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 로버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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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in Rover Group Ltd.(1983~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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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ver Group Ltd.(1986~1989)
Rover Group Holdings Ltd.(1989~1994)
BMW UK Holdings Ltd.(1995~2000)
1. 개요
2. 국영기업으로서의 존립(1982~1988년)
3. 민영화 초기(1988~1994년 1월)
4. BMW 산하로의 편입(1994~2000년 4월)
5. 관련 문서


1. 개요


1982년에 영국마거릿 대처 정부 산하에 있던 국영 대기업 브리티시 레일랜드를 개편한 자동차 회사였다. 1986년에 경영진이 교체되어 로버 그룹으로 개명한 뒤 1988년에 민영화되었으며, 1994년에 BMW가 매입할 때까지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산하에 존속했다. 본래 BMW 산하의 로버 그룹을 따로 다루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오스틴 로버~BMW 산하 로버까지의 내용을 이 문서에 통합했다.

2. 국영기업으로서의 존립(1982~1988년)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에 회사의 체질을 전반적으로 뜯어고친 신임 회장 마이클 에드워즈가 물러난 뒤, 해럴드 머스글로브를 비롯한 새 경영진들이 들어오며 "오스틴 로버 그룹"으로 개명했다. 오스틴 로버 그룹이라는 이름 하에, 개발진들은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부터 개발해 온 신차 프로젝트들을 물려받았다. 설립 초반에는 오스틴 메트로가 회사에서 갈망하던 오래간만의 상업적 성공을 불러들여오고 있었고, 혼다와의 기술제휴가 성사되어 나온 첫 차종인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은 중박 정도의 판매량이지만 고품질의 차를 만들 수 있다는 증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해럴드 머스글로브 등의 신임 경영진들은 오스틴 로버 그룹을 포드나 복스홀같은 대중차 대량생산 기업으로서 회생시키고자 했으며, 어느 정도 수혈이 이루어지고 있던 코어 브랜드인 대중차의 오스틴, 고급차의 로버, SUV 및 오프로더의 랜드로버 등에 집중하며 마이클 에드워즈 시절에 얻은 발판을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전망이 어둡다고 판단한 모리스, 트라이엄프는 1984년에 브랜드를 폐지하고, MG는 MG B를 생산하던 영국 애빙던 공장을 폐쇄한 뒤 오스틴 차종들의 스포티 버전을 전담시켰다.
이에 따라 오스틴 로버 그룹에서는 메트로의 성공을 이어갈 새 대중차 라인업으로 준중형급 오스틴 마에스트로, 중형급 오스틴 몬테고를 각각 1983년, 1984년에 출시했다. 고급 브랜드 로버로는 트라이엄프 어클레임을 대신하는 엔트리급 프리미엄 컴팩트카로 로버 200 시리즈를 준비해 1984년에 출시했으며, 어클레임처럼 혼다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개발하여 고품질을 추구하고자 했다. 로버의 기함급 차종인 SD1도 혼다와의 협력 프로젝트로 후속차종을 개발, 1986년에 로버 800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적극적인 국영기관 및 시설들의 민영화를 추진하며 "작지만 강한 정부"를 비전으로 내세우던 영국 보수당 정부를 설득하여, 자체엔진 개발을 포기하고 혼다 엔진을 현지생산해서 운영비를 줄이자는 정부의 제안에 맞서 오래간만의 자체 최신 엔진 개발비를 유치했다. 이 밑천을 통해, 오스틴 로버 그룹의 대중차 라인업에서 쓸 주력엔진이자 알루미늄 합금 소재, 듀얼 오버헤드 캠샤프트, 린번 시스템같은 당대 고급 기술들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나아가 메트로와 미니를 동시 대체할 완전신차 프로젝트인 AR6 프로젝트를 추진, 마에스트로와 몬테고 후속과도 호환되는 알루미늄 기반 플랫폼을 토대로 기존 공장 설비들과 호환이 되도록 신차개발을 이어갔다.
개중에서 로버 200 시리즈는 트라이엄프 어클레임보다 큰 성공을 성취, 어클레임보다 젊은 고객층들까지 유치하며 고수익성의 인기 상품으로 등극했다. 새 엔진도 훗날 로버 K-시리즈 엔진이라는 명의로 공개했으며 당대에는 윗급 배기량의 차종들과 맞먹는 성능과 정숙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마에스트로와 몬테고는 출시 초반에만 반짝 성공하는 데 그쳤고, 초기의 품질 문제와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같은 대규모 파업, 그리고 1970년대 말 기준의 실내외 스타일링으로 인한 신선도 급락[1]에 시달려 빠르게 실패작으로 전락했다. 메트로 역시 5도어 해치백을 출시하고 MG 브랜드의 스포티 라인업을 강화하여 꾸준히 버티기는 했으나 신규 경쟁차들의 압박이 점점 커졌다. 상업적인 실패가 겹침에 따라 영국 정부에서는 오스틴 로버 그룹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1984년에 재규어를 매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회사를 다시 구조조정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나아가 1986년에는 해럴드 머스글로브 등의 경영진들을 경질하고 당시 영국의 항공우주 회사였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ritish Aerospace. 이하 BAe)" 출신의 기업인 그레이엄 데이(Graham Day)를 회장 자리에 앉혀 구조조정을 강화했다.
그레이엄 데이 휘하의 오스틴 로버 그룹은 "양보다 질"을 구호로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으며, 이 과정에서 오스틴 브랜드의 폐지가 결정되고 로버 800 시리즈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차 프로젝트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상용차 부문인 레일랜드도 트럭, 버스 부분을 나누어 매각했으며, 회사 이름도 로버 그룹으로 개명했다. 이에 따라 로버 그룹은 해럴드 머스글로브 등이 꿈꾸던 "대량생산 대중차 기업"에서 벗어나 "고수익성 틈새시장 전문기업"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
참고 자료

3. 민영화 초기(1988~1994년 1월)


결국 1988년 후반,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에서는 로버 그룹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BAe에 최종 매각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졸지에 해리어 전투기 만들던 회사가 승용차까지 판매하기 시작한 셈인데, 본래는 미국 GM에 매각하려고 했으나 국민들의 반발 때문에 영국 기업인 BAe에다가 넘긴 것이다. 새 주인이 된 BAe의 회장 그레이엄 데이는 "양보다는 질"을 내세우는 고급화 및 틈새시장 전략을 표어로 삼아 로버 그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BAe 산하에서는 고급차 브랜드였던 로버, 그리고 품질 및 성능 개선을 위한 혼다기연공업과의 기술제휴를 적극 활용했으며, 판매량이 낮더라도 가격을 좀 더 높게 받을 수 있는, 수익성이 높은 제품을 개발하도록 하는 동시에, 브랜드 정체성을 견고하게 다지고자 미니(단일 경승용차), 로버(주력 승용차), 랜드로버(SUV 및 RV), MG(스포츠카)로 철저히 라인업을 정리했다. 제품기획의 초점도 1986년을 전후하여 수익성 외에 고객만족도에 집중하였고,[2] 이를 이유로 오스틴 브랜드를 폐지하고 차기 비SUV 승용차 부문을 로버 브랜드로 집중시켰다. 또한 사내의 기존 개발 부서와 별도로, 틈새시장 전문 부서인 "로버 스페셜 프로덕트(Rover Special Products)"를 설립함에 따라 MG F나 MG RV8, 랜드로버 프리랜더, 로버 800과 200 쿠페, 로버 200과 메트로 카브리올레, 미니 카브리올레와 1990년대판 쿠퍼와 같은 틈새시장 전략 차종들을 만들기도 했다. 로버 스페셜 프로덕트에서는 자체 개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업체에 외주를 주어 개발에 반영하는 역할도 했다.[3]
다만 대중차 브랜드였던 오스틴이 사라져 버림에 따라 기존의 오스틴 차종인 메트로, 마에스트로, 몬테고는 한동안 브랜드 없이 모델명으로만 판매했고, 비용절감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개발비도 예전보다 많이 깎여 메트로와 미니의 통합 후속차였던 오스틴 AR6[4] 등의 적잖은 차기 프로젝트들이 개발 중간에 폐기되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로버의 주력제품 개발팀이 혼다차에 너무 의존적으로 가게 만든 것은 물론,[5] 왕년 고급차 브랜드로 3세대 로버 200(R3)이나 로버 메트로/100 시리즈[6]와 같은 소형차들이 개발, 출시되면서 순수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터지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 자율적이었고 수익성이 높았던 랜드로버와, 라인업이 빈약한데다가 BAe가 처음부터 틈새 시장 특화형으로 유지했던 미니 및 MG는 그나마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인 것은, 혼다차와 같이 합작한 2세대 로버 200과 400,[7] 그리고 랜드로버의 중간급 차량인 디스커버리 등이 출시되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고, 10년 된 소형차를 우려먹었던 로버 메트로도 사골치고는 괜찮은 실적을 거두었으며, 제품들의 전반적인 품질과 서비스도 개선되어 나름대로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랜드로버와 미니도 이 시기부터 고급화가 서서히 이루어져 레인지로버의 고급화와 디스커버리의 데뷔, 미니 쿠퍼의 부활을 포함한 미니 라인업 재확장 등으로 1990년대 이후 브랜드 운영방향의 새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회사의 자체 역량을 평가절하면서 자체 설계역량에 악역향을 끼쳐[8][9] 장기적으로 발목이 잡히는 구석도 있었고, BAe에게 한동안 돈줄이 되어 주던 여객기 리스 사업이 1990년대 초반부터 항공운송업계의 대불황으로 인해 커다란 손실을 안겨 줌에 따라 로버 그룹에 신경을 쓸 겨를이 훨씬 적어졌다. 결국 경영난에 처한 BAe는 로버 그룹을 매각할 준비를 하다가, 대중차 시장에 진입하기를 원했던 BMW에게 로버 그룹을 매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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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MW 산하로의 편입(1994~2000년 4월)


1994년 1월, 이전까지 로버 그룹을 가지고 있던 BAe가 본업인 항공우주산업과 무관한 사업들을 매각하면서 로버 그룹도 매각 대상이 되었다. 이때 독일의 고급차 업체인 BMW가 로버 그룹을 사겠다고 나섰는데, 당시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 상으로는 회사 규모를 늘리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매년 1백만대에 못미치는 수를 생산하던 BMW에서도 자사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대량판매를 할 방안을 찾다가 혼다와의 협업이 결렬되자 당시 제휴관계에 있었던 로버 그룹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당시 BMW를 경영하던 베른트 피셰츠리더(Bernd Pischetsrieder) 회장과 볼프강 라이츨레(Wolfgang Reitzle) 사장이 이 계획을 주도했고, 이들은 로버 그룹의 '찬란했던' 역사와 혼다와의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발전했으리라는 예측을 근거로 로버 그룹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10]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는 데 시급했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가 BMW의 결정을 반겼던 반면에, 로버 그룹에서는 혼다에게 자사를 인수해달라고 하면서 다소 반발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혼다에서는 로버 그룹의 지분을 이전의 20퍼센트에서 47.5퍼센트로 지분을 늘리는 데서 만족했으며[11], 이를 본 BMW에서는 위협을 느끼면서 로버 그룹의 인수를 더 서둘러 진행했다. 이때 혼다와의 기술제휴 관계도 끊어졌으나 혼다차 기반의 로버 차들은 여전히 개발 및 판매가 진행되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으나 BMW가 혼다를 찾아가 부품 수급과 로얄티 인하를 부탁했기 때문이였으며,[12] 인수 초기에는 피셰츠리더도 로버 출신의 존 타워스를 회장으로 세워 로버 그룹의 자율성을 보장하고자 했다.
로버 그룹에서는 BMW의 관리 하에서 이미 BAe 시절부터 개발했던 3세대 로버 200과 2세대 로버 400, MG F 스포츠카, 2세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부터 프리랜더에 이르는 여러 신차들을 내놓았고, 특히 고급차인 로버 75와 3세대 레인지로버, 차세대 로버 소형차(R30)와 신형 미니처럼 BMW가 직접적으로 밀어 준 사례도 존재했으나 정작 피셰츠리더와 라이츨레 정도를 제외한 BMW의 경영진 다수는 로버 그룹 인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고, 더군다나 1990년대 중반 로버 그룹의 실적에 실망한 피셰츠리더가 로버 그룹의 자율경영 정책을 사실상 그만두고 크게 손을 대면서 로버 그룹과의 마찰도 생겼다. 거기에 노후화되어 가는 라인업에 대한 적절한 대응의 부재,[13] 개량형 K-시리즈 엔진의 심각한 결함[14]과 미흡한 대응, 로버 브랜드에서의 무리한 고급화 정책[15]으로 발목이 묶인 판매량과 같이 해결해야 되는 문제들이 더 생겨났으며 1990년대 말에는 영국 파운드화의 강세[16] 때문에 생산공장이라 해봐야 영국 공장들뿐이던 로버 그룹의 경쟁력이 더 추락해버렸다.
때문에 로버 그룹을 관리하느라 BMW에서는 약 60억 유로에 달하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크라이슬러와의 기술제휴[17]를 시도하거나 미니, 로버 75와 R30 등의 핵심제품에 개발역량을 집중시켜 손해를 줄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나아가서 그나마 로버의 "마지막 기회"로 여겨지고 있었던 로버 75의 모터쇼 데뷔를 피셰츠리더 본인이 망치는 실수[18]까지 하면서 결국 로버그룹 인수의 책임을 지고 이사진들의 주도 하에 1999년 2월에 자진사퇴하는 사건까지 터지고 말았다. 그나마 새 라인업을 완전히 짜놓았던 랜드로버 정도만 그럴싸한 실적을 거둔 상황에서, 사실상 피셰츠리더와 라이츨레를 쫓아낸 BMW에서는 로버그룹을 매각할 준비를 시작했고, 결국 2000년 4월에 포드로 넘긴 랜드로버와 자신들이 유지하기로 한 미니 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을 단돈 1파운드에 매각해버렸다.[19]이후 로버 그룹은 "피닉스 벤처 홀딩"과 "알케미 파트너스"의 두 영국 업체가 인수전을 벌인 끝에 그해 5월 피닉스 벤쳐 홀딩에 의해 인수되어 "MG로버 그룹"으로 개명되었다.
참고자료

5. 관련 문서



[1] 본래는 1977년부터 개발하여 1981년에 출시했어야 했던 차들이지만 회사에 돈이 없어 투자를 메트로에 집중하느라 출시가 더 미루어졌다. 1981년에 부임한 오스틴 로버 그룹의 신임 수석디자이너 로이든 액스는 마에스트로와 몬테고의 디자인을 "프로포션, 디테일 하나하나가 엉망진창이고 어설프다"고 평가하며 이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해럴드 머스글로브는 정부가 신차의 전면 백지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해 어쩔 수 없이 70년대 후반 기준의 종이접기 스타일링을 계속 고수해야만 했다.[2] 미니의 경우는 시내에 거주하는 20~30대 여성 고객이 중심이며 자차를 단순 이동수단이 아닌 애완동물 같은 존재로 취급한다는 고객조사결과를 내세웠다.# 로버 200 시리즈 역시 고객들이 실제 가격보다 비싼 차로 예상하고 있었다는 조사결과에 초점을 두고, 로버 800 시리즈와 함께 비SUV 승용차 부문의 주요 하이라이트로 집중 지원했다.[3] 대표적인 예시가 소형 로드스터인 MG F로, 로버 스페셜 프로덕트를 통해 디자인 회사인 MGA 디벨롭먼트에게 개발과정 상당수의 외주를 맡겼다.[4] 메트로와 미니의 후속 차종. 그 외에도 마에스트로와 몬테고의 후속 차종도 AR6 기반으로 개발중이었다.[5] 2세대 로버 200 시리즈처럼 로버 그룹과 혼다가 동등하게 서로의 재능을 교환하며 제대로 개발된 사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버 600 시리즈나, 2세대 로버 400 시리즈처럼 로버 그룹에게 불리한 협업조건을 요구받는 경우가 생겨 기술제휴가 독이 되기 시작했다. 가령 로버 600같은 경우는 로버 그룹 차원에서의 미국 수출 금지, 인테리어와 파워트레인은 혼다가 전담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로버 400은 아예 혼다가 먼저 자신들이 디자인을 완성해 제안하고 로버 그룹이 거기에 맞춰 신차를 개발하는 방향을 잡았다. 로버 600까지는 그나마 로버 그룹이 바라던 방향대로 신차를 개발할 수 있어 개발진 내부에서도 만족했으나, 로버 400의 세대교체 때는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로버 그룹과 혼다 인원들과의 마찰이 커졌다. 이때 경영진들은 차세대 로버 400의 개발과정을 바꾸자고 로비하는 개발팀 앞에 혼다와 협업하지 않으면 로버 그룹을 폐쇄하겠다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개발진들이 제품개발의 제약이 커진 상태에서 신차개발을 이어가야 했다.#[6] 오스틴 메트로의 페이스리프트 모델.[7] 실내외 디자인부터 소재, 품질관리에 다다르는 수많은 방면에서 고품질로 인정받았으며, 운전역학과 성능 면에서도 동급 준중형차들을 압도해 경쟁차종 대비 한 체급 위 배기량급과 동등한 가격대에도 꾸준한 판매고를 낼 수 있었다. 엔트리급 엔진인 1.4L 로버 K-시리즈 엔진을 장착한 최저가 사양 로버 214Si만 해도 1.6L짜리 엔진이 들어간 포드 에스코트, 오펠 카데트, 피아트 티포보다 최고출력이 높았을 정도. 여기에 혼다로부터 자문팀과 공장 설비를 도입하는 등, 일본 업계와 동등한 품질관리를 통해 고품질 차로서도 공을 들였다. 해외 수출도 1990년대 초부터 영국 파운드화의 환율이 유리해짐에 따라, 프랑스나 이탈리아같이 순수 일본차에 대한 장벽이 남아 있던 국가들에서도 어필해 일정한 실적을 거둬들였다. 덕분에 1998년까지 약 100만대를 만들어 절반 이상을 영국 내수에서 소화하는 등, 로버 그룹의 비SUV 승용차 라인업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8] 1984년의 오스틴 몬테고가 상업적으로 실패한 이후, 로버 그룹이 자체적으로 설계한 플랫폼의 완전신차는 거의 없었다. 개발진들이 의욕을 잃은데다가 혼다와의 기술제휴가 주된 방향이 되어서 대부분은 로버의 승용차 라인들처럼 혼다와의 합작으로 개발되거나, 프리랜더, R3 로버 200, 로버 메트로, MG F처럼 과거에 설계한 플랫폼을 재활용했다.[9] 대신 개발진들은 파워트레인 개발에 집중했고, 1989년의 로버 K-시리즈 엔진으로 결실을 보면서 BMW 휘하에서도 엔진 개발팀은 BMW 측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일했다.[10] 여담으로 로버 그룹 인수 당시의 인터뷰에서 로버 브랜드에 생각을 묻는 질문이 나오자, 피셰츠리더는 "저렴한 재규어"라고 답변했다. 퇴사 압박을 받을 때쯤 이사회에 회생책을 발표할 때도 로버 그룹에 대한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투자를 제안했다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초장기 대규모 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퇴사한 지 수년 뒤인 2004년 8월에도 "다시 기회가 왔다면 로버 그룹을 다시 샀을 것이며, 그때 우리는 인내심이 너무 없었다"라고 카 매거진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었다.[11] BMW의 로버그룹 인수 후의 경영이 실패한 뒤, 혼다에서는 "로버 그룹을 인수하지 않았던 것이 혼다 역사상 최고의 결정이였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12] 때문에 혼다 시빅/도마니를 기반으로 한 2세대 로버 400이 1995년에 출시될 수 있었고, 1.6L 자동변속기 사양 한정으로 혼다 엔진도 적용되었다. 단, 혼다에게 지불할 로열티가 크게 올라 판매량이 좋아도 수익은 얼마 나지 않았다.[13] 1994년만 해도 로버 브랜드의 승용차는 메트로(100 시리즈)부터 800에 걸치는 5개 차종에 바디 라인업도 다양했으나 메트로, 600 800의 단종과 200, 400의 세대교체, 병행생산하던 200 컨버터블 및 쿠페의 단종을 겪으면서 1999년부터는 25, 45, 75의 3개 차종에 바디 라인업도 제한적이었다.[14] BAe 시절의 적은 개발비가 원인이었다. 이를 만회하고자 엔진 블록을 키우는 대신 엔진 블록을 유지하는 한도에서 배기량을 다변화했는데, 냉각수와의 접촉면이 넓어지면서 헤드 가스켓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일찍 터지는 결함이 속출했다. 이는 곧 영국 내에서 K-시리즈 엔진이 놀림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15]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시절의 고급화 정책은 동급 사이즈의 차종 대비 한 체급 더 높은 배기량의 가격대를 잡는(가령 1.4L짜리 로버 200 = 1.6L짜리 포드 에스코트) 선에서 시작했으나, 3세대 로버 200과 2세대 로버 400은 아예 한 체급 높은 사이즈의 차종들과 가격대를 맞춰(당시 준중형차였던 로버 400이 가격대 때문에 포드 몬데오, 시트로엥 잔티아같은 중형차들과 비교되기도 했다) 고객들의 인식에 혼란이 생겼다.[16] 1997년 5월부터 영국 파운드화의 환율을 높이면서 수입차들이 영국에서 더 싸게 팔리기 시작했고, 해외 시장에서의 로버 그룹 차종들은 가격이 훨씬 비싸졌다. 이로 인해 판매량보다는 수익성을 쫓고 국내에서의 부진을 해외 수출로 보강하는 기존 가격정책이 무력화되어 손해가 불어났다.[17] 미니의 파워트레인을 닷지 네온의 수출 사양과 공용했다.[18] 로버 그룹의 경영진들과 영국 정부가 로버 그룹을 지원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영국 정부의 지원 없이는 로버 그룹의 폐쇄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식의, 상당히 부정적인 내용으로 발표를 나섰다. 신차 이야기가 빠진데다가 워낙 부정적인 내용이라서, 언론에서는 로버 그룹의 위기에만 초점을 두고 보도했다.[19] 때문에 BMW는 매각 당시는 물론 한동안 영국 국민들의 질타를 받았다. 사실상 BMW에서 쫓겨난 입장이었던 피셰츠리더도 커뮤니티에서 간간히 욕을 먹는 상황이며, 심지어는 BMW에서 비싼 돈을 들여 라이벌을 없애 버렸다는 평가도 나왔다.[20] 1980년대 당시의 MG차들은 오스틴 차들의 스포티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대로 된 스포츠카 라인은 1992년의 MG RV8이 출시되기 전까지 공석이였다.[21] 신형 미니는 1993년부터 개발되어 1997년에 공개되었으나 양산은 BMW의 로버 그룹 매각 후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