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바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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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막을 수 없는 선수가 나왔을 때 은퇴하겠다.'''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AC 밀란의 주장을 무려 16년 동안이나 역임한 전설적인 수비수이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20여 년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AC 밀란에만 헌신한 원 클럽 맨이며, 바레시의 존재 덕에 밀란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세리에 A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유스 시절, 선수 시절 전부 밀란만을 위해 헌신했으며 2번의 강등에도 불구하고 팀을 지탱했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취임 후 아리고 사키 시절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알베리고 에바니, 로베르토 도나도니, 카를로 안첼로티,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등과 함께 역대 최강의 팀으로 꼽히는 '''밀란 제너레이션'''을 구축하고 팀의 주장으로 전세계를 호령하였다.
1974년 형인 주세페 바레시[4] 를 따라 인테르에서 입단테스트를 하지만 키가 작아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지게 되고, AC 밀란에서 전설인 조반니 트라파토니[5] , 지아니 리베라 앞에서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150만 리라 + '''키가 1cm 자랄시 100만리라 추가''' 라는 해괴망측한 계약을 체결하고 AC 밀란 유스팀에 입단한다.[6] 그 후 밀란의 전설인 스웨덴 삼총사 중 한명인 닐스 리드홀름의 지도하에 기량이 급성장하고, 1977년 18세의 나이로 세리에 A에 데뷔하고, 곧바로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으로 주전을 차지하고, 78-79 시즌 스쿠데토를 들어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하지만... 당시 밀란 구단주인 펠리체 콜롬보가 SS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승부조작을 했다가 발각되었고, 팀은 세리에 B로 강등당하게 됨으로써 주전 선수들이 타팀으로 이적하지만 바레시는 에바니, 타소티등과 남아 팀을 지키면서 세리에 A 승격을 이끌지만, 승부조작의 여파로 선수들은 계속 떠나고, 팬들도 등을 지면서 이듬해 재차 세리에 B로 강등되고 만다. 바레시를 눈여겨 보고있던 UC 삼프도리아와 인테르가 바레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모든 조건을 뿌리치고 팀에 남아 다시금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세리에 A로 복귀시킨다. 이 때의 모습을 본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바레시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상처입은 명문팀의 주장이 된다. 한편 이런 바레시와 달리 '밀란 역사상 최고의 배신자'로 꼽히는 선수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멤버 풀비오 콜로바티. 원래 AC밀란 유스 출신으로 바레시와 함께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밀란의 주장 완장까지 차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밀란의 2차례의 강등때 첫 강등때는 남아서 밀란을 다시 세리에A로 올려놓는데 공헌했지만 두번째 강등때는 팀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도 라이벌인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버리고 만다, 이때문에 같은 유스 출신이면서도 두번째의 강등마저 견뎌내고 팀을 지킨 바레시와 대조되어 '밀란 역사상 최고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다. 다만 시즌도중 밀란의 부진에 화가난 관중들이 던진 돌덩이에 머리를 강타당하는 사건이 있었던등 그가 이미 밀란에서 마음이 떠날만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밀란팬이면서도 그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바레시에게 하늘이 축복을 내렸는지 1986년 당시 신흥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중위권 팀이 되어버린 몰락한 명문 AC 밀란을 매입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풀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강호로 떠오른 밀란은 유럽을 다시금 정복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에서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2부리그 팀인 파르마 칼초 1913에게 개박살 나면서 자존심을 구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루스코니는 사키의 철학에 매료되어 당시 밀란 감독이자 전설인 닐스 리드홀름을 경질하면서 까지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마르코 판바스턴, 카를로 안첼로티, 루드 굴리트, 로베르토 도나도니등을 폭풍영입하면서 스쿼드를 보강하였고, 사키는 바로 리그우승으로 회답면서 바레시는 9년만에 스쿠데토를 들어올리고, 기세를 몰아 89, 90년 유러피언컵를 2연패하면서 유럽을 지배한다.
사키가 떠난 이후에도 밀란의 파죽지세는 계속 되었고, 파비오 카펠로 부임 이후 90/91 시즌 34라운드부터[7] 92/93 시즌 23라운드까지 세리에 A 58경기 연속 무패기록을 세우지만 90년 챔스 이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계속된 불운으로 우승컵을 놓치고[8] 결국 1994년 세계 최강팀 중 하나라 꼽히는 FC 바르셀로나 드림팀 1기를 상대로 4:0 승리를 거둠으로써 4년 만에 챔스 우승을 거둔다.
이후에 밀란 제너레이션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밀란은 상당히 과도기적인 방황을 지속하게 된다.
그 시절에 당한 참패가 바로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6:1로 처참하게 털렸을 때이다. 바레시 역시도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기라고 말할 정도였던 이 대참사에서 바레시는 슬슬 유망주 티를 벗어나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털리고 말았다. 그 경기 이후 바레시는 슬슬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96-97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한다. 많은 밀라니스타들이 그의 은퇴를 슬퍼하고 기념해주었다. 그가 밀란에서 달았던 등번호 6번은 당연히 영구 결번이 선언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 커리어가 상당히 다이나믹하다. UEFA 유로 1980에 만 20살의 나이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국제 메이저 대회에 데뷔하지만 동포지션에는 이미 '''아주리 군단'''에는 당대 최고의 리베로인 가에타노 시레아가 있었다.[9] 이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하지만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의 선택은 당연히 절정의 기량을 펼치는 시레아였고 바레시는 조국의 44년만의 3번째 우승을 후보로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당시 만 20세가 안된, 훗날 당대 최고의 파워 디펜서로 이름을 떨치며 대표팀에서는 바레시와 파트너였고, 인테르에서만 뛴 레전드인 주세페 베르고미가 브라질 전에서 강렬한 월드컵 데뷔를 하며 결승전까지 뛰며 우승의 한 축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에겐 상당히 아쉬울 따름이다.
UEFA 유로 1984에서는 이탈리아가 애초에 본선을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가자.[10]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바레시 자체가 시레아가 공고한 대표팀에 들어가서 후보를 하기를 좀 꺼린 것도 있었고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도 이런 바레시를 굳이 불러야할 필요성을 못느껴 엔트리에 탈락한다.
그리고 1986년 월드컵 이후 베아르초트 감독과 시레아가 국가대표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바레시의 국가대표 인생도 만개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바레시는 절정의 나이였고 밀란 제너레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척보면 딱아는 후배 파올로 말디니도 국가대표에서 중용되면서 UEFA 유로 1988에 당당히 주전으로 참가하고 자국에서 열리는 대망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골키퍼 발테르 쳉가, 센터백에 바레시와 리카르도 페리 조합 그리고 좌우 풀백에 파올로 말디니와 국가대표 주장인 베르고미[11] 라는 말도안되는 진형으로 단일 월드컵 최장기간 무실점. 517분 연속 무실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다. 하지만 아주리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그들의 최초의 실점이자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했고, 승부차기에서 패배하여 3·4위전으로 빠져서 3위로 대회를 마무리하고 만다.[12]
UEFA 유로 1992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지역 예선 도중 당시 주장이었던 주세페 베르고미가 자신의 교체 투입에 불만을 품고 비신사적인 테클을 함으로써 국대에서 사실상 강제 은퇴 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주장직을 수행한다.[13]
이후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나선 바레시는 조별리그 2차전 노르웨이전에서 부상을 당한다. 이후 아주리 군단은 로베르토 바조의 크레이지 모드와 잔루카 팔리우카,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등이 혼신의 방어를 펼쳐 기어코 결승전에 오른다. 준결승전에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뛰지 못하지만 바레시는 결승전에서 복귀한다. 이때 결승전으로 보면 바레시는 엄청난 퍼포먼스로 브라질의 공격을 차단한다. 바레시가 보여준 엄청난 수비력은 단연 압권. 경기를 보다보면 바레시에게 완전히 막힌 호마리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승전 자체가 하나의 바레시 스페셜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혼신의 수비 때문이었을까?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첫 키커로 나서지만 실축하고 만다.[14] 하지만 당시 마라도나조차 우위를 점하기 힘든 로베르토 바조의 맹활약을 봐왔던 팬들은 바조의 홈런을 보게 되고 바레시의 실축은 그대로 잊혀졌다.[15][16] 바조의 실축 이후에 얼굴을 감싸 안고 서럽게 우는 바레시를 보고 많은 아주리 팬들이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1994년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다른 역대급 리베로형 수비수인 프란츠 베켄바워, 마티아스 자머와 같이 굴지의 패싱력과 오버래핑 능력을 갖췄던 선수.
엄청난 공간,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 그리고 탁월한 타이밍 포착 능력 등을 통해서 역사에 남는 리베로가 되었다. 특히 수비 라인 조율은 가히 신의 경지.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이때다 싶을때는 순식간에 드리블로 공간을 도약하여 자신의 진형 최후방에서 상대 진형 최전방 까지 넘어가는 오버래핑을 보여줬다.
승부차기 실축만 빼면 결승전은 프랑코 바레시가 어떤 선수인지 하나로 응축한 그런 경기라고 볼 수 있겠다.
4. 기록
4.1. 출전 기록
4.2. 대회 기록
- AC 밀란 (1977~1997)
- 세리에 A: 1978-79, 1987-88, 1991-92, 1992-93, 1993-94, 1995-96
- 세리에 B: 1980-81, 1982-83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 1992, 1993 1994
- UEFA 챔피언스 리그: 1988-89, 1989-90, 1993-94
- UEFA 슈퍼컵: 1990, 1994
- 인터컨티넨탈컵: 1989, 1990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2
4.3.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89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0
- FIFA 100: 2004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9-90
- 구에린도르: 1989-90
- 세리에 A 20세기 최고의 선수: 2000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9, 1990
- 옹즈 드 옹즈: 1990, 1991, 1992
-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 1994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AC 밀란 20세기 최고의 선수: 1999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5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3
- 골든풋: 2012
5. 지도자 경력
2002년 풀럼 FC 단장을 맡았고[17] 그 후 AC 밀란 U-20 유스 팀을 지도했다. 현재는 지도자에서도 은퇴한 상태.
6. 바레시에 대한 언사
'''내 생각에는 바레시가 최고의 수비수다. 그와 교환한 이 셔츠는 평생 가지고 다닐 기억이다.'''
'''디에고 마라도나'''
'''세계 축구 역사에 기념비적인 존재다. 그가 수비진영을 벗어나 놀라운 패스를 전달하면 엄청난 성과가 나온다.'''
'''게오르게 하지'''
'''바레시가 버질 반다이크를 칭찬했다. 이건 마치 왕으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은 것 같다.'''
'''위르겐 클롭'''
'''"바레시는 나의 25년 동안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였다. 스피드가 있었고, 수비를 통솔하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다. 또 그라운드 위에선 신사적이었다. 나도 1994년 월드컵의 결승에서 고전했으니깐 말이다.'''"
7. 기타
- 위에서 언급한 형 주세페 바레시 역시 제법 훌륭한 선수였는데, 라이벌 팀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입단해서 수석코치까지 맡는 등, 팀 레전드로 활약 중이다.[18] 형제가 각각 라이벌 구단에서 레전드 대우를 받는 드물고도 훈훈한 사례. 참고로 조카인 레지나 바레시는 현재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위민의 주장이다.
- 2013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에서 20년간 근속한 세컨키퍼 스티브 하퍼의 은퇴 기념으로 벌어진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VS AC 밀란 레전드 매치에서 참전하는 덕분에, 파올로 말디니가 주장 완장을 못차게 되었다.
- 피파 온라인 3에서 월드 레전드로 나왔으나 그 성능이 솔 캠벨보다도 좋지 않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체격 차이가 너무 클 뿐더러, 온라인 게임 특성상 실축 바레시의 수비센스와 천재적인 라인컨트롤, 정확한 패싱과 빌드업 능력 등 리베로적인 장점이 다 죽어버리면서 작은 키와 부족한 몸싸움이라는 신체적인 약점만 드러나게 돼 버린 탓이다.[19] 다만 스텟만 놓고 보면 꽤 잘빠진 편이며 오버롤 92로 월드 레전드 수비수 중에 3번째로 높은편이라 가성비 선수로 바레시를 쓰는 유저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피파 온라인 4에서도 NHD, TC, HOT, LH시즌으로 출시되었지만 마찬가지로 가끔씩 수미로 쓰는 경우가 있을 뿐 거의 기용되지 않는다.
[1] 1991년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장교장 Ufficial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2] ˈfraŋko baˈreːzi,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바레시'이지만 실제 발음은 '바레지'이다. 바레시로 읽히려면 s가 하나 더 붙어 'Baressi'여야 한다.[3] 센터백, 스위퍼[4] 주세페 바레시는 최근까지 인테르에서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5] 선수 시절 은퇴시즌을 제외한 전 시즌을 밀란에서만 뛴 밀란의 전설. 은퇴후 72~74년까지 밀란 유스팀 감독을 맡다 74년, 75-76시즌때는 밀란 A팀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감독으로 전성기를 맞은 팀은 라이벌 유벤투스 FC(...). 그리고 그 유벤투스 FC는 조반니 트라파토니 시절 국내무대와 유럽무대에서 깡패짓을 하면서 황금기를 구사하였다.[6] 당시 키는 164cm였으며 후에 176cm까지 자란다.[7] 엄밀하게는 이때는 아직 아리고 사키가 감독할 시절이다.[8] 1990-91시즌에 챔스 8강전에서 마르세유와 경기를 치뤘는데 경기 도중 조명이 꺼져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조명이 고쳐졌지만 밀란이 재경기를 요구하면서 땡깡을 피우다 UEFA에서 몰수패를 선언하고 1991-92시즌 유럽대항전 참가 금지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1992-93시즌 챔스 결승전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게 0-1로 패하였다. 이때 우승팀인 마르세유는 리그앙 에서 승부조작을 시도했다가 우승 박탈등의 중징계를 받았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는 승부조작과는 무관하기에 우승컵은 그대로 들고 있다.[9] 우리 시대로 치면 제법 뛰어난 공격전개와 훌륭한 수비력을 보여 주는 유망주가 아주리 군단에 데뷔했는데 하필이면 경쟁 상대가 전성기 알레산드로 네스타인 격.[10]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1984년 아주리 군단의 A매치 데이터를 보면 가에타노 시레아와 프랑코 바레시가 동시 기용된 경기도 종종 있다. 영상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자세한 진형은 알 수 없지만 만약에 둘다 모두 리베로로 기용했다면 더블 리베로 진형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형이 나오게 된다. 더블 플레이메이커도 힘든 판국에 더블 리베로라니. 지금은 옛날 같은 위상이 아니라지만 여로모로 수비 강국 이탈리아의 위엄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11] 리카르도 페리와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징을 보여주었다. 다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통한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12] 당시 우승팀인 서독은 5승 2무였고, 이탈리아는 6승 1무였다. 단 한번의 무승부가 우승을 좌절시킨 셈.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압도적인 수비라인과 자국 버프, 그리고 서독의 지독한 아주리 징크스를 생각하면 이탈리아가 결승전에 진출했다면 그들의 4번째 우승은 16년 일찍 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13] 하지만 베르고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에 복귀한다. 사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위한 후보로서 뽑힌 것이었는데 조별예선에서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노장인 베르고미가 대체로 뛰게된다.[14] 사실 연장 종료 직전에 다리 경련으로 실려나가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레시를 첫번째 키커로 투입한 아리고 사키의 결정이 의문이지만 아마도 주장으로서 분위기를 가지고 오라는 의미였을듯.[15] 참고로 바조는 페널티 킥 최강자라 불릴만큼 냉철한 판단력을 무기로 한 덕에 페널티 킥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문제는 중요한 무대에서...[16] 우리나라로 치면 2002 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때 주장인 홍명보와 공격의 중심인 황선홍이 실축한 꼴이다.[17] 이 당시 감독과의 불화 문제로 단장을 그만두는데, 당시 감독은 프랑스의 레전드 장 티가나.[18] 프랑코 바레시가 밀란에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경기를 뛰고(719경기), 처음으로 영구결번에 올랐고, 주세페 바레시는 인테르에서 역대 다섯 번째로 많은 경기를 뛴(559경기) 선수이다.[19] 이는 피파 온라인에서 구현된 은퇴 수비수 중, 몸싸움이나 저돌적인 태클이 아닌 수비지능과 빌드업 능력이 빼어났던 선수들의 고질적인 약점이다. 인게임에서 빌드업은 플레이어가 직접 하고, AI보다는 피지컬이 훨씬 중요하다.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무어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로, 모두 당대 최고의 센터백으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단지 키가작다는 이유로 풀백이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