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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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약 8만여 장의 대장경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1]
정식 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 '재조대장경' 이나,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장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써 책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여러번 인쇄되었는데, 대표적인 한국의 수장처로는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월정사 그리고 부산의 동아 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전기 일본이 요청해 보내준 것도 꽤 많은 양이 남아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만1258판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만 1352판'''으로 밝혀졌다.[2]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은 북한의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에 소장되었는데, 여기에도 장경판각이 있다.
2. 역사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3∼38년(1236∼1251)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두번째로 만들어 졌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떄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말한다.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동기는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대부터 선종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 인경본만이 전한다. 이 외에 대마도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둑맞았다.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꽤나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초조대장경이 상당히 있는데,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후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불력(佛力)으로써 몽골군을 쫒아내기 위해 경판들을 본래 강화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는데, 이후 선원사에 보관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조 7년(1398) 5월 합천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에 이른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현행 한국사 교육에서는 가르치지만,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외적이 쳐들어 왔다면 불경 새길 시간에 무기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수밖에 없다. 외적의 침공이라는 국난 앞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던 고려 조정의 나약함과 무능한 이미지만을 주목하는 꼴이 된다.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1924년에 발표한 논문 《고려의 대장경》에서 팔만대장경을 두고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국방 능력이 없었던 고려 군신들의 종교상 미신의 결과물'''"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12-13세기 사람 이규보도 "전에도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거란이 알아서 물러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썼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 더욱 쉬운 면도 있다.[3]
서여 민영규(閔泳珪) 박사는 1996년에 발표한 《고려대장경 신탐 - 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이라는 논문에서 대장경 조판이 가지는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여기서 민 박사는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한 결과물이 바로 재조대장경 조판'''이었다고 주장했다. 고려 무신 정권, 특히 최씨 무신 정권은 선종 불교와 가까워서 (상대적으로 기존 왕실이나 귀족들에 가까운) 교종 불교계와 사이가 소원했다. 몽골군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으로 부인사(符仁寺)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 지경에 이르자, 정권의 반발세력인 교종 불교계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렇게 최씨 정권을 중심으로 국가 결속을 강화하고자 '재조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한 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팔만대장경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 사업이었으며, 따라서 최우는 이를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 이 임시기구는 고려 전국의 여러 승려들이 맡았는데, 말년에 삼국유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일연스님도 남해군의 분사대장도감에서 1249년부터 3년간 일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혹은 개판)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모두 정안(鄭晏: ? ~ 1251)이 투자하여 이루어졌는데, 정안은 당시 최씨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이(崔怡, 최우)의 처남이었다. 최이(최우) 자신도 생전에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는데 여기서 진양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로 최씨 무신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정안 자신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정씨로 남해와 진주, 하동은 서로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고 오탈자가 거의 없기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고자 거의 1년 가까이 훈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수는 '''5272만 9천 자'''이다. 발견된 오탈자는 5200여만 자 중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으로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4] 을 썼는데 오탈자가 한 글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즉, 이 작업을 하면서 절을 무려 '''1억 5천만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다.
3. 구성
그야말로 불경대백과사전. 대반야경에서부터 마지막 화엄경탐현기까지 총 1514종 불경을 수록하고 있으며, 권수로 따지면 6569권이다. (구성 및 분류는 연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수록된 불경들의 목록과 대략적인 내용은 네이버캐스트 참고.
4.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대한민국 국보 제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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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원활한 통풍을 위해 건물 앞뒤와 위아래에 위치한 창의 크기를 달리하였다. 이러한 장경판고는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경판고는 세계의 도서관 건축을 다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건축사 교수 제임스 W.P 캠벨의 저서 <세계의 도서관> 첫머리에 언급된다.[5]
이어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5. 위험했던 순간
사라질 뻔한 순간이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조선의 세종대에 벌어진 일로,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무로마치 막부는 팔만대장경판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의 주고쿠 지방인 스오의 슈고 다이묘인 오우치씨가 대장경판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오우치씨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도래인 가문으로서 친조선 정책을 취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오우치씨를 백제의 후손으로 인정해서 조선 초기에 상당히 교류가 많았다.[6] 그러던 와중 오우치 요시히로는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여전히 불교가 중요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이 끊임없이 대장경을 청구하자[7] '''세종이 대장경판을 넘겨줄까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한 후 기존의 방침을 고수했다.
세종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만년의 일이고, 대장경이 지금에나 중요한 문화재로 여겨지지 당시에는 그냥 많고 많은(그리고 실생활에 그다지 쓸모도 없는) 불교 유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왕조가 애초에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만큼 불교 유물을 외국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사람도 조정에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들이 대장경을 일본에 주지 말자고 반대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경판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걸 요구한다고 줬다간 나중에는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정무적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그냥 인경본을 주는 것으로 무마했다. 덧붙여 세종은 이걸 한양으로 옮겨 보관할까 하기도 했다.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5일 기사.
하지만 비용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결국 취소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팔만대장경에게 좋게 되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한국전쟁 및 기타 각종 훼불 사건 등 여러 참극을 생각할 때, 서울로 옮겼다면 현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대장경의 이동장소로 거론된 양주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자주 거처했고 무학대사가 머물던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유림들이 방화하고 훼손하여 불상이 죄다 목이 잘리는 등, 이미 16세기에 소실되어 흔적만이 남았다. 개경사 역시 조선 태종 8년(1408) 지금의 구리시 검암산에 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세우고 유생들의 출입을 왕명으로 막았던 절이지만 지금은 그 터도 남아 있지 않다.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19년(1437) 4월 28일 기사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시시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갔다. 류큐에서는 여러 번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가다가 아예 원판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해서 인경본을 받아갔고,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 보관했지만 1609년 사츠마번이 침공하여 소실되었다. 그리고 인쇄본으로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갖기 위해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하여 달라고 하는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1484년 이천도국이라는 가짜 나라 사신을 내세워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고, 1741년에는 구변국이라는 가짜 나라를 내세워 같은 짓을 하려다가 역시 거부당했다. 급기야는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8]
그렇게 잦은 일본측의 노림에도 조선 조정은 대장경을 넘겨주지 않았고, 대장경은 임진왜란의 병화도 용케 피했다. 일제강점기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노렸는데, 해인사 승려들이 '차라리 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고 하며 죽을 각오로 막았기에 일본도 번번이 반출하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한 승려는 칼을 가져와 자해하면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매천야록에서 황현도 이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해인사에 벌어진 화재들. 해인사는 여기저기가 일곱 번에 걸쳐 불이 나며 꽤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대장경은 멀쩡했다.'''
사실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고, 이를 보관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 화재를 방지하는 과학적 설계와 배치가 되어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에 굉장히 민감한데 이를 모두 버텨냈다.
세 번째로 경판들이 소실될 뻔한 일은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이 공습할 때다. 전쟁 중에 빨치산들이 해인사에 숨어들자, 미군 군사고문단이 한국군 F-51 조종사였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에게 빨치산 소탕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지만,[9] 김영환 장군은 문화재 소실을 우려해 빨치산은 금방 빠져 나갈 것[10] 이나 문화재를 잃으면 복구할 길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군법에 따라 전시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승만이 총살하라며 대노할 때 배석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김영환에게 그간 세운 전공이 있었던 덕분에 즉결처분은 모면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환 장군의 예측대로 빨치산들이 곧 해인사를 빠져나간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11] '''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5.1. 보관 문제
대장경 일부가 세월 흔적에 훼손된 게 있다.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벌레가 파먹은 듯한 흔적도 있어서 흰개미 같은 나무에 해충이 되는 벌레가 노릴까 하여 해인사 측이 흰개미가 둥지를 지을 만한 근처 나무를 미리 자른 적도 있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에 따르면 흰개미는 오래된 경판을 먹지 않으니 큰 걱정이 없다는 태도이다.
다음은 먼지. 이 먼지도 오래 쌓이면 경판에 해가 된다. 예전에는 승려들이나 불자들이 자발하여 하나하나 붓으로 천천히 먼지를 털었지만 이젠 관광객이 많아져서 먼지가 더더욱 많이 쌓이고 저렇게 털 틈도 없다. 진공청소기를 쓰자면 경판에 해가 될 거 같기에 한 청소기 업체에서 6달이 넘게 바람을 최대한 적게 하고 나무에 해가 안 가게 연구하면서 특별히 만든 청소기를 쓰지만, 역시 사람 손으로 터는 게 낫다고 하여 주기를 두고 관리하며 손수 털기도 한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경판의 마모 문제인데 반야심경 등 대중에 인기가 많아 인경(印經)할 일이 많은 경판에서는 글자가 깨진 것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1960년대 이후로는 인쇄를 안 하고 있어서 글자가 마모될 염려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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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재에 대비하여 해인사 측은 '''아예 소방차를 가지고 있다'''. 소방차에 해인사라고 적혀 있으며 승려들이 몰고 자주 화재 대비 훈련을 갖출 정도이다. 일부 의견으로 극성 종교 광신도들의 테러를 염려하고 있다. 카더라가 아니라 이는 해인사 측에서도 숭례문에 불지른 채종기 같은 정신이상자를 우려하여 만일을 대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해인사 외에 다른 사찰에서도 화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소방차를 구비 중이라 해인사만 특별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찰에서는 사진에 나온 것보다 더 커다란 소방차도 보유하고 있다. 남양주 수진사 방화 사건 같은 사건을 봐도 개신교 광신도의 방화 염려도 결코 헛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장경판전 안으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고 있는데, 해인사 관리인에 따르면 무당 등이 부적에 불을 붙여 장경판전 창살 사이를 통해 안쪽으로 던져 넣는 일이 많아 이제는 주변도 출입을 통제한다고 한다. 2017년과 2019년에 대장경 세계문화축전 때에는 이례적으로 장경판전 내부 마당까지 개방했다.
6. 여담
소설가 조정래가 대장경 조판을 소재로 <대장경>을 썼다.
현재 전 세계 불교학계에서 원전 텍스트로 많이 참조하는 일본의 대정(다이쇼)신수대장경은 이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6.1. 시험문제 출제 유형
팔만대장경 문제는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
'팔만대장경 전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 있는데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졌는데 몽골의 침입에 의해 불타버렸다.' 부분에서 말을 좀 바꿔서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졌다.'고 하면 틀린 보기가 되므로 유의해야 한다.
약간의 논란으로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는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 인경본 1715권만이 전한다. 그래서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졌다'가 아니라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출제위원들도 알고 있긴 할 듯.
한 시험에 "팔만대장경의 경판 개수는?" 이라는 문제(객관식)를 출제한 적이 있다고 한다.
6.2.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2011년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45일 동안 대장경 간행 천년을 기려 소재지인 합천에서 열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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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매년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재현 등의 관련행사가 열렸지만, 이 행사가 특히 유명해진 까닭은 '''팔만대장경 진본 2점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해인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경판전 안에 꽂혀 있는 모습을 한 번쯤은 봤겠지만 실제 판 전면이 일반에 공개된 사례는 이전 두 차례뿐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몰린 까닭은 해인사 측에서 다음 번 진본 공개는 '''1세기 뒤'''에나 다시 고려할 것이라 공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안 보면 죽기 전에 다시는 못 본다'''는 것. 언론에서는 '100년 마케팅' 이라고들 일컫는다. 덕분에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진귀한 현상을 보였다.
하지만, 6년 뒤인 2017년 10월 20일부터 4년 만에 열리는 축전을 기념하여 17일간 대장경 이운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와 함께 8점의 진본을 새로이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7. 관련 항목
8. 국보 제32호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