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1. 개요
나당전쟁이 끝난 후 평화를 맞이하자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으며 골품제의 모순이란 것도 지역 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7세기 ~ 8세기에는 그렇게까지 차별로 다가오는 현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전성기 150여 년 동안은 다들 신라인으로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적응하고 살았던 걸로 보이는데, 이 기간 동안 백제인 정체성을 내건 반란이나 큰 저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 옛 백제 영토에서 일어난 822년의 김헌창의 난은 이 대목에서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 백제 유민 정체성을 근거로 일어난 반란은 아니었고 주동자 김헌창부터가 무열왕계 강릉 김씨로서 웅천주에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옛 백제 영토를 한꺼번에 독립시키겠다는 의도가 생각보다는 파괴력이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고 해당 지역의 반신라 감정이 있음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신라가 융성하면서 지방 세력이 성장하지만 그에 따른 과실은 수도 일대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자 골품제로 인한 지방 세력의 불만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백제 유민 의식에 점점 불을 붙이게 된다. 신라에서 파견하는 지방관이 고려나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달리 흡사 점령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입장에서 꽤 긴장된 분위기의 통치[1] 를 행했던 것도 백제 지역의 진정한 통합에 큰 저해 요소였으며, 화랑들의 산천 탐방이 백제 지역 사회에 후기가 될수록 크게 부담을 주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현상에 점차 시너지를 일으킨다. 하필이면 신라의 군사 및 행정 역량이 옛 백제 지역을 꽤 효율적으로 통제해서 지방 세력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고구려 유민만도 못했던 모순도 있었고.[2] 때문에 백제 유민 의식에 기반한 부흥 운동은 결국, 200여 년 후 백제 유민도 아닌 조상 대대로 신라인이었을 개연성이 농후한 신라 장수인 견훤에 의해 후백제란 형태로 성공하게 된다.
후백제가 망한 후 고려시대에도 백제 유민 의식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 무신정권 기의 이연년 형제의 난 때 백제 부흥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그걸 마지막으로 여몽전쟁 이후로는 삼국 유민 의식은 소멸되어 더 이상의 백제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여기서 후백제의 성립이 백제 멸망 당시 백제 부흥 운동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 있다는 해석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몇 있다.
2. 백제 멸망과 후백제와의 관련성
2.1. 200년의 시간 간격
백제 멸망(660년)과 후백제 건국(900년) 사이에 200년 이상의 긴 차이가 있었기에, 그 사이에 유민 의식이 남아있을까 의문스럽다는 주장이 있으나, 유민의식을 계속 이어가는 한 부흥운동에 있어서 단순한 시간간격 자체는 크게 의미가 없다. 당장 신라부흥운동이라는 반례가 있다.
2.2. 영토상의 문제
영토상으로 보자면 한성 백제와 웅진/사비 백제도 매우 다르다. 한성백제는 경기도에서 발전했다고 하지만 황해도도 상당 부분 영유했었고, 강원도 내륙지역인 영서 지방도 어느 정도 가진데다가, 전라도와 충청도 동부 및 남부를 직할 통치하진 못했음이 유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충청도 전체라도 일단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건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 때 와서였으나 5세기 초중반부터는 광개토대왕이 충북 일대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면서 침투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아는 충청도 전체가 백제 아래에 확고히 있던 시절은 결국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이후 장수왕에게 475년에 한성을 빼앗기면서 중심지를 충청도로 옮겼고, 그후엔 충청도의 기존 토착 호족들을 제어하기 위해 전북 익산 일대를 일종의 제2수도로 조영하면서 직할지화하면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까지 직접 지배력을 투사하여 예전 한성백제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하던 것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면밀한 중앙집권을 관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도 + 충청도만 백제고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애초에 그것이 그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조선 시대 행정구역 관념을 투영한 것이어서 틀린 건 둘째치고, 아예 사실관계부터가 다른 편견에 찬 주장이다.
후백제의 영토를 들어 백제와 무관함을 주장하는 다른 논리로는 후백제의 영토가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건 그냥 틀린 얘기다.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경상도 서부 일대는 망하기 몇 년 전까진 후백제가 차지한 영역이 고려보다도 그 차지한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며, 충청도 영역도 백제의 옛 중심지이던 공주 - 부여 일대는 고려에 맞서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고 대전 - 계룡 축선은 거의 늘 붙들고 있었으며 충청북도는 백제를 무던히도 애먹이던 삼년 산성 일대를 포함해 2/3 정도가 후백제의 강역이었다. 백제가 전남 일대의 마한은 복속시키는 것이 늦었기에 이 지역 주민들은 별로 백제에 대한 애착이 없었으나, 전남보다 거의 백수십 년 전에 영토로 넣어 백제가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왕가 직속 영토로 오랫동안 경영해온 전북은 아예 사정이 달랐다.[3] 게다가 후백제의 강역 대부분은 경상도 및 충청북도 상당 부분과 대전 일부, 충청남도 서북부 외엔 전부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보유하던 영역들이다.
구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지역 호족들은 태봉/고려와 후백제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했다지만 이걸 갖고 백제성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게, 견훤 자체가 신라 방면에 전력을 집중한 게 주된 이유였고 애초에 신라가 옛 백제 수도권역을 집중 관리했던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백제 멸망(660년) 후 백제 부흥 운동은 백제 중심지인 충청남도 지역(주류성, 임존성, 사비성 등)에서 일어났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이 사실상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신라 지배하에서도 백제 지역 유민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저항은 간간이 있었고 그건 신라의 집중적인 관리를 어쩌다가 피한 전북 일대에서 주로 일어났음을 간과한 것이다.[4][5]
또한, 김헌창의 장안국 반란 때 옛 백제 영역의 전체가 김헌창 반란에 동참해서 중앙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백제사와 통일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영역이다. 김헌창은 백제란 이름 자체를 내세우진 않고 그저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서 떨어져나가겠다는 분리주의만 표명했는데도 일순간의 파급력은 강했던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이념을 앞세운 지역 주민의 본격적인 민심 싸안기란 과제까진 나가지 않았기에 추진력이 약하여 쉽게 실패했지만, 이는 견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견훤은 김헌창보다 한술 더 뜨는 자세로 나가게 된다.[6]
물론 전라도, 경상도하는 조선시대에 생겨난 관념을 그 전 시대에 투영하여, 경상도는 신라고 전라도는 백제라고 말하는 건 사실 관계와 다른 인식이지만, 그렇다고 충청도만 백제며 전라도는 전라남도 중에서도 일부인 나주만 예로 들어 백제 아닌 마한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틀린 생각임은 명심해야 한다. 나주는 애초에 거의 후백제 강역도 아니었고 고려의 영역이었다. 백제 왕가 직속 군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일종의 제2수도로 경영된 익산 부근 전북은 사정이 다르다. 전라도에서도 전라남도 일부인 나주 일대가 백제 부흥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전라도 전체가 백제에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고, 전라도를 그런 식으로 묶어서 보는 것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에 얽매인 생각이다.[7] 그런 방식의 논리라면 고구려 역시 수도가 국내성/평양 일대였으나 막상 고구려부흥운동은 비교적 변방이었던 개성과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했기에 별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8] 또한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논리대로라면 일반인들이 백제의 영역이라고 보는 충청도 지역도 백제가 아니게 된다. 충청북도 중북부는 이미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가 제패했고, 진흥왕 이래로는 서쪽 일부 영역만 제외하면 줄곧 신라 영토였으며 이후 백제는 말기에 의자왕이 잠깐 신라를 밀어붙였을 때 외에는 이 지역을 수복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충청북도가 백제의 손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는 건, 훗날 등장하는 후백제의 성과였다.
이 대목에서 세월에 따라 변화가 심한 백제영역의 변천양상은 여전히 염두에 두지 않고 백제가 초기에 정복왕조로 시작한 것만 억지로 부각하면서 정복왕조 백제가 지배하는 영역 중 부여인 의식이 있어야 진짜 백제유민이고 백제인이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 무관한 억지다. 건국 당시의 부여계가 해당 지역과 해당 인적집단에게 딱 고정되어 영원불멸 늘 고정된다는 관념이야말로 일부 현대 한국인의 강력한 착각이다. 부여계들이 직할통치할 수있는 지역은 당연히 초반엔 얼마 안 되며 상당 부분은 당연히 현지 세력에 맡기던지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결국 동화와 타협은 필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보다 길었던 전북 지역은 전남 지역과 당연히 양상이 다를 수밖엔 없었음도 생각해야 한다.
"호남인들의 조상들 운운"하면서 이들 전체가 최후까지 백제의 침공에 저항하던, 정복자 백제라면 아주 이를 갈고 증오하던 마한인들이란 주장도 할 법은 하지만, 이는 조선 시대 행정구역의 관념을 그보다 천년 전 상황으로 소급한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이는, 백제와 마한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투쟁한 관계가 아님을 망각한 심히 틀린 생각이다. 백제는 애초에 마한의 구성국으로 시작해서 마한의 맹주국이 되어 마한 소국들을 통합했고, 그 과정에서 크게 보아 네 개 권역으로 구분되는 마한은 수백 년이 지나 서서히 망해 흡수된 관계인데, 그 과정에서 애초에 하나로 통짜로 엮는 게 불가능한 마한의 원한과 유민의식이 유독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호남에만 강렬하게 남았다고 망상하는 건 틀린 역사 읽기다. 똑같이 조선시대의 무리한 행정개념을 이런 편견에 맞대응하기 위해 어거지로 끌어와보면,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어디 그런 저항이 없었겠는가? 사실 충청도 권역만 해도 목지국이 백제에게 망하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해 저항했고, 백제는 이걸 완전히 억누르는 데 거의 5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공주 또한 웅진 천도 수십 년 이전부터 백제가 꾸준히 왕실이 직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상황에서도 천도한 시점에서 기득권을 침해받은 토착 호족들의 저항을 무마하느라 많은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백제 전성기 때 직할통치한 황해도는 처음부터 백제 영역이 아닌, 아예 한제국의 낙랑-대방이었다.
그런 관념에서 보면 백제는 영원불멸 초기 부여계가 처음 시작한 위례성 그리고 이후 현대 한국인에게 이미지상으로 잘 알려진 공주, 부여에만 고정된 존재지만, 당연히 이런 가상현실 백제는 있어본 적 없는 허상이다. 국가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적응과 변천, 통합과 흡수를 반복하는 실체지, 누군가의 관념에서 건국 당시로 고정되어 늘 그 환경 그 조건에 맞춰 상연되는 테마파크가 아니다.
물론 신라 귀족의 직계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신라부흥운동과 후삼국시대 백제부흥운동의 양상이 다른 건 맞지만, 부흥운동을 옛날 귀족 직계 후예가 일으켜야 인정할 수 있다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통용되지 않는 일개인의 편견이다. 설령 이를 인정하더라도, 똑같은 신라 귀족의 후예였으나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하여 근왕군을 일으켜, 조상이 같은 신라 귀족 후예들을 단순 반란역적으로 취급하여 토벌해 살해했던 참상이 이 부분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것은 신라와 고려의 옛 나라 백성 흡수가 역시 차이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3. 명칭상의 문제
여말 교체기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에 대해, 남부여부흥운동이 아니며 남부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을 들어 이름만 빌려온 거란 주장이 있고 그 과정에서 난데없이 호남이 곧 마한이란 이상한 이의가 제기되는데, 이는 마한 운운 이전에 조선 시대에 정해진 행정구역에 지나치게 매몰된 관념이지만 일단 논해볼 가치는 있다.
백제는 애초부터 북방 부여인들이 당대에 중북부 마한의 영역으로 남하하여 세운 일종의 외래 정복왕조 국가였다는 점에서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르지만, 그러한 상태가 내내 지속된 것은 아니다. 외래 정복왕조라지만 같은 예맥계라는 큰 틀에선 예외가 아니었고, 때문에 시간이 오래 흘러 동화와 회유 등을 통해 토착 호족들을 구슬러 같은 백제라는 국가 안에서 어느 정도의 통합은 이뤘던 것이다. 부여씨가 국성이고 국호를 남부여로 했다지만 적어도 국호의 경우 '남부여' 왕실이 시퍼렇게 힘이 있었던 현실에서도 역시 오래 갈 수가 없었던 건, 이미 백제라는 브랜드로 오래도록 통합을 이뤘다는 현실을 거스를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후대의 부흥도 역시 백제란 국호를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더군다나 남부여라는 명칭은 성왕 때 잠시 사용한 이벤트성 국명이라는 것이 학계의 결론이고 성왕대 어느 시점, 혹은 바로 다음 왕인 위덕왕 대에 남부여 명칭은 폐지되고 다시 백제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당장 위덕왕 대에 조성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나 무왕 대에 조성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도 또렷이 '백제'라 적혀있으니 말 다한거다.
물론 부여계에게 복속당한 중북부 마한인들이 그 같은 정체성을 가질리야 만무했던 것이, 그들이 백제라는 틀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백제왕 또한 오랫동안 마한왕을 자칭할 수밖에 없었던 게 과연 무엇이 이유였겠는가? 나당연합군으로 북방계 부여씨와 대성팔족이 완전 없어졌으니 백제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백제인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현대인의 심각한 착각이다. 백제의 지배를 받아들이던 토착 호족들은 신라 중앙 정부의 강력한 간섭으로 성을 쓸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세력을 거세당한 건 아니었고, 그 중에 가장 백제의 정체성이 강했던 건 고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실이 제2수도를 운영한 바 있는 전북 일대였다. 또한 기존 마한계 호족조차 백제 치하에서와는 달리 태수의 행정적 간섭을 더욱 강하게 받는 현실을 어느새 인지하게 되자 불만을 점차 쌓아가게 되고 이것이 그들이 백제부흥운동에 합류하게 되는데까지로 이어지는 것이다.[9]
2.4. 견훤의 출신지
견훤의 출신지가 경상북도 상주고 본디는 서남 해안에 배치된 신라 장군이었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현대 한국인들이 저지르는 착각이 셋 있다. 바로 한 가지는 고대국가에서 모든 사람들이 현대인과 같은 확고한 국가정체성이 있어야 부흥운동에 동참할 거란 환상이다.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을 따져봐도, 본인이 현재 체제에서 기득권이 있어도 유민의식과 별도의 국가 정체성을 이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망한 국가가 다시 일어날 때 그 주역이 정복국의 유력자거나 심지어는 정복국의 왕족인 경우가 오히려 흔하며, 망한 나라의 왕실 직계나 그 후손이 복국에 성공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매우 드문 케이스다. 망하면서 지배 국가의 관리를 거치게 되면 그나마 반항할 물적 힘과 야심을 가지는 계층은 지배 국가에게 협조적인 계층이 될 수 밖에 없다. 애당초 대항할 힘도 없는 자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일 수는 없기 때문이며, 김헌창의 난이 꽤 성공적이었던 건 희귀하게 여겨지겠지만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이쪽이 정상이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900년에 완산주에 이르렀을때까진 백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 완산주에 이르러 굳이 백제 의자왕을 들춰낸 건, 그 전까지 백제에 대한 명분이 통할지, 그리고 신라 체제를 자기 힘으로 온전히 극복할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라고 해도 중국 제국 지역 내라면 그 지역 고대 춘추국가의 한 글자 국호를 활용하여 나라를 세웠던 중국사의 사례만 보고 착각하여, 계승의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국호 빌려쓰는 건 가능하다는 억측인데, 적어도 중국사 외의 다른 사례에선 그러한 예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사에서 한 글자 국호로 다시 등장하는 이민족 국가들의 경우, 그 한 글자 국호를 썼던 국가의 역사에 대해 원한을 풀어주고 말고를 언급하면서 그 해당 역사를 끌어낸 사례는 있는가? 거의 없다. 비슷한 사례는 후금-청의 경우가 있으나 이건 그야말로 계승의식이 분명 확인되는 경우다. 게다가 다시 이게 다 맞다고 쳐도, 그렇게 견훤의 근거 지역에서 마한 계승 의식이 강렬했다는 추측을 한다면, 왜 견훤은 망해가는 신라를 거부하는 구실로 그보다 훨씬 역사가 길다 볼 수 있는 마한의 원한은 내세우지 않고 굳이 의자왕의 원수 운운했던 것인가? 그것은 대대로 신라인이고 신라계 토착 호족인 견훤이었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백제 유민의식이 이유였던 것이다.
다른 나머지 세 번째는 바로 국가정체성이다. 국가정체성은 현대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며, 고대나 중세에도 물론 그 강도나 출발점은 분명 약할 수 있지만 문화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유사한게 나타날 수 있다. 애초에 자신의 세력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라에 대한 자신의 반란을 명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백제'란 브랜드가 여전히 유효했던 것 자체가, 그 지역에 살던 '신라인들'이 신라인이란 정체성을 포기하고 망한지 오랜 백제인이 되겠다고 선택했을 정도로 백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3. 같이보기
[1] 역사 지리학 강의 참조[2] 김헌창의 난 때도 구 백제 지역보다 구 고구려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3] 재미있는 사실로, 황해도 지역 또한 고구려가 집중적으로 육성한 지역 대도시 및 그 배후 지역들이었다.[4] 백제 양식의 석탑이 백제 멸망 후에 갑자기 명맥이 끊기다가, 신라의 통제가 약화된 말기부터 갑자기 백제의 옛 땅에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주로 현재의 충남, 전북 지역이다. 물론 전남 지역은 앞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변화에서도 예외였지만. 충청남도 문화 연구원의 백제사 전집의, 백제 유민 동향편 참조.[5] 나말여초 정치 제도사 연구, 충청남도문화 연구원 편찬 백제 유민 동향 부분 참조.[6] 김헌창의 난 때도 구백제 지역보다 패서 구 고구려계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7] 이 글을 곡해한 혹자는 전북과 전남을 나누어 전북은 백제가 맞지만 전남은 아니다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명심해야 할 것은 나주는 전남에서도 극히 일부 지역이고 마한세가 가장 짙은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전남 전체를 백제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주 일대를 제외한 전남 전역이 후백제의 합세한 것과 여몽전쟁 시기 담양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을 기치로 발생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설명할 수가 없다. 전남이 백제사에 늦게 합병된건 맞지만 그래봐야 6세기 초반인 무령왕대이고 660년의 백제 멸망까지 140년간 엄연히 백제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8] 일단 당장 전주가 전라도고 뭐시고 따지기 이전엔 부여-전주 직선거리보다 평양-개성 직선거리가 훨씬 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전주가 공주/부여와 거리가 좀 있으니 백제성이 없다면 개성에 정도한 고려의 고구려성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백제의 제 2수도였던 익산은 그냥 전주 바로 윗동네다. 반면 고구려 제 3수도였던 재령은 개성과 거리가 여전히 멀다.[9] 호남인의 기원과 문화원형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