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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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랑게(Heinz Lange : 1917년 10월 2일~2006년 2월 26일)'''

1. 전투기 조종사의 아들
2. 첫 격추
3. 동부전선
4. 영-독 전투기 대결
5. 서훈


1. 전투기 조종사의 아들


1945년 4월 29일에 628번째 마지막으로 출격할 때까지 대전 기간에 걸쳐 70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에이스 하인츠 랑게는 독일 제국1차 대전에서 한창 싸우고 있던 1917년 10월 2일에 쾰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롤프 랑게(Rolf Lange)는 독일제국 항공대에서 비행 교관을 지낼 정도로 솜씨 좋은 조종사였다.
김나지움을 마치고 1936년 10월 1일에 독일 공군에 입대한 그는 빌데파크 전투비행학교(Luftskriegsschule Wildpark-Werder)에서 훈련을 끝내고 첫 자대로 수도 베를린을 지키는 제234전투항공단(JG 234) 예하의 제4비행단으로 배속되었다. 훈련 과정에서 랑게는 아버지의 재능과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아주 뛰어난 조종 적성을 보여주었다. 랑게는 자대에서 교관으로 차출되어 베르노이헨에 새로 세워진 전투비행학교에서 1938년 9월까지 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2. 첫 격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루프트바페 사령부는 다시 예비장교를 소집하고 병력을 재배치했는데, 이때 랑게는 제132전투항공단과 제26전투항공단(JG 26)을 거쳐 1939년 7월에는 동부 프러시아에 주둔하면서 개전 준비를 하고 있던 제21전투항공단(JG 21)에 배속되었다. 랑게는 이 부대에서 2차 대전의 불뚜껑을 열어제친 전투 조종사가 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중에 첫번째 실전을 경험한 하인츠 랑게 소위는 격추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10월 30일에 콰켄부르크(Quakenbrück) 상공에서 정찰 비행을 위해 어정거리고 있던 영국 공군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를 격추시키면서 자신의 격추 리스트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프랑스 침공 이후 JG 21의 제I비행단은 제54전투항공단(JG 54) 예하의 제 III 비행단으로 재배치되고 중위가 된 하인츠 랑게는 1940년 8월에 제8비행중대장이 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하인츠 랑게는 76회의 출격을 했지만, 그는 격추전과에 목을 매는 다른 에이스들과는 달리 아군 폭격기 엄호에 치중하여 적기를 내쫓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격추에 나서지는 않는 임무에 집중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3. 동부전선


하인츠 랑게 중위가 발칸 반도 전역에서 종군하고 있던 1941년 봄, 루마니아 서부의 아라드(Arad)에서 출격하던 때는 지상군에 대한 기총 소사와 폭격 임무에 종사해서 마찬가지로 격추 기록은 더하지 못했다. 이런 그가 격추 행진에 나서게 된 것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였다. JG 54의 제III비행단은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하는 육군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며 랑게는 이 전역에서만 7대를 단숨에 격추해 10월에는 JG 54의 선임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11월에는 소속 부대를 옮겨 JG 51 예하 제3비행중대장이 되었다. 그때까지 500회나 출격한 그는 1943년 2월에 대위로 진급했고, 8월 22일에는 라보츠킨 La-5Yak-1 전투기에 더해 2대의 일류신 IL-2를 떨궈 자신의 스코어를 40대로 높여놓았다.
해가 바뀐 1944년 1월에 하인츠 랑게는 JG 54 제I비행단장이 되었고, 5월에는 JG 51 제IV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0월 15일에 랑게는 70번째 승리를 거두면서 11월에 기사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패전이 임박한 1945년 3월에 JG 51의 제IV비행단은 주력기를 Fw 190A-8에서 Fw 190D-9으로 교체했다. 비행단장이나 항공단 사령관급의 고급 지휘관들이 자꾸만 전사하자, 하인츠 랑게는 4월에 접어들며 귄터 요스텐을 대신하여 JG 51의 사령관 대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4월 말에는 다시 제IV비행단장으로 돌아갔고, 랑게의 마지막 출격은 4월 29일이었다.

4. 영-독 전투기 대결


그의 전과 중에서 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 1기를 빼면 전부가 동부전선에서 거둔 것이며, 그 중에는 24대의 Il-2와 12대의 Pe-2가 포함되었다. 패전 후에 영국은 독일의 Fw 190D-13과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 주둔하고 있던 RAF 무장해제 비행단(British Disarmament Wing)이 보유하고 있는 호커 템페스트 전투기와 서로 성능 비교를 하고 싶어했다. 비행단 지휘관 에반스(J. G. Evans) 소령은 하인츠 랑게 소령에게 부대 조종사와 모의 공중전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인츠 랑게는 D-9까지만 10회 정도 몰아보았을 뿐 더욱 신형인 D-13형은 조종석에 올라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 요청에 응한 그는 곧바로 콕핏에 올라타 이륙했다. 양 기체의 교전은 탄약을 빼두고 연료는 절반만 채운 상태에서 고도 3000 m에서 시작되었다. 대전기 최고의 전투기로 일컬어지는 템페스트와 D-13이었던 만큼 두 기체는 매우 인상적인 성능을 보였고 막상막하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독일 조종사가 모는 독일제 전투기가 승리한 것으로 결판났다. 하인츠 소령은 기체에서 내린 후 말했다.

"이 교전은 무승부다. 두 전투기는 어느 쪽이 확실히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차이가 없고, 결국은 누가 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입니다. 요는 조종사의 솜씨에 달린 문제지요."

전후에 민간인으로 돌아온 하인츠 랑게는 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전공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0년 8월부터 보험 회사에 법률 고문으로 들어간 그는 이 직장에서 30년이 넘게 근무하다가 1982년에 은퇴했다.

5. 서훈


2급 /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2년 10월 27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5월 17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