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준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정미 7조약에 찬성해 정미칠적이 되었다.
아버지는 임백희. 조카딸이 이완용의 큰며느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관직 생활
1885년 별시 병과로 합격해 승정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5년에 별시 병과 7위로 합격했다. 1892년 1월 성균관 대사성, 1895년 4월 제용원 주전사장 6월 시종원 좌시종에 임명되었다. 1886년에는 승정원의 주서에 천거된 후 계속해 관직이 올라갔다 1907년 성균관장에 임명되었다. 1903년 10월에 중추원 의관에 이어 11월에는 비서원승으로 태의원 소경을 겸했으며 1907년 1월 성균관장에 임명 되었으며 5월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자 내부 대신으로 입각하였고 대한 의원장을 겸했다. 을사조약 후 고종은 을사 조약이 무효라며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보내고 뜻을 전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준이 죽자 일본의 압박으로 임선준이 내부 대신에 올랐다.
1907년 5월에 한국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 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같은 달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 대수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내부 대신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으며 정미 조약 (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학부대신 이재곤, 탁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부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송병준과 함께 ‘정미 7적'으로 지탄받았다.
2.2. 친일 행적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조선에 와서 조선을 시찰할 때 환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사회를 조직해 평의원을 맡았다. 그리고 탁지부 대신이 되어 지방의 일본 소유로 된 군용지 • 철도 용지 등을 면세했으며 의병에게 처단당한 인물의 친족에게 보상금을 지원했다. 친일 단체 대동 학회의 회원, 대한 여자 흥학회 고문, 대한 산림 협회 명예 회원, 유교 진흥을 위해 세워진 승종 교회 찬성장으로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 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먼저 합병 후 1910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9년 2월 사망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0월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5만원을 받았고, 2월에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같은 해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빛나고 빛날지니! 아. 천년 만년이여'''라는 「합병기념축사」를 게재하여 일제의 조선 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했다. 1912년 8월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2월에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7년 5월 조선의 유력자인 귀족과 실업가 등이 발기하고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주회한 남북 만주 시찰단 환영 원유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 불교 단체 불교 옹호 회의 고문에 위촉되었다.
2.3. 사망
1918년 9월 경성 구제회에 기부했고 죽기 전까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19년 사망했다. 사망 당일 특지로 정 4위에 추서되었다. 작위는 아들 임낙호가 이어받았다.
3. 여담
- 조카 딸이 이완용의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