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학살

 


폴란드어 : Zbrodnia katyńska
영어 : Katyn Forest Massacre
러시아어 :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
독일어 : Massaker von Katyn, Massenmord, Massanerschießungen von Katyn (Katyn)
'''카틴 숲의 학살'''
1. 개요
2. 전개
3. 발견
4. 영미의 묵인 및 침묵
5. 전쟁 이후
6. 소련 몰락 이후
7. 뒷이야기들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인 1940년 4월 3일부터 약 두 달간 소련NKVD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들과 지식인을 대량 처형하고 암매장한 사건.
현재 폴란드 중부 시비엥토크시스키 주에 카틴 학살 추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 전개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그 일주일 뒤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발발한 이후 폴란드는 두 국가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병들은 대체로 즉시 석방했지만, 폴란드군 장교와 부사관 수만 명은 수용소에 수감시켰다. 수용된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고통을 받았다.
이후 소련군은 포로 관리를 대숙청으로 악명 높은 NKVD에게 넘겨주었다. NKVD는 1년간 포로와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개별 포로의 성향을 파악했다. 이후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하니 즉시 제거하자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의견을 상신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학살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폴란드군 포로들에 대한 재분류를 통해 포로 25,736(1명 제외 전원 남성)명을 카틴 숲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갔고, NKVD는 미리 암매장하려고 파둔 여러 곳에서 이들 중 2만 2천여 명을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총살했다. 총살당한 이들 중 8천여 명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였으며, 6천여 명은 폴란드 경찰, 나머지는 폴란드 지식인이었다. 카틴에서만 4,400여 명이, 민스크에서 3,870명이, 하리코프에서 3,800여 명이, 메드노예(Mednoye)에서 6,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 외에 키예프와 헤르손(Kherson)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카틴에서만 제독 1명, 장군 2명, 육군 대령 24명, 해군 대령 17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 대위 654명, 하사관 3,420명, 군종 신부 7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200여 명이 넘는 조종사대학교수 20명, 변호사, 기술자, 교사 수백여 명, 난민 131명, 대지주 3명 등이 카틴에서 학살당했다. 카틴 이외에도 민스크, 하리코프, 메드노예 등지에서 학살된 장교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장성급 인사만 14명이 학살'''당했다. 학살 피해자 중 8%는 폴란드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학살의 현장에서 막판 분류 작업으로 살아남은 천하의 행운아는 395명에 불과했다. 야니나 레반도프스카(Janina Lewandowska) 육군 중위를 제외하고 살해된 사람은 전부 남성이었다. 학살이 끝난 후 NKVD는 불도저로 이러한 시신을 흙으로 덮어버려 사실을 은폐했고 그대로 모든 게 묻히는 듯 했다.
공식적으로는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스몰렌스크 부근의 카틴에서만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카틴에서 죽은 사람들은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나왔고, 오스타쉬코프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스크바 북부의 칼리닌 부근에서 학살되었으며, 스타로비엘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은 하리코프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카틴 숲에서 학살의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카틴 학살로 알려진 것이다. 또한 장교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부사관(사실 수로 따지면 부사관들이 제일 많이 죽었다) 및 "계급 각성"이 이루어지 않는다고 판정된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병 250명도 학살되었다고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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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폴란드 육군 장교의 견장지폐.

3. 발견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영국폴란드 망명 정부소련과 협력하여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합의하고, 폴란드군 포로를 망명 정부의 병력으로 활용할 것이니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폴란드군 포로들은 도망쳐서 찾을 수 없다.'''' 고 대답하였고, 500여 명만이 영국으로 보내졌으며 소련이 수용하고 있다고 추정되던 수천~수만 명의 포로들은 그 행방이 묘연해지게 된다. 물론 폴란드 인민군 등 공산 계열 폴란드군에 편입된 병력도 적지 않았지만, 아예 행방불명 상태가 된 포로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와중에 이들의 행방을 묻는 폴란드 망명 정부에게 스탈린은 ''''죄다 만주로 도망가 버렸다.'''' 고 대답했다. 참고로 만주는 다른 곳이 아니라 당시엔 일본령 만주국이었던 중국 만주다.
이후 1943년 4월 13일,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4,000여 명이 살해당하여 암매장된 사실을 발견했다. 실로 끔찍하게도 이 사실은 '''폴란드 포로들의 시신을 개가 뜯는 광경이 목격'''되면서 발각되었다. 이 사체들이 입은 복장의 형태, 그리고 실종자들의 명단을 찾아본 결과 이들은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교사, 지역 유지, 경찰, 가톨릭 사제, 가톨릭 수도자 등 폴란드 핵심층들[1]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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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발급된 지그문트 슬로닌스키(Zygmunt Sloninski)의 여권. 의사이자 명목상 폴란드군 소령이기도 했던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1년 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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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안내를 받아 학살 현장의 묘지를 방문한 비시 프랑스 수뇌부. 참고로 나치는 폴란드 점령 이후부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무차별로 탄압하였고 그들이 싫어하는 유대인들은 바비야르(Babi Yar)같은 곳에서 정기적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이를 소련의 만행으로 발표했고, 서방 측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연합국의 공동보조를 균열시키려고 했다. 독일 측의 요청에 의해 중립국 또는 독일 동맹국에서 합동조사반이 파견되어 이를 소련측의 소행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이다. 가짜 증거라도 만들어서 소련을 매도해야 할 판인데 진짜 학살 증거가 나왔으니 당연한 일. 물론 소련은 이를 부인했고, 오히려 '''"이는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다."''' 라고 거짓말을 했고 1944년에는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알아보는 척도 했다.
이런 류의 신변 바꾸기는 학살 진상규명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인데, 난징 대학살 부인론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는 중국인 시체 사진을 두고 '''국민당군이 후퇴하면서 자국 민간인을 처형하고 버린 시체'''라고 주장한다든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의 학살 증거를 모두 '''상대방에서 학살한 후 우리가 한 걸로 조작한 거'''라고 하는 것 등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4. 영미의 묵인 및 침묵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사건을 듣고 조사관을 파견하여 소련군이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당시 같은 연합국 측인 소련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기밀로 처리했다. 이는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영국은 미국보다도 먼저 통신감청 및 암호해독을 통해 독일의 매장지 발견 직후 카틴 학살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먼저 접할 수 있었다.[2] 하지만 나치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연합국인 소련과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수장인 시코르스키 장군에게 행방불명자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사실을 확인한 폴란드 망명 정부는 국제적십자사 위원회에 카틴 숲의 집단 매장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실종된 폴란드군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소련에 공식적으로 요구하였으나, 소련은 1943년 폴란드 망명 정부와의 국교를 '''단절'''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 봐야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하며, 진실을 말한다 해도 자국 포로 수만 명을 학살한 국가와는 아무리 사정이 최악이라도 동맹을 유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잘 아니 아예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자 다른 나라들도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에 대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소련의 국교 단절에 불쾌함을 느꼈으며, 미국 또한 대독일전을 같이 수행하는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한 소련의 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테헤란 회담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소련-폴란드 간 국경선 확정 문제로 불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나치를 먼저 때려잡고 나서 나중에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일단 침묵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5. 전쟁 이후


1946년, 소련의 법 기관들은 나치 독일에게 카틴 숲 학살의 책임을 전가했다. 이 당시 폴란드 정부는 폴란드계 소련인[3]들로 구성되어 있는 위성국가였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폴란드의 상황은 영화 카틴에 잘 나와 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폴란드에서도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가 득세했고, 1970년대부터 공산 폴란드 정부는 카틴 사건에 대해서 세 차례에 걸쳐 재조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장군과 폴란드 공산 정부는 진상 재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이는 야루젤스키 장군이 1939년 당시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동부 출신으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시력이 손상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부모를 잃는 등의 고역을 치룬 경험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4]
연합국 역시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악행을 선전하는 것은 체제 경쟁에 큰 도움이 되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1952년, 미국 의회는 카틴 숲의 학살은 소련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냈으며, 1970년에 영국은 카틴 숲 학살자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하여 소련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6. 소련 몰락 이후


1989년과 1990년, 소련의 대혼란기에 소련 학자들이 카틴 학살 사건과 관련된 문서[5]를 찾아내었고 결국 1990년 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NKVD에 의한 포로 학살을 공식 시인하였다.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학살 명령이 담긴 스탈린흐루쇼프 등의 서명이 들어간 다량의 관련 문서들이 기밀 해제됨에 따라 이는 공식적인 사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2012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국 쪽 문서의 기밀 해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현재의 러시아 정부는 카틴 숲 학살에 대해 ''''이는 NKVD에 의해 자행된 일이지만 이를 라브렌티 베리야 등 NKVD 쪽이 미리 계획하고 제안, 실행한 점을 들어 현재 러시아에게 국가적인 책임은 없다.'''' 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폴란드러시아 간 외교적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러시아소련의 계승국이고 소련의 통치자가 이오시프 스탈린이며 그가 학살의 최고 책임자임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6]
현재 폴란드MD에 가입하네 마네 하는 입장을 보이자, 결국 러시아에서도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이 카틴 학살 추모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후술하는 영화 '카틴'을 방송사들마다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10년, 카틴 학살 7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스몰렌스크로 가던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당시 대통령 및 각료들이 탄 Tu-154 여객기가 스몰렌스크 공항 근방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7] 조종사 과실[8] 및 공항 시설 미비[9]로 인한 관제 실수(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애초에 착륙 허가를 내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가 원인이지만, 음모론(폴란드 카친스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손을 썼다는 주장)도 떠돌고 있고,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국내에 반러 감정이 불까봐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 사고 수습을 하고 있다. 원인이 좀 말이 되지 않았는지 폴란드 측에서 재조사를 하는 중. 자세한 건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 문서 참조.
이 사건을 다룬 2007년작 폴란드 영화 '카틴(Katyn)'도 있다. 2010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폴란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가 후원했다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러시아 공화국은 애도를 표하고 애도 기간 동안 이 영화를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하여 방영하였다. 참고로 감독은 ''''재와 다이아몬드''''의 감독인 안제이 바이다이며, 감독의 아버지인 야쿠프 바이다(Jakub Wajda)가 카틴 학살 때 피살됐다고 한다. 한국어 더빙도 되어 KBS 명화극장으로 방영한 바 있다.
만화 고르고13에서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있다.

7. 뒷이야기들


  • 사실 소련의 이와 같은 학살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초창기에 연방으로 억지로 통합한 나라 대다수에서 흔하게 벌어진 일이다. 아르메니아, 조지아, 타지키스탄 등 각지에서 좌우파를 따지지 않고 반소적인 이념이나 주장을 하던 많은 지식인들을 끌고 가 불문곡직으로 전원 사살, 암매장했다. 문제는 카틴 학살처럼 크게 알려지지도 못하고 어디에 묻혀진지 기록조차 없어 아직도 그들이 어디에 묻혀진 지 도통 모르는 게 허다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타지키스탄은 우연히 한 나무꾼이 당시 타지키스탄 내 지도자들을 학살하는 현장을 목격하곤 수십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식들에게 그 장소를 이야기했고,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서야 그 자식들이 이 사실을 알렸다. 타지키스탄 정부는 그 장소를 파낸 끝에 학살된 지도자들의 유골과 유품들을 찾아냈고, 이 장소를 성지화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리고 있어서 아직도 이렇게 묻혀진 곳을 찾지못해 아쉬워하는 다른 옛 소련 가맹국들에게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 밖에 키르기스스탄도 일부 학살 현장이 이전부터 알려져서 독립하자마자 거길 파내어 1937년에 학살당한 137구 인사들 시체와 유품을 찾아내기도 했으나, 여기도 상당수 다른 학살 현장은 알려지지 못했다.
  •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획득한 폴란드 포로들은 대략 24만여 명이고, 이 중에서 12만여 명은 1939년에서 40년 사이에 석방되거나 자력으로 탈출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10개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문제는 적정 수용규모는 실제 포로수의 절반 정도였던 데다가 설비 자체가 극단적으로 열악하여 포로들의 불만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던 것. 당연히 수용소를 관리하는 소련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고, 또한 포로에게 들어가는 보급품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스탈린과 NKVD의 실무진들로 하여금 폴란드 장교단에 대한 학살을 결정하는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핀란드군 포로수용소는 정작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 포로를 고작 1천여 명밖에 잡지 못했고, 그나마도 규모가 가장 작은 수용소에 몰아 넣었는데도 여유공간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결국 딴 생각이 있어서 학살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확실한 건 폴란드군 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온다.
  • 카틴에서 학살된 폴란드군 장교들은 오스타쉬코프, 코젤스크, 스타로비엘스크 등의 "특별수용소"에 집중되었다.
  • 게다가 1940년 4월에만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NKVD 직할의 감옥에 수용된 폴란드인들도 대량 학살당했다. 이때는 폴란드인만이 아니라 발트 3국우크라이나인들도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 포로가 된 폴란드 장교들이 모두 "카틴 학살"에서 살해당한 것은 아니며, 잡힌 포로 중 반은(포로 4만명 중 약 2만명) 소련이 설정한 "심사기준"을 통과하여 살아남았다. 이런 경우는 폴란드 장교들의 성향에 대한 조사 중에서 친소련적(덤으로 반나치는 아닌) 경향을 보인 사람-지그문트 베를링(Zygmunt Berling) 중령이 대표적-이거나, 외국의 외교기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들,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스타니스와프 스비아니에비츠(Stanisław Swianiewicz) 교수가 대표적으로 포로 성향 심사시에 유창한 러시아어로 협조한 것이 심사를 책임진 바실리 자루빈의 눈에 띄어 카틴 숲 부근의 역에 도착했을 때 학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들 및 "기타" 분류로서 3개 포로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들의 동향을 은밀히 알려온 사람-최소한 1명의 장군이 이에 속했다-들이다.
  • 카틴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폴란드군 장병들은 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는 영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허가받아서 폴란드 망명 정부 아래에서 싸우거나,[10] 혹은 소련이 조직한 친공산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나치와 싸웠다. 소련은 이런 친공산 폴란드군도 못 믿어서 이 부대에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입대시키는 방법으로 감시했다. 참고로 단순히 감시 목적만은 아니었다. 카틴 학살에서 워낙 많은 폴란드 장교와 부사관들이 죽었기에,[11] 이들을 보충할 수가 없어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장교로 꽂아넣은 것. 하지만 이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폴란드어를 잘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소련 시민으로 살아서 폴란드인이라기보다는 소련인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했기 때문에[12]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더욱 크게 샀다.[13]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살아남아 후에 친공산 폴란드군을 이끈 베를링 장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대항하여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하려고 했으나, 이 봉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스탈린은 베를링 장군을 해임하였다. 어쨌든 이 친공산 폴란드군은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하였고, 후에 폴란드 공산 정부가 군을 재건할 때 주축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반공 폴란드군의 장병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어렵게 살았다.
  • 카틴 학살 현장을 발굴한 나치 독일은, 학살한 시신을 매장할 경우 언젠가는 들통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수용소에서 나온 시신들을 매장 대신 화장하기 시작했고, 이미 매장된 시신도 수용자들을 동원해 도로 파내서 화장해버렸다.


[1] 흔히 카틴 학살 사건이 폴란드군 장교단만을 대상으로 한 학살인 것처럼 알려진 경우가 제법 많은데, 이는 폴란드가 일종의 군사독재정권 하에 있었던 탓이 크다. 당시 폴란드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군국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이 우대를 받는 경향이 컸고, 이 때문에 폴란드 지식인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 계급을 받았다. 대학만 입학해도 일단 소집하면 병사가 아니라 사관후보생으로서의 부사관으로 입대한 후 이름만 예비역 부사관인 상태로 곧장 예비역에 편입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일단 장교인 건 맞다'''. 특히 지식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성과에 따라서 군 계급도 순차적으로 올라가곤 했기 때문에, 계급과 연령만 봐서는 현역인지 예비역인지 정도가 아니라 명목상으로만 장교였는지도 알기 어렵다.[2]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에니그마'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다.[3] 대표적으로 소련군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폴란드계였기 때문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새로 생긴 폴란드 인민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4]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에서 논란의 인물이다. 폴란드에서 1981년 반공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군부를 이끌던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실상 집권했다. 이것 때문에 전두환 같은 악명을 뒤집어 썼으나, 야루젤스키는 프라하의 봄처럼 이런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군의 침공 징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약처방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폴란드 공산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정부의 수장이었으며, 레흐 바웬사의 혁명이 성공하자 순순히 정권을 민주 정부에 이양하여 물러나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았다.[5] 이 문서에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여러 수용소에 수감 중인 폴란드인 약 25만 명을 처형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주요 인물들이 문서에 서명하였다.[6] 당장 오늘날 러시아가 UN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 있는 것도 소련의 계승국이기 때문이다.[7] '''이 사건이 뉴스에 나오고 나서야 카틴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처음 안 일반인들도 있었다'''[8] 안개가 심하여 관제탑에서는 착륙이 어렵다고 안내하였으나 착륙을 강행하였다. 거기다 고도 경보가 울리자 고도계를 수동으로 더 높게 설정하여 경보를 꺼버리기까지 했으니 사고가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9] 계기착륙장치 미비.[10] 그 유명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참고로 안데르스는 소련이라면 치를 떠는 강경한 민족주의자였다고. 하긴 동료들을 짐승처럼 다루고 도살한 자들이니...[11] 위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한 국가의 군대를 충분히 꾸릴 수 있는 규모이다(...)[12] 이들 중 소련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종교를 믿던 이들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 신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정교회를 믿으며, 폴란드 본토에 사는 소수의 정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러시아 등 동슬라브계 후손이거나 러시아 치하에서 러시아화된 폴란드인의 후손이다.[13] 폴란드계 소련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초대 폴란드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소련의 앞잡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쫓겨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