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 유키코

 

'''시가현 지사'''
'''제14-15대'''

'''제16-17대'''

'''제18-19대'''
구니마쓰 요시쓰구

'''가다 유키코'''

미카즈키 다이조

'''제16~17대 시가현지사
(((((
가다 유키코
'''
'''출생'''
1950년 5월 18일 (73세)
[image] 사이타마현 혼조시
'''국적'''
[image] 일본국
'''학력'''
교토대학 농학부 졸업
교토대학 대학원 농학 박사
'''가족'''
아버지 와타나베 야스오[1]
배우자 가다 료헤이(이혼)[2]
장남
차남 가다 슈헤이[3]
'''직업'''
정치인, 학자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1''' (참)
'''의원 대수'''
25
'''현직'''
시가현 선거구 일본 참의원 의원
'''경력'''
시가현립 비와호 연구소 연구원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환경사회학과 교수
시가현립 비와호 박물관 연구고문
제16~17대 시가현지사
일본 미래당 대표
비와코세이케이스포츠대학 학장
일본 참의원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의 농학자, 환경사회학자, 문화인류학자이자 정치인이다. 현재 시가현 선거구 일본 참의원으로, 제16~17대 시가현지사 등을 역임했다. 원래 성은 ‘와타나베(渡辺)’.

2. 생애


사이타마현 혼조시의 양잠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와타나베 야스오는 혼조시의회 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사이타마현립 구마가야 여자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대학 농학부를 졸업한다. 대학 재학 중 동아리로 탐험부에 가입했는데, 이 당시 탐험부에 여자 부원이 없었던지라 당시 탐험부 부장이었던 가다 료헤이와 격렬한 논쟁 끝에 가입했다. 이후 가다 료헤이와 '''대학 재학 중이던(!) 22세에''' 결혼한다. 대학 3학년 시절에는 탄자니아에서 반 년간 생활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동 대학 대학원 농학연구과에 진학한다. 중도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을 가면서도 일본의 농촌 연구를 위해 일시 귀국하고, 비와호 호반에서의 농촌 생활 형태의 변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해외 연구를 했다. 이후 비와호에 관한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시가 현청에서 설립한 비와호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 후 2000년부터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환경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한다.

2.1. 정치 활동


교수로 근무하던 당시 시가현 릿토시에 건설 예정이었던 미나미비와코역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시가현은 재정난이 심각했었는데, 그 가운데 역 건설비 250억엔의 대부분을 시가현에서 부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해당 문제에 관해 주민투표 조례안이 제출된 2006년 1월 당시 현의회에서 회의를 방청하던 도중, 회의를 방청하던 다른 주민들이 조례안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고 시가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선거 당시 “아깝다(もったいない)”라는 단어를 표어로 내걸고 미나미비와코역 건설 중지, 현내 댐 건설 사업 동결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시 자민당과 민주당은 현직 지사였던 구니마쓰 지사를 추천했으며, 공명당도 자민당을 따라 구니마쓰를 추천했다. 일본 공산당도 원래는 가다를 추천하려고 했지만 독자 후보를 따로 출마시켰다. 주요 정당들 중에선 사회민주당만이 막판에 가다를 추천했으며, 그 외에는 자민당의 일부 비주류 의원들만이 개별적으로 가다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렇게 험난한 상황 속에서 최종적으로 구니마쓰 지사를 꺾고 '''당선되었다.''' 관련 기사
당선 이후 자신이 공약했던 미나미비와코역 건설을 중지시켰다. 또한 현내에 계획되었던 댐 건설 사업도 전부 동결 혹은 재검토해 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오츠시, 히코네시 등이 반발했다. 또 미나미비와코역 건설 중지로 살해 협박 전화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의회 선거에서 미나미비와코역 건설 반대파가 압승하면서 자민당 측에서도 결국 건설 중지 의향을 보였고, 미나미비와코역 예정지인 릿코시 시장도 건설 중지에 찬성했다. 이후 가다는 미나미비와코역 건설 부지에 전기 자동차용 전지 공장을 유치시켰다.
이후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소속 시가현 제1구 중의원 의원이었던 우에노 겐이치로 후보[4]를 꺾고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성공 이후 중앙 정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일본 미래당을 창당해 당 대표를 맡는다. 또한 일본 미래당에 오자와 이치로와 그의 세력들이 합류하고, 여기에 카와무라 타카시가 만든 정당인 감세일본과 녹색바람을 탈당한 일부 의원들, 그리고 야마다 마사히코, 가메이 시즈카, 아베 도모코 등이 합류해 당세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하지만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선거 결과 단 9석 만을 건지며 참패했다. [5]
이후 미래당의 당명은 생활당으로 바뀌고, 오자와와 대립한 뒤 탈당해 아베 도모코와 일본 미래당이라는 또 다른 정치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현의회에서 당 대표 직과 지사직의 겸임을 해소하라는, 다시 말해 '''중앙 정계에 그만 기웃거리라는''' 요구를 해 결국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 지사직에 복귀한다. 이후 2014년 현지사 선거에는 불출마하고 지사직에서 퇴임한다.
퇴임 후 시가 현에 위치한 비와코세이케이스포츠대학의 3대 학장으로 취임해 3년 가까이 재임하다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대학 선배 가와바타 다쓰오의 지명을 받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시가현 제1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자민당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지역 내에서 나름 지지층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입헌민주당희망의 당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어느 정당에 비례대표 투표를 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부탁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표명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44.7%의 득표율로 47.7%의 득표율을 얻은 자민당 후보에게 3%p 차로 밀렸다. 93.8%의 석패율로 입헌민주당에 입당했다면 무난히 비례 부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6] 무소속 후보였기 때문에 비례 부활도 하지 못하고 낙선했다. 참고로 시가 1구에서는 일본공산당의 추천을 받은 사회민주당 후보가 득표율 7.6%를 얻으면서 비 자민당 표를 잠식했다.
이후 2019년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무소속 야권 단일 후보로 시가현 선거구 참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원내에 진출한다. 원래는 국민민주당에 가다가 입당하고, 입헌민주당일본 공산당은 독자 후보를 내려고 했으나, 가다가 '''야권 단일 후보 아니면 출마 안 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민민주당을 탈당했고, 야당들이 가다를 추천하기로 합의해 출마가 성사된 것이다.
당선 후, 같은 선거에서 에히메현에서 무소속 야권 단일 후보로 당선된 나가에 다카코와 함께 원내회파 벽수회 (碧水会)를 결성하였으며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레이와 신센구미 야마모토 타로 후보 지지를 표명하였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06 - 2012
정계 입문

2012 - 2013
창당

2013 - 2014
탈당

2014 - 2018
창당

( )
2018 - 2019
입당

( )
2019 -
탈당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2006
2006년 시가현지사 선거
시가현

'''217,842표(46.03%)'''
'''당선(1위)'''
'''초선'''
2010
2010년 시가현지사 선거
'''419,921표(63.17%)'''
'''당선(1위)'''
'''재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시가현 제1구
79,724표(44.7%)
낙선(2위)

2019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시가현 선거구
'''291,072표(49.37%)'''
'''당선(1위)'''
'''초선'''

5. 둘러보기



[1] 전 혼조시의회 의원.[2] 농학자, 환경학자. 전 교토대학 교수.[3] 오츠시의회 의원.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정치인으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4] 현재는 시가현 제2구 중의원 의원.[5] 하지만 가다는 누구와는 달리 적어도 자기 당에 들어오는 세력들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46회 총선거는 민주당 정권의 삽질로 오히려 자민당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다.[6] 희망의 당다루토코 신지를 긴키 블록 비례대표 1번으로 단독 공인하면서 석패율 97%의 마부치 스미오도 당선되지 못했다. 마부치는 훗날 다루토코의 사직으로 승계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