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협지
1. 개요
판협지란 90년대에 등장했던 신무협이 몰락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여 2000년대 도서대여점 시대에 무협소설의 주류를 차지했었던 '''가벼운 무협 작품군'''을 의미한다.
무협소설의 세대 구분에 따르면 3세대 무협이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와 무'''협'''지를 더한 말로, 판타지의 극초창기 번역이었던 '환상소설', 혹은 Fantasy를 '''환타지'''[1] 로 읽어 앞글자를 따 온 환협지라는 말로도 불렸다.
판협지라는 말이 막 생겨난 초기에는 퓨전 판타지를 가리키기도 했으나, 현재에는 2000년대 도서대여점 시절에 유행했던 양산형 무협 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완전히 정착된 상황이다. 어원에 판타지가 들어가 있음에도 순수 무협 소설에도 판협지라는 말을 쓰는 상황이다.
당시 종이책에 표시되던 장르명은 신무협 또는 신무협 판타지였다.[2]
2. 유래
1980년대 후반 무협 장르 자체가 몰락하는 듯했으나, 90년대에 이른바 무협의 르네상스를 맞으며 신무협이 등장한다. 신무협은 금방 대세로 굳는 듯했으나, 두 가지 문제점에 직면한다.
- 훗날 좌백이 술회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작품성에 치중하다 보니 무협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었고, 무협 고정독자층이 이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 또한 무협 붐에 힘입어 과거 이름난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재간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지명도가 낮거나 과작(寡作)인 신무협 작가들에 대한 시장 선호도가 급격히 하락해 밀려난다.
초기 창작무협 작가들은 고전 중국무협의 세례를 받았고, 이후 신무협 작가들은 중국무협과 한국무협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데 비해서, 새롭게 등장한 작가층은 무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한테는 30년 넘게 무협 작품이 나오면서 숱하게 쌓인 검증된 필수요소들과, 이영도가 일으킨 판타지 소설 붐이 있었다. 때문에 판협지는 기존의 구무협과 신무협과는 다르게 판타지 소설의 영향을 받고, 또 한국 판타지 소설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판협지의 시작은 <묵향>과 <비뢰도>, 그리고 <황제의 검>으로, 세 작품을 필두로 한 판협지는 신무협의 몰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품성 대신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고, 당시 인기 장르였던 판타지 소설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또한 기존의 1세대 구무협, 2세대 신무협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인터넷 연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판협지의 특징들은 무협소설은 아재들의 전유물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보다 연령대가 낮은 10대 20대 독자들한테 어필하는 데 성공했으며, 신무협 몰락 당시 이탈한 고정 독자층을 다시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묵향과 비뢰도, 황제의 검의 성공 이후 이러한 판협지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오면서, 2000년대의 판협지는 판타지 소설과 함께 도서대여점의 양대 축이 될 수 있었다.
판협지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묵향, 비뢰도, 황제의 검, 권왕무적, 잠룡전설 등이 있다.
3. 몰락
판협지는 2000년대 당시 독자층의 욕망을 대리충족하게 하면서 커졌다는 점에서 1세대 구무협과 유사성이 있는데, 1세대 무협 몰락의 원인인 유사한 패턴의 반복과 그로 인해 식상한 독자들의 이탈, 1세대 식의 표절까진 아니라 해도 유사한 소재의 반복적인 차용, 질 떨어지는 상품의 범람 같은 1세대 무협 몰락의 원인까지 따라가는 경향이 계속 보이는 상태다. 질 떨어지는 글의 범람은 결국 괜찮은 작품까지 묻어버리고 괜찮은 작품이 묻히면서 결국 독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는데, 대여점 체제에선 일단 질은 둘째 치고 책들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는 게 문제점이었고, 결국 도서대여점의 몰락과 함께 3세대 판협지 역시 함께 몰락하게 된다.
이렇게 판협지가 몰락한 이후 2010년대에 접어들고 웹소설 시장이 부상하면서 무협소설의 무대는 웹소설로 넘어가게 되고 회귀물과 사이다 등 최신 필수요소를 도입하여 4세대 무협인 무협 웹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4. 특징과 의의
판협지라는 용어 자체가 퓨전 판타지나 양판소와 같이 거론되는 일들이 많고, 그리 이미지가 좋은 용어는 아니다. 그래서 세대를 구분한다기보다는 소설의 수준을 얕잡아보는 용도로 사용될 때도 많다.[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협지는 3세대 무협으로서, 그 이전의 구무협, 신무협[4] 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특징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신세대의 입맛에 맞는 문체와 클리셰, 분위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80년대, 90년대에는 젊은 세대들도 구무협, 신무협 등을 보았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조차 무협지의 분위기는 아저씨틱하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치게 무겁고 장중한 문체[5] , 평면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상, 무거운 분위기 등등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기 힘든 면들이 많았다. 그러나 판협지의 시대로 오게 되면서, 인터넷과 대여점의 보급으로 젊은(어린) 세대가 장르소설의 주 독자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쇄신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본 장르문학에서 라이트노벨이 나온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문체는 확연히 가벼워졌고 유머러스해졌다. 가벼운 농담 따먹기 등이 많이 들어가서 사극이 아니라 시트콤의 분위기로 바뀌었다.[6] PC통신과 인터넷 문학답게 짧고 대화 위주의 문장이 적극 사용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진지한 작품이 없는건 또 아니다. 하지만 진지할땐 진지해도 일상의 유쾌함은 버리지 않았다.
둘째로 그 이전에는 주인공들이 완벽초인이나 복수귀 등 마치 그리스 신화나 사마천 사기, 고전소설 등에 나올 법한 전통적 영웅상의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일부 국어 선생님들은 영웅일대기의 구조가 곧 무협지의 구조다! 라고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주인공들은 반드시 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협'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러한 주인공의 상은 판협지의 시대에 와서아 현대적인 소설의 주인공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물론 판협지에서도 먼치킨 주인공이나 잘난 주인공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과거의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 없어 보이는 주인공에서 내면적인 욕망과 고민이 드러나는 주인공으로 바뀌어갔다는 점은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과거의 클리셰가 바뀌는 과정에서 악한 주인공[7] 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주인공의 전형적인 예가 묵향과 비뢰도의 주인공들이다.
셋째로 연애에 대한 묘사가 대폭 늘어났다. 과거에도 성애씬은 넘쳐났고 연애 묘사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히로인들은 상당히 평면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히로인들은 남성인 주인공들의 전리품과 같은 존재였고, 개성과 단점이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그냥 완벽하게 이쁘고 몸매 좋고 무공도 제법 강하고 지위도 높은 그런 여성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재미있게도 정작 한국 무협의 뿌리에 닿아 있는 김용 노사의 소설 같은 경우 주체적이고, 개성도 강하고, 감정표현도 하고, 결점도 있고, 역동적이기도 한 여성상을 보여줬었다는 점이다.
하여간 이러한 김용 소설의 여주인공들 같은 여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요새 표현으로 하자면 다양한 모에요소들이 적용되기도 하였다.[8] 남자를 이끌고 다니거나 츤츤거리는 여주인공은 마치 당시 유행하던 서브컬쳐 여주인공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연애의 분위기는 너무 분위기를 잡는 연애보다는 알콩달콩한 연애 쪽으로 흘렀고, 하렘은 뭐 무협이기도 하니깐 당연히 기본(...)
연애묘사는 늘었지만 비교적 저연령을 대상으로 하였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연재되기도 하고 하다보니 수위는 낮아졌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사라졌고 대신 섹드립이나 베드신 정도가 들어가는 정도였다. 물론 베드신이 꽤 찐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과거 무협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있지만, 언급한 변화들만 해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 분위기를 주기에 충분했고, 이래서 침체되었던 한국 무협이 다시 젊은 층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공식
대략적인 공식을 정리한 페이지
- 주인공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최후를 맞은 은둔고수의 후손 혹은 환생이다.
- 아주 잘생겼고, 처음에는 상냥하다. 이후에 사건을 겪으며 비정해지고 오만해지다가, 천생연분을 만나 성격이 온화해진다.
- 적대세력에서 자객을 보내어 주인공을 죽이려고 들지만,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지거나 확인사살을 빠뜨려서 지나가던 초고수에게 구원받는다.
- 청출어람은 기본이요, 100년이 걸려도 한번 볼까 말까 하다는 영단을 먹고 급격히 파워 업한다.
- 강호행의 목적은 오로지 복수. 나중에 인생에 희의를 느끼고 자살하거나 잠적하거나 한다.
- 모여드는 아가씨들은 모두 미인이며, 츤데레, 일편단심형이다. - 그러나 이건 모든 무협, 아니 모든 장르문학이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추녀, 추남들이 몰려드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 적들은 뭔 짓을 해도 결코 주인공을 이길 수가 없다. 아군도 마찬가지라서, 주인공이 아무리 막나가도 제재할 수가 없다.
- 기연이 발에 채여 굴러다닌다. 그래서 죽어야 할 상황에서 늘 멀쩡히 살아난다.
- 스승이 있다면 그 유형은 무조건 둘 중 하나다. 주인공을 성심성의로 가르친 뒤 모든 것을 내주고 내상을 이유로 죽는 스승 혹은 주인공을 시종처럼 부려먹는 경박한 스승. 후자는 대개 자신보다 강해진 주인공의 휘하에서 개고생한다.
- 술을 마셨다 하면 죽엽청과 여아홍 뿐이요, 요리는 만두, 소면, 오리고기, 소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화요리에 대한 묘사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아예 요리사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이상, 중화요리를 가장 다양하게 묘사한 작품이 다름 아닌 《다크메이지》[9] 일 정도. 물론 양산형이 그렇다는 거고 작가가 내공이 깊은 경우, 대표적으로 군림천하만 봐도 중화요리에 대해 풍부한 묘사를 한다.
6. 관련 문서
[1] 주로 과거에 쓰였고 일본식 영어의 영향을 받은 표기다. 현대에도 읍니다 드립처럼 알면서 그냥 일부러 드립으로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2]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신무협이라는 단어는 90년대에 등장했던 2세대 무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어짜피 마케팅 용어였기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판협지도 신무협이라고 하기도 한다.[3] 이 항목에 '공식' 이 있는 것도 그러한 의도에서라고 볼 수 있다.[4] 90년대 무협을 의미하는 세대론적 구분으로서이다. 자세한 것은 신무협 항목 참조. 구무협과 판협지의 중간 특성을 가지고 있다.[5] 성애 씬에서조차 그렇다..[6]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시트콤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부터였다.[7] 과거에도 잔인한 주인공들은 있었지만 나름의 신념과 소위 협이 있는 주인공들이었다.[8] 서브컬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점이니, 실제로 서브컬쳐의 영향으로 묘사에 그런 것을 넣은 작가도 있었을 것이고, 그냥 인류 보편적인 매력 어필 차원에서 넣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9] 주인공은 원래 요리사는 아니지만, 중원에서 마교 교주로 지내던 시절에 입맛이 워낙 고급이라 어지간한 숙수들 솜씨도 성에 안 차서 스스로 요리를 배웠다는 설정이라 웬만한 요리사 이상으로 중화요리를 잘 만든다.[10] 판협지와 인터넷 무협지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는, 2010년경부터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차세대 무협지 장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