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야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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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 제91대 총리.기자: "원주율은 '3.14'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약 3'이 좋을까요?"
'''"원주율이 3이면 외울 수 있어도 3.14면 외울 수 없다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나는 더 길게 말할 수 있어요. 3.14159265358…."'''
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문답.
2. 생애
도쿄도에서 태어나 본적지인 군마현 타카사키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일본의 제67대 총리를 지낸 후쿠다 다케오. 일본 헌정사상 최초의 부자 총리 기록을 세웠다. 아자부 고등학교[2] 를 거쳐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전임 총리 아베 신조처럼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아베 신조와는 다르게 본래 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아내인 미네 요시코와 결혼 할 때 정치가의 아내는 시키지 않겠다고 서약까지 할 정도. 마루젠 석유회사에 취직해 과장까지 승진했으나 아버지가 후계자로 점찍은 동생 유키오가 병사하면서 1976년 회사를 그만두고 1977년 아버지 다케오의 내각총리 비서를 거쳐 1990년 아버지의 지역구(구 군마 3구)[3] 를 물려받아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래 7선 의원의 자리를 지켰다.
외교가 전문이었던 아버지처럼 주로 외무정무차관과 자민당 외교부장을 거쳐서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맡았다.(부장관은 아베 신조)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도 관방장관에 유임되어 2004년 5월 국민연금 미납파문으로 사임할때까지 3년 반(1289일)여를 재직해 '''최장 재임 관방장관''' 기록을 세웠다. 후임은 호소다 히로유키. 이 기록은 후일 2,3,4차 아베 신조 내각의 관방장관인 스가 요시히데가 경신한다.
이후 2007년 9월 26일, 아베 총리가 사임하고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소 다로 간사장을 제치고 총재에 당선되어 일본 제91대 총리가 되었다. 이 과정이 험난했는데 당시 국회는 참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고, 중의원은 자민당이 다수당으로 일명 '네지레[4] 국회' 였다. 양원의 총리 지명이 불일치하면 중의원의 의결을 따른다는 헌법 조문에 따라 총리가 되었다.[5]
임기 초 모리야 다케마사 전 방위성 사무차관의 골프접대 파문, 자위대의 인도양 파견 연장 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이때 민주당과의 대연정이 대두되어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 비밀 영수회담을 가졌으나 연정은 불발되고 오자와는 대표직을 사임한다.
총리로서 후쿠다는 공무원 제도를 개혁하고 행정경비 절감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 시절의 참의원 선거 참패로 일본은행 총재 임명동의안이 번번히 민주당이 장악한 참의원에서 매번 부결되었으며, 지지율 또한 30%대에 머물렀다. 심지어 2008년 6월 11일에는 '''전후 헌법으로 첫번째 참의원 문책 결의안'''이 발동되어 자민당이 장악한 중의원에서 신임표결까지 해서 살아남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2008년 9월 24일 사임을 선언하여 임기 종료. 2007년 9월 26일부터 재임해서 딱 '''1년 동안''' 재임하고 물러난 셈. 아베 신조보다는 온건한 이미지로 총리가 되었지만 자민당의 몰락 크리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후임은 아소 다로(...).
사실 후쿠다는 신중거사(愼重居士)라는 별명처럼 재임기간 중에 별다른 업적도 없고, 거꾸로 큰 실책도 없는, 그냥 묻어가는 총리가 될 뻔 했으나, 밑의 일로 나름 강한 임팩트를 주고 퇴임했다. 바로 총리 사퇴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 때문이었다.
(一般に、総理の会見が国民には他人事の様に聞こえるという風な話が良く聞かれておりました。今日の退陣会見を聞いても、やはり率直にその様に印象を持つのです。)기자: "총리의 회견이 국민들에게는 보통 남의 일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오늘 사임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솔직히 그런 인상을 갖게 되는군요."
(他人事の様にという風にあなたは仰ったけれども、私は自分自身を客観的に見る事は出来るんです。'''あなたと違うんです。'''そういう事も併せ考えて頂きたい。)후쿠다: "기자님은 남의 일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도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당신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 점도 같이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 미묘한 어감으로 유명세를 탄 "당신과는 다릅니다"는 2008년 하반기 신조어/유행어 대상에 입상하기도 했고, 인터넷 유행어 대상을 타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중의원 선거까지는 출마하여 7선까지 지냈지만, 2012년 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지역구를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에게 물려주면서[6] 정치 일선에서는 은퇴했다. 이후 아버지 때부터의 전문분야인 외교 부문에서 다른 나라로의 특사로 파견되거나[7] 정부의 외교 정책 자문을 해주고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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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퇴임 후.
3. 선거 이력
4. 기타
- 한국과도 약간 괴랄한 인지도가 있는데 바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가 2008년 7월에 나온 이야기다. 그의 재임기간에 한국은 2008년, 기존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정권교체가 있기도 했다.
- 우연이지만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71세로 총리에 취임했고 본인도 같은 나이에 총리가 되었다.
- 수트를 가장 잘 입는 총리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고이즈미 총리 때도 "노 넥타이는 꼴불견"이라고 주장하며 각료 가운데 홀로 노타이를 거부했지만, 총리 재임 이후 책임감을 느꼈는지 이후 타이 없이 컬러셔츠만 입고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 2012년에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福田達夫, 1967년~)가 지역구를 안정적으로 물려받아 46~48대 중의원에 내리 당선되었다.
- 클래식과 와인 애호가이며 헝가리 음악을 좋아한다. 예술 분야에 대해서도 박식해서 만남을 가진 예술인들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명문 정치가 집안이라 전체적으로 매우 품위있고 귀족적인 기품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골프 정도를 제외하면 서민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고 쉽게 욱하는 성격의 아베 신조와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정치성향까지 포함해서[10] ...
[1] 창의력을 강조하고 교과 내용을 줄인 한국의 7차 교육과정의 모티브가 되었다.[2] 하시모토 류타로, 요사노 가오루, 다니가키 사다카즈, 히라누마 다케오, 스즈키 슌이치, 야마다 다로, 쓰무라 게이스케 의 출신 고교.[3] 소선거구제 개편 이후 지역구는 군마현 제4구[4] 네지레(ねじれ)에는 뒤틀림, 비틀어짐 등의 뜻이 있다.[5] 참의원, 중의원이 각각 총리지명선거를 실시하는데 참의원 1위는 오자와 이치로였다.[6] 아들은 2017년 중의원 선거까지 3선에 성공했다.[7] 시진핑과의 비밀 회담을 하기도 했다.[8] 심지어 민주당 정권에서도 자문을 먼저 요청하기도 했다.[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0] 후쿠다는 중도우파, 아베는 극우. 독특하게도 그 선대는 반대여서 아베 신타로가 상대적으로 중도, 후쿠다 다케오는 극우 성향이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가 기시 노부스케에서 이어지는 계파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 중에서 중도라고 해도 일본 정계 전체로서는 오른쪽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