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모토오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2. 생애 및 정치 활동
치바현 카토리군 도노쇼정 출생. 치바현립 사하라 고등학교와 니혼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 졸업. 대학 졸업 이후 코마츠카와 철강 기계 직원을 거쳐 아버지 하야시 다이칸의 비서를 맡았다. 이후 1983년 치바현의회에 출마하여 3선을 하다가, 1993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바 2구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 소선거제구로 전환된 1996년, 그의 연고지인 카토리시가 위치한 치바현 제10구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 1기 2차 개조 내각에서 국토 교통 차관에 임명되었고, 2기 고이즈미 내각까지 차관직을 수행한다. 2008년 후쿠다 야스오 개조 내각에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오키나와와 북한의 대책 담당)에 임명되어 첫 입각하였으나, 후쿠다 총리는 개각 1개월만에 퇴진했기 때문에, 54일동안만 장관을 맡게 됐다. 아소 다로 내각에서 다시 대신직을 맡게 되지만, 같은 해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하여 아소 정권이 막을 내렸기 때문에, 2개월만 장관을 맡게 되었다. 이때 본인도 치바 10구에서 낙선했지만, 미나미칸토 비례대표 블록으로 부활한다.
2011년 미래정치연구회(현 이시하라 파)에 소속되어있는 아마리 아키라를 따라 최고의 일본이라는 회파에 참석한다. 2012년, 치바 10구에서 현역 의원인 야타가와 하지메를 다시 꺾고 지역구를 재탈환하여 7선에 성공한다. 같은 해 미래정치연구회에서 이시하라 노부테루 회장이 취임하자 탈퇴하고 지공회로 이적. 니카이 도시히로 회장 밑에서 지공회 부회장을 맡는다. 2013년 1월 자민당 치안 대책위원장에 취임한다.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8선에 성공하고, 2015년 10월 7일, 아베 신조 제 3기 1차 개조 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산업 경쟁력 담당 장관), 원자력 경제 피해 담당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원자력 손해배상 폐로 등 지원기구)에 임명되었다. 2016년 8월 3일 장관을 퇴임하고 자민당 간사장 대리에 취임하였다. 2017년 8월 3일 선거대책위원장 대리를 겸임하였다. 같은해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야타가와 하지메가 희망의 당으로 출마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9선에 성공.[3]
3. 성향
일본 헌법 개정에서 부분적 찬성, 집단적 자위권과 관한 헌법 재검토 찬성, 일본 재무장에 관해서는 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 TPP 참여 반대, 조건을 만족하는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 찬성, 여성 미야케 창설 반대,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도입 반대를 주장하는 일본의 우파 성향의 정치인이다. 일본 회의 간담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모임 소속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는 니카이 도시히로와 같은 친중, 친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4. 기타
- 아베 내각에서 원자력 경제 피해 등 원자력과 관련 된 직을 맡고 있던 2016년 3월 1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의 질의에서 원자력 정책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고 여러번 돌려 말해 비판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사전 통보 없이 전문적인 질문이 많이 나왔다는 말도 있었으나, 본인은 공부가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 2020년 7월 2일, 니카이 간사장과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이 도쿄도 기오이초의 요리점에서 회식할 때 같은 파벌인 에사키 데쓰마 전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기시다파의 네모토 다쿠미 전 후생노동대신, 오노데라 이쓰노리 전 방위대신과 동석했다. 넷은 한때 야당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던 추억을 이야기했다고.#
- 도로 운송 경영 연구회에서 헌금을 받았다는 논란이 있다.공산당의 주장, 당시 속기록 그리고 1998년에서 2000년까지 3년간 스즈키 무네오가 대표를 맡고 있는 자유민주당 홋카이도 제13구(현 홋카이도 7구, 2002년 선거법 개정으로 이름 변경.)지부와 스즈키의 자금 관리 단체인 헤이세이 정책 연구회에서 150만엔의 기부금을 받았다.
- 2014년 제186회 국회에서 장관, 차관, 정무관 보좌관, 의장, 부의장, 위원장이 아무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의정 질문 당시에도 아무도 없었던 것이 지적되었다. 기사.
- 니카이 도시히로의 최측근인 만큼 그의 중국 방문에는 항상 본인이 동석 하고있다.
- 태어난 날 이틀 전에는 조지마 고리키가, 이틀 후에는 이마무라 마사히로가 태어났다.
5. 둘러보기
[1] 전직 중선거구제 치바 2구 중의원, 아들도 해당 선거구를 세습했다. 환경대신.[2] 여담으로 그의 초선 당시 중선거구제가 실시되었다. 당시 치바 2구는 현재와는 다르게 치바 9구, 10구, 13구 일부를 관할했었다. 소선거구제 변경 이후 치바 10구에서 계속 당선된다.[3] 하지만 야타가와 하지메도 비례대표 블록으로 후에 부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