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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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의 제4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현지 시간으로 2000년 11월 7일 열렸으며 20세기에 치뤄진 마지막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조지 H. W. 부시의 아들이자, 텍사스 주지사인'''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빌 클린턴 행정부의 부통령인''' 민주당 후보 앨 고어를 상대로 전국 득표수에선 패배했으나, '''선거인단에서 5표 차로 당선'''되었다. 1888년 대선 그로버 클리블랜드 이후 112년만에 벌어진 일로 이후 플로리다 재검표 문제와 수반해 한동안 미국 대통령 선거 방식을 다른 나라처럼 전국 득표 계산을 통한 단순 다수제로 개편해야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2. 경선
임기 중 탄핵 위기를 맞기도 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이었지만 밀레니엄 경제 호황과 함께 순탄하게 2001년 1월 20일 두번째 임기를 마치는 것으로 예정됨에 따라 여당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 모두 새로운 후보를 찾아야 했고, 경선을 통해 각각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와 앨 고어 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2.1. 공화당
현직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없었던 공화당은 경선 초반 많은 후보들이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해 도전했다. 하지만 공화당 출신 전직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의 아들이자 텍사스 주지사를 역임하고 있던 조지 W. 부시는 막강한 자금 지원과 중앙당의 지지를 받으며 일찍 선두 자리를 굳혔다. 이런 조지 W. 부시 출마와 입지 구축에 조지 슐츠 전 장관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부시와 콘돌리자 라이스 등이 함께 참여했던 1998년 4월 열린 정책 현안 토론에서 부시를 차기 권력 후보로 점찍은 슐츠가 출마를 적극 권유하면서 지원을 약속한 것.
하지만 1999년부터 진행된 토론회에서 부시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후발 주자 존 매케인 연방상원의원에게 추격을 허용했다. 당원 조직력이 중요한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부시가 압승을 거뒀지만 일반 유권자에 대한 지명도와 매력이 중요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매케인에게 패배하고 만 것.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지지율 격차가 57%p(1999년 10월)에서 22%p 차이(2000년 2월)까지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부시가 델라웨어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연승하며 차이를 벌리자 매케인이 2월 22일 열린 애리조나와 미시간 프라이머리에서 모두 승리하며 대의원 수를 역전시키며 공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3월 7일, 슈퍼 화요일에 승부가 갈렸는데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9개 주에서 부시가 승리하면서 승리가 기울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는 당시 승자 독식 제도를 선택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52.21%를 득표하며 할당된 대의원 162명을 독점한 것이 컸다. 이외에도 부시 진영에서 매케인을 향해 아버지의 참모였던 리 애트워터 뺨치는 흑색선전[2] 에 매케인 캠프의 선거 자금 부족으로 결국 3월 9일 매케인이 경선 참여 중단을 선언하며 둘의 대결이 끝났다.
부시는 총 44개 경선에서 승리해 1,496명의 대의원을 확보해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2.2. 민주당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 출신이자 8년간 빌 클린턴의 부통령을 역임했던 앨 고어가 경선 시작전부터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서있었다. 그 외 밥 케리 네브레스카 주 연방 상원의원, 딕 게파트 전 하원 원내대표, 다음 대선에 도전하는 존 케리 연방 상원의원 등이 있었지만 결국 도전을 포기했고 빌 브래들리 전 연방 상원의원만이 남아 고어의 대항마로 나섰다. 고어는 민주당의 중도적 포지션을 상징하며 밀레니엄 호황을 누린 클린턴 행정부의 많은 정책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와 반대로 브래들리는 스스로를 고어보다 더 진보적인 대체자로 정의하면서 포지티브한 선거 운동과 슈퍼 예산 편성을 통한 복지 정책 확대, 총기 규제, 건강보험 개혁 등 진보적 아젠다를 골자로 유세를 펼치며 마이클 조던 등 유명 인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고어를 향한 중앙당의 지지가 흔들리지 않고 매우 강력했던데다가, 브래들리가 정작 농민들의 곤경에 냉담하고 무관심하다는 네거티브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1월 24일, 아이오와[3] 코커스에서 26.25%p차로 압승을 거둔데 이어 2월 1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도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며 승부를 사실상 끝냈다. 결국 슈퍼 화요일마저 대패한 브래들리는 그 시점에서 유세를 종료했다.
고어는 남은 경선을 이어가며 56개 경선에서 전승을 거뒀으며 3,007명의 대의원을 확보해 대선 출마를 확정지었다. 현대적 경선 체제가 확립된 1972년 이후 처음이자 유일하게 현역으로 재선에 도전하는 후보가 아니면서 모든 경선에서 승리한 후보로 남았다.
3. 본선
양당 전당대회 직후부터 두 후보 간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고어는 리버럴 유권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정책 분야에서의 좌클릭과 함께 젊고 안정적인 리더십으로서의 자신을 홍보했으며(8년 부통령을 지내고도 2000년 기준으로 50대 초반이었다. 상대 후보였던 부시보다도 2살 어리다.[4] ) 부시는 기독교 우파의 지지와 별개로 자신을' 온정적 보수주의자(Compassionate Conservative)'로 규정하며 중도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고어의 경우, 밀레니엄 경제 호황의 영향으로 빌 클린턴 8년 집권에 대한 피로로 인한 후유증을 크게 겪진 않았지만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가 고어를 향했어야할 강성 리버럴 표를 선거 기간 내내 꾸준히 잠식하고 있었다.[5] 거기다 자신에게 강점으로 작용했어야했을 토론회에서도 우스갯소리로 나올만한 지적은 몇번 있었어도 두 후보 모두 실수를 크게 저지르지 않으며 승부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결과 예측이 매우 어려웠다.
승패를 결정지을 경합 주로는 대표적인 스윙 스테이트인 '''플로리다(선거인단 25명)''', 펜실베이니아(23명), 오하이오(21명) 등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미국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 후보가 전국적으로 민주당 표를 결과에 영향을 끼칠만큼 잠식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투표 당일이 다가왔고...'''
3.1. 선거 당일
개표 초반 공화당 강세지역인 남부 주[6] 들의 개표가 먼저 종료되면서 부시 후보가 먼저 54대 3[VT] 까지 앞서나갔다. 그러나 '''저녁 7시 50분 경'''(미 동부 시각) CNN을 포함한 미국 각 방송사가 플로리다[FL] 를 고어 우세 지역으로 판정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고, 8시에 미시간, 일리노이, 뉴저지 등 민주당 우세 지역의 개표가 시작되며 이 지역에서 승기를 점한 고어 후보가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를 가져간 부시 후보를 119대 121까지 따라붙었다. 뒤이어 펜실베이니아[PA] 도 고어의 우세가 확실시되면서 고어 후보가 역전에 성공했다. 9시에는 뉴욕[NY] 에서 개표가 시작되어 고어 후보가 192대 153으로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시 후보가 오하이오를 이기고[OH] 192 대 185까지 따라붙은 데 이어 '''밤 10시'''를 전후해 플로리다 주 결과가 '''고어 우세에서 경합 지역으로 번복되면서''' 다시 선거 판세가 요동쳤고, 이후 부시 후보가 서부와 남부의 공화당 우세 지역을, 고어 후보가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 해안 주[7] 를 확보하면서 확보 선거인단 수는 고어 249 대 부시 246이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선거인단 25명의 플로리다의 결과에 따라 대선의 승자가 갈리는 상황이 되었다.[8]
그 상황에서 '''다음날 새벽 2시 30분''', 이번에는 플로리다가 부시 우세 지역으로 판정되면서 각 방송사가 부시의 당선을 선언했다. 이 때 고어도 부시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한다"는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대선은 부시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개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플로리다 내 '''두 후보 간 격차가 0.05% 이내로 줄어들어''' 플로리다주 법 규정상 자동 재검표에 들어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플로리다의 결과가 뒤집히면 당선자가 바뀌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한 고어 후보 측이 '''새벽 4시''' 결과 승복을 철회하면서 2000년 미국 대선은 그 후 한 달이 넘는 재검표 소동에 휘말리게 된다.[9]
3.2. 플로리다 재검표 공방
선거 당일 부시와 고어의 플로리다 주에서의 득표차는 불과 '''1784표'''였다. 거기에 플로리다 개표를 두고 논란이 거세지자 현장 투표 재검표 및 법정 공방 끝에 실시된 해외 부재자 투표 재검표 결과, 표차가 줄어들어 부시 후보가 '''537표차'''로 고어 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플로리다 주 대법원이 민주당 측이 제기한 수작업 재검표 주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선의 향방이 다시 안개 속에 빠지는 듯 했으나, 12월 12일 연방대법원이 수작업 재검표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부시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이 재검표 공방이 거세진 이유는 하필 당시 플로리다 주의 주지사가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인 점도 한몫했다. 젭 부시가 형의 당선을 돕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치룬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돈 것.
3.3. 플로리다 주 투표용지 논란
플로리다 주의 근소한 표차는 재검표 논란만이 아니라 투표용지에 대한 문제까지 불러 일으켰다. 플로리다 주는 이때 이른바 나비형 투표용지(Butterfly Ballot)라 불리는 펀치카드 투표용지를 사용했다.
이 투표용지는 후보자들의 명단이 투표용지 좌우에 적혀있고, 그 가운데에 원들이 나열되어 있는 식이며, 지지하는 후보의 칸(원)에 구멍을 내어 투표하는 방식이다. 글로 읽어서 이해가 어렵다면 직접 보자. 누가 봐도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의 기표란은 최상단이지만,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기표란은 두번째인지 세번째인지 네번째인지 헷갈린다. 참고로 저 투표용지에서 앨 고어의 기표란은 세번째 칸이다.
특히 두번째 칸을 배정받은 개혁당 뷰캐넌 후보에게 잘못 투표한 사람이 속출했는데, 뷰캐넌은 플로리다 주 전체에서 17,484표(0.29%)를 득표, 녹색당 후보에 이어 4위를 기록했으며 그중 민주당 초강세 지역인 팜 비치에서 3,411표(0.79%)를 쓸어담았다. 주 전체 득표율은 뷰캐넌의 다른 주 득표율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팜 비치에서의 득표율이 거의 배에 달했던 것.
플로리다 주의 표차는 고작 537표에 불과했고, 이런 투표용지가 유발하는 착오만으로도 앨 고어가 잃은 표가 꽤 된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 당연히 민주당은 투표용지의 적법성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했으나 역시 기각되었다.
4. 결과
4.1. 공화당
4.2. 민주당
4.3. 랄프 네이더
당시 제3후보인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는 선거를 전후해서 당 내외에서 굉장히 시달렸다고 한다. 당선 가능성 자체는 고어와 부시에게 밀려서 대단히 낮은 상태에서 끝까지 선거를 완주할 지,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고 고어를 지지하는 쪽으로 바꿀지를 두고 녹색당 내에서도 고민과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게다가 선거가 끝난 뒤에는 네이더 때문에 표가 분산되어서 선거에서 패배하였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난도 받아야 했다고.
당시 네이더의 선거를 지원했던 마이클 무어는 부시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선거를 포기하자고 네이더를 설득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마이클 무어도 한편으론 '네이더로선 함부로 선거를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이해했다.
5. 관련 문서
6. 관련 링크
[1] 원래는 267명을 획득했으나, 워싱턴 D.C.의 선거인단 중 1명이 워싱턴 D.C.의 제한된 연방 참정권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기권표를 던졌다.[2] 당시 매케인이 입양해 키우고 있었던 흑인 고아가 매케인의 사생아라는 근거 없는 내용이었다.[3] 아이오와는 옥수수 생산에 종사하는 백인 농민 비중이 아주 높은 주다.[4] 심지어는 20년 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 둘 다 고어보다 나이가 많다.[5]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나왔던 로스 페로가 꾸준히 공화당 후보의 온건 보수표를 잠식해 빌 클린턴의 압승에 의도치않게 기여한 바 있었다.[6] 인디애나 12명, 켄터키 8명, 사우스캐롤라이나 8명, 버지니아 13명, 조지아 13명[VT] 버몬트 선거인단 3명[FL] 선거인단 25명[PA] 선거인단 25명[NY] 선거인단 33명, 힐러리 로댐 클린턴 또한 상원의원 당선 확정[OH] 선거인단 21명[7] 캘리포니아 54명, 워싱턴 11명, 뉴멕시코 5명, 하와이 4명[8] 플로리다 외에는 위스콘신과 오리건에서 승자가 확정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9] 다만 이러한 경우가 처음은 아니다. 1876년 대선에도 3개 주의 결과가 초박빙으로 나와 아무리 재검표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대통령 취임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미 대법원에서 승자를 판정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러더퍼드 B. 헤이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