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청치시기
1. 개요
청나라가 1683년 정씨 왕국을 멸망시킨 때부터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 섬을 할양할 때까지를 지칭한다. 한자로 '''청조통치시기'''(淸朝統治時期), '''대만청치시기'''(臺灣清治時期)라고도 한다.
템플릿에 사용된 지도는 1894년 당시 청의 타이완 섬 점유를 나타낸 지도로, 타이완 섬 내륙은 대만 원주민들의 영역이었다. 섬 전역을 지배하에 넣은 나라는 일본 제국이 최초이다.
2. 상세
정씨 왕국은 타이완 섬을 거점으로 존속 내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고수하며 청나라에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무력을 동원하여 결국 정씨 왕국을 멸망시키고 타이완 섬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복건성으로 편입하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청 정부는 타이완 섬이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들의 타이완 섬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전근대의 모자란 행정력 때문에 한족들의 불법 이주가 판을 쳤다.[1] 불법적으로 건너간 한족들의 배가 난파되어 시신으로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당시의 타이완은 대륙에 비해 발달이 덜 된 험한 곳이다 보니 남성들이 주로 건너가서[2] 섬의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져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게 되었다.
이주한 한족들은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타이완 섬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한족과 대만 원주민(당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멸시 의식에서 생번(生蕃)이라 하였다)의 경계인 '번계(蕃界)'를 정해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금했지만, 한족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한족들이 점차 번계를 넘어 원주민 영역에서 농사를 짓고, 시간이 흘러 번계가 재조정되어 원주민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 또 원주민 영역에서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은 한족들도 있었지만 원주민 토지를 강탈한 한족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족의 생활영역과 원주민의 생활영역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타이완 섬 한족 주민의 남초현상이 심각했기에, 한족 남성들이 주로 평야지대의 대만 원주민 여성들과 혼인하여 대만 원주민의 한족 동화가 촉진되었다. 그러나 현재 본성인 혈통에 대만 원주민 혈통이 거의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족 여성도 대다수의 한족 남성과 결혼할 수 있을 만큼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1717년 청나라는 모든 남양무역을 금지했고 타이완 섬에서는 중계무역이 단절되어 손해가 막심하였다. 1727년 이 무역금지 조치는 해제되고 남양무역이 다시 개방되었으나 대만은 대외무역항에서 제외되었다. 청의 이러한 타이완 섬 탄압은 타이완 섬이 다시 서양세력의 무역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시행되었다.
청의 의도대로 타이완 섬은 국제무역망에서 벗어났으나 중국 대륙과 일정한 교류는 지속되었으며 시간이 흐르자 증가하는 경향이 보였다. 또한 타이완 섬의 동남아무역도 어느정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1732년, 옹정제 통치 시기 청나라는 타이완 섬 동북부를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타이완 섬 부족들의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이 멸망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토였던 곳은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맺은 톈진 조약(Treaty of Tientsin)의 영향으로 1865년 타이완 섬이 개항되었다. 항구개항으로 타이완 섬은 다시 국제무역망에 포함되었다. 이후 타이완 섬은 차, 설탕 등을 수출하면서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아울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류큐 왕국 병합으로 타이완 섬은 갑작스럽게 최전선이 되자 청나라에서는 대외 방어의 전초 기지로서 타이완 섬의 역할에 주목해, 타이완 섬을 복건성(푸젠 성) 관할에서 새로 설치한 대만성(타이완 성) 관할로 하고 성도(省都)를 타이난이 아닌 타이베이에 두었으며, 당시 청나라의 근대화 정책과 맞물려 철도가 부설되고 전등이 설치되는 등 근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 발효되었다. 조약의 결과 타이완 섬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로써 청의 타이완 섬 통치는 종료되었다. 타이완 섬의 한족들은 이에 저항하여 타이완 민주국을 수립하고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 저항이 실패하면서 타이완 섬은 일본 제국의 영향권 하에 완전히 포함되었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200년 넘게 영유했다. 그러나 근대 민족의식이 태동하기 이전이고 타이완 섬으로 이주한 한족들은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국가/민족 정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청나라 역시 타이완 섬을 일본에 양도하기 직전인 19세기 말을 제외하면 타이완 통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타이완 섬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될 정책도 여럿 추진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청나라에 대한 귀속감은 크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이 타이완 섬을 영유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비해 이 지역에서는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타이완 섬을 통치한 국가라 할 만한 정치체제 중 청나라의 통치가 가장 길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대만인들은 중국인 정체성이 약한데, 청나라가 보여준 무관심도 그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3. 참고 문헌
- 조세현,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 대만학계의 연구현황을 중심으로", 2016
[1] 이들은 대개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나 나라에 찍힌 해적들이었기에 어차피 이주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2] 청나라에서는 타이완 섬에 한족들이 눌러앉는 것을 막기 위해 남성만 이주를 허락하고 여성의 이주를 금지했던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