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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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후지쯔배 초대 우승자인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우승 결정 직후이다. 상대는 린하이펑 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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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쯔배 우승컵을 들고 있는 마지막 우승자 박정환. 우승컵이 항아리로 되어있는 특이한 모양새를 확인할 수 있다.
1. 개요
2. 상세
3. 대회 이력
4. 여담


1. 개요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世界囲碁選手権富士通杯)'''
일본기원에서 1988년 창설된 세계 바둑 기전이자 '''최초의 세계 대회 기전'''. 이 타이틀은 본래 응씨배가 가져갈 예정이었지만, 당시 바둑 최강국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이었는지 응씨배 창설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기원 측에서 전자회사 후지쯔의 후원을 받아 급조한 것이 유래. 이후 창설된 토요타덴소배와 함께 유이한 일본창설 국제기전 노릇을 맡아왔다.

2. 상세


대회는 1988년 1회부터 해마다 열리며, 세계 각국에서 예선을 통과한 24명[1]이 단판승부를 통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형식으로, 결승전도 단판승부이다. 경기룰은 생각시간 3시간에 1분 초읽기 10회[2][3], 우승 상금은 1500만엔. 이는 20년간 같은 금액을 유지했다.[4]
대회 초창기 당시 16명 중 한국기사는 3명만이 초대되었으나,[5] 세계무대에 맥을 못쓰는 나머지 셋 모두 조기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창설국 일본은 우승을 독식하는 등 그야말로 일본만의 리그나 다름없던 대회였다. 그러다 6회 유창혁의 우승을 기점으로 한국기사들이 포텐을 터뜨리기 시작. 5~24회까지 단 네번을 제외하고 한국이 우승을 쓸어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우승자 연혁을 봐도 유창혁,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박정상, 강동윤, 박정환 등 쟁쟁한 한국기사들이 번갈아가며 우승을 차지하는 식이었으니 어찌보면 한국의 바둑 전성기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기념적인 기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6]
하지만 2011년 24회를 마지막으로 후지쯔배의 폐회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최초의 세계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7] 이전부터 후원사 후지쯔의 지속적인 경영 악화와 일본 바둑의 몰락으로 인해 어느정도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무엇보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직격탄을 맞은것이 큰 원인. 때문에 마지막 대회는 관서지방서 32강 토너먼트를 5일만에 속행시키는 등 차질이 많았다고 한다.

3. 대회 이력


'''회차'''
'''년도'''
'''우승자'''
'''전적 '''
'''준우승자'''
'''1'''
1988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1:0
린하이펑 九단
'''2'''
1989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1:0
린하이펑 九단
'''3'''
1990
린하이펑 九단
1:0
녜웨이핑 九단
'''4'''
1991
조치훈 九단
'''기권승'''[8]
첸위핑 九단
'''5'''
1992
오타케 히데오 九단
1:0
왕리청 九단
'''6'''
1993
유창혁 六단
1:0
조훈현 九단
'''7'''
1994
조훈현 九단
1:0
유창혁 九단
'''8'''
1995
마샤오춘 九단
1:0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9'''
1996
이창호 九단
1:0
마샤오춘 九단
'''10'''[9][10]
1997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1:0
왕리청 九단
'''11'''
1998
이창호 九단
1:0
창하오 九단
'''12'''
1999
유창혁 九단
1:0
마샤오춘 九단
'''13'''
2000
조훈현 九단
1:0
창하오 九단
'''14'''
2001
조훈현 九단
1:0
최명훈 八단
'''15'''
2002
이세돌 三단
1:0
유창혁 九단
'''16'''
2003
이세돌 七단
1:0
송태곤 四단
'''17'''
2004
박영훈 六단
1:0
요다 노리모토 九단
'''18'''
2005
이세돌 九단
1:0
최철한 九단
'''19'''
2006
박정상 七단
1:0
저우허양 九단
'''20'''
2007
박영훈 九단
1:0
이창호 九단
'''21'''
2008
구리 九단
1:0
이창호 九단
'''22'''
2009
강동윤 九단
1:0
이창호 九단
'''23'''
2010
쿵제 九단
1:0
이세돌 九단
'''24'''
2011
박정환 九단
1:0
추쥔 八단

4. 여담


  •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최택이 후지쯔배에 참가해 우승했던 에피스드가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골때리는 게 성덕선에게 기념품이랍시고 우승컵을 선뜻 넘겨버린 것. 위 사진처럼 모습은 영락없는 항아리인지라 받자마자 실망하는 기색을 내며 고작 김치 담그려는(...) 용도로 쓰려다가 항아리의 정체를 알아본 성노을이 말리자 실체가 우승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최택이라는 캐릭터가 이창호 九단을 모티브했고 실제 바둑 사건을 모티브로 스토리가 짜여졌긴 해도 실제랑 기간이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응답하라 1988 에피소드 중 선우가 준우승만 3번한 대회라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 대회는 1988년에 창설된 대회이다.[11] 그리고 최택이 1988년 우승자라고 했는데 초대 우승자는 일본다케미야 마사키이다.
  • 후지쯔배 우승컵을 프로포즈 용도로 사용한 사례가 실제로 존재한다. 후지쯔배에서 우승한 유창혁 九단이 아내에게 프로포즈 할 때 후지쯔배 우승컵을 선물한 적이 있다.#

[1] 제1회는 16명, 마지막인 2011년 24회는 32명 - 7개 지역구 예선을 거친 29명(대한민국 6명, 일본 13명, 중국 6명, 대만·북미·남미·유럽 각 1명)과 전 대회 3위내 입상자[2] 2002년 15회까지는 덤이 5집반이었지만 2003년 16회부터 한국처럼 6집반. 그리고 마지막인 2011년 24회는 생각시간 2시간에 1분 초읽기 5회.[3] 이 형태는 바로 이전의 6시간에 육박하는 장기전 위주의 바둑에서 탈피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훗날 하나둘씩 창설되는 세계기전 룰의 본보기가 되어왔다.[4] 중간에 2000만엔으로 잠깐 인상시킨 적은 있었으나, 후원사의 재정문제로 16회 다시 복구시키고 준우승 이하의 상금은 오히려 대폭 줄이기도 했다.[5] 해당 기사는 당연히 조훈현, 서봉수가 발탁되었지만, 나머지 한명은 장두진이 선발되는 약간의 이변이 있었다.[6] 한국바둑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2000년대 우승한 기사만 봐도 기사의 전성기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 중국도 4번의 우승기록이 존재하긴하나, 중국바둑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0년이 되자 기전은 폐회하게되어 사실상 한국만의 무대로 남아버리게 되었다.[7] 마지막 우승자는 박정환 九단. 박정환의 우승은 이세돌 이후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8] 첸위핑 九단의 병세 악화로 결승전 직전에 쓰러져서 국제 바둑 기전 사상 첫 기권승이 나왔다.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기록.[9] 여담으로 당시 대회에선 한국기원 소속의 선수들이 16강에서 전부 탈락하며 바둑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이때는 한국기원이 대회 초창기같은 약체가 아니라 떨어진 기사들이 무려 리즈시절의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이었다. 물론 한국국적으로 본다면 조치훈이 8강에 안착하긴 했다.[10] 고바야시 九단의 이 대회 우승은 2020년 12월 기준으로 일본 국적 기사의 마지막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이다.[11] 최택의 모티브가 된 이창호 九단은 이 대회에서 우승 2번, 준우승 3번을 했다. 시기상으로 맞지는 않지만 준우승을 3번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