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샤오셴
1. 소개
중화민국(대만)의 영화감독. 리안, 차이밍량 등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인정받는 대만 영화계의 거장으로, 80년대 아시아의 영화를 이끌었다. 나이로는 임권택(1936년생), 이창동(1954년생) 두 감독 사이에 해당한다.
영화감독으로써 평생에 한번 조차 어렵다는 칸 영화제 경쟁부문 본선에 신작은 꼭 초청받는다.
2. 생애
1947년 4월 8일 중국 본토 광둥성 매현의 객가계 가족에서[2] 출생했고, 이듬해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만 가오슝 현 펑산 시(현 가오슝 시 펑산 구)에서 생활했다. 즉 외성인이다. 본인 고백에 따르면 10대 시절은 동네 건달처럼 지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안 했다고. 초기작 펑꾸이에서 온 소년은 이 시절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
군 복무를 마친 1969년 대만 국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영화 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972년 졸업한 후 여러 직업을 거치고서 영화계에 본격 입문했다. 처음엔 배우가 되고 싶어했으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으로 전향했다. 감독 데뷔 후 젊은 시절 배우로써 활동했는데 대표작으로는 타이페이 스토리가 있다. 그러나 연기는 남을 위해 하는 거라고 생각해 더이상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난한 흥행작들을 발표하다가 1980년대에 유학파 감독들과 교류하면서 '뉴웨이브'[3] 계열에 합류하였다. 특히 1989년에 대만 현대사의 비극 2.28 사건을 다룬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를 발표하여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양조위가 주연한 비정성시는 그해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아시아 영화로 39년만에 수상했다[4] . 이 작품으로 양조위가 국내에게 알려지게 된다. 사실 한국 개봉당시, 상영시간이 길다고 40분이 넘게 잘려나가는 탓에 흥행에서 참패했으나 비디오로 나오면서 잘려나간 부분이 다 나오고 비디오 대여에서 꽤 히트를 친 바 있다.
2003년에는 일본에서 아사노 타다노부, 히토토 요와 함께 촬영하여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카페 뤼미에르>를 발표한다. 도쿄 진보쵸 고서점가를 배경으로 한 고즈넉한 풍경을 잘 잡아내었다.
2015년에는 본인의 첫 액션/무협 영화이기도 한 사극 <자객 섭은낭>(刺客聶隱娘)을 발표하였다.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여 대만, 더 나아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3. 영화 감독으로서의 특징
그의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 등의 영향을 받아 정적이고 느린 컷과 롱테이크로 사회와 인생, 역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년왕사나 동동의 여름방학, 연연풍진 같은 초기작들은 자신의 청춘 시절을 소재로,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대만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면 비정성시를 기점으로는 좀 더 다양한 팔레트로 역사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초기작은 리얼리즘적인 경향이 강했다면 후기작으로 갈수록 형식을 강조하고 있다. 1999년에 발표한 해상화가 러닝 타임 130분에 컷이 38개로 이뤄져있다는건 유명한 사실.
때문에 동아시아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경우는 데뷔작 환상의 빛부터 허우샤오셴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실제로 감독이 '허우샤오셴은 내 영화의 아버지'라고 언급한 적 있다. 한국에서도 이창동 감독과 허진호 감독에게 일부 영향을 미쳤다. 동시기 감독으로는 에드워드 양 (양덕창)하고 그 색채가 유사한 편. [5]
반대로 영화 특징 때문에 '존경은 받되, 흥행은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최근엔 프랑스나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건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기반을 받쳐줄 상업영화의 몰락으로 악순환이 이어지는 셈. 한국에서도 비정성시 이후로 1990년대 만든 영화는 전부 소개되질 못했다가 밀레니엄 맘보 이후 다시 소개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초창기부터 내한하면서 한국 영화계, 감독들하고도 많은 친분이 있는 편이다. 가장 최근 내한은 자객 섭은낭의 한국 정식 개봉을 앞둔 2016년 1월 프로모션 차원으로 내한한 것.
2001년 밀레니엄 맘보를 기점으로 붉은 풍선을 [6] 제외하고는 서기를 빠짐없이 캐스팅하고 있다. 서기가 워낙 가식없고 털털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2000년 자신과 처음 만났을때도 유명한 감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전혀 기죽거나 두려워하지 않아했다는 점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서기도 허우샤오셴과의 협업을 통해 연기에 대한 매력을 깨우쳤다고 고백한 바 있다.[7]
기타노 다케시와 친하다.[8] 2000년대 초에는 기타노 다케시를 캐스팅해 일본 야쿠자가 대만에 와서 겪는 일을 그리는 영화를 찍을 뻔 했으나 무산되었다.
4. 주요 작품
- <펑꾸이에서 온 소년> (風櫃來的人. 1983)
- <동동의 여름방학> (冬冬的假期. 1984)
- <동년왕사> (童年往事. 1985)
- <연연풍진> (戀戀風塵. 1986)
- <나일의 딸> (1987)
- <비정성시> (悲情城市. 1989)ㅡ베니스 최우수 작품상
- <희몽인생> (戱夢人生. 1993)ㅡ칸 심사위원상
- <호남호녀> (好男好女. 1995)ㅡ칸 경쟁부문
- <남국재견> (南國再見,南國. 1996)ㅡ칸 경쟁부문
- <해상화> (海上花. 1998)ㅡ칸 경쟁부문
- <밀레니엄 맘보> (千禧曼波. 2001)ㅡ칸 경쟁부문
- <카페 뤼미에르>(珈琲時光. 2003)ㅡ칸 경쟁부문
- <쓰리 타임즈> (最好的時光. 2005)ㅡ칸 경쟁부문
- <빨간 풍선> (2007)ㅡ칸 경쟁부문
-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2015) ㅡ칸 감독상
- 기타 다수.
[1]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한다.[2] 재미있게도 동료 에드워드 양도 객가 출신이다.[3] 중국어로는 '신랑차오'(新浪潮. 새로운 물결)로 불린다. 의미는 똑같다.[4] 1950년 아시아 최초로 서구권 국제영화제 대상인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는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5] 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에드워드 양은 훨씬 현대적인 감각으로 동시대 대만인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6] 여기선 줄리엣 비노쉬를 캐스팅했다. 2016년 시점 허우샤오셴 영화에 출연한 유일한 서양 배우.[7] 밀레니엄 맘보가 칸에서 상영 직후 호텔에 가서 울었다고 한다. 서기는 배우 생활 초기부터 섹스심벌 이미지를 좀처럼 벗어나질 못해 고생했는데, 허우샤오셴을 통해 연기 실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당당히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로 발돋움할 수있었다.[8] 기타노는 의외로 중화권 감독들과 친분이 많은 편이다. 다른 중화권 감독인 자장커도 오피스 기타노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제작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