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피닉스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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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이자 음악가. 하지만 1993년, '''만 23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만약 리버가 현재까지 잘 살아 있었다면 '''만 54세'''로,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한 연기 커리어를 쌓아오면서 꽃다운 중년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할리우드 최대 유망주로'''[11] 꽃미남 미모에 섬세하고 우수한 연기력을 갖춰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던 배우였다.[12] 1993년 사망했기에 현 시대를 살아가는 10~20대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며, 듣고선 누구냐고 하겠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만큼에는 그는 역대급 임팩트를 남긴 할리우드 스타로 평가받는다. 40대, 50대 세대는 거의 리버 피닉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
연기력도 뛰어난 편이고, 엄청난 외모로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20대 초반에 요절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의 제임스 딘'''으로 불린다.
그 '''호아킨 피닉스의 형이다.''' 호아킨 역시 형을 닮아서 역대급 연기력의 소유자이고, 2019년작 조커에서 아서 플렉을 열연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다.
2. 출생
1970년 8월 23일, 히피인 알린 듀네츠와 존 리 바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 알린은 컴퓨터 오퍼레이터와 결혼을 하고 스물셋의 나이에 뉴욕 맨해튼의 한 사무실에서 비서 일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늘 바라왔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1968년 여름, 백팩 속에는 옷 몇 벌을, 주머니 속에는 단 몇 달러만을 넣고 서부지역을 향해 도망치듯 떠난 히치하이킹 여행에서 존을 만나 마드라스에 정착해 첫 아이인 리버 주드 바텀(River Jude Bottom)을 낳았다.
'''리버(River)'''라는 이름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속 '생명의 강(River of Life)'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이름이다. 영어 이름의 경우 단어, 자연물을 이름으로 잘 쓰지 않아 리버의 이름은 특이한 편에 속해 종종 인터뷰어들에게 왜 이름이 리버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였다.[13] 또한 리버의 중간 이름인 '''주드(Jude)'''는 영국 배우 주드 로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노래 Hey Jude에서 따왔다고 한다.
2.1. 하나님의 자녀파(派)
리버의 부모님은 리버의 출생 이후 종교적으로 난교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이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에 가입했고 선교의 일환으로 남미 지역을 순회하며 살았다. 이 때 어린 리버와 동생들은 종교 단체의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며 길거리 공연도 자주 했는데 사실상 구걸에 가까웠다. 그들은 후에 종교 단체의 비리와 폐단에 염증을 느껴 개종했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정착했다. 이 때 그들은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로 피닉스라는 성으로 개명하게 된다.[14]
리버는 이런 생활 환경 탓에 정규 학교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정규 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아는 상식인 위인, 역사, 문학 등을 전혀 몰랐다. 극작가 나오미 포너는 "리버 피닉스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읽고 쓸 수 있었고 그러는 것을 좋아했지만 역사나 문학적 감각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했다."고 회상했다. 14살 때 찍은 영화 《컴퓨터 우주 탐험》에 함께 출연했던 또래 이선 호크, 제이슨 프레슨과도 배경지식이 너무 차이가 나서 스탭들이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했는데 리버가 힘들어했다고 한다.[15] 다행히 아역 배우들끼리는 아이답게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리버의 동생들은 그와 같이 재능이 많은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호아킨 피닉스'''다.
3. 연기 활동
3.1. 데뷔
피닉스 가족이 미국에 정착한 후, 댄서이자 아역배우 에이전트인 아이리스 버튼은 리버가 동생들과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잔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다. 그는 그녀 덕에 여러 편의 광고 영상 찍을 수 있게 되었고, 1980년, 여동생 레인과 함께 TV 쇼에 조연 급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3.2. 1980 - 1985: 소년기
리버는 1980년부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판타지》라는 TV 쇼에 여동생 레인과 함께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1982년에는 CBS 방송 프로그램 시리즈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기타를 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내던 리버의 모습을 보고 PD가 섭외했다고 한다.
TV 시리즈가 끝난 1년 후, 리버는 1984년 TV 미니 시리즈 《Celebrity》에 피터 넬슨의 아역으로 출연했다. 비록 10분 정도만 화면에 나왔지만 리버의 배역은 매우 중요했다. 그 후 몇 달이 안 되어 ABC 방송국에서 난독증을 가진 소년을 연기해 호평을 얻었다. 호아킨 피닉스와 같이 출연했으며 이 방송이 호아킨 피닉스의 데뷔작이 되었다. 여러 편의 드라마 출연 후, 1985년, 그는 에단 호크와 함께 그의 첫 영화 《컴퓨터 우주탐험》에 출연하게 된다.
3.2.1.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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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만 16세의 리버는 로브 라이너의 《스탠 바이 미》에서 주인공 무리의 리더 격인 크리스 챔버스를 연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리버가 이 영화의 중력같은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그에 대해 리버는, "나는 크리스 챔버스와 나를 동일시해서 마지막 촬영 후 가족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역에 몰입해있었다.
《스탠 바이 미》와 같은 달에 개봉한 피터 위어 감독[16] 의 《모스키토 코스트》에서는 해리슨 포드의 아들 역을 맡았다. 리버의 연기를 본 위어 감독은 "그는 당연히 스타가 될 것"이며 "연기력 이외에도 그에겐 무언가가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도 없는 무언가가 그에겐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3.2.2. 지미의 사춘기 (A Night in the Life of Jimmy Reardon,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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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키토 코스트》 이후, 리버가 만 17세이던 1988년 2월과 3월,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지미의 사춘기》와 《KGB의 아들》이 차례대로 개봉하게 된다.
그 중 《지미의 사춘기》는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며, 그는 영화 속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가 실망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가 나오질 않았고,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나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 역에 맞는 사람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3.3. 1986 - 1993: 청년기
3.3.1.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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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개봉한 두 편의 영화로부터 몇 달 후, 리버가 만 18세가 된 시점에 그가 출연한 또 하나의 작품, 대감독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가 개봉된다.
이 영화는 FBI에 쫓겨 떠돌이 생활을 하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피아노에 소질을 보이는 첫째 아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평생 거처를 옮겨다녔던 피닉스 가족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교제 중이던 배우 마사 플림튼과 호흡을 맞추었으며, 이 영화에서 리버는 가짜로 연기하는 것이 싫어 직접 피아노를 배워서 연주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로 인해 National Board of Review에서 남우조연상을 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 부문의 후보가 된다. 루멧의 저서 『영화 만들기』에 따르면,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와도 논쟁할 줄 아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17]
3.3.2.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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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리버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에서 어린 인디아나 존스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게 된다.
199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에 출연하여 젊은 해병을 연기했다. 같이 출연한 주연 여배우는 리버는 자신과 배역을 떨어뜨리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로 배역과 한 몸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리버가 연기한 배역은 그와 성격이 너무 달랐다. 히피였던 리버가 해군을 연기하는 것에서 힘들어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라고 회상했다.
3.3.3.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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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와 키아누 리브스는 리버의 남동생 호아킨 피닉스와 키아누가 함께 출연했던 영화 《페어런트 후드》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바람둥이 길들이기》에 함께 출연하게 되며 절친이 되었고 거스 밴 샌트의 《아이다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리버 피닉스는 어머니를 찾아 여행하는 남창 마이크를 연기했다. 《허공에의 질주》와 함께 리버 피닉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데이비드 안센이란 평론가는 "마이크가 그의 사랑을 고백하는 캠프파이어 씬에서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 장면, 그리고 모든 장면에서 리버 피닉스는 마이크로 분한 그의 모습을 너무 깊이 보여줘서 우리가 전에 그를 본 적이 있기는 한가 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아주 대단하게 섬세한 연기였다."라며 평했다. 이 영화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평론가 협회, 독립영화제에서 주연상을 타게 된다. 이 연기로 인해 리버는 주연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고, 개성 강한 연기파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이 시기에 리버는 마리화나, 코카인, 헤로인 등 수많은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거스 밴 샌트는 훗날 『핑크』라는 리버에 관한 책을 썼는데 거기서 리버는 다른 마약 중독자와 달리 특별한 때만 마약을 복용했고[18] , 대신 알코올 의존증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리버는 자신의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마약 중독 문제를 숨기려고 했다.[19]
후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스니커즈》라는 스릴러 영화를 찍었다. 이 때 즈음에 리버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폴 역할을 브래드 피트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 후 《콜 잇 러브 (The Thing Called Love)》라는 음악 영화를 찍었고, '''이 영화는 리버의 마지막 완성본 영화로 기록된다.'''
4. 음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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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리버의 연기 활동이 가족들의 주 수입원이었지만 리버는 사실 음악에 상당한 열정을 두고 있었다. 친한 친구들, 친척과 함께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재능이 많았던 리버 피닉스는 노래도 부르고 곡도 쓰고 기타도 쳤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찍었고, 연기는 흥미로워서 했지만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고 밝혔다. 연기자로 데뷔하기 이전에도 리버는 형제들과 함께 연주를 하면서 길거리를 다녔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경찰들에 의해 제지되기도 했다. 지미의 사춘기에서는 리버가 작곡하고 녹음한 노래를 엔딩 크레딧에 넣으려 했는데, 20세기 폭스사에서 잘랐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다시 감독판에 넣었다는 후문. 리버는 이후 여동생 레인과 함께 Aleka's Attic 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Aleka's Attic의 곡 중 한 곡은 아이다호의 사운드 트랙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보통 밴드의 곡은 PETA 같은 보호단체의 자선 앨범에 수록되었다.
5. 사회 공헌
리버 피닉스는 동물권리보호와 환경보호 그리고 정치 운동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20] . 그는 PETA의 대변인이었으며 1992년에 모금 활동도 하여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어린 팬층을 겨냥한 환경의식 에세이를 썼고 미국의 유명한 잡지사인 세븐틴에도 실렸다.
또한 리버는 채식주의자였다. 리버의 첫 여자친구이자 배우인 마사 플림튼은 "우리가 15살이었을 때 리버와 저는 맨해튼의 비싼 레스토랑에 갔어요. 저는 연한 껍질의 게를 주문했는데 그가 갑자기 울면서 레스토랑을 나가버렸어요. 제가 따라나오자 그는 '난 너를 사랑해... 근데 왜?'하고 말했어요. 그는 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상당히 아픔으로 느껴졌던 거에요."하고 회상했다.[21]
리버는 경제적으로도 많은 환경, 인권 단체에 기부를 했으며 코스타리카의 위험에 처한 땅 800에이커(약 98만 평)를 구입했다고 한다.
다만 이 시절만 해도 PETA는 그렇게 비난을 받지 않고, 알려지지 않던 곳이었다. 지금이라면 그야말로 온갖 병크 짓에 돈벌려고 혈안이 되어 욕을 푸짐하게 처먹기에 미국에서도 혐오하는 이들도 많다보니 리버 피닉스가 이런 곳 대변인으로 뛰어들었냐고 억울하게 욕을 먹기도 한다.
6. 사망
1990년부터 리버는 헤로인과 코카인 등 각종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만성 중독에 빠졌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다.
1993년 10월 31일에 리버는 조니 뎁이 로스앤젤레스 선셋 스트립에서 운영하던 클럽인 '바이퍼 룸'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날 새벽, 리버는 실외에서 쓰러졌고 5분 이상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 호아킨 피닉스가 911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리버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조차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 후 그는 앰뷸런스에 태워져 여러가지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그를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새벽 1:51, 향년 23세의 나이로 리버 피닉스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리버 피닉스의 부검 결과 밝혀진 공식 사인은 급성 다량 약물 중독이었다.''' 혈액에서 많은 양의 헤로인과 코카인 그리고 다른 약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평소 복용하던 약물들로 인해 몸이 안 좋아지자 누군가[22] 가 건넨 약을 먹고 이것이 악화되었다는 누군가의 증언이 있었다.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고, 소신있는 발언을 자주 했던 리버의 생전 이미지로 인해 사후에 리버는 "채식주의자 제임스 딘"이라고 묘사되기도 했고 다른 요절한 배우들과 비교되어 보도되기도 했다. 리버는 생전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다니엘 몰로이역에 캐스팅 되어 있었는데 리버를 대신하게 된 크리스찬 슬레이터는 캐스팅 수익금 전부를 리버가 생전에 기부하던 자선단체에 기부하였으며,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리버 피닉스에게 헌정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거스 밴 샌트는 그의 영화 《밀크》에서 클라이브 존스 역을 리버에게 주기로 했고 90년대에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결국 그 역은 에밀 허쉬가 2008년에 연기하게 된다. 그리고 밴 샌트 감독은 리버를 주인공으로 앤디 워홀 영화를 찍으려 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고 밝혔다.[23] 리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의 인연이 꽤 깊은데 꽃미남 젊은 배우로 많이 비교되어 회자되었고 당시 이 시대의 제임스 딘이라는 평가를 받던 리버와 약간의 라이벌 구도에 있었던 모양이다.(참고로 둘다 채식주의자다) [24] 아이러니하게도 리버 피닉스는 《바스켓볼 다이어리》에 출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갔고[25] 국내에는 리버를 모델로 그려졌다고 잘못 소문이 나있던 《토탈 이클립스》도 리버가 아주 큰 흥미를 보이던 작품이라고 한다.[26]
리버가 사망할 당시 호아킨 피닉스가 911에 구조 전화를 건 음성이 녹음되어 방송에 공개되고(#유튜브 링크) 장례식장에 리포터가 침입해서 리버의 시신 사진을 찍어가는 등 미디어는 예의없는 모습을 보였고 그에 염증을 느낀 호아킨 피닉스는 잠시 동안 할리우드를 떠났다.
리버의 죽음 이후 어머니 알린(개명 후 '''하트 피닉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고한다.
미국의 펑크 락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Blood Sugar Sex Magik>의 수록곡 'Give It Away' 에 그를 기리는 가사를 담았다."그의 친구, 동료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리버가 정규적으로 약을 복용하던 사람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플로리다 집에서 함께 살았고 클럽 소동의 일부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 때 유타에서 6주간 촬영을 하고 왔어요. 우리는 핼러윈과 나이트 클럽, 파티 같은 분위기가 그의 보통 경험과 아주 벗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약물 복용으로 죽어 갔을까요? 저는 리버가 떠남으로써 세상이 그의 세대의 정신이 어떻게 닳아 무너지고 있는지 집중하길 소망합니다. 리버는 지구에 살아있으면서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의 목소리를 찾았고 집을 찾았습니다. 온 세상의 이야길 듣는 걸 잘 하던 리버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엑슨발데즈의 기름 유출 사건에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피가 튀는 전쟁에도 아직 충분하질 않습니다."
7. 필모그래피
7.1. 영화
7.2. 텔레비전
7.3. 뮤직비디오
8. 가족 관계
- 아버지 : 존 리 바텀 (1947년생)
- 어머니 : 알린 피닉스 (1944년생)
- 여동생 : 레인 피닉스 (1972년생)
- 조카 : 조나스 윈터 (조카)
- 남동생 : 호아킨 피닉스 (1974년생)
- 조카 : 리버 피닉스 (2020년생)
- 여동생 : 리버티 피닉스 (1976년생)
- 조카 : 리오 에베레스트 에쉬 (1997년생)
- 조카 : 인디고 오리온 에쉬 (1999 ~ 2001) : 2살 때 폐렴으로 사망.
- 조카딸 : 스칼렛 제스민 에쉬 (2001년생)
- 여동생 : 서머 피닉스 (1978년생) / / 매제 : 엔디 로드
- 조카 : 인디아나 오거스트 애플렉 (2004년생)
- 조카 : 아티커스 애플렉 (2008년생)
- 여동생 : 레인 피닉스 (1972년생)
9. 연인 관계
- 마사 플림튼[32] (1986년 1월 - 1989년 6월)
- 수잔 솔곳[33] (1989년 10월 - 1993년 1월)
- 사만다 마티스[34] (1992년 11월 - 1993년 10월)
[1] 출생명은 '''리버 주드 바텀 (River Jude Bottom)'''[2] 성장한 곳은 로스엔젤레스라고 한다.[3]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4] #[5] 개명 전 출생명은 '''존 리 바텀 (John Lee Bottom)'''. 하트 피닉스와 1997년 이혼했다.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가족들의 공식 입장은 밝혀진 바 없다.[6] 개명 전 출생명은 '''알린 샤론 듀네츠 (Arlyn Sharon Dunetz)'''. 사회 운동가이다.[7] 풀네임은 '''레인 조안 오브 아크 피닉스 (Rain Joan of Arc Phoenix)'''. 배우이자 음악가이다.[8] 'Joan of Arc'는 'Jeanne d'Arc' 즉 '잔다르크'의 영어식이다.참고로 생일은 '''1972년 11월 21일'''.[9] 풀네임은 '''리버티 마리포사 피닉스 (Liberty Mariposa Phoenix)'''. 과거 아역배우이던 시절이 있었다.[10] 풀네임은 '''서머 조이 피닉스 (Summer Joy Phoenix)'''. 배우 겸 모델 겸 디자이너이다.[11] 또 다른 유명한 당대 할리우드의 최고의 유망주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발레 소녀로 유명한 '''제니퍼 코넬리'''가 있다. 둘 다 준수한 외모와 연기력을 가졌으며 연기 활동을 일찍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1993년 마약으로 요절한 리버와는 다르게 제니퍼 코넬리는 1990년대 선구안이 나빠서 추락할 뻔했지만 연기력으로 30세를 넘겨서 성공했다. 무엇보다 제니퍼 코넬리는 극심한 헤로인 정키였던 리버와는 다르게 마약을 일절 안 했다. 둘의 나이는 동갑이며 제니퍼 코넬리는 동생 호아킨 피닉스와도 친분이 있으므로 만약 리버가 살아 있었다면 둘이 서로 친해졌을 수도 있다. 제니퍼 코넬리가 표지모델로 나온 잡지를 들고 있는 리버.[12] 당장 리버 피닉스의 죽음 이후로 성공가도를 달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자신의 우상이 리버 피닉스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당시 리버의 위상이 얼마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13] 리버의 동생들의 이름 또한 매우 히피스럽다. 서머, 레인, 리버티, 리프.[14] 원래 성인 Bottom은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의미이기는 하다.[15] 게다가 영화 속 배역이 무려 똑똑한 어린이 과학도였다.[16] 죽은 시인의 사회와 트루먼 쇼로 알려져 있다.[17] 출처[18] 일반적으로 마약 중독자들이 만성 중독에 빠져서 시도때도 없이 마약에 중독되어 산다는 점을 본다면 특이한 점이다.[19] 사실 마약 중독자들 치고 자신이 마약을 하고 다닌다고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단지 티가 날 뿐이지. 리버와 비슷한 즈음 마약 중독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자살한 커트 코베인 역시 자신이 헤로인 중독자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다. 마약 중독자 본인이 마약을 하고 다닌다고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다닌 건 2010년대 중후반 트랩 비트를 위시로 한 멈블 래퍼들의 등장 이후이다.[20]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90년대 초에는 동물권리에 대한 콘셉트 자체가 굉장히 생소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때부터 유기농 식품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위해 힘 썼는데, 지금에야 채식주의다 유기농이다 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처럼 리버와 같이 일찍부터 많은 사회문제와 개인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낸 사람들 덕분이다. 실제로 이렇게 한 목소리로 낸 유명인들로 인해 팬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이전에는 뭍혀져 있던 사회 이슈들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21] 플림튼은 리버와 교제하며 그를 따라 채식주의자로 전향했지만 그가 죽고 시간이 흐른 후로부터는 더 이상 채식주의자가 아니다.[22]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과거 멤버인 존 프루시안테로 추정된다. 존 프루시안테 역시도 젊은 시절에는 헤로인 정키로 유명했다.[23] 앤디 워홀의 젊은 시절이 리버와 사뭇 닮아있었다고...[24] 사실 라이벌 구도였던 적은 없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일방적으로 리버 피닉스를 본인의 우상으로 여겼을뿐이고 정작 라이벌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디카프리오가 성장한 시점은 리버 피닉스의 사망 이후이다.[25] 리버 피닉스가 출연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루머이다.[26] 아쉽게도 캐스팅이 시작되기 전에 리버는 죽었고, 모두 알다시피 그 배역은 디카프리오에게 가서 그의 리즈시절 기념비적 영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만약 리버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리버의 랭보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27] 1993년작이지만 리버가 촬영 기간 도중 사망하여 미완성 상태로 방치됐었다. 재편집 및 재촬영으로 줄거리를 바꾸어 완성시킨 후 2012년이 되어서야 개봉했다.[28] 영화 《스탠 바이 미》의 DVD에 수록되어 있음[29] 카메오[30] 트러스트(Trust)라는 이름도 있다.[31] 존이 만 15세 때 한 여자를 임신시켜 낳은 딸[32] 리버의 첫 여자친구. 리버는 《모스키토 코스트》를 촬영하기 1년 전, 뉴욕 시민인 마사와 처음 만났다.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나니까 둘 다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죠. 모르겠어요, 우린 더 쿨해진 것 같아요. 우리 둘 다 몇 인치 더 성장했죠."[33] 둘은 한 파티에서 만났다. 그때 리버는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며 자신을 그의 애칭인 '리오'라고 소개했고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한 친구가 그녀에게 그가 유명한 배우이자 음악가인 리버 피닉스라는 걸 알려줬고 그녀가 리버에게 네가 진짜 리버 피닉스가 맞냐고 물어보자 리버는 "아뇨, 아니에요. 그 남자는 저랑 전혀 안 닮았어요!"라고 했다. 둘은 플로리다 주 미카노피에 있는 리버네 목장 근처의 집에서 동거를 했다. 리버는 그녀가 미용사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고 그녀는 리버를 돌보고 옷을 사주고 리버가 하는 일의 계획을 세워주는 등 리버를 자식처럼 대했다.[34] 둘은 《콜 잇 러브》 촬영 중 관계를 형성해나갔고 리버가 죽기 전까지 교제했다. 마티스는 리버가 죽은 후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인생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바뀌었고 몇몇은 아름답게 변화했죠. 이 계기(리버의 죽음) 덕분에 그의 가족들조차 훨씬 더 단단해졌어요. 그러니 아마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