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무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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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진나라(晉)의 제13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제9대 황제.
2. 생애
융화 원년(362년)에 간문제 사마욱과 이릉용의 3남으로 태어났다.[1] 자는 창명이다.
처음에 회계왕에 책봉되었다가 함안 2년(372년) 7월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할 때는 나이가 어렸기에 태후의 섭정을 받았고, 4년 후인 태원 원년(376년) 정월부터는 몸소 정사를 처리했다. 환온에게 선양 요구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중신들이 시간을 질질 끌어 기다리던 환온이 사망하여 어찌어찌 잘 해결되었다.
태원 8년(383년)에는 전진(前秦)의 부견이 87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당시 동진의 군사는 겨우 8만이었지만, 전진의 삽질을 이용하여 부견의 군대를 비수대전에서 박살내고 서주, 연주, 청주, 사주, 예주, 양주를 수복했다. 사실 부견이 워낙 황급하게 도주했기 때문에 계속 추격했더라면 중원 수복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초기에는 황제에 걸맞는 기량과 권위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아우인 회계왕 사마도자[2] 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자기는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지냈다. 악습을 충고하는 신하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사마요 또한 사마도자의 퇴폐에 불만이 많았으나 태비에게 핍박받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노인, 승려, 비구니를 가까이 두며 총애했고 신하들은 당파 싸움을 자행해 동진의 정치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태원 21년(396년) 9월, 후궁들과 주연을 베풀던 사마요는 총애하던 장귀인에게 '''너도 이제 30세가 넘었구나. 새 후궁을 찾아야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술김에 한 농담이었는데, 문제는 장귀인이 이걸 진담으로 알아들어 버렸다. 결국 그날 저녁 장귀인은 술에 취한 사마요의 얼굴에 '''두꺼운 이불을 잔뜩 올려서 질식시켜 죽여버렸다'''. 이렇게 사마요는 재위 25년, 35세의 나이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이 직후 장귀인은 뇌물을 뿌려서 주위사람들의 입을 막고, 효무제가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려 급사했다고 둘러댔다. 사마요의 태자 사마덕종은 추움과 더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저능아였고, 효무제의 동생인 사마도자(司馬道子)는 평소 생활이 난잡한 자여서 장귀인의 범죄를 들춰낼 사람이 없어 그대로 묻혔다. 사마요는 396년 10월에 융평릉에 안장되었다.
3. 여담
사마요는 총명하고 서예를 좋아했는데, 특히 시 짓기에 관한 의지가 상당히 강했다. 그러나 의지에 비해 실력은 다소 허접했는지 조잡하고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찍 죽은 데다가 뒤를 이은 이은 황제들이 무능하여 나라가 결국 망국으로 치달은 것등 후한의 영제, 남송의 도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도 어리석은 데다가 사치에만 매달린 영제나 도종과 달리 달리 사마요는 처음에는 유능했지만, 말년에 방탕에 빠져 어이없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종의 공민왕과라 할만 하다.
결국 사마요는 영제와 도종처럼 사실상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영제의 아들 소제와 헌제처럼 그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과 공제 사마덕문은 모두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유유에게 휘둘렸고, 마지막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4. 둘러보기
[1] 사마욱은 다섯 아들이 웬일인지 모두 요절했다. 이릉용은 까만 피부에 애꾸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들을 낳아준다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황후가 되었다. 과연 이릉용은 황제의 아들들을 풍성하게 낳았다.[2] 효무제 사마요의 동복 형제로 간문제 사마욱의 막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