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페즈 알아사드

 


<colbgcolor=#282828><colcolor=#febe00> '''이름'''
하페즈 알아사드
(حافظ الأسد; Ḥāfiẓ al-ʾAsad)
'''출생'''
1930년 10월 6일
시리아-레바논 카드라하
'''사망'''
2000년 6월 10일 (69세)
시리아 다마스쿠스
'''종교'''
알라위파 이슬람
'''정당'''
'''바트당''']]
'''자녀'''
장녀 부슈라 알아사드[1][2]
장남 바셀 알아사드[3]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
3남 마지드 알아사드[4][5]
4남 마헤르 알아사드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암살위기 모면과 하마 사태
2.3. 독재
2.4. 사망과 세습
3.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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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로, 1971년부터 2000년 사망할 때까지 30년 동안 대통령직에 종신집권 하였으며 차남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 자리를 세습했다. 여러모로 현대 시리아의 바트당 세습독재 체제를 설계한 인물이라 봐도 무방하다.

2. 생애



2.1. 초기


1930년 프랑스가 군정통치 하던 시리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에서 농부 알리 술라이만 알아사드의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사드 가문을 비롯한 알라위파 사람들은 라타키아 같은 지중해 해안가 변방에서 농업에만 종사하는 무지렁이들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고등교육을 받은 이는 하페즈가 유일했을 정도..
하지만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할 쯤 대다수의 잉여 알라위파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기위해 신생 시리아군에 입대하였고 하페즈도 마찬가지로 군인의 길을 걷게된다. 이후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6], 이듬해 국방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제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한 시리아 정부에서 그에게 책임을 지워 숙청하려고 하자 1970년,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고, 이듬해 최초의 알라위파 시리아 대통령이 되었다.
집권 기간 동안 하페즈는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도 능력이 있어서 아랍에서 시리아의 위상을 높아갔고 그 때문에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1946년 독립 이후 쿠데타가 끊이지 않던 시리아의 정국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도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안정은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바탕이 되었다.

2.2. 암살위기 모면과 하마 사태


집권 이후 하페즈 아사드는 자신이 알라위파라는 약점을 타파하기 위해 철권통치 종교적 유화정책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둘다 썼다. 먼저 핵심 실세인 군부의 주요 직책에는 무조건 알라위파만을 기용하였고 1963년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법[7]을 적용해 반대파 인사 수천 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시리아의 대다수인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의 세속주의를 계속 지원하고, 무슬림 형제단계열의 극단주의자들이 아닌 수니파 주류 성직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도 해주어 시리아의 국민 여론이 무슬림 형제단에게로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는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여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을 벌인 것을 계기로 반미 반서방 정책을 폈고 당시 여느 반미국가와 마찬가지로 친 소련 정책을 취했다.
1970~80년에에 지하조직 형태로 크게 힘을 키우고 하마나 이들리브 등 이슬람 성향이 강한 북부 지역,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키운 무슬림 형제단이 "알라위파 이교도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수니파 정권을 세우자는 빌미로 각지에서 군인, 민간인, 공무원을 가리지 않는 테러를 저지르며 국가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들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 가입을 국가범죄로 금지하고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말리 대통령을 영접하던 중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의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이 때 상황이 매우 아찔했다. 수류탄이 대통령의 발 밑에 떨어지자 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발로 멀리 차버려 멀리서 터뜨려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또 다른 수류탄이 근처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뻔 하던 걸, 경호원이 품고 폭사하여 이 위기도 겨우 넘겼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대신 국방장관과 경호원 등 관료 여럿이 희생당했다. 일단 자기 목숨을 구하고 대신 희생한 경호원을 국가유공자로 우대하고 유족들에게 후한 경제적 보상을 하고, 무슬림 형제단 및 이슬람 극단파로 수감되어 있던 1200 여명을 즉결 처형으로 보복한다.
이후에도 무슬림 형제단과 그 영향을 심하게 받은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를 먹어버릴 기세로 무장봉기스러운 테러와 암살을 계속했다.[8] 이게 어느정도로 심했냐면 단지 친정부성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알레포 대학 학장이나 원로 의료인인 이브라힘 나마같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고, 아사드 대통령의 주변인사들이나 군 사령관들을 연거푸 죽여댈 정도였다. 심지어 수니파 주요 성직자 중 한 명이었던 셰이크 알 샤미는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을 예상하며 좋아하는 수니파 성직자들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결국 하페즈는 2년뒤 군대를 동원해 무슬림 형제단을 유혈 진압했다. 이때 하마 시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필두로 대규모 봉기가 시작되자,[9] 이를 초강경 진압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2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하마 사태라고 부른다.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무슬림 형제단을 진압하기 위해 벌인 학살이라 이슬람 테러를 혐오하는 서구권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 하나를 아예 초토화시키고 주민이 1만여명이 사망했으니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한 과잉진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 국민여론은 시리아 정부를 무척 옹호했는데[10] 무슬림 형제단이 자폭 공격에 무고한 민간인들을 억지로 위협하여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난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2.3. 독재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를 먼저 암살하려고 했다가 벌어진 하마 학살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세속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는 같은 아랍세속국가이자 바트당 정권인 이라크를 쌩까고 이란을 지원했으며[11] 걸프전때는 아예 미국과 쿠웨이트 편을 들었고[12]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과 회동하여 수교까지 맺었다.
하지만 하마 학살을 벌인 이후로 내부적으로 독재 정치는 더욱 심하고 악랄해진다. 도시 곳곳에 군경을 배치하여 주민들을 감시하는건 기본[13]이고 마치 북한처럼 주민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여 신고하게 하는 체제를 확립했고 수천명을 재판도 없이 정치범으로 몰아 수용소에 가두었다. 거기다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이후로는 그를 벤치마킹하여 공공기관이나 시설에 자신의 대형 초상화를 설치하거나 대형 동상을 여러개 세우는 등[14] 옆나라 이라크사담 후세인 못지 않은 막장 개인 우상화도 조장한다(...) 지폐에도 본인 얼굴은 기본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세뇌교육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여당은 오직 바트당만 될 수 있었고 요식행위에 불과한 대통령 선거에는 항상 본인이 '''단독출마하여 99~10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또한 레바논 내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90년대 들어 레바논의 종교적 갈등이 어찌어찌 봉합된 이후로도 레바논에 시리아 군대를 주둔시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5]

2.4. 사망과 세습


하페즈는 자신의 후계자로 일찌감찌 장남인 바셀 알아사드를 세워놓은 상태였다. 바셀은 일찍이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에 입대하여 후계자 수업을 철저히 받고 있었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1994년에 개인 차를 타고 가던중 '''교통사고를 당해 바셀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하페즈 아사드는 세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맏이인 부쉬라는 남성 중심의 이슬람 계승법상에 어긋나는 딸이었고[16], 남은 아들들중 삼남인 마지드는 허약하고 정신이상이 있었다고 하며[17] 막내아들인 마헤르는 불같은 성격인데다 나이도 너무 어렸다.[18] 결국 영국에서 의과교육을 받던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를 후계자로 책정하였고 바샤르는 자의인지 아버지의 압력에 의한 타의인지 확실치 않으나 결국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영구 귀국하여 후계자 수업을 받게된다.
그리고 하페즈 알 아사드는 2000년 6월 10일, 69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사드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확인됐으며, 심한 당뇨병으로 고생해온 그의 건강이 급격하기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시리아 국영 TV는 “아랍의 위엄을 지키고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싸워온 아사드 대통령이 10일 아침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하페즈의 사망과 함께 시리아 의회는 서둘러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당시 나이 34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대통령 연령을 40세 이상으로 제한한 헌법 제83조를 수정했고 결국 바샤르가 차기 대선에 단독 출마하여 시리아의 대통령이 됨으로써 시리아는 '''공화국을 표방하는 아랍국가중 세습을 한 유일한 국가'''가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페즈 알 아사드의 사망에 대해 보도하는 시리아 국영 TV (2000.06.10)[19]

3. 평가


프랑스에서 독립후 불안정하던 시리아를 안정시키고 바트당 체제를 확립해 아랍민족주의 세속정책을 통한 이슬람극단주의 억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아랍민족주의를 오히려 본인의 권력 강화에만 이용해 먹고 철권독재를 통한 비민주적인 통치를 한 데다 세습까지 자행한 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거기다 현재 시리아 내전이 지금까지 억눌리던 문제점이 폭발하여 벌어진 일이니 어찌보면 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역시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반군들을 모두 제압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기회를 얻었으니 어쩌면 바샤르 역시 아버지 대에 쌓여서 발생한 시리아 내전을 수습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4. 기타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는 매우 친했다고 하며 서로서로 선전용 포스터를 각 나라에 보내줄 정도였다고 한다.
  • 이라크의 후세인 집안 못지않게 이쪽 집안도 장신으로 유명한데 아들이자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키는 190cm에 육박한다.[20] 근데 바샤르가 자식들 중에서 유독 키가 큰 편이긴 했다.
[1] 정확히는 차녀다. 위로 언니가 한명 있었는데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요절했다.[2] 시리아 내전 당시 국방차관 이었던 남편이 반군의 폭탄테러로 암살당했다. [3] 1994년 교통사고로 사망.[4] 2009년 지병으로 사망.[5] 하페즈의 자녀들 중 가장 존재감이 없었다(...) 북한의 김씨일가로 치면 김정철 포지션이라 할 수 있을듯..[6] 이 시절 바샤르가 태어났다.[7] 하페즈가 아닌 바트당 정부에서 선포한 법이었다. 이는 2011년까지 무려 48년간 유지되어 왔다[8] 이후 내용에 대한 출처는 사미 무바예드 저, <IS의 전쟁>을 참고하였음. 다만 해당 학자는 무슬림 형제단이 쿠르드족에 대해 적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쿠르드족에 대한 대단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논란이 되며, 저서에도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그의 책이 미국에서 출판됐다 하더라도 엄연히 바트당 독재 국가 어용 학자인 그의 저술의 편향성 논란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는 나라로 노골적인 종북 성향의 인사들도 자유롭게 활동 및 의사 표현이 가능한 나라이다.[9] 시작은 무슬림 형제단이 모든 하마 시의 모스크를 장악하여 반란을 선포하면서 전개되었다.[10] 물론 독재국가인 시리아 특성상 정부를 비판할수 없었던 것도 있다. 하마 학살 이후의 다마스쿠스에서 벌어진 친정부 집회에서는 도시 중심부를 가득 채울만큼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아사드를 어깨에 태우고 행진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에게 죽음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11] 이는 시리아랑 이라크가 애당초 바트당의 분열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사이가 최악이었던 점이 큰 원인이다.[12] 실제로 걸프전쟁 발발 이전인 1987년에 쿠웨이트를 방문한 적도 있다.[13] 이건 사실 테러방지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면이 있기도 했다. 물론 악용된건 실드칠 수 없지만..[14] 이 동상들이나 초상화들은 시리아 내전 때 거의 박살나거나 총알받이가 된다. [15] 이때문에 레바논에서는 반시리아 감정이 강해졌다. 나중에 바샤르 알 아사드 때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레바논에 주둔한 시리아 군대를 미국의 압력으로 철수시키면서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16] 사실 해외순방에도 부쉬라가 여러번 동행하는 등,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17] 2009년에 일찍 사망했다.[18] 그런데 하페즈는 마헤르의 그런 성향이 자길 닮았다고 여겨 처음엔 바샤르가 아닌 마헤르를 후계자로 하려 했다고 한다. 만약 바샤르가 후계자 되길 거부했다면 차기 대통령은 마헤르가 됐을 확률이 높다.[19] 전반부는 아랍어, 후반부는 영어로 아나운스한다.[20] 위의 사진을 보면 대충 하페즈의 키를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이 175cm이니 하페즈는 대략 175 ~ 177cm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