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치하 몽골

 


'''청나라 치하 몽골'''
'''ᠮᠠᠨᠵᠤ ᠶᠢᠨ ᠦᠶ᠎ᠡ'''
'''Манжийн ү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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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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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1912
위치
내외몽골
수도
울리아스타이(외몽골)
후흐허트(내몽골)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대칸 황제
언어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한족, 몽골인
종교
티베트 불교
성립 이전
북원
멸망 이후
중화민국(내몽골 ''복속'')
복드 칸국(외몽골 ''독립'')
1. 개요
2. 상세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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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가 몽골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1635년부터 몽골의 독립국 복드 칸국이 수립된 1911년까지를 지칭한다.
통치자는 청나라 제2대 황제인 숭덕제부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까지이다.

2. 상세


몽골계 민족들은 14세기 후반 몽골 제국의 해체 이후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다. 분열 후 수많은 몽골계 종족들이 난립했으나 17세기 이후 북방에 진출하기 시작한 청나라에 의해 이들은 복속되기 시작하였다.
그전에 중원에서 패퇴한 원나라북원은 차하르를 중심으로 만주 및 내몽골 일원의 각 유목부족을 규합했었고 원 소종 땐 중국 북부의 허베이 성산시 성 등을 수복해 한족 거주지가 대거 포섭되었다. 내몽골로의 한족 이주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북원의 영향력하에는 연해주지린 성, 헤이룽장 성에 살던 여진족 각 부족들도 있었고, 이들은 명과 북원, 조선에 모두 조아리며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북원은 3대 만에 명나라와의 부이르 호 전투에서 패배해서 멸망하고 만다. 이때 중심지인 후룬부이르가 털리고, 기세를 몰아 서달의 북방 원정군이 외몽골의 오이라트까지 손봐주려 현 울란바토르인 외튀켄 산으로 진격했다.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역시 불에 타 버린다. 이후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가 칸을 자처했으나 다시 암살당해 보르지긴 씨족이 주도권을 되찾아 오게된다. 이후 몽골은 나름 힘을 길러 다얀 칸 때에 이르러 '''대원황제'''를 다시 선포하며, 명나라에서 오는 한족 이주민들을 시켜 귀화성이라는 중국식 도시를 짓게 하였고, 알탄 칸 때는 경술의 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포위해 화북을 거의 회복할 뻔한다.
이후 만력 3대정으로 명이 약체화되고, 여진 부족들이 약진하며 몽골도 힘을 잃었다. 그리고 오이라트도 에센 사후 힘을 잃었으며 준가르로 계승된다. 그리고 여진 부족들 역시 누르하치를 통해 통일, 스스로 후금을 자칭하고 유목세계 통일에 나선다.
17세기 초중기에 한참 일어나던 후금내몽골이 복속되어 대원진국옥새를 바치고 후금과 일체화되었다.
17세기 말기에 강희제는 원정을 통해 준가르인들을 쫓아내 버리고 외몽골을 복속시켜 버렸다. 이때 준가르 명군인 가르단은 패퇴 후 알타이 기슭에서 자살해 버렸다.
가르단이 죽고 체왕 랍탄이 뒤를 이으며 준가르는 신장성 및 외몽골 서부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번엔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그 후 18세기 중기 건륭제 때에는 이 준가르를 완전히 갈아 엎어버리고 준가르인들을 대량학살하면서 신장성티베트, 칭하이 성이 차례대로 청나라의 영역에 복속되었다. 이때 신장성은 준가르 절멸로 빈 땅이 되어버렸고, 여기에 한족들과 신장 서부 타림 분지 일대에 살던 위구르, 알타이 일대에 살던 카자흐, 키르기스, 타타르 등 각 튀르크 부족들을 이주시키며 둥간이라 불리는 한족 무슬림 회족도 이 지역에 들여보낸다.
외몽골의 할하인들은 청나라의 간접지배 하에 놓인 이후 끊임없이 청나라에 저항하였다. 할하 거주지인 외몽골은 반 독립지대로 조공국 형식이라 각 지역의 칸들이 알아서 다스리고 중국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으나 어쨌든 청 황실의 영향력 아래 놓였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중국과는 물론 내몽골과도 이질적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이번원(理藩院, Tulergi Golo-be Dasara Jurgan)이란 기구을 설립하여 만주와 내몽골 기인들에게 이번원의 모든 업무를 담당케 했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 이미 일체화한 몽골부족들이 할하 거주지로 들어가 이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똑같이 티베트에도 암반이라는 기구를 설치했으나 이 기구는 내정간섭보단 '''주티베트 청나라 대사관'''에 가까웠다. 티베트의 경우 단순히 번국이라고 하기엔 지위가 너무 높았다. 이유는 티베트 불교를 통해 몽골을 통제하기위해서이다.
그리고 저항하는 외몽골인들을 억제하기 위해 분할통치(分而治之)를 실행하였는데, 일정한 유목지를 설정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가 속한 행정구역 밖으로 거주를 이전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 행정구역이 바로 기(旗, Qosi'u 호쇼트 또는 코쇼)와 소목(蘇木, Sumu 수무), 맹(盟, Aimag 아이막)으로 청과 중화민국 시기를 거쳐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명목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는 몽골인들의 역동성과 단결성을 억제하고, 청나라의 지배구조에 순응, 동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미 만주에 일체화된 내몽골인들은 이 기/맹 시스템을 따르고 있어서 한족들이 무슨 성 사람인가 할때 이들은 무슨 기 사람인가 라며 서로를 정의했다.
청은 이질적인 외몽골인을 억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찍 일체화된 내몽골인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우대하였다. 내몽골인들의 경우 일찍이 후금 시절부터 합류한지라 팔기군에 몽고병 내진 몽골팔기로, 한족으로 구성된 한병, 만주족과 타 여진족 부족들 그리고 시버족으로 구성된 청병과 함께 엄연한 팔기군의 구성원이었다. 물론 숫자는 한병 즉 한군기인이 제일 많았고 팔기 내에서 몽골기인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나 이들은 한군기인보다 우대받는 집단이었고, 청대 내몽골 지역의 132기 중 106기가 다얀 칸의 후손이었는데, 황실은 주로 이들 보르지긴 왕공들의 딸과 지속적으로 통혼하였다. 덕분에 내몽골 왕공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특히 준가르 원정과 할하 복속 때 내몽골 왕공들이 주력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내몽골의 중국화(中國化)의 원인은 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청나라 시기 내몽골에 광산 개발이 이루어지자 한족들이 내몽골에 정착하면서 내몽골이 중국에 동화돼버린 것과 한화된 만주인이 몽골인과의 혼인함으로써 한인문화가 몽골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된 것 등이 있다. 사실 한족들의 경우 다얀 칸 시절에 한족 거주지가 대거 몽골 영역에 포섭되자 동몽골 내 한족 비중이 갑자기 늘었고, 알탄 칸이 만든 귀화성은 아예 한족들을 동원해 만든 도시였다.
물론 내몽골의 원주민인 차하르, 우랑카이, 투메드, 칼간 부족민들은 엄연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몽골"에 두고 있고, 오히려 보르지기트 가문의 적통임을 자부하고 있다.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은 이 차하르인들을 아주 혐오하여 몽골인인 척 하는 중국인 정도로 취급하고, 차하르인은 보르지기트 씨족 자부심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진짜 몽골 원본임을 강조한다. 허나 외몽골에도 압타이 샌 칸[1] 처럼 칭기즈 칸의 후손이 존재했고, 청나라 시기 내몽골에서 영향력을 떨친 보르지긴 귀족들은 칭기즈 칸 직계가 아닌 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외몽골/내몽골의 분열 자체가 알탄 칸 등 몽골 왕족간의 분열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정통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3. 참고 문헌


  • 이평래, "1911년 몽골 독립과 민족 통합 운동의 초기 과정", 2008, vol., no.104, pp. 155-190 (36 pages)
[1] 몽골 1대 "젭춘담바 후툭투"인 자나바자르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