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관동
'''틈관동'''[1]
간체자: 闯关东
정체자: 闖關東
청나라가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만주 일대에 수백년에 걸친 한족들의 이민을 칭하는 단어.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 했을때, 100만명 가량으로 추정 되던 만주족들중 9할에 이르는 90만명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만주족들은 원나라 멸망의 사례 등을 살펴 나름의 백업 플랜으로 훗날 후손들이 중국에서 쫓겨날 일이 생기더라도 돌아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주에 한족의 정착을 금하는 봉금 정책을 취했다.[2] 그래서 만주는 '옥토가 천리에 펼쳐 있고, 땅은 있으나 사람은 없는'(沃野千里, 有土無人)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화북과 산동 지방은 수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토지가 황폐화 되어 있던 상태였고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비옥한 토지가 널렸다는 만주를 향해 조금씩 몰려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아예 막은건 아니고 1653년 순치제 시절에 주둔군이 먹을 군량을 생산할 목적으로 10년 가량 잠깐 이민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1인당 한달에 곡식 한말을 주고 토지 개간이 늘때 마다 더 주는등 꽤나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성인남성 약 1만5천명 가량이 몰려왔다.[3] 하지만 군량 자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만주족의 이익이 침해 될것을 우려하여 다시 이민을 금지 하였다. 역사에서는 보통 틈관동이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고 본다.
그래도 알음 알음 소식을 전해 들은 중원의 농민들은 산해관을 거쳐 만주(주로 요동)으로 들어왔다. 산동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빠른 해로를 통해서 왔기 때문에 더 많은 수가 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도 이들을 대놓고 막진 않았고 요동의 만주족들은 오히려 이들을 반기며 자신들의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했다. 이덕분에 심양을 중심으로 만주의 인구는 크게 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만주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늘어나자 내내 쉬쉬하던 정부에서도 그 이야기를 방관만 할순 없었고 1740년, 전면적인 봉쇄령을 내렸다. 산해관을 닫아 버려서 백성들의 이주를 막고, 이미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여기로 전입신고 하고 세금 낼래, 아니면 다시 니네 고향으로 돌아갈래?''' 하며 둘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산해관을 통과할수 있던 유일한 사람들인 상인들도 목적지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어야만 드나들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주로 불법 입국을 시도했다. 아예 내몽골로 올라가 산해관을 우회하거나 해로를 통해 뤼순 근처에 상륙 후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더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 까지 합세하여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이시기부터 틈관동의 목적지는 요동에서 길림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50여년 가량이 지난 1792년, 화북지방에 찾아온 유례 없는 자연재해로 산해관에 난민들이 모여들자, 직예성 총독은 '먹고 살기 힘든 사람만 골라서 내보내주죠?' 라는 내용으로 직접 상소를 올려서 건륭제에게 이주를 허가 받았다. 그 후로도 약 10여년에 걸친 끝 없는 자연재해로 인해 이 조치는 계속 연장 되었다.
이후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관문을 닫고, 나빠지면 열어주는 정책이 반복 되었지만 틈관동의 물결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기상으로 19세기 부터 화북 지방에는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았고 백련교도의 난 같은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주민들은 더 멀리 흑룡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봉금령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멀리 서양에서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도달한 러시아 제국이 나타나면서 '''후방이였던 만주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대략 1860년 경에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및 외만주를 탈취하고 더욱 압박이 거세지자, 청나라는 만주 방어를 위하여 인구유입을 할수 밖에 없었고 1878년, 가족 동반 이민을 허용하면서 그동안 취해왔던 봉금 정책을 완전히 해제 하였다.
이후로도 중원의 혼란이 계속 되자 더 많은 수의 인구가 만주로 몰려들었다. 최후의 틈관동은 1958년부터 이뤄진 '북대황(北大荒)[4] 개발' 이라는 국가주도 만주 개발 정책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 강의 3개 강이 만나는 중국 최동단 삼강평원 지역[5] 을 개발하기 위해 15만 명의 인민해방군과 5만명 가량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인력을 투입하였다. 한국전쟁 이후로 이 지역은 중국의 우방국인 북한, 러시아, 그리고 가상적국 1순위인 한국, 일본, 미국이 부딪히는 지역으로 변했다. 만주를 중원을 방어하는 전진기지화 시키려는 중국 공산당의 계획하에 60년대부터 수십만~수백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북 3성에 정착하였고, 북대황 개발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원작소설 작가는 고만당, 손건업이며 드라마 감독은 장신건, 공생이다. 청나라 말엽부터 중화민국 만주사변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산둥성 출신인 주개산 일가의 틈관동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에는 나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들도 나왔으나 원작만큼의 인기는 누리지 못했다.
간체자: 闯关东
정체자: 闖關東
1. 중국의 역사사에 있었던 민족이동
청나라가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만주 일대에 수백년에 걸친 한족들의 이민을 칭하는 단어.
1.1. 배경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 했을때, 100만명 가량으로 추정 되던 만주족들중 9할에 이르는 90만명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만주족들은 원나라 멸망의 사례 등을 살펴 나름의 백업 플랜으로 훗날 후손들이 중국에서 쫓겨날 일이 생기더라도 돌아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주에 한족의 정착을 금하는 봉금 정책을 취했다.[2] 그래서 만주는 '옥토가 천리에 펼쳐 있고, 땅은 있으나 사람은 없는'(沃野千里, 有土無人)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화북과 산동 지방은 수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토지가 황폐화 되어 있던 상태였고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비옥한 토지가 널렸다는 만주를 향해 조금씩 몰려들었다.
1.2. 상세
사실 처음부터 아예 막은건 아니고 1653년 순치제 시절에 주둔군이 먹을 군량을 생산할 목적으로 10년 가량 잠깐 이민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1인당 한달에 곡식 한말을 주고 토지 개간이 늘때 마다 더 주는등 꽤나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성인남성 약 1만5천명 가량이 몰려왔다.[3] 하지만 군량 자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만주족의 이익이 침해 될것을 우려하여 다시 이민을 금지 하였다. 역사에서는 보통 틈관동이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고 본다.
그래도 알음 알음 소식을 전해 들은 중원의 농민들은 산해관을 거쳐 만주(주로 요동)으로 들어왔다. 산동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빠른 해로를 통해서 왔기 때문에 더 많은 수가 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도 이들을 대놓고 막진 않았고 요동의 만주족들은 오히려 이들을 반기며 자신들의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했다. 이덕분에 심양을 중심으로 만주의 인구는 크게 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만주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늘어나자 내내 쉬쉬하던 정부에서도 그 이야기를 방관만 할순 없었고 1740년, 전면적인 봉쇄령을 내렸다. 산해관을 닫아 버려서 백성들의 이주를 막고, 이미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여기로 전입신고 하고 세금 낼래, 아니면 다시 니네 고향으로 돌아갈래?''' 하며 둘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산해관을 통과할수 있던 유일한 사람들인 상인들도 목적지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어야만 드나들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주로 불법 입국을 시도했다. 아예 내몽골로 올라가 산해관을 우회하거나 해로를 통해 뤼순 근처에 상륙 후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더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 까지 합세하여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이시기부터 틈관동의 목적지는 요동에서 길림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50여년 가량이 지난 1792년, 화북지방에 찾아온 유례 없는 자연재해로 산해관에 난민들이 모여들자, 직예성 총독은 '먹고 살기 힘든 사람만 골라서 내보내주죠?' 라는 내용으로 직접 상소를 올려서 건륭제에게 이주를 허가 받았다. 그 후로도 약 10여년에 걸친 끝 없는 자연재해로 인해 이 조치는 계속 연장 되었다.
이후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관문을 닫고, 나빠지면 열어주는 정책이 반복 되었지만 틈관동의 물결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기상으로 19세기 부터 화북 지방에는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았고 백련교도의 난 같은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주민들은 더 멀리 흑룡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봉금령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멀리 서양에서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도달한 러시아 제국이 나타나면서 '''후방이였던 만주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대략 1860년 경에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및 외만주를 탈취하고 더욱 압박이 거세지자, 청나라는 만주 방어를 위하여 인구유입을 할수 밖에 없었고 1878년, 가족 동반 이민을 허용하면서 그동안 취해왔던 봉금 정책을 완전히 해제 하였다.
이후로도 중원의 혼란이 계속 되자 더 많은 수의 인구가 만주로 몰려들었다. 최후의 틈관동은 1958년부터 이뤄진 '북대황(北大荒)[4] 개발' 이라는 국가주도 만주 개발 정책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 강의 3개 강이 만나는 중국 최동단 삼강평원 지역[5] 을 개발하기 위해 15만 명의 인민해방군과 5만명 가량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인력을 투입하였다. 한국전쟁 이후로 이 지역은 중국의 우방국인 북한, 러시아, 그리고 가상적국 1순위인 한국, 일본, 미국이 부딪히는 지역으로 변했다. 만주를 중원을 방어하는 전진기지화 시키려는 중국 공산당의 계획하에 60년대부터 수십만~수백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북 3성에 정착하였고, 북대황 개발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1.3. 관련 문서
2. 동명의 중국 소설 및 드라마
원작소설 작가는 고만당, 손건업이며 드라마 감독은 장신건, 공생이다. 청나라 말엽부터 중화민국 만주사변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산둥성 출신인 주개산 일가의 틈관동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에는 나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들도 나왔으나 원작만큼의 인기는 누리지 못했다.
2.1. 등장인물
2.1.1. 주개산 일가
주개산 - 작품의 주인공. 의화단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청나라 조정에서 의화단을 소탕하기 시작하자 관동으로 피신하여 채금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마련하고(1부 시점), 그 재산을 기반으로 집과 땅을 사서 농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무장 탈영병들의 약탈과 방화로 터전을 잃게 되어(2부 시점) 도시로 진출한다. 하얼빈에서 식당 및 행상업을 운영하다가(3부 시점) 석탄광이 발견되어 그쪽에 투자하지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함으로 인하여 온가족이 다시 고향인 산동에 돌아간다. 놀라운 괴력을 가지고 있으며[6] 지략 또한 뛰어나다. 기본적으로 아량이 넓은 대인배이지만 의화단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외세, 특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석탄 채굴업도 원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일본 기업과 경쟁관계라는 말을 듣고 지지했을 정도. 그러나 무분별한 혐일주의자는 아니고, 자신에게 피해를 줬던 양자 이치로도 끝까지 아들로 인정한다. 의화단 시절에 명성을 엄청나게 쌓아서 작품 초중반부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많고 직업 이야기꾼들도 주개산의 행적을 이야기로 만들어 평설하고 다닌다. 2부부터는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들에게 집안일을 맡기는데 평소에는 최대한 시비를 피하고 참지만, 일단 아들들이 사태를 수습 못해서 본인이 일선에 나서기 시작하면 정리되지 않는 게 없다. 거의 완벽한 인물상이지만 세대가 세대인지라 역시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들 주전무의 혼사 관련으로는 평생 후회하고 사는듯.
주개산의 아내 - 성씨는 위씨이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작중에서는 대개 전문이 엄마 등으로 불려진다. 시골 여인이라 무식하고 수구적인 면이 있지만 마음씨가 착하다.
주전문 - 주개산의 장자. 작중 찌질이 1호. 전형적인 소농, 소시민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주개산의 성품 중 순박함과 근면함을 이어받았으며, 부지런하고 가정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수구적이고 우유부단하며 겁이 많다. 2부에서는 집안 농사일을 맡는데 아직 미숙해서 아버지와 아내의 도움을 자주 받으며, 3부에서는 식당을 책임지는데 여러 요리들을 개발하고 배우는 등 2부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큰 일이 터지면 스스로 수습 못해서 아버지가 나서서 해결해준다. 그래도 크게 사고를 안 치는 말 잘 듣는 아들이었으나 4부 시점에서 집안의 사업이 석탄 채굴 위주로 흘러가자 머리 좋은 막내동생 때문에 장자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고, 일본인의 협박까지 받는 바람에 일본인의 편에 섰다가 나중에 일본인들이 동생 주전무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다.[7]
주전무 - 주개산의 차자. 단순무식하며 반항아 기질이 강한 상남자 스타일. 주개산의 성품 중 융맹함과 의협심을 이어받았으며, 사고를 자주 쳐서 부모에게 자주 혼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남자 기질 때문에 주개산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다. 처음에는 하원장의 가게에서 장사를 배웠으나 허구한날 사고만 쳐서 결국 쫓겨나 벌목장 등에서 일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모가 강제로 주선한 혼인을 피하기 위해 다시 가출, 마적단들의 총에 맞아 죽은줄 알았으나 군인들에 의해 구출되고 전공을 세워 승진하게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 맞서 하얼빈에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 전사한다.
주전걸 - 주개산의 막내아들. 주개산의 성품 중 지혜로움을 이어받았으며 머리가 좋고 상업에 재능이 있다. 주전무와 함께 하원장의 가게에서 장사를 배우면서 영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얼빈에 이주한 이후 행상업을 맡다가 석탄광이 발견되자 석탄 채굴업에 뛰어든다.
키타 이치로 - 부모를 따라 중국에 온 일본인. 소년기 시절 역병에 걸려 태워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수아에 의해 구출되고 주개산 일가에 의해 양자로 길러지다가[8] 이치로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부모가 다시 찾아와서 떠나게 된다. 4부에서는 성인으로 되어 주개산 일가와 재회하고 수아와 결혼하게 되지만, 일본 상인인 모리타 다이스케에게 이용당해 주개산 일가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처음에는 의도는 좋았다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다른 일가족들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가운데 주개산의 아내만이 여전히 따뜻하게 챙겨주는 것에 대하여 감동하여 주씨 일가를 도운 뒤 자살한다.
담선 - 작중에서는 주로 선아로 불려진다. 주전문의 약혼녀였으나[9] 주전문과 관동으로 가던 중에 헤어지고, 악질 부자에게 겁탈당하면서 정절을 잃었다고 생각해 주씨 일가를 찾지 않고 벌목장에서 일한다. 하지만 마침 어머니의 훈계를 피해 가출한 주전무도 벌목장으로 찾아왔고, 점차 선아에 대한 연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주전무를 피해 선아는 벌목장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나문의 하녀가 되지만 나문도 가문이 몰락해버리고 나문의 결혼식에 따라갔는데 결혼 상대가 하필이면 옛 애인인 주전문...[10] 선아가 전에 주전문, 주전무 형제를 구한 은혜 때문에 주개산은 선아를 양딸로 입양하지만 선아에게 연심을 품고있던 주전무는 결국 선아를 끌고 가출해 버린다. 이후 주전무와 함께 뱃일을 하다가 마적떼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지만 주전무와 헤어지게 되고, 산적 진삼강을 알게 되어 의남매를 맺고 산적단의 둘째 두목이 되어 삼강홍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이후 관병에게 잡혀서 처형당할뻔하다가 구출당해 주씨네 집으로 피신하였고, 나문의 제안과 수아의 동의로 주전무의 첩이 될뻔했으나 산적단 탈퇴 의식을 치를 때 군대들이 소탕작전을 벌이는 바람에 다시 도주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만주사변 이후 수하의 산적단을 거느리고 주전무의 부대를 도와 일본군에 저항한다. 주전무가 전사한 후, 주전무의 시체를 주씨네 집에 운반해오고, 주씨네 집에 쳐들어온 일본군들을 사살한다.
나문[11] - 주전문의 아내. 원래는 청나라 친왕의 딸이었으나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집안이 몰락하고 주전문에게 시집가게 된다. 왕실 출신이라 박식하고 재주가 많지만 곱게 자라서 농사일이나 부엌일은 꽝이다. 하지만 마작 실력이 뛰어나서 도박으로 크게 한탕 딴 적이 있다.[12]
한수 - 주전무의 명목상 아내, 작중에서는 수아로 불려진다. 지주의 딸로 일편단심 주전무를 사모하고 있지만 주전무는 수아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다. 한씨 일가에게 도움이 필요했던 주개산이 억지로 둘을 결혼시키려 하지만, 주전무는 결혼 당일날 수아를 재워놓고 가출해 버린다. 주개산 일가가 하얼빈에 진출할 때 둘째 며느리 신분으로 따라갔으나 주전무는 여전히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시어머니가 불쌍하게 생각해서 수아를 많이 챙겨주긴 하지만... 4부에서는 자신을 연모하는 이치로에게 마음을 열다가 결국 주개산 일가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게 된다.[13] 하지만 이치로가 자살하게 되면서 다시 주씨네 일가로 돌아온다.[14]
하옥서 - 상인 하워장의 딸이며 주전걸의 아내. 외국의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진보적 청년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작품 최후반부에 아들을 출산한다.[15] 나름대로 캐릭터성이 있긴 하지만 다른 시누이들에 비해 비중이 적은 편.
2.1.2. 1부 관련
하원장 - 관동에서 가게를 차린 상인. 주개산의 처자식들이 관동으로 갈 때 같은 배를 탔으며, 굶어죽을뻔 했으나 주씨 일가가 양식을 나눠줘서 목숨을 건진 인연이 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전무와 주전걸을 받아들여 장사를 배우게 하지만 주전무가 허구한날 사고를 치는데다 장사는 적성에 맞지 않을거라 판단해서 집에 돌려보낸다. 청일전쟁 때 막내딸 하옥서를 제외한 일가족이 뤼순에서 일본군들에게 살해당한 과거가 있어서 일본이라면 치를 떤다. 1부 시점에서는 아버지가 있었으나 2부 시점에서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타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2부 시점에서 후실을 들인다. 인성은 나쁘지 않지만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된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상도를 고집하고 있다. 경쟁 상대이자 악질 상인인 오씨를 계략으로 몰아붙여서 파산시키는가 싶었지만, 결국 오씨와 결탁한 다른 상인의 계략에 의해 장사에서 크게 손해보고, 설상가상으로 아편까지 피우다보니 몸도 망가져 버려서 결국 사망한다.
금대나 - 주개산이 일하던 금광의 책임자. 금대나는 이름이 아니라 금광의 책임자라는 뜻의 호칭이다. 관가와 결탁하여 주개산의 파트너인 하노사를 살해하고 하노사의 금광을 빼앗는다. 하노사에게 파트너가 있어서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 짐작하고 캐내려 하지만 실패한다. 인부들을 미끼로 하여 본인이 몰래 금을 빼돌리려 하였으나[16] 주개산에게 간파당해 도망치다가 주개산이 투척한 편자에 맞아죽는다.
금파두 - 금광의 현장관리인. 금파두도 이름이 아닌 직위 호칭이며, 사실 금대나와는 사촌형제 사이다. 금광 인부들과 함께 금을 빼돌리는척 하지만 사실은 일꾼들을 미끼로 써먹기 위한 음모였고, 금 반출 계획을 미리 관가에 밀고하여 관가의 주의가 인부들에게 쏠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주개산이 금을 금파두의 몸에 숨겨놓아서 금파두가 오히려 현행범으로 처형당한다.
대흑아두 - 역시 별명이며, '검은 계집'[17] 이라는 뜻이다. 금광 일대에서 술집을 차리는 여주인. 주개산에게 호감을 가지고있는듯 하지만 사실 산적들이 심은 첩자였다. 자의로 첩자가 된 건 아니고, 딸이 산적들에게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라고. 주개산에 의해 신분이 간파되고 죽임을 당할줄 알았으나[18] 그녀의 딱한 사정을 참작해 결국 살려준다.
대금립 - '큰 금알'이라는 뜻으로, 역시 별명인 것 같다. 금광의 인부 중 한 명으로, 성질머리가 더럽고 거만하다. 처음엔 성질 죽이고 살던 주개산을 햇내기로 알고 여러모로 괴롭혔으나 주개산이 괴력을 선보인 뒤로는 감복하고 사과한다. 하지만 여자 문제로 돈이 필요해서 장딴지를 가르고 금을 넣어 반출하려다 산적들에게 걸려서 살해당한다. 이후 사실 대흑아두의 아들이며 역시 첩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소금립 - '작은 금알'이라는 뜻으로, 역시 별명인 것 같다. 대금립의 동생이며 아직 어린아이다. 역시 금광에서 인부로 일하고 있으며 형과는 달리 주개산에게 상냥하게 대하며, 나중엔 아예 주개산을 양아버지로 모신다. 하지만 역시 대흑아두의 아들이며 첩자인 걸로 밝혀진다.
노독벽 - '외팔 노인'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젊었을 때 염군]에 가담한 적이 있다. 한쪽 팔은 호랑이를 많나서 잃은 것이라고 한다. 주전무와 선아가 일하는 벌목장의 현장관리인이며 겨울에 벌목, 여름에 수로로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마적떼가 운수선을 공격할 때 총탄에 맞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한다.
홍두건 - '붉은 두건'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원래는 약혼남까지 있었으나 연극을 보던 중에 누군가에게 엉덩이를 만지는 성추행을 당했단 이유로 파혼당했다. 이 일로 혼사길이 막혀서 결국 창녀가 되었으며, 1부 시점에서는 벌목장에서 몸을 팔고 있다. 성질이 불같은 면이 있으나 마음씨는 착해서 주전무와 선아를 은근히 챙겨주며 주전무에게는 호감이 있는듯하다. 2부 시점에서는 벌목장을 떠났으나 여전히 기생집에서 몸을 팔고 있으며, 우연히 재회한 선아에게 진삼강을 소개시켜준다. 그 이후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2.1.3. 2부 관련
한노해 - 관동의 지주이며 수아의 아버지. 수아가 주전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침 가뭄으로 물이 급했던 주씨 일가와 거래를 제안한다. 주전무는 이 결혼을 거부했지만 주개산의 강압으로 혼담이 성사되는가 싶더니, 결국 주전무가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식까지 다 치르고 가출해버렸는지라 한씨 일가 입장에서는 제대로 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으며, 수아가 그 충격으로 반쯤 실성했는지라 이 일로 주씨 일가에게 원한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보복을 가한다. 처음엔 주개산도 미안한 참지만 한노해의 소행이 점점 선을 넘자 결국 맞대응을 하면서 적당히 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노해가 보냈던 산적이 주개산에게 역관광 당한 상황이라 결국 수락하고, 이후 무장 탈영병의 약탈과 방화로 죽을뻔 했을때 주개산이 구해줘서 원한을 풀게 된다. 주개산 일가가 하얼빈으로 이주할 때 수아를 같이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머슴들 - 주개산의 집에서 일하는 머슴들인데... 전래동화에서 나오는 부자와 머슴의 관계를 기대하면 안되고, 진짜 말듣지 않는 머슴들이다. 심지어 한노해와 결탁하여 주씨네 가축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들 때문에 장자 주전문은 속을 썩이고, 참다못한 주개산이 나서서 왕년의 포스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고분고분해진다.
진삼강 - '삼강 일대를 호령한다'는 뜻의 별명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본명이 안 나왔으나, 드라마판에서는 이름이 조룡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거상으로 위장해서 아내를 찾아다녔으며, 홍두건의 소개로 선아를 데려가게 되지만 이런저런 원인으로 결혼을 포기하고[19] 의남매를 맺는다. 3부에서는 러시아 군대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되어 가다가 일행이 주개산의 식당에 들르게 되는데 진삼강이 호걸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개산이 한끼 식사의 선심을 베풀자 그 보답으로 자신이 강탈했던 재물을 감춘 위치를 알려준다. 하지만 주개산은 그 재물로 경찰서에 뇌물을 먹여 진삼강을 구출해주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진삼강은 주씨네 행상대가 다른 산적에게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진삼강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산적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했으나, 주씨와 경쟁관계에 있는 반씨 일가가 그 산적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자 결국 진삼강을 공격, 진삼강은 이들과의 싸움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다.
노사 - 넷째라는 뜻의 별명이며, 별명처럼 진삼강 산적단의 넷째 두목이다.[20] 특별한 개성은 없지만 꾸준히 등장하는 조연이며, 나중에 하얼빈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치르다가 전사한다.
2.1.4. 3부 관련
반오야 - 반씨네 다섯째라는 뜻의 존칭, 3부의 메인빌런이다. 열하성에서 틈관동해 왔으며 유씨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로 열하인들의 수장이 되어 산동인들을 억압한다. 왕년에 위세를 떨쳤던 주개산이 나타나자 산동인들의 구심점이 될 것을 염려하여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주씨 일가를 쫓아내려고 한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봐서[21] 주개산도 그냥 떠나려고 하지만, 떠나기 전날에 반오야가 찾아와서 '질긴 소고기가 씹는 맛이 좋다'면서 도발을 날리고, 진삼강도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채찍을 주면서 이걸 보여주면 다른 산적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주개산 일가는 다시 남게 된다. 이후에도 여러 수작을 부리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진삼강의 산적단이 반씨네 상대를 노리고 집요하게 털어먹으면서 오히려 불리해지자 주개산을 찾아 전재산을 걸고 내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내기에서 보기 좋게 패배하고 본인의 독자까지 사망하는 바람에 홧김으로 드러누웠다가 주개산이 찾아와서 내기 무효다, 이런 의미없는 싸움은 더이상 하지 말자고 화해를 제안하자 그제서야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후회하며 통곡한다. 이후 아들의 장례식에서 주개산과 함께 산동과 열하 사람은 더이상 서로 싸우지 않고 영원히 화목하게 지내리라 맹세하고, 4부 시점에서는 재산을 조카에게 물려준 뒤 고향인 열하로 돌아갔다고 언급된다.
반노대 - 반씨네 맏아들이라는 뜻의 호칭인데... 애초에 반씨네는 독자다. 본명은 드라마 버전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 반소덕이라고 적힌 게 스쳐가듯 나온다.
천외천 - 반씨 일가와 결탁한 산적.
유씨 - 작중 찌질이 2호.
유대보 - 유씨의 아들.
궈쑹링 - 실존인물.
장쉐량 - 실존인물.
2.1.5. 4부 관련
모리타 다이스케 - 4부의 메인빌런.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 참가했었으며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서 시력이 좋지 않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이며 갑자구의 석탄 채굴권을 두고 중국인들과 경쟁한다.
이시카와 코지 - 모리타 다이스케의 측근 부하. 작중 엔딩 부분에서 모리타 다이스케를 따라 주씨 일가네 집에 쳐들어왔다가 사망한다.
반소경 - 반오야의 조카.
[1] 관동은 산해관의 동쪽, 즉, 만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틈은 문을 열었다는 의미다. 비슷한 말로 동남아로 이주하는 하남양(下南洋)과 몽골로 가는 조서구(走西口)가 있다. 전부 당대 먹고 살기 힘들었던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단어들이다.[2] 본래 요동 지역은 명나라 시절부터 조금씩 개척이 이루어지던 영토였으나 이 정책으로 인해 정착민 대부분이 쫒겨났다.[3] '성인 남성만' 해당한 이유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4]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황무지라는 뜻.[5] 북대황 개발 이전까지 이 지역은 황량한 늪지대였다.[6] 금광에서 사고로 생매장 당했는데 그걸 자력으로 뚫고 다시 지상에 돌아온 적이 있다.[7] 전에 일본인들과 협력할 때 자신의 가족만큼은 건들지 말라고 조건을 내걸었다.[8] 원래는 수아가 자기 집으로 데려왔으나 이치로가 병에 걸린 것을 본 한노해가 기겁해서 버리라고 하고, 수아는 차마 버리지 못해서 예비 시댁인 주개산네 집에 데려온다.[9] 원래는 둘이 결혼까지 치를 예정이었지만 혼수로 준비해둔 양식이 산적들에게 강탈당한다. 당시 흉년이라 양식이 귀했기 때문에 선아의 부모는 양식 없이는 시집보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결혼을 미룬다.[10] 주전문도 선아를 8년을 기다렸으나 노총각으로 남기도 뭣해서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나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11] 왕실 출신이므로 성씨가 아이신기오로라는 추측도 있지만 작중에서는 나문으로만 나온다.[12] 이후 주전문도 배운게 있는지, 역시 마작으로 크게 딴 적이 있다.[13] 원래는 바람을 핀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주전무가 거의 20년동안 한 번도 수아와 동침하지 않아 수아가 생과부로 지냈기 때문에 오히려 주개산 일가가 미안한 입장이다. 시누이인 나문도 처음엔 바람폈다며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수아가 20년을 생과부로 지냈다는 사실을 알자 수아의 편을 들었고, 명의상 남편인 주전무도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과하고 수아를 놓아준다.[14] 이치로도 주씨의 양자인지라 어쨌든 계속 주씨의 며느리다.[15] 이 때 주전무가 전사하는데, 사망과 출생을 동시에 다룸으로서 가족의 대가 끊기지 않고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이어갈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6] 당시 채굴한 황금은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고 국가에 상납해야 했다.[17] 아두는 계집 혹은 몸종이라는 뜻이다.[18] 그녀의 밀고로 인해 금 반출을 시도하던 인부들 몇 명이 죽었다.[19] 원작 소설에서는 선아가 주개산의 양딸이라는 걸 듣고 놀라서 '나 따위가 어찌 감히 주개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겠는가'며 포기, 드라마판에서는 선아의 과거 행적을 듣고 존경심이 생겨서 포기한다.[20] 왠지 산적단에 셋째 두목이 없다.[21] 블랙 컨슈머 및 진상손님들을 보낸 건 어찌어찌 주개산의 재치로 넘어갔지만 산적들과 결탁하여 주전걸의 행상대를 공격하고 주전걸에게 부상을 입힌 건 주개산으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