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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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추모하는 장소인 2.28 평화기념공원
二二八事件
Ér'èrbā Shìjiàn
Jī-jī-pat sū-kiāⁿ
1. 개요
2. 원인
3. 발단
4. 항쟁의 격화
5. 진압과 학살
6. 그 후
7. 기타
8.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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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배반당한 포모사>(Formosa Betrayed: 被出賣的臺灣) 중에서 2.28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부분
1947년 중국 대륙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일제로부터 타이완의 행정권력을 인수한 중국 중화민국 정부대만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계간지 「기억과 전망」 2003년 가을호에 실린 쉬즈지아(許志嘉) 저, 이희옥 번역 ''타이완 2.28사건의 역사적 진실과 복권(平反)'' 논문이 사건 개요를 잘 정리하고 있으니 참고.
2.28사건은 아직도 타이완 최대의 아픔으로 남아있는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추정 희생자 수 : '''18,000 - 30,000'''

2. 원인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 국무부, 중국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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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일본제국이 패망한 이후, 타이완은 중화민국에 할양된다. 대만일치시기 시절 대만은 조선에 비해서 식민 통치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식민지 사람들이었던 대만인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당했고, 더군다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 등 전시체제는 대만인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했다. 그렇기에 일본 제국이 물러가고 중국 국부군이 타이완에 진주할 때, 많은 대만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중국대륙의 국민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정부중일전쟁의 후유증과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고, 대륙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대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대만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천이(진의)[1]부터 말단까지 상당수 국민당원들은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며 살던 대만 본성인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간주하였다. 특히 대만 총독격이었던 천이부터가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까지 졸업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들과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거부했고 오로지 관화(표준중국어)만 썼다. 당시 일제통치 50년 동안 일본어를 상용하던 대만 지식인들 중 대륙에서 활동하던 극소수를 제외하면 관화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음에도 그는 관화를 할 수 없는 대만인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도 주지 않으려 했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타이완의 행정부는 소수 요직은 물론 교사와 말단 공무원, 경찰, 군인까지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온 중국인들이 차지하였고, 구색 맞추기식으로 임용된 소수 대만인들도 본인 혹은 선대부터 본토에서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일제가 대만에서 물러가면서 남긴 공장들은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 죄다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중국인들에게만 불하했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다시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또 전쟁이 끝나면서 타이완에 일본제국의 징병/징용으로 해외로 떠났던 사람들이 대만으로 귀국했는데, 중화민국 정부는 이들을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漢奸)' 정도로 몰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도 대만성 행정장관 천이가 실시한 전매정책으로 인해 많은 대만인들이 일감을 잃고 먹고 살기가 빠듯해진데다, 일제의 항복 후 일본 본토의 교역망이 일시에 붕괴되면서 타이완의 물가와 실업률 역시 폭등하였다.
결국 본성인들은 이러한 중화민국의 대만 통치에 배신감을 느꼈고, 실망감 역시 매우 커졌다. 당시 돌았던 '''"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이 당시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었는데, 일본인은 개처럼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처럼 타이완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었다.

3.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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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장마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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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시 위안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과부 린장마이(林江邁)[2]가 담배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대륙에서 담배는 정부 전매품이 아니었지만 대만에서는 전매품이었고, 이러한 단순히 전매제가 실시되는 수준을 넘어 당시 대만은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통제경제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매일 노점을 단속하러 다녔는데, 먹고 살기가 팍팍했던 대만인들은 이를 피해다니며 노점판을 벌였다. 2.28 사건 당시 린장마이를 단속하는 과정에서도 중국정부의 단속반과 경찰은 총신으로 그의 머리를 때리는 등 린장마이를 강압적으로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고[3] 매일 같이 벌어지던 이런 과잉 단속에 항의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다 급기야 천원시(陳文溪)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으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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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이 된 천원시 학생의 피살을 묘사한 판화도)

4. 항쟁의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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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시는 총을 맞은 다음 날인 1947년 2월 28일 사망하고 마는데, 이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중국국민당이 운영하고 있던 경찰서와 군 부대 본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허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폭행을 자행했던 경찰관을 포함하여 2명의 경찰관을 때려죽이고 4명을 부상 입혔다. 이후 군중은 행정장관 공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식량이 부족해 쌀값이 폭등하던 당시 상황에 행정장관 공서에 막대한 쌀이 비축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흥분하여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의 수가 급증하였고, 이 때 경비병들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대만인들은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점차 시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엔 시위의 범위가 타이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도 폭발했는데, 이는 결국 상호간의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마당에 위에서 말한 특권 독점에 따른 갈등도 있었고, 거기다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4]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대만 본성인이 외성인과 국민당에 저항할 때 두 집단을 구별한 기준은 대만어(민남어)/일본어 구사능력이나 기미가요 제창 가능 여부였는데, 고로 대만 본성인들은 저항의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노래를 부를 수 없고 민남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외성인들은 '짱고로(チャンコロ)'라고 부르며 죽였는데, 짱고로는 과거 일본군이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인들을 산 채로 붙잡아 총검술 연습 대상으로 삼아 찔러죽일 때, 중국인이 죽는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 붙인 말이었다. 처음부터 외성인이나 국민당에서는 일본제국에 협력한 '매국노'라면서 대만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는데, 충돌 과정에서 대만인들이 일본제국 시대의 경험으로 友敵 구분을 하면서 그러한 인식은 고착되게 된다. 결국 두 집단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게 되었다.[5]
3월 1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담배단속으로 야기된 유혈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행정장관 천이와의 타협으로 다소 중립적인 명칭인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2일,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외성인들에 대한 공격이 더욱 확대되는가 하면, 타이베이의 미국 영사관에 사건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정부 측에 대만 시민들이 미국의 신탁통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국민당 중앙을 격분시켰다. 이후 3월 5일, 처리위원회 8항목 정치개혁안을 제출 다음과 같은 사안을 요구하였다.
1. 대만성 행정장관의 비서장, 민정장, 재정장, 교육장, 경무장은 본성인을 임용한다.
2. 공영사업은 본성인이 경영한다.
3. 현장과 시장은 선거로 뽑는다.
4. 전매제도를 철폐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처리위원회 측은 3월 6일, 좀 더 구체화된 32개조 정치개혁안을 제출한 후 장제스 주석 만세를 외치며 정식성립대회를 마치는 등 급진주의를 자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천이도 3월 6일 밤, 방송을 통해 현시정부를 선출제로 구성하겠으며, 관료 인사를 본성인 중심으로 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3월 7일, 이전의 32개조에 10개항을 더 한 42개조 요구가 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대만인 전범과 한간의 무조건적인 석방, 대만 행정장관 제도 폐지, 처리위원회 내부에 정무국 설치, 대만 주둔 육해공군에는 대만인 채용 등 보다 근본적인 요구사항이 들어갔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징병으로 징집된 대만인이 인구의 1%에 달하는 상황에서 일본군 복무 여부만 가지고 한간으로 몰아 처벌/살해하고 집안 재산을 강탈하던 중국정부의 조치가 얼마나 대만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중국국민당은 2.28 사건 발생과 동시에 중국에 파병 요청을 해놓은 상태였고 시간을 끌기 위하여 대만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한 수습위원회와 협상에 나선 것이며, 그래서 후일 42개조 요구를 두고 국민당 프락치가 강경진압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협상 모션을 취하면서 시간끌기에 성공한 당시 대만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 천이는 중국 국민당군 증원부대의 대만 도착을 하루 남겨놓은 3월 7일 제시된 급진적인 요구인 42개조 요구를 당연히 거부하였고, 대만 엘리트들로 구성된 처리위원회도 42개조 요구가 성민의 합의가 아니라며 3월 8일 42개조 요구를 번복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3월 8일 기륭항에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병력이 도착하였고, 이들은 함상에서부터 항구로 소탕사격을 실시하며 바로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 된다.

5. 진압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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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섬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陳儀)는 겉으론 대만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중국에 진압 병력의 파병을 요청했다. 사건이 타이완 섬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대만내 자체 병력으로는 시위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장제스국공내전 때문에 최초 파병 요청읏 받았을 때는 군대 파견을 거부했는데, 이번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맘을 바꿔 결국 진압군을 타이완으로 파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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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증원군이 도착하자마자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중국군 헌병 제4연대 소속 2개 대대병력이 최초로 지룽항에 도착, 소탕사격을 실시하며 지룽에서 무차별 진압을 실시했고, 이어 3월 9일 도착한 21사단 병력이 지룽~타이베이 축선, 타이완 북부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진압은 대만 전국에 중국군 병력이 투입되면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사건 가담자를 색출한 것도 아니고 그냥 대만인/중국인 여부를 가린 후 대만인들을 집단 처형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 때 대만인으로 몰려 희생되었으며 중화민국 정부가 도망친 후 타이베이 시내에서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중학교 학생들 수백 명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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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50주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6] 또한 이와 별도로 외성인 7~8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아무래도 대만 역사에 무지한 국민당군 입장에서는 2.28 관련 시위 참여자들이 순 매국노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당시엔 타이완 섬 외부가 고향인 국민당군 장병들과 대만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 번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되면 돌이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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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룽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학살을 묘사한 기록화들. 국민당군은 진압 과정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대만인으로 판정하여 친일파로 몰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몇몇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해자들 뒤에 바다가 묘사되어있는데 몇 명을 사살하면 시체들의 무게로 사람들이 줄줄이 바다로 빠졌다고 한다. 2.28 사건의 희생자들의 추적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학살은 3월 17일 바이충시가 타이완 지역의 군정장관으로 부임한 후에 진정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대만인 엘리트들이었던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제 통치 당시부터 활동하던 대만인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대만 지식인 사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종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영화 비정성시 등에서 보듯이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대만인들을 잡아죽이는 작업, 시골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清鄉)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대만인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가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고,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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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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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민주화 이전 타이완에선 언급조차 꺼려하는 최대 금기였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타이완으로 외성인들이 들어오고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심지어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징역형을 선고할 정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잊혀지고 만다. 국민당이 피해자들의 재산을 싹쓸이해가고 이후로도 대만인 출신 지식인들을 친일과 친공의 싹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탄압했다. 당시의 대만 공산당 역시 이 때 국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하면서 살아남은 소수는 중국 대륙으로 도주하였고, 이들의 일파는 현재 중국 전인대의 구색정당인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재야 인사들이나 피해자들 사이에서 진상규명 요구는 있었겠지만, 국민당이 철권통치하던 시절인지라 대만에서 제대로 된 논의는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주로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나 중국 대륙(...)에서 2.28 사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워졌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40년이 지난 1987년 2월 28일 정난룽이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연구회를 성립한 시점부터였다. 이후 대만 계엄령이 해제되고 1988년 타이완 출신의 리덩후이 총통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오랜 논란 끝에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7] 그 뒤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정하지만 장제스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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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정부의 첫 공식 추도행사에 참석한 리덩후이 당시 총통)
중화민국 정부 추산으로만 민간인 2~3만명이 학살당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확실한 진상조사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최소 1만 8천명이 사망했다고 보이지만(조사를 다시 할 때마다 희생자 수가 만 명씩 늘어난다), 누가 2.28 사건으로 죽었는지 제대로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어 유가족에게 보상을 완료한 것은 2천여 명, 구체적으로 신상정보가 밝혀진 피해자는 겨우 5~6백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중화민국 정부는 오늘날까지 2.28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2.28 국가기념관(二二八國家紀念館)에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有受害者,沒有加害者), 타이완 역사상의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문구가 있기도 했다.[8]
이 사건은 본성인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각인시켰고, 중화민국 반환 직후부터 발생한 타이완 독립운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아울러 훗날 타이완에서 벌어지는 메이리다오 사건 같은 계엄반대 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민주진보당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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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건은 국민당을 이끈 장제스가 직접 연루된 사건이라, 국민당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 사건이 부각되는 것을 내심 원하지 않는 분위기다. 일례로 마잉주 전 총통은 재임 시절 2.28 사건을 '일부 부패한 관료들의 탐학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 정도로 언급하며 장제스와 국민당 핵심 계층, 타이완 독립과의 연관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9] 그러나 2.28 사건 주간만 되면 국민당은 물론이고 장제스 동상이 매년 파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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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당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10] 여기에 대해서는 대만 내에서도 워낙 논쟁거리라 쉽게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차이잉원 정권은 매년 2월 28일을 중정기념당의 정기휴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현재 2월 28일은 중화민국에서 '평화기념일'이란 날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 '실질적 영토(=타이완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날'은 이 날이 유일하다. 이 날에는 조기를 게양하게 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덩샤오핑 집권 전까지는 이 사건을 국민당 집단의 폭정에 대한 '타이완 인민의 의거'로 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후 국민당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11] 또한 당시 중화민국 민주화를 주장했던 사람들 다수가 타이완 독립도 같이 주장했다는 점으로 인해서 이 행사는 없어졌다. 물론 2.28 사건 피해자들도 중국 공산당 천안문 6.4 항쟁 진압과 문화대혁명, 티베트 탄압 등을 들어 국민당과 다를게 없는 공산당이라며 크게 아쉬울거 없다는 입장. 차이잉원 정권이 들어서자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사건이 대만 독립파들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재차 주장했다.

7. 기타


  • 사건의 원흉 중 하나인 타이완 성 행정장관 천이는 사건이 끝나고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저장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려했다가 발각[12]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타이완 땅에서 처형되었다.[13]
  •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로 대만 역사를 요약하는 무용이 공연되었는데, 2.28 사건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었다.
  • 희생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만의 일본인들이나 기타 일제 식민지인들의 귀환은 1949년에야 완료되는데, 미처 일본 등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다. 지룽에 거주하던 박순종과 기타 선원 2명 등 한국인 3명도 국민당군에 의해 끌려가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아 보상을 받고 있다고 한다.#[14]
  • 한국대구 10.1 사건, 5.18 민주화운동, 특히 본토에서 떨어진 바다 건너 섬에서의 학살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제주 4.3 사건[15]과 비슷한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념재단 및 단체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4.3 사건보다 먼저 명예회복과 정부 사과가 있어서 4.3 관련 단체에서 2.28 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2018년 4월 2일 제주도 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 교육국은 4.3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 2.28 사건에 참가했던 대만 본성인들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폭압에 저항할 때 저항 메세지를 국민당쪽이 모르게 일본어로 방송하거나 기미가요 제창 여부로 본성인과 외성인 여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국민당과 외성인을 더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28 사건의 이면에는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라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상술된 개돼지 발언 등으로 볼 때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기보다는, 대만인이란 정체성이 식민지 시기 및 국민당 독재 시기를 거쳐 형성된 데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만일치시기에도 힘들었지만[16], 이후 집권한 외성인들도 만만찮게 자신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추억보정까지 더해져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의 향수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타이베이 중정구에는 이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있다. 이름은 '2.28 평화 기념공원'. 한국에선 228을 중국어로 발음한 '얼얼바 공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원 내에는 2.28 사건을 다룬 전시관과 국립대만박물관이 있다. 이것도 원래는 타이완성립박물관이었는데,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성립이 국립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립고궁박물원이 중화 문명을 주제로 한다면, 국립대만박물관은 타이완 섬 자체의 자연 인문 역사를 주로 다룬다.

8.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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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이 감독하고 양조위가 주연한 1989년작 대만 영화 '비정성시'는 1945~1950년대까지의 대만 현대사를 관통하는데, 2.28 사건이 직접적으로 다뤄지며 영화 중간에 2.28사건의 발생을 언급하는 장제스의 연설문도 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89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개봉 성적의 경우 국내 개봉 당시엔 그리 흥행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비디오 대여 같은 2차 시장에선 꽤 쏠쏠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1] 천이는 대만 통치에서 무능함을 자랑했지만 당시 국민정부에서는 천이가 가장 대만 사정에 밝았다. 그는 1934년 복건성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대만의 근대화 상황을 보고 이를 복건성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이후 일제의 패망으로 대만을 점령하기 전부터 국민당 지도부와 장제스에 직접 건의하여 대만 연구반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대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인사였다. 그러나 대만통이란 양반이 대만 민심도 제대로 못읽고 전후 혼란기 강압통치로만 일관함으로써 결국 2.28사건을 촉발했다. 이렇게 보자면 대만통이란 것도 허상.[2] 린이 아닌 장이 자기 본성이다. 과거 중화권은 전통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자기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는데(관부성이라 한다), 남녀평등에 민감했던 공산당 집권의 영향인지 대륙에선 이 방식을 쓰지 않으나 타이완에서는 요즘도 쓰고 있다고 한다.[3] 당시 린장마이는 노점 활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맞으면서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물건만은 돌려달라고 빌었다. 이 사건 이후 린장마이는 병원에 실려갔다가 치료를 받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2016년에 나온 2.28사건 관련 인물들의 가족들을 추적하여 인터뷰한 책에 따르면 린장마이의 딸은 "고향에 돌아온 이후 가족들은 늘 그날의 일을 함구한 채 평범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4] 지금은 대만에서도 표준중국어가 쓰이지만, 당시 대만에서는 표준중국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본성인들이 썼을 대만어는 소위 '중국어 방언'들이 거의 그렇듯이(...) 이름만 방언이지 외국어인 수준이다. 식자층이 썼을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고.[5] 영화 <비정성시>에 이때의 일화가 하나 나온다. 청각장애인 주인공에게 상대방이 대만어와 일본어로 질문했는데, 이를 주인공이 알아듣지 못하자 곧바로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동행인이 사정을 설명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알 수 있는 장면. 물론 <비정성시>의 허우샤오셴 감독도 외성인이라는 사실도 고려하면서 보아야 한다.[6] 본성인측의 비공식적인 주장은 4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7] 아이러니하게도 2.28기념공원 바로 밑에는 장제스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서우 공원(介壽公園)이 존재하고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중정기념당이 있다.[8] 타이완대학병원역에 위치하는 2.28 평화공원과는 별개의 장소로, 과거 대만성 참의원으로 쓰였던 건물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한국의 제주 4.3 사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도 전시되어있다.[9] 그나마 마잉주 총통은 국민당 입장에서 껄끄러운 2.28 사건 추도행사에 재임 중 매년 참석하긴 했다. 한국에서 5.18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추도행사 진행이 정권/정파 성향에 따라 논란을 빚고 있는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10] 급진적인 대만 독립파 입장에서 보자면, 장제스는 독재자 이전에 '''침략자'''다. 올림픽에서 국기 게양 못한다고 하지만국기가 바로 그들에겐 침략자들의 상징물인 것. 오죽하면 타이완 탄압과는 별 연관도 없는 쑨원조차 거리를 둘 정도다.[11] 당시 양안의 집권자인 덩샤오핑장징궈는 그저 상대방의 최고권력자라서 존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다. 둘은 덩샤오핑이 20대 초, 장징궈가 10대 말이었을 때 처음 만났고 몇 년 동안 같은 공간에 있기도 했다. 물론 양안이 갈라진 후에는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12] 자신의 옛 부하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에게 같이 투항하자고 권유를 했는데 탕언보가 장제스에게 밀고를 해버렸다. 다만 탕언보가 '밀고'를 했다기 보다는, '장제스도 천이를 잘 아니 좋은 말로 타이르겠지' 정도로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일로 탕언보는 한때의 후견인인 천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13] 원한관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여기를 참조해봐도 좋다.[14] 해당 언론 보도는 2.28 사건을 '대만 원주민에 대한 학살'로 쓰고 있으나 아직까지 대만 원주민으로 일컬어지는 대만인들은 인구 비율상 극소수로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2.28 사건의 피해자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인은 오래 전부터 중국대륙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이민 온 자들로, 현재 대만의 소수민족으로 규정된 오스트로-미크로네시안 계열의 대만 원주민과 별개로 구분된다. 물론 명확한 집계조차 안되는 실정이니 대만 원주민들도 학살당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고, 일본통치시기에 그나마 중국적 문화가 있었던 대만 본성인들보다 더 일본 황민화가 진행된 집단으로 일본제국군에서도 대만 원주민들로만 구성된 특수부대를 남양 최전방에서 운용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니 대만 본성인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로 몰려 학살당한 사례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인구 비율상으론 2.28 사건 당시 대만 본성인들이 이미 원주민을 대체한 주류 거주민이긴 하다.[15] 특히 2.28 사건 바로 다음 날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발단이 되는 사건인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16] 특히 집권 말로 갈수록 군국주의와 전쟁 때문에 최악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