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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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의 영화배우. 梁朝偉(영문명: Tony Leung Chiu Wai, 광동어: 렁치우와이(Loeng4 Ciu4 Wai5), 보통화: 량차오웨이(Liáng Cháowěi)).[2] '''1962년''' 6월 27일 홍콩 출생. 본적지는 광둥 성 태산[3] 이다.
중국에선 영제(影帝), 즉 '''영화황제'''로 불리는 배우.[4]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다. 1981년에 데뷔하였으며, 홍콩 4대 천왕과 비슷한 시기에 청춘스타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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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의 아버지는 도박 중독자였고, 양조위가 8살 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그와 여동생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한 후 삼촌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최종학력은 중학교 중퇴. 극도로 가난했지만 지금도 인성으로 유명한 그 답게, 비록 중학교 중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치거나 어머니 속을 썩이기는커녕 아주 품행이 단정한 효자였다고 한다.
배우 데뷔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배우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고 살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한 배우 지망생이자 훗날 절친한 친구가 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 친구가 TVB의 배우 훈련반 오디션을 보는데 도와달라며 부탁해서 동행했다가 오히려 친구는 떨어지고 양조위가 붙었다. 결국 친구도 1년 뒤인 1982년에 합격하였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주성치.[5] 여담으로 양조위와 똑같이 가난 때문에 중학교 중퇴하고 막일을 하다 친구 권유로 TVB 오디션을 보아 합격하고 대스타가 된 선배 배우가 있으니 그게 바로 '''주윤발'''이다.
젊었을 적에는 잘생긴 외모로 강인한 청년 역할을 많이 맡았고 여러 무협드라마에서 주연과 조연을 많이 맡았으며,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연기파 배우로 활약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후반 홍콩 영화들의 인기가 높아질 즈음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액션 계열에서 활동하는 경우를 제외한 중화권 배우들 중에서는 매우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3. 인기와 성품
유덕화와는 1980년대에는 라이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서로가 구축한 영역이 달라서 라이벌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양조위는 1980년대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연기 영역에서 꾸준하게 수상 후보에도 오르고, 상도 많이 받았지만, 유덕화는 연기 영역에서는 '겉멋만 들었다.', '상복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6] 유덕화는 1992년부터 홍콩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불렸고, 배우로는 물론이고 가수로도 대성공하여 지금까지 콘서트를 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는 인기스타 느낌이라면[7] , 양조위는 가수로도 활동을 했지만, 큰 소득을 내지 못하였고 연기 위주로 활동하며 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진 편이다. 1990년대 초중반 시기 가수 영역에선 여명이 유덕화의 라이벌에 가까웠다. 적당히 좋은 가창력의 발라드 가수라는 점에서 포지션도 비슷하다. 가수 영역에선 장학우는 너무 넘사벽이고 곽부성은 사실 살짝 후배뻘인데다 댄스로 승부 보는 가수라 직접적 비교는 어렵다.
동아시아권에서 굉장히 유명한 톱스타지만 무척 소탈하고 가식이 없다. 2009년 한국 관광객이 홍콩의 IFC쇼핑몰에 있는 시티슈퍼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쇼핑하던 양조위를 발견하고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 요청했는데 흔쾌히 승낙했고, 그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이 일이 한때 국내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음식점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모습을 한국 여행객이 목격했다고 글도 올라온 적이 있다. 이런저런 호평이 많은 편이다.
중화권 항공사의 승무원들이 친절하고 자상하다고 주윤발과 함께 기내 매너남으로 뽑기도 했다.
굳이 흠을 찾자면 일대종사 촬영 전 무술지도를 해준 엽준 노사에게 "천성이 게으르다"라고 혹평을 들은 것 정도. 다만 이 부분은 비슷한 시기에 지도받은 견자단의 태도와 비교되어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양조위는 난생 처음으로 배운 무술이었고, 견자단은 배우이기 이전에 오랜 수련을 쌓은 '무인'으로 일반 배우들과는 달리 어머니 맥보선부터가 아주 유명한 무술인인지라 배우로 데뷔도 하기 전부터 고강한 무예와 기본기를 갖춘 사람이라, 둘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욱이 영춘권 수련 도중 팔을 다쳤다고 하는데 몸이 재산인 배우이니만큼 여러모로 고려할 사항이다. 참고로 이 때 나이가 무려 쉰.(...)
2013년 베를린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쿵후를 4년간 지속적으로 수련해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22분 40초쯤부터.# 그리고 실제로 수련하는 영상.
4. 배우로서의 양조위
데뷔 초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에서 주연인 벙어리 사진사 역으로 열연해 대사 한마디 없지만 신인답지 않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산마르코 황금사자상을 타며 양조위는 연기력에 호평을 받았다.[8]
왕가위 감독의 대표적인 페르소나이며 가장 많은 작품을 함께 한 배우이다.[9] 왕가위 감독은 배우 선정이 무척 깐깐한 편인데, 양조위가 계속 캐스팅된다는 것은 곧 양조위의 연기력을 잘 알 수 있는 증거. 또 양조위의 매력을 잘 살려줄 수 있는 감독이 왕가위이기도 하다.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춘광사설>, <화양연화> , <2046> 등에서 보여주는 양조위의 연기는 기존 출연작과 분위기부터 남다르다. 특히 <아비정전>에서는 마지막에 불과 몇십 초 등장하는데도 엄청난 포스를 내뿜어 주신다. <춘광사설>, <화양연화>, <2046>으로 칸 영화제에 3번이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2000년에만 화양연화로 칸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왕가위 감독은 SBS '금요일엔 수다다'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면서 장국영과 양조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예전부터 아우라가 남다른 배우였지만 2002년 영화 <무간도>에서 양조위의 풍모는 범접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무간도 시리즈의 작품성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고 이 작품으로 기존의 여성팬은 물론이고 남성팬까지 속출했다. 2007년 <와호장룡>으로 유명한 이안 감독이 연출한 <색, 계>에서는 영 좋지 않은 곳을 노출하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몸을 바친(...) 연기를 펼쳤다."두 사람을 '음'과 '양'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 이 공간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면 제일 먼저 보일 사람이 '장국영'이에요. 모든 사람이 집중하게 되고, 그렇게 주목을 받아야만 하는 배우가 장국영이죠. '양조위'는 이 공간에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눈에 안 띄게 어디론가 숨을 거에요. 하지만 언젠가는 서서히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거예요."
양조위가 주로 주연을 많이 맡다 보니, 일반인들에겐 악역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8년 <암화>, 2006년에 <상성>을 거쳐 <색, 계>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타고난 선한 마스크에 어울리지 않는 연기 변신을 계속하고 있는 연기파 배우이다. 인터뷰도 올라왔다. 인터뷰 링크
5. 한국에서의 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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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국내 가수 더 네임의 뮤직비디오에 전도연, 류승범과 함께 출연한 적 있다. 유튜브 영상. 배우 캐스팅이 엄청난 만큼 뮤비 길이도 무려 8분에 달한다. 그 인연으로 그 노래를 양조위가 직접 표준중국어로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名字
2013년 영화 '일대종사'에서는 송혜교와 부부로 출연하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인지도가 점점 떨어지는 다른 중국 배우들과 달리, 양조위는 오히려 연기파 배우로서 그 인지도가 확고해지는 추세다. 왕가위라는 좋은 감독을 만났던 이유도 있지만, 양조위는 배우로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연기를 시도한 덕분에 그 이름이 점점 더 알려지게 된 것. 우리나라에서 역시 과거형으로 잊히고 있는 다른 중국배우들과 달리 양조위는 꾸준한 인기를 자랑한다.
여담으로 아저씨를 만든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인 우는 남자에서의 원래 주인공은 장동건이 아니라 양조위였다고 한다. 원래 시나리오가 중국인 킬러랑 한국인 여성을 투톱으로 내세우고 굉장히 깔끔하게 잘 나온 시나리오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조위가 출연을 거절하게 되고 배급사에서 촬영을 독촉하자 양조위 대신에 장동건이 급하게 대타로 들어갔고, 시나리오 역시 갈아엎으면서 중국인에서 재미교포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게 되고 그러다보니 개연성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말이 이종격투기에 올라온 적이 있다. 물론 영화 쪽 일을 하는 친척에게 들었다는 것 뿐이기 때문에 신뢰성은 장담할 수 없다. 네이트판 펌글. 그런데 2013년 1월 23일에 실제로 양조위가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에 이은 차기작인 <첸을 위해>에 출연을 조율 중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니 이정범 감독이 양조위를 많이 좋아하는 듯.# 물론 이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엎어진 모양이지만. 일각에서는 이 <첸을 위해>의 시나리오를 무리하게 뜯어 고쳐서 만든 것이 우는 남자라는 카더라가 있다.
2015년 4월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의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였는데, 주연배우였던 안성기의 초청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안성기와 여러 유명 영화제에서 만나 친분을 쌓아왔고 나이가 12년차 위인 안성기를 형님으로 부른다고. http://naver.me/G1tFokl8
6. 기타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과거 장국영, 유덕화, 곽부성, 금성무와 함께 중화권 미남의 대명사였다. 금성무와 함께 출연했던 중경삼림의 223 파트가 끝나고 663이 등장할 때 많은 여자들이 혹했다는 소문이 있다. 2000년대 초반을 포함한 한동안은 수염을 기르기도 했다.[10]
- 할리우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아시아권 배우들에 대한 헐리우드의 차별과 편견 때문이라고 한다.[11] 그래도 2021년 개봉 예정인 샹치 앤 레전드 오브 텐 링즈에 출연을 결정한 걸 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 듯하다.
- 그는 유가령과 20년 가까이 공개 연애를 하면서, 몇 년간의 동거 후에 2008년에 결혼했다. 결혼식은 부탄 국왕의 초대를 받아, 부탄에서 올렸다. 양조위와 유가령은 1989년부터 무려 19년 동안 연애했으며, 그들의 연애 초기에 유가령이 조폭들에게 납치되는 수난을 겪었는데 수년이 지나고 홍콩의 모 잡지에 의해 유가령의 납치 당시 나체 사진이 유포되기도 하는[12] 등의 수난을 겪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연애사를 나열하자면 영화 뺨칠 정도로 드라마틱하고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었다. 이에 관련된 일화들은 링크 참고. 진정한 로맨스가이 양조위.
이 일화가 서프라이즈를 통해 방영되면서, 한국에서 양조위에 대한 평가 중에 순정파적인 이미지가 (서프라이즈 방영 이전보다) 더 크게 부각되었다. 양조위가 얼마나 유가령에게 일편단심이었냐면 1990년대에, 국내 영화잡지 인터뷰에서 결혼에 대해 묻자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유가령과 할 것이다'라고 못박을 정도였다.
결혼식 이후 불화설, 유가령 바람설, 고부 갈등설 등이 언론에서 계속 터져나왔지만 어디까지나 찌라시일 뿐이다. 2014년엔 양조위가 유가령의 연극에 참석하면서 양조위의 가족들까지 대동해 이런 불화설을 일축시키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없기 때문에 불임설, 대리모 임신설 심지어는 임신을 포기했다는 찌라시까지 도는 판국이다. [13]
- 2014년 주윤발, 유덕화 등과 더불어 홍콩 우산 시위를 지지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그래서 당시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에서 댓글로 퇴출 여론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으나, 이들의 대륙활동이 어려워졌다는 설은 낭설이다. 물론 하운시나 황요명처럼 대놓고 불이익을 받는 연예인들도 있지만, 주윤발, 유덕화, 양조위 등은 아무 불이익 없이 활동하고 있다. 다만 양조위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2014년 청풍자 이후 2017년 개봉할 유럽공략까지의 기간을 쉰 건 사실이다.
- 영화 일대종사(2013)에서 장쯔이 캐릭터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높은 비중으로 편집된 것에 반발, 왕가위 감독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홍콩 현지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장쯔이가 연기한 궁이 캐릭터는 그가 맡았던 주인공 엽문보다 비중있게 그려진다. 그에 반해 팔극권고수로 등장한 장첸이 연기한 일선천이라는 캐릭터는 일체의 설명도 없이 등장하고 퇴장해버려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 이 문서에는 근거없는 100% 루머라고 적혀 있었으나 당시 홍콩발 보도를 인용한 기사1, 기사2를 볼 때 당시에는 양조위 측의 반발이 컸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심지어 일대종사촬영 중에도 왕가위 감독, 장쯔이와 출연 분량과 촬영 일정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양조위는 왕가위가 2016년 제작을 맡은 영화 '파도인'에도 출연했고, 왕가위의 차기작에도 출연 예정인 만큼 수년이 지난 지금은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 2010년대 들어 중국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한국에는 중국영화가 잘 상영되지 않아서 2010년대 이후에 커리어가 사그라든 것처럼 오해되는 일이 많지만, 거의 매년 출연하고 있으며, 2018년 출연작 몬스터 헌트 2는 대박을 냈다. 본진인 홍콩영화는 1990년대 이후로 사그라들었고(몰락 이유는 다양하지만 홍콩 영화 자체의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를 스타덤으로 올려 놓은 왕가위도 1990년대 홍콩영화 쇠락기에 중경삼림(1994), 동사서독(1994)[14] 두편으로 뜨긴 했지만, 이후에 계속 흥행에 실패하면서[15] 이후 양조위와 같은 슈퍼스타를 기용할만큼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현재 필모그래피가 대부분 상업성 중국 영화에 낭비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 특히 2018년 개봉한 영화 '유럽공략(欧洲攻略)'을 보면 그의 망가짐에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 망작은 중국의 영화 평점사이트 도우반에서 10점 만점에 3점대[16] 를 찍고 있는데, 평점을 보면 다들 개판오분전인 영화의 완성도는 둘째치고 영화 황제가 어쩌다 이 모양으로 추락 했냐고 개탄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헐리우드 진출을 거부하다가 고집을 꺾은 이유도 이런 황폐한 중국 영화계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함이라 볼 수도 있다.
- 대한민국 배우 안성기와 닮았다. 특히 웃는 모습이 가장 닮았다.#
- 한국에서는 쟁쟁한 성우들이 돌아가며 맡았는데 KBS에선 주로 김일과 홍성헌이 MBC에선 안지환, 구자형, 신성호, 황윤걸이 SBS에서는 주로 김승준이 가끔 구자형이나 김영선이 맡았다. 시청자들 사이에선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일의 평가가 대체적으로 좋았으며 천녀유혼 같은 작품은 구자형의 평가가 좋았던 편이다.
7. 디스코그래피
8. 광동어 앨범
- 朦朧夜雨裡 (1986)
- 誰願 (1987)
- 難以忘記的你 (1993)
- 一生一心 (1994)
- 日與夜 (1994)
- 從前…以後 (1995)
9. 보통화 앨범
10. 출연작
11. 수상내역
[1] 영화의 초반 양조위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당시 별 것 없는 이 장면에서 여성 관객들 의 헉 소리가 영화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이 장면은 임청하의 마릴린 먼로 가발 + 트렌치 코트, 금성무의 파인애플 통조림 등과 함께 중경삼림을 상징하는 키워드인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의 도입부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2] 1958년생 양가휘(梁家輝)와 영어 이름이 Tony Leung으로 같기 때문에, (다른 홍콩 스타들도 대부분 이렇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꼭 영문 성명에는 중국어 이름까지 같이 붙여 구분한다. 양조위는 Tony Leung Chiu Wai, 양가휘는 Tony Leung Ka-fai 이다. 나이가 더 많고 좀 더 다부진 체격의 양가휘는 Big Tony, 양조위는 Little Tony로 불리기도 한다.[3] 台山이라는 지명은 시 북쪽에 위치한 三台山(삼태산)에서 유래한 것인지라, 정체자로 표기해도 '台山'이다. '臺山'이 아니다.[4] 주로 양조위가 가장 많이 이렇게 불리지만 이 칭호로 불리고 있는 배우는 양조위와 영어로 동명이인이기도 한 양가휘, 장가휘(이 쪽은 또 한자로 양가휘와 같은 글자를 쓴다!), 유덕화, 고천락, 오히려 가수로 더 크게 성공한 장학우 등이 있다. 그 중 외국에도 알려진 빈도를 고려하면 양조위가 가장 유명하기는 하다.[5] 이소룡을 동경해서 예전부터 배우가 꿈이었던 주성치는 방과 후면 양조위와 함께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해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친구이긴 하지만 성격이 상반되고 연기분야도 다르며, 서로 각자 영역을 구축하기 바빠 잘 만나지 않는 걸로 보인다. 또한 주성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집에 콕 박혀있는 사람이다. 가끔 매체에서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공개하는 서로의 친한 모습도 그나마 최근에 가까운 게 10년 이상된 사진, 영상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성치 항목 참고.[6] 천장지구에서 오천련, 오맹달은 금상장에서 신인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으나, 유덕화는 후보에도 오르지도 못했다. 그가 금상장에서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건 영화 암전(1999년 작)으로였다.[7] 중국 매체에서는 매년 중화권 연예인 수입 순위를 발표하는데 항상 10위권 내에 랭킹될 정도다.[8] 당시에 그가 민남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벙어리로 설정했다. 이전 문서에선 보통화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비정성시의 대화 대부분은 민남어로 진행되고 있다. 사실 홍콩 출신으로서 광동어만 죽 써오던 연예인들은 노래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만 언어 능력이 더 많이 요구되는 연기까지 타 방언으로 완벽히 소화하기는 무리다. 홍콩 배우 중 보통화가 완전히 자연스러운 배우로는 애초에 대만 출신인 임청하나 금성무, 베이징이 고향인 여명(홍콩) 정도이다.[9] 이전 문서에선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볼 수 없다고 서술해놨고 그 근거로 장국영과 함께 했을때의 비중 문제, 그리고 일대종사에서의 푸대접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페르소나가 아니라고 할만한 결정적 요소가 되지 못한다. 일단 페르소나라는 개념 자체가 감독과 분신처럼 함께한 배우라는 뜻이고 꼭 주역에만 국한해서 쓰지 않는다. 양조위는 왕가위와 무려 7편을 함께 한 배우이고 심지어 주연의 의미를 까다롭게 해석해도 그가 메인캐릭터로 나온 영화가 4편이다.(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2046) 더군다나 이중 <화양연화>와 <중경삼림>은 평론가, 대중 모두 왕가위 필모의 꽃이라 칭할 정도로 평가가 제일 높은 축에 드는 영화이다. 이 영화들의 명백한 주역이 양조위인 이상 왕가위 필모는 양조위 없이 설명할 수 없고 페르소나임을 부정하는게 더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왕가위에 의해 비중이 터무니없이 깎인 케이스는 일대종사의 양조위만이 아니다. 당초 왕가위 영화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되어 계획 없이 2-3년을 찍다가 막상 조연 수준으로 편집된 스타들이 한둘이 아닌데 심지어 여배우 중 왕가위와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춘 영혼의 파트너 장만옥한테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 사실 장만옥은 왕가위의 무계획 촬영 스타일에 이전에도 불만을 많이 품어왔고 <화양연화> 때 이미 갈등이 심했는데 결과물이 워낙 걸작이라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2046>도 함께 했다. 그런데 <2046> 편집 결과 자신의 비중이 말도 안될 정도로 축소된 것에 분노해 왕가위와 대판 싸우고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10] 수염기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는 무간도1, 2046, 이연걸의 영웅.[11] 실제로 헐리우드에는 암묵적인 동양계 남자 캐릭터의 법칙이 존재한다. 1. 고자(여자와 맺어지지 않는다, 혹은 성적 매력이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2. 쿵푸(중국계)나 인술(일본계)말고는 존재 가치가 없다, 3. 입체적이지 못한 단순한 캐릭터성 등.[12] 또 다른 홍콩의 유명 배우인 유덕화가 조폭의 영화 출연 강요를 거절했다가 머리에 총이 겨누어지고 살해 협박을 받은 뒤에 결국 출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당시 홍콩영화계는 조폭의 입김이 강했다. 1990년에 유가령도 모 영화에 출연하라는 조폭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조폭에게 납치당해서 나체 사진을 찍히고, 영화 출연을 하지 않으면 나체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을 받았다. 다행히 연인 양조위가 백방으로 손을 쓰는 등 애쓰기도 했고 조폭도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몇 시간만에 무사히 구출되었는데, 사건이 발생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돈에 눈이 먼 주간지에 의해 적나라한 나체 사진이 보도되었다. 이 일로 유가령은 나체 사진만 찍힌게 아니라 강간까지 당했다는 소문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으로나 배우 이미지상으로나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자 동료 배우들(한국인도 알만한 유명한 홍콩배우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해당 언론사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엄연히 범죄 피해자인 유가령의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13] 다만 이건 두 사람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라고 보는 게 맞을 듯. 결혼했을 때의 나이가 둘 다 40이 넘은 상태였다. 참고로 양조위가 1962년생, 유가령이 1965년생.[14] 이 영화도 수입이 안되다가 중경삼림이 한국에서 대흥행한 후인 1995년에야 들어왔다.[15] 일부 영화팬들이 중국 검열때문에 왕가위가 작품활동을 안한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왕가위가 활발히 활동하던 1990년대는 중국의 영향력이 매우 적었던데다가 왕가위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도 아니었고 중국이 간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왕가위 자체가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감독이기 때문에 홍콩 영화계의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이었고, 모아니면 도라는 왕가위의 흥행성 때문에 투자받기가 어려워져서 작품이 부진하다고 보는게 맞다.[16] 이것도 너무 올려쳐진 점수다. 양조위와 같이 출연한 아이돌 배우의 팬들이 몰려가서 그나마 선방한 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