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스태퍼드
[image]
Thomas P. Stafford
1930년 9월 17일
미국의 군인, 우주 비행사.
NASA 우주 비행사 출신으론 처음으로 중장까지 진급한 인물이다. 대장은 케빈 패트릭 칠튼이 최초이다. 이게 왜 대단하냐면, 우주 비행사로 NASA에 파견된 동안은 '''폭풍간지''' 하나는 어지간한 장군 저리가라지만 정작 군 커리어에서는 지휘관이나 참모 보직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빵구가 나고 장교단과의 연계도 흩어지게 된다.[1] 그럼에도 중장까지 단 걸 보면 실로 보기 드문 커리어.
1930년 9월 17일에 태어났고 고향은 오클라호마의 웨더포드이다. 어릴 적엔 보이스카웃에서 놀았고 1948년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2년에 '''미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미국공군사관학교가 생기기 전이라서 미국육군사관학교와 해사에서 임관 인원의 일부를 공군으로 배치하던 시절이었다. 동기로 짐 러블이 있는데 짐은 해군으로 갔다. 미 공군과 미 해군은 제독들의 반란을 겪을 정도로 사이도 안 좋았고 당시 미 공군 장교단의 주류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육군 항공대 장교들이었기에 험난한 군생활을 했을 듯...
조종사로 활동하다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고, 1962년에 NASA가 야심차게 뽑은 뉴 나인(New Nine, NASA 우주인단 2기)에 선발된다. 제미니 계획에서 제미니 6A호, 제미니 9호[2] , 이후 아폴로 계획에서는 아폴로 11호의 리허설 격[3] 이었던 10호의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임무 중엔 컬러 텔레비전과 관련된 것도 있었고, 아폴로 10호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인 우주선의 최고 속도 기록 등 갖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주선에서 똥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목격'''한 사건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폴로 10호 문서 참조
이후 NASA의 아폴로와 스카이랩 계획에서는 지상에서 승무원 교육과 팀 배정을 담당했다.
한편 1971년에는 소유즈 11호의 재진입 도중 여압복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사망한 세 소련 우주비행사의 소련 국장에 NASA의 조문단으로 참가하여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소련과의 합동 우주개발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image]
스타 시티에서의 훈련...
4차 비행인 1975년, 미국이 문레이스의 승자로 결정난 가운데 데탕트 시대를 여는 상징적 사건인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 아폴로 사령관을 맡았고, 인류 최초의 EVA를 실시했던 소련의 우주 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Alexey Leonov)와 큰 친분을 쌓았다. 함께 올라간 이들 중에는 머큐리 계획의 멤버였으나 심장병으로 행정직을 전전하다 근성으로 우주에 올라간 디크 슬레이튼도 있었다. 총 우주체류시간은 21일 3시간 42분이다.
[image]
아폴로 측 승무원들. 디크 슬레이튼, 밴스 브랜드[4] , 그리고 스태퍼드.
[image]
양측의 합동 찍찍... 레오노프 옆의 소련 우주비행사는 발레리 쿠바소프. [5] 이들 중 디크 슬레이튼을 제외한 4인은 아직 생존해 있고 여전히 양국의 우주개발 교류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아폴로 계획을 다룬 HBO의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에서는... 제일 중요한 우주비행 장면은 진짜 살짝만 나오면서 '''잘렸다.''' 지못미. 사실 아폴로 10호가 달 착륙선 개발 완료라는 큰 의미를 갖는 아폴로 9호에 비해 별다른 사항이 없이 11호의 리허설 성격이었기 때문에 10호를 자세히 다루기엔 애매하기도 했다. 우주에서만 잘렸다 뿐이지 지상에서의 이야기에서는 꽤 비중이 있게 나오긴 한다. 제미니 계획의 첫 유인 미션인 제미니 3호로 함께 배정되어 팀을 이뤘던 선배 앨런 셰퍼드가 귓병을 앓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인물. 그런데 셰퍼드는 스태퍼드에게 나 잘리면 너도 잘리는 거라고 겁을 주며 이르지 말라고 한다(...)[6] 그래도 스태퍼드가 인맥을 동원하여 소개받은 시험적인 수술을 통해 셰퍼드는 달에 갈 수 있었다.
오클라호마 사투리가 매우 심했던 모양이다. 레오노프 말로는 아폴로-소유즈 미션에서 영어/러시아어/오클라호마어라는 3개 언어가 사용되었다나(...)
해사 1952년 임관자 가운데 가장 먼저 별을 달았다. 1975년 아폴로-소유즈 미션 당시 준장에 이르렀는데, 이는 미/소의 양측간 데탕트 분위기 형성을 위해 일부러 '양국 공군의 장군들이 우주에 올라가서 양국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프로파간다 성격으로 진급한 것이긴 했으나 계속하여 빨리 진급하였다. 1978년에 48세의 매우 어린 나이로 중장을 달았다. 엘모 줌왈트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인사적체가 그리 심할 때가 아니어서 장군을 빨리 달 수 있었다. 60대 장군들도 자주 나오는 21세기의 미군과 다를 때. 1979년에 퇴역했다.[7]
노년에도 항공우주개발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지속했다. STS-107의 비극적인 공중분해 사고 이후 마찬가지로 우주비행사 출신 리처드 코비(Richard Covey)와 함께 재발 방지 위원회(Stafford-Covey Commission)를 이끌었다.
동명이인이자 동향인 천문학자 톰 스태퍼드도 나름대로 유명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남남이다. 이 톰은 소행성 천문학자로 활동 중인데, 우주에 갔다온 톰과 소행성 찾는 톰을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
[1] 여성의 육아 휴직만큼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육아휴직이 길어야 3년을 넘지 않는데 NASA 커리어는 길게는 십수년까지 이어지니... [2] 원래 백업이었지만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이 T-38 추락사고로 함께 순직하자 급히 정규팀으로 배정되었다.[3] 리허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좀 그런 것이, 아폴로의 사령/기계선과 달 착륙선이 함께 달로 향한 것은 10호가 처음이었다. 다만 이 미션에서는 달 착륙선의 달에서의 발사 기능이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착륙을 감행했다가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결국 달에서는 착륙선은 홀로 고도 15km 지점에서 비행을 하는 저궤도상 테스트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 당시 함께 달에 갔던 사령선 조종사 존 영과 착륙선 조종사 유진 서넌은 아폴로 16호와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으로 달을 밟았다.[4] 아폴로 18호가 취소되기 전에 사령선 조종사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훗날 SF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5] 사실 이 말은 브랜드에게 좀 억울한 것이, 브랜드 역시 우주왕복선이 4차례의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첫번째로 정규 궤도 미션을 시작한 STS-5의 사령관이었으며 1990년 12월 STS-35 미션까지도 활동했다. 우주비행사로는 물러난 이후에도 실험기 연구에 매진하며 2008년까지 오랫동안 근무했던 나름대로 레전드 소리 들을만한 커리어를 가졌다. [6] 심장질환이 발견되어 그라운딩 처분이 내려져서 행정직으로 활동하던 디크 슬레이튼이 제미니 이후 아폴로까지 팀원 배정을 맡았다. 초창기였기 때문에 한번 정해진 팀을 맘대로 쪼개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셰퍼드가 잘리면 스태퍼드 역시 잘릴 수 있었다. 결국 둘 다 거스 그리섬과 존 영으로 교체되었고, 스태퍼드는 제미니 6A에서야 또다른 머큐리 시절 베테랑 월리 시라와 함께 우주에 나가게 된다. [7] 당시는 중장으로 최저 복무기간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요새는 3년 근무 안 하면 소장으로 강등되어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