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엄프 어클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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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umph Acclaim'''
영국의 자동차 업체인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생산한 세단형 준중형차이다. 혼다와의 기술제휴 관계가 낳은 첫 결과물인 동시에 유럽에서 생산된 첫 일본차, 또한 영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바꾼 전환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마이클 에드워즈 경이 1977년에 브리티시 레일랜드(이하 BL)의 새 회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BL 내부의 엄청난 '혼란'을 접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내부를 과감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BL의 재건을 위해 추진된 계획들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업체와의 합작'으로, 다른 업체와 BL이 합작을 함으로써, 1970년대 내내 나락으로 떨어지던 BL차의 품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BL의 오스틴-모리스 디비젼에서는 1965년으로 그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트라이엄프의 소형 세단인 돌로마이트의 후속 차종을 준비하던 참이였으며, 위에서의 기술제휴 전략에 따라 알파로메오, AMC, BMW, 미국 및 영국 크라이슬러]], 피아트, 포드 모터 컴퍼니, 제너럴 모터스, 혼다, 마쯔다, 메르세데스 벤츠, 미쯔비시, 닛산, 푸조-시트로엥 그룹, 르노, 사브, 스바루, 토요타, 폭스바겐, 볼보 등의 수많은 업체들을 고려하던 중 제1순위로 크라이슬러의 유럽 자회사였던 루츠 그룹(Rootes Group), 2순위로 일본의 혼다기연공업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다. [1] 이때 BL에서는 "Dovetail"이라는 이름 하에 루츠 그룹과의 기술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영국 크라이슬러가 미국 본사로부터 매각되어 프랑스의 푸조-시트로엥 그룹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무산될 낌세가 보였고, 푸조와 영국 크라이슬러 측에서도 BL과의 합작의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 1978년 9월 6일자로 무산되었다.
한편, 1977년 초반부터는 당시 프랑스의 공기업이였던 르노와도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BL에서는 랜드로버의 유럽 및 미국 홍보 권리를 르노에게 양도하고 르노에서는 신차인 르노 9를 영국에서 BL차로서 생산 및 판매를 하게 해 주는 형태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1978년 초에는 에드워즈가 직접 나서서 르노와의 연결 고리를 계속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르노에서 BL판 르노 9는 영국 내수에서만 BL차로 판매할 수 있는 등으로 BL에게 불리한 조선을 요구하고 있었고, 거기에다가 그해 4월 1일에 르노가 미국 AMC와 합작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르노와의 거래도 무산되었다.
결국 BL에서는 제2후보로 뽑아 두었던 혼다와의 기술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2] 에드워즈 회장은 지인이였던 전임 도쿄 대사인 프레드릭 워너 경(Sir Fred Warner)을 통해 기술제휴 제안에 대한 혼다 측의 반응을 알아보기로 했으며, 당시 해외진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혼다기연공업의 회장인 카와시마 키요시(河島喜好)도 BL과의 기술제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78년 10월에는 레이 호록스(Ray Horrocks) 당시 오스틴-모리스 상무이사를 비롯한 BL 경영진 팀이 혼다와의 회담 장소로 정해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으며, 그렇게 하여 혼다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진행 과정은 순조로웠으며, 1979년 초반에 혼다에서는 자신들이 제공할 차를 보여주고자 BL의 사업 전략부장 마이크 카버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혼다에서 공개했던 차는, 당시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던 세단형 시빅인 혼다 발라드(Ballade)로 카버 전략부장은 발라드 세단이 향후 재편될 BL 라인업에 잘 맞을만한 차라고 생각했던 한편, 유럽에서 잘 나가는 라인이였던 해치백이 아닌 3박스 세단이 그 기반으로 제공되었던 점이 실망스럽기도 했다고 밝혔다. 카버 전략부장을 비롯한 BL측 인사들은 이 차를 기반으로 한 BL차가 어떻게 BL 라인업에 잘 끼워맞춰질 수 있을지 구상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BL과 혼다 측의 협상도 혼다 발라드를 BL 라인업에 반영하는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한번 시작된 협상은 서로 만족할 만한 내용으로 신속히 흘러갔다. 결국 1979년 12월 26일, 혼다와 BL의 기술제휴 협상이 성사되었다.[3]
이렇게 해서 혼다-BL간의 기술제휴 협상이 성사되었으니, 재규어-로버-트라이엄프 디비젼에게는 혼다 발라드를 BL 라인업에 끼워맞추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인 "Bounty"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이 차가 생산될 공장으로는 돌로마이트가 생산되던 캔리(Canley) 공장으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에드워즈 산하의 공장 정리 과정에서 브랜드 디비젼을 재정리하면서 Bounty 프로젝트가 오스틴-모리스 디비젼으로 통합되어 옥스포드의 카울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한편, 시장조사 과정에서는 Bounty 프로젝트가 제공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생산 목표량을 높였으며(매주 1500대) Bounty 프로젝트가 세단이였다는 점은 당시 BL이 개발하던 오스틴 메트로와 오스틴 마에스트로의 출시 기간에 따른 2년간의 공백기를 매꿀 수 있다는 동시에 판매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또한, 트라이엄프 돌로마이트의 후속으로서 이를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기로 계획하는 동시에, 기존의 오래된 라인업(모리스 마리나와 오스틴 알레그로)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은, 알레그로와 마리나를 살 사람들의 입장에서 Bounty 프로젝트는 이들 2개 라인의 경쟁차라기보다는 그 대안으로 비춰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기존 라인업을 크게 간섭할 가능성도 낮았다. 생산 방식으로는 단순히 혼다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80퍼센트의 부품을 영국에서 만들어 사용하고 공장 인도가격의 70퍼센트를 영국이 차지할 비중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이러한 행보가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또한 여기에 쓰일 1335cc 엔진은 일본에서 만들어지기는 하나, 조립 과정을 영국에서 진행하도록 함으로서 다른 BL차 라인업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일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으로도 보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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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7일에 출시된 어클레임은 실질적으론 혼다 발라드와 별로 다르다고 할 것이 없었다. 트라이엄프 벳지가 붙은 그릴, 범퍼 디자인, '통상적인' 위치(즉 앞문)에 자리잡은 백미러, 그리고 포드 코티나에서 가져온 앞좌석 구조 정도가 외양상으로의 차이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 둘 간의 차이점을 좀 더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보더라도 발라드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마감, BL차 전용 페인트 도장, 그리고 일본 사양의 단일 기화기를 대신하는 Keihin제 이중 기화기, 그리고 영국 시장에 맞추어 변화를 준 기존의 독립식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 세팅 정도로 매우 소소했다. 엔진도 혼다에서 개발한 1335cc OHC 엔진이 적용되었고 5단 수동과 3단 반자동변속기(혼다 Hondamatic과 동일)가 적용되었으며, 트림은 L, HL, HLS, CD의 4개 트림이 제공되었다.
차 자체의 질과는 별개로,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의 존제는 '유럽에서 생산되는 첫 일본차'라는 지위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존재였다. 영국은 몰론 프랑스와 이탈리아처럼 여전히 일본 업체에게 반감이 남아 있던 국가들은 '트로이의 목마' 등으로 비유하면서 우려했는데, 어클레임이 출시되기 1주 전, 영국 '타임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클 에드워즈는 이러한 우려들에 대해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 자동차 사업에 대한 실리적인 반응이며, 카울리 공장에 2천명분의 일자리를 살리고, 수없이 많은 영국 부품산업의 일자리 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로 어클레임이 "영국에 적합한 영국차"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대응했다.
기본적으로 차 자체는 1년 전에 출시된 소형차인 오스틴 메트로에 비하면 고객들의 기대를 크게 충족시키진 못했다. 고객들이 보기에도 어클레임은 "트라이엄프판 혼다차"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영국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포드와 제너럴 모터스와 예전부터 영국에서 차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이유로 별다른 반감을 보이진 않았으며, 기존의 돌로마이트 오너들 다수는 별다른 반감 없이 어클레임을 사러 트라이엄프 대리점을 찾아가곤 했다. 성능, 연비, 높은 수준의 조립품질, 그리고 운전 재미에 대해 호평했으며, 또한 당시 기준으로는 옵션 사양도 잘 들어가 있었기때문에 소비자와 언론 모두가 대체로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일본차"인 만큼 신뢰성이 높았던 것으로 유명해 잠시나마 BL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 주기도 했으며, BL 측의 기대치보단 살짝 못 미치기는 했어도 1982~1983년 사이에 1965년 이후 트라이엄프 차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잘 팔리는 차 10위 이내로 들어가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5]
어클레임의 경험을 통해서, BL에서는 혼다로부터 자신들의 제품의 조립품질과 그 기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배웠고, " 조립을 위해 설계된 차"라면 자신들의 인력들이 여전히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클레임의 품질과 신뢰성은 BL만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부와 일본 업체들로부터 "영국의 조립 인력과 일본의 기술력이 잘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영국 제조업이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어클레임이 성공작으로 증명되자, 로버는 혼다와 같이 어클레임의 후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클레임의 선례를 따라 3세대 시빅의 세단형인 2세대 발리드가 베이스로 제공되었고 실내 공간도 좀 더 유럽 시장에 알맞는 크기였으며, 어클레임 때보다 훨씬 BL(당시 오스틴 로버 그룹)이 좀 더 많이 손을 댈 수가 있기까지 했으니 상당한 기대주가 될 만했다. 그러나 이 SD3 프로젝트를 출시할 브랜드를 고르는 일은 좀 까다로운 일이였는데, 당시 오스틴 로버의 개발진들에 의하면 트라이엄프 브랜드는 스포츠카인 TR7/TR8의 단종으로 거의 수명이 끝나다시피 했던 상황이였고, 어클레임조차 마에스트로가 출시될 때까지의 기간을 매꿀 '임시방편'으로서의 역할이 다 끝난 상황인데다가 트라이엄프가 가진 '싸구려 스포츠카 메이커' 이미지도 걸림돌이었다. 더군다다, 이때는 이미 마에스트로의 시판이 임박했었고, SD3은 대량판매용 차량인 마에스트로와의 판매간섭을 막고자 어클레임보다 더 윗급 시장을 노리는 걸로 방향이 잡혀 로버 브랜드로 출시가 준비되기에 이른다.
결국 1984년 여름에 133,625번째이자 마지막 어클레임이 카울리 공장을 빠져나가면서 트라이엄프 브랜드도 그 끝을 맞이하였고, 오스틴 로버에서는 오스틴, 로버, MG 브랜드만으로 승용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한편, SD3 프로젝트는 그 해에 "로버 213"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으며, 이후 800과 2세대 200/400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차들이 혼다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고, 오스틴 브랜드가 마에스트로와 몬테고의 부진으로 1987년에 사라졌을 때 로버 브랜드가 200으로 대표되는 소형차 라인까지 흡수했다. 한편 혼다는 1985년에 영국 스원든(Swindon)에다가 자신들의 공장을 짓고 4년 뒤를 기점으로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닛산에서도 1984년에 공장을 짓고 1986년부터 자신들의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Totally Equipped to Triumph'''- 당시 광고 카피.
'''Triumph Acclaim'''
1. 개요
영국의 자동차 업체인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생산한 세단형 준중형차이다. 혼다와의 기술제휴 관계가 낳은 첫 결과물인 동시에 유럽에서 생산된 첫 일본차, 또한 영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바꾼 전환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2. 배경
마이클 에드워즈 경이 1977년에 브리티시 레일랜드(이하 BL)의 새 회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BL 내부의 엄청난 '혼란'을 접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내부를 과감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BL의 재건을 위해 추진된 계획들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업체와의 합작'으로, 다른 업체와 BL이 합작을 함으로써, 1970년대 내내 나락으로 떨어지던 BL차의 품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BL의 오스틴-모리스 디비젼에서는 1965년으로 그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트라이엄프의 소형 세단인 돌로마이트의 후속 차종을 준비하던 참이였으며, 위에서의 기술제휴 전략에 따라 알파로메오, AMC, BMW, 미국 및 영국 크라이슬러]], 피아트, 포드 모터 컴퍼니, 제너럴 모터스, 혼다, 마쯔다, 메르세데스 벤츠, 미쯔비시, 닛산, 푸조-시트로엥 그룹, 르노, 사브, 스바루, 토요타, 폭스바겐, 볼보 등의 수많은 업체들을 고려하던 중 제1순위로 크라이슬러의 유럽 자회사였던 루츠 그룹(Rootes Group), 2순위로 일본의 혼다기연공업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다. [1] 이때 BL에서는 "Dovetail"이라는 이름 하에 루츠 그룹과의 기술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영국 크라이슬러가 미국 본사로부터 매각되어 프랑스의 푸조-시트로엥 그룹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무산될 낌세가 보였고, 푸조와 영국 크라이슬러 측에서도 BL과의 합작의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 1978년 9월 6일자로 무산되었다.
한편, 1977년 초반부터는 당시 프랑스의 공기업이였던 르노와도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BL에서는 랜드로버의 유럽 및 미국 홍보 권리를 르노에게 양도하고 르노에서는 신차인 르노 9를 영국에서 BL차로서 생산 및 판매를 하게 해 주는 형태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1978년 초에는 에드워즈가 직접 나서서 르노와의 연결 고리를 계속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르노에서 BL판 르노 9는 영국 내수에서만 BL차로 판매할 수 있는 등으로 BL에게 불리한 조선을 요구하고 있었고, 거기에다가 그해 4월 1일에 르노가 미국 AMC와 합작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르노와의 거래도 무산되었다.
결국 BL에서는 제2후보로 뽑아 두었던 혼다와의 기술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2] 에드워즈 회장은 지인이였던 전임 도쿄 대사인 프레드릭 워너 경(Sir Fred Warner)을 통해 기술제휴 제안에 대한 혼다 측의 반응을 알아보기로 했으며, 당시 해외진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혼다기연공업의 회장인 카와시마 키요시(河島喜好)도 BL과의 기술제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78년 10월에는 레이 호록스(Ray Horrocks) 당시 오스틴-모리스 상무이사를 비롯한 BL 경영진 팀이 혼다와의 회담 장소로 정해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으며, 그렇게 하여 혼다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진행 과정은 순조로웠으며, 1979년 초반에 혼다에서는 자신들이 제공할 차를 보여주고자 BL의 사업 전략부장 마이크 카버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혼다에서 공개했던 차는, 당시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던 세단형 시빅인 혼다 발라드(Ballade)로 카버 전략부장은 발라드 세단이 향후 재편될 BL 라인업에 잘 맞을만한 차라고 생각했던 한편, 유럽에서 잘 나가는 라인이였던 해치백이 아닌 3박스 세단이 그 기반으로 제공되었던 점이 실망스럽기도 했다고 밝혔다. 카버 전략부장을 비롯한 BL측 인사들은 이 차를 기반으로 한 BL차가 어떻게 BL 라인업에 잘 끼워맞춰질 수 있을지 구상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BL과 혼다 측의 협상도 혼다 발라드를 BL 라인업에 반영하는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한번 시작된 협상은 서로 만족할 만한 내용으로 신속히 흘러갔다. 결국 1979년 12월 26일, 혼다와 BL의 기술제휴 협상이 성사되었다.[3]
이렇게 해서 혼다-BL간의 기술제휴 협상이 성사되었으니, 재규어-로버-트라이엄프 디비젼에게는 혼다 발라드를 BL 라인업에 끼워맞추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인 "Bounty"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이 차가 생산될 공장으로는 돌로마이트가 생산되던 캔리(Canley) 공장으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에드워즈 산하의 공장 정리 과정에서 브랜드 디비젼을 재정리하면서 Bounty 프로젝트가 오스틴-모리스 디비젼으로 통합되어 옥스포드의 카울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한편, 시장조사 과정에서는 Bounty 프로젝트가 제공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생산 목표량을 높였으며(매주 1500대) Bounty 프로젝트가 세단이였다는 점은 당시 BL이 개발하던 오스틴 메트로와 오스틴 마에스트로의 출시 기간에 따른 2년간의 공백기를 매꿀 수 있다는 동시에 판매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또한, 트라이엄프 돌로마이트의 후속으로서 이를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기로 계획하는 동시에, 기존의 오래된 라인업(모리스 마리나와 오스틴 알레그로)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은, 알레그로와 마리나를 살 사람들의 입장에서 Bounty 프로젝트는 이들 2개 라인의 경쟁차라기보다는 그 대안으로 비춰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기존 라인업을 크게 간섭할 가능성도 낮았다. 생산 방식으로는 단순히 혼다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80퍼센트의 부품을 영국에서 만들어 사용하고 공장 인도가격의 70퍼센트를 영국이 차지할 비중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이러한 행보가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또한 여기에 쓰일 1335cc 엔진은 일본에서 만들어지기는 하나, 조립 과정을 영국에서 진행하도록 함으로서 다른 BL차 라인업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일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으로도 보았다.[4]
3. 출시 및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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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7일에 출시된 어클레임은 실질적으론 혼다 발라드와 별로 다르다고 할 것이 없었다. 트라이엄프 벳지가 붙은 그릴, 범퍼 디자인, '통상적인' 위치(즉 앞문)에 자리잡은 백미러, 그리고 포드 코티나에서 가져온 앞좌석 구조 정도가 외양상으로의 차이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 둘 간의 차이점을 좀 더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보더라도 발라드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마감, BL차 전용 페인트 도장, 그리고 일본 사양의 단일 기화기를 대신하는 Keihin제 이중 기화기, 그리고 영국 시장에 맞추어 변화를 준 기존의 독립식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 세팅 정도로 매우 소소했다. 엔진도 혼다에서 개발한 1335cc OHC 엔진이 적용되었고 5단 수동과 3단 반자동변속기(혼다 Hondamatic과 동일)가 적용되었으며, 트림은 L, HL, HLS, CD의 4개 트림이 제공되었다.
차 자체의 질과는 별개로,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의 존제는 '유럽에서 생산되는 첫 일본차'라는 지위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존재였다. 영국은 몰론 프랑스와 이탈리아처럼 여전히 일본 업체에게 반감이 남아 있던 국가들은 '트로이의 목마' 등으로 비유하면서 우려했는데, 어클레임이 출시되기 1주 전, 영국 '타임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클 에드워즈는 이러한 우려들에 대해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 자동차 사업에 대한 실리적인 반응이며, 카울리 공장에 2천명분의 일자리를 살리고, 수없이 많은 영국 부품산업의 일자리 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로 어클레임이 "영국에 적합한 영국차"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대응했다.
기본적으로 차 자체는 1년 전에 출시된 소형차인 오스틴 메트로에 비하면 고객들의 기대를 크게 충족시키진 못했다. 고객들이 보기에도 어클레임은 "트라이엄프판 혼다차"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영국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포드와 제너럴 모터스와 예전부터 영국에서 차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이유로 별다른 반감을 보이진 않았으며, 기존의 돌로마이트 오너들 다수는 별다른 반감 없이 어클레임을 사러 트라이엄프 대리점을 찾아가곤 했다. 성능, 연비, 높은 수준의 조립품질, 그리고 운전 재미에 대해 호평했으며, 또한 당시 기준으로는 옵션 사양도 잘 들어가 있었기때문에 소비자와 언론 모두가 대체로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일본차"인 만큼 신뢰성이 높았던 것으로 유명해 잠시나마 BL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 주기도 했으며, BL 측의 기대치보단 살짝 못 미치기는 했어도 1982~1983년 사이에 1965년 이후 트라이엄프 차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잘 팔리는 차 10위 이내로 들어가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5]
어클레임의 경험을 통해서, BL에서는 혼다로부터 자신들의 제품의 조립품질과 그 기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배웠고, " 조립을 위해 설계된 차"라면 자신들의 인력들이 여전히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클레임의 품질과 신뢰성은 BL만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부와 일본 업체들로부터 "영국의 조립 인력과 일본의 기술력이 잘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영국 제조업이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어클레임이 성공작으로 증명되자, 로버는 혼다와 같이 어클레임의 후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클레임의 선례를 따라 3세대 시빅의 세단형인 2세대 발리드가 베이스로 제공되었고 실내 공간도 좀 더 유럽 시장에 알맞는 크기였으며, 어클레임 때보다 훨씬 BL(당시 오스틴 로버 그룹)이 좀 더 많이 손을 댈 수가 있기까지 했으니 상당한 기대주가 될 만했다. 그러나 이 SD3 프로젝트를 출시할 브랜드를 고르는 일은 좀 까다로운 일이였는데, 당시 오스틴 로버의 개발진들에 의하면 트라이엄프 브랜드는 스포츠카인 TR7/TR8의 단종으로 거의 수명이 끝나다시피 했던 상황이였고, 어클레임조차 마에스트로가 출시될 때까지의 기간을 매꿀 '임시방편'으로서의 역할이 다 끝난 상황인데다가 트라이엄프가 가진 '싸구려 스포츠카 메이커' 이미지도 걸림돌이었다. 더군다다, 이때는 이미 마에스트로의 시판이 임박했었고, SD3은 대량판매용 차량인 마에스트로와의 판매간섭을 막고자 어클레임보다 더 윗급 시장을 노리는 걸로 방향이 잡혀 로버 브랜드로 출시가 준비되기에 이른다.
결국 1984년 여름에 133,625번째이자 마지막 어클레임이 카울리 공장을 빠져나가면서 트라이엄프 브랜드도 그 끝을 맞이하였고, 오스틴 로버에서는 오스틴, 로버, MG 브랜드만으로 승용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한편, SD3 프로젝트는 그 해에 "로버 213"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으며, 이후 800과 2세대 200/400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차들이 혼다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고, 오스틴 브랜드가 마에스트로와 몬테고의 부진으로 1987년에 사라졌을 때 로버 브랜드가 200으로 대표되는 소형차 라인까지 흡수했다. 한편 혼다는 1985년에 영국 스원든(Swindon)에다가 자신들의 공장을 짓고 4년 뒤를 기점으로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닛산에서도 1984년에 공장을 짓고 1986년부터 자신들의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 당시 BL이 후보들을 선정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1:BL 입장에서 협업하고 싶어하는 업체일 것, 2:자신들이 인수당할 위험이 낮은 업체일 것, 3:적합한 중형차를 개발하고 있는 업체일 것.[2] 혼다기연공업의 규모가 당시 BL의 회사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였고, CVCC와 F1 경기 등을 통해 '혁신'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일본차 업체치고는 유럽 이미지가 강했던 편이기에 후보로 선정되었다.[3] BL은 혼다차와의 협력을 통해 기술 및 품질적인 요인들을 개선할 도움을 받을 기회, 더 나아가 스스로 살아남을 판도를 마련할 기회를 얻었으며, 혼다기연공업은 스스로의 지위를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릴 주요 계기와 유럽 시장에 대한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는 정보 통로를 얻을 수 있었다.[4] 덤으로 Bounty 프로젝트가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으로 출시되기 전에, BL에서는 혼다와의 합작 프로젝트 여럿을 구상했던 적이 있었다. Bounty 프로젝트의 해치백 버전인 HD9, 이보다 훨씬 작은 라인업인 HD14, 그리고 고급차인 HD17이 이들 사례로, 결국에는 HD17만이 XX로 개명 후 로버 800으로 출시되는 데 그친다.[5] 한편, 한 등급 아래인 오스틴 메트로와 별 차이가 없는 휠베이스는 어클레임의 실내 공간을 좁게 만드는 데 일조해 영국용으로 나온 앞좌석이 원판보다 작았음에도 여전히 실내 공간이 좁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