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이
1. 개요
고려인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해방 후 여러 갈래로 나뉘어있던 북한 정권 내 파벌 중 소련파의 거두였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면서 휴전을 20여일 남기고 평양 지하 방공호 내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인 성씨 중에 간혹 ~가이라고 붙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가이 앞에 있는 것이 곧 성씨다. 대표적으로 나 씨 성을 쓰는 고려인은 러시아 쪽에서는 '나가이'라는 성으로, 유 씨 성을 쓰는 고려인은 '유가이'라는 성으로 남아 있다.
2. 생애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나[1] 모스크바의 로모노소프 대학교(모스크바 국립대학교원명)를 졸업하였고,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슈켄트주의 주당(州黨) 비서로 근무하다 1945년 8.15 광복 후 소군정요원으로 귀국하였다. 군정청 관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0월 소련에서 북한을 감시하기 위해 수백 명의 소련통역관 겸 감시요원을 정권에 배치했을때 그도 통역관 겸 감시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 참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의 정권 수립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신설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6월 당의 제2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당 비서에 선출되면다. 이렇듯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기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조선로동당 제1서기를 거쳐 한국전쟁 중 1951년 11월 내각 제2대 부총리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부장에서 제명, 좌천당한다. 평소 김일성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박헌영, 리강국 등을 비롯한 남로당 일파에 대해 누명을 씌워 숙청이 벌어질때 허가이는 이들이 미국과 교신하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원들을 옹호한 것을 김일성에게 질책당한 후 1953년 7월 2일에 자신의 사무실인 평양의 지하 방공호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사후 그의 가족들은 소련으로 이주하였다. 아들인 허 이고르는 모스크바에 거주중이다.
3. 토사구팽 암살 의혹
공식 사인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암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당시 권총을 두 개나 갖고 있으면서도 가슴에 장총을 맞은 자세로 죽었다든가, 죽기 몇 시간 전 장인이자 인민군 탱크부대장이던 최표덕과의 대화에서 조금도 자살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허가이의 딸 허리라는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친구였던 장학봉은 허가이가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허가이가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암살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스크바에 거주중인 아들 역시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암살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파의 수장이기에 소련대사관을 들락날락하는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부수상이자 외무상이었던 박헌영과 공무가 겹쳐서 계속 만나는 돈독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하려고 할 때 박헌영을 변호하려고 나선 허가이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이자 제거대상 1호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는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실패의 원인을 남로당에게 뒤집어 씌우는 작업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파의 수장인 허가이가 반대하면 일이 다 틀어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소련시민권자'''였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큰 국제적 분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허가이의 죽음에 대하여 다른 증언도 있다. 1951년 로동당 조직부장에 해임된 후, 후임자였던 박영빈(소련파, 전 로동당 조직부장 겸 정치위원)은 허가이 암살설을 일축했으며, 세가지 이유 때문에 허가이는 자살했다고 주장했다.그날 밤 아버지는 자살할 정도의 정신상태는 전혀 아니었답니다. 가족에게 전할 유언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 자살할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외조부는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다만 아버지는 외조부에게 "김일성 동지는 '''내가 자기의 일거 일동을 모스크바에 보고하고 있다고 오해해''' 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오해는 쉽게 풀릴 것이다. 지금 조국에는 37년도를 생각게 하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는 김일성 동지를 너무 치켜세워 그를 조선의 스탈린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고치지 않으면 인민들의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께서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차례 나를 소환해주도록 모스크바에 요청했다. 조국에서 나의 사명은 거의 끝났다. 오직 아첨분자들이 분별없이 날뛰고 있음이 걱정될 뿐이다.” 고 말했답니다. (친딸의 증언)[2]
첫째로, 1951년 당에서 비판당해 조직부장직에서 해임당했다
둘째로, 순안저수지 복구사업을 김일성으로부터 지시받고 책임자가 되었는데, 공사현장에도 잘 나가지 않고 그일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자연히 복구사업이 지연되고 지원군도 동원되지 않는 상황. 최경덕이 현장에 직접 나가 확인후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그러자 김일성은 허가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오? 내가 보고받기로는 잘 안되는 것으로 듣고 있소"라며 비난했다. 이에 허가이는 '잘못 보고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이 직접 순안저수지 복구현장을 보고 즉각 당회의를 열어 허가이를 힐난했다.
셋째로, 여자 문제 폭로였다. 소련파 간부들이 당시 연회장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을 초청해다가 술자리를 가졌는데, 연회후에 연회장 앞에 있던 저수지에 배우 하나가 죽으려 하는 것을 경비병이 목격했다. 그 배우는 "내가 유부녀인데 허가이 동무가 나를 욕보이려 한다"고 했다 한다. 이 사실이 당에 보고돼 허가이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는 것.
허가이는 유서를 써 놓고 죽었다. 내가 직접 보았고, 허가이 필체가 틀림없었다. 유서 내용은 간단했고 그 중 "김일성이 독일 방문 때 나에게 선물로 준 권총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가이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