며 건강 자체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장거리 비행을 꺼렸다. [6] 처칠과 루즈벨트는 장개석과 회담을 진행한 카이로에서 다시 한번 회담을 개최하기를 원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고 중간지점으로 중동 지역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바스라 등이 개최지로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는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회담이 개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1943년 11월 28일에 마침내 각국 정상들이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회담이 시작된다. 회담 초기 단계에서는 선결과제였던 대독일 전쟁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각국 정상들은 '각국이 협력하여 최후(즉 독일이 항복하거나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라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를 이루었다.[7] 다만 이를 위해서 서방측은 소련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소련이 발칸반도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해주어야만 했으며,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선을 전쟁 발발 직전보다 약 250km 가량 서쪽으로 옮기는 것에도 동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후로 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은 바로 제2전선 문제였다. 1941년부터 스탈린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제2전선을 유럽 어딘가에 형성해서 소련의 부담을 경감시켜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고 처칠과 루즈벨트 역시 제2전선의 형성 자체에는 동의를 표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양 측 사이의 의견 충돌이 존재했는데, 1943년 이내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던 스탈린에게 처칠과 루즈벨트는 선박, 병력의 부족을 근거로 난색을 표했다. 또한 상술했듯이 스탈린이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할 것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처칠은 지중해 일대에 상륙할 것을 원했던 것. 논의 끝에 절충이 이루어졌고 제2전선은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해안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다.
각종 협의 사항이 전반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하게 결정된 것에서 보여지듯이 시종일관 회담장을 장악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테헤란 회담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유럽대륙에서 2년 넘게 독일군 주력을 상대한 것은 소련군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스탈린의 발언권이 강했던 데다가,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이후 전세가 완전히 소련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루즈벨트는 장거리 여행 +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던 건강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처칠이 어떻게든 스탈린과 협상을 해보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외에도 몇가지 세부사항들이 결정됐는데, 이란의 독립과 유고슬라비아 내 파르티잔의 활동 지원 및 터키를 연합군 측으로 꼬시기[8]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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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모여 연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다른 회담과는 다르게 한국사에선 별다른 비중이 없으나 [1] 세계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꽤나 큰 의의를 지닌다. 이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바로 유럽 대륙에서 혼자 독일군을 상대하는 소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소위 '''제2전선'''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처칠은 지중해 연안에서 상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논의 끝에 스탈린이 주장한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되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자세한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 참고.
또한 이 회담에서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의 의지를 표명하고 이란의 독립과 주권·영토의 보전을 약속했다.[2]
2. 진행
2.1. 배경
1941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미국, 소련은 어떠한 군사적인 제휴관계도 맺지 않는 상태였으나 같은해 6월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12월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한 배를 타게 된다. 이에 따라 전후 처리,[3]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4] 큰 틀에서의 전쟁 구상[5] 등을 놓고 삼개국 사이에 의견을 조정할 필요가 점차 커지게 됐다. 이에 따라 각국 정상들 사이에 특사들이 오고가기 시작했지만 전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정상이 직접 만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빠르게 개진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은 비행기를 타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역시 장애인이며 건강 자체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장거리 비행을 꺼렸다. [6] 처칠과 루즈벨트는 장개석과 회담을 진행한 카이로에서 다시 한번 회담을 개최하기를 원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고 중간지점으로 중동 지역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바스라 등이 개최지로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는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회담이 개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2.2. 진행
1943년 11월 28일에 마침내 각국 정상들이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회담이 시작된다. 회담 초기 단계에서는 선결과제였던 대독일 전쟁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각국 정상들은 '각국이 협력하여 최후(즉 독일이 항복하거나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라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를 이루었다.[7] 다만 이를 위해서 서방측은 소련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소련이 발칸반도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해주어야만 했으며,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선을 전쟁 발발 직전보다 약 250km 가량 서쪽으로 옮기는 것에도 동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후로 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은 바로 제2전선 문제였다. 1941년부터 스탈린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제2전선을 유럽 어딘가에 형성해서 소련의 부담을 경감시켜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고 처칠과 루즈벨트 역시 제2전선의 형성 자체에는 동의를 표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양 측 사이의 의견 충돌이 존재했는데, 1943년 이내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던 스탈린에게 처칠과 루즈벨트는 선박, 병력의 부족을 근거로 난색을 표했다. 또한 상술했듯이 스탈린이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할 것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처칠은 지중해 일대에 상륙할 것을 원했던 것. 논의 끝에 절충이 이루어졌고 제2전선은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해안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다.
각종 협의 사항이 전반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하게 결정된 것에서 보여지듯이 시종일관 회담장을 장악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테헤란 회담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유럽대륙에서 2년 넘게 독일군 주력을 상대한 것은 소련군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스탈린의 발언권이 강했던 데다가,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이후 전세가 완전히 소련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루즈벨트는 장거리 여행 +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던 건강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처칠이 어떻게든 스탈린과 협상을 해보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외에도 몇가지 세부사항들이 결정됐는데, 이란의 독립과 유고슬라비아 내 파르티잔의 활동 지원 및 터키를 연합군 측으로 꼬시기[8] 등이 있었다.
3. 여담
-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의 전쟁도발을 영원히 억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고위직부터 말단직까지 포함해서 십만명의 독일군 장교를 처형할 것을 제안했다. 루즈벨트는 이 발언이 농담인 줄 알고 '그건 너무 많고 4만 9천 명 정도만 죽이죠?'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각종 정보원을 통하여 대숙청, 카틴 학살의 진상을 알고 있던 처칠은 스탈린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제대로 뚜껑이 열려서 성질을 내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처칠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스탈린이 황급하게 농담이었다며 처칠을 붙들어서 회담은 재개될 수 있었다. 후에 처칠은 회고록에서 위의 스탈린의 제안이 서방 세계 지도자들의 배짱을 시험해 본 것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 회담 이후 진행된 저녁 만찬에서 처칠은 조지 6세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만든 검을 스탈린에게 선물했다. 스탈린은 이 검을 받은 뒤 감사의 의미로 칼집에 키스를 하고는 옆에 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건넸는데, 보로실로프가 이 검을 만지작거리다가 놓쳐서 땅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고 전해진다.[9]
- 제2전선의 수립을 돕기 위해 프랑스 북부에서의 상륙작전 직후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진행하는 것도 이 테헤란 회담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 결정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실행에 옮겨진다.
- 독일 측에서 테헤란 회담에 모인 연합국 정상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이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진 사람은 바로 연금 상태에 놓인 무솔리니를 탈출시켜서 전 유럽에 악명을 떨친 오토 슈코르체니. 다만 불확실한 것이 이 계획은 수립단계에서 취소됐으며, 슈코르체니 본인은 자서전에서 그런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작전을 어떤 미친 놈이 진행하느냐면서 부인했다. 그런데 정작 연합국 측에서는, 심지어 NKVD조차 이 계획이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다고 주장한다.
-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을 포함한 수많은 고위급 관리들과 함께 갓 진수된 미 해군의 기함 아이오와급 전함 네임쉽 아이오와에 탑승했다. 문제는 호위함대에 끼어 있던 플레처급 구축함 윌리엄 D. 포터가 대서양을 건너는 중 어뢰 발사 훈련을 하다가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어뢰발사관을 사용하는 바람에 어뢰를 대통령이 타고있는 아이오와로 쏴 버렸다! 어뢰를 회피한 아이오와는 16인치 주포 9문을 모두 윌리엄 D. 포터에게 조준하고 방금 벌어진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10] 겁에 질린 포터의 함장은 모든 것을 실토했고. 포터함은 즉시 호위임무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터덜터덜 모항인 버뮤다로 돌아간 포터함 승조원들은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완전무장한 해병대원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결국 고의는 아니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어뢰를 오사한 어뢰 담당자가 14년 징역을 받는 등 후폭풍은 매우 컸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면을 내려서 처벌을 받은 승조원은 없었지만, 해군 내에는 소문이 쫙 퍼져서 윌리엄 D. 포터 함을 만나는 함선마다 포터에게 '쏘지 마라! 우린 공화당원이야!'라고 인사했다고 한다(루스벨트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 플레처급 구축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USS 윌리엄 D. 포터는 이후에도 대전 내내 사고를 쳤고, 최후엔 가미카제에 의해 침몰했는데, 그 때에도 격추된 특공기가 바다로 떨어지면서 하필이면 어뢰마냥 포터의 수면 아래 밑부분에 부딪혔고, 그 영향으로 침몰했다. 다행히도 기적적으로 사상자는 없었으며, 승조원은 전원 구출되었다.
[1] 전혀 없지는 않은게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을 40년 정도 준비기간(신탁통치)을 주고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이 그것에 동의했다.[2] 전간기 이란은 팔레비 왕조 치하하에서 당시 태국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독소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랜드리스 항로였던 무르만스크 일대가 노르웨이에서 출동한 독일 잠수함대에 의해 위협받자 새로운 루트가 요구되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련과 영국이 이란을 침공, 점령해버린것. 이러한 이유로 안전한 후방이었던 이란에서 이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란에 대해 전후 독립을 확약하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다.[3] 미국은 종전 후에도 대영제국을 유지하려 했던 처칠의 야망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종전 후 소련이 동유럽 일대에 자신의 세력권을 다져놓을 것에 대해서도 미국 정계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4] 뭐 거창하게 효율적인 배분이라고는 써놓았지만 말이 좋아 효율적인 배분이지 현실은 그냥 천조국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한 소련과 영국 사이의 다툼이었다. 여기에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태평양 전쟁도 진행해야 했으니...[5] 소련의 부담을 경감시켜주기 위한 제2전선이 대표적인 예.[6] 아닌게 아니라 처칠은 뻔질나게 북아프리카와 미국 본토를 들락날락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햇수로 삼년 사이에 루즈벨트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만도 무려 5번 갔으며 북아프리카도 2번이나 갔다. 여기에 전선시찰은 덤이다.[7] 이 합의가 중요한 까닭은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아 저 독일이랑 강화 맺을게요. 이만 ㅂㅂ' 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 초기에는 서방과 소련 모두 '저 놈이 일방적으로 독일이랑 강화 맺고 나 물먹이려는거 아니야?'하는 의심을 상대방에 대하여 품기도 했었다.[8] 이 회담 직후 터키는 루즈벨트와 처칠의 꼬드김을 받고 대독 전선에 참가할 것을 약속한다. 다만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질질 시간을 끌다가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진 1945년 2월에야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그것도 군사적 행동은 거의 전무한 그냥 상징적인 선전포고.[9] 러시아에서는 칼을 선물한다는 것이 '관계를 끊자'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10] 구축함의 장갑으로는 어느 곳에 맞아도 16인치 탄을 막을 수 없다. 단 한 발만 맞아도 포터는 침몰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