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단일화 협의회

 

1. 개요
2. 태동
3. 진행
4. 단일화 수용
5. 원인
6. 단일화 이후
7. 명단
7.1. 구 여권(한나라당, 문민정부) 출신
7.2. 경제인 출신
7.3. 전문가 영입
7.4. 1997년 이전 영입
7.5. 동교동계/舊 민주계 출신
8. 참고
9. 유사사례


1. 개요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민통합21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사실상 정몽준으로의 후보교체)를 요구하며 노무현 후보사퇴를 주장하던 새천년민주당 의원 그룹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약칭 "후단협"으로 통한다.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내부총질'''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건이지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당시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없이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2. 태동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경선[1][2]으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이인제를 지지하던 동교동계 주류와 상당수 현역 국회의원들은 이 상황을 상당히 떨떠름하게 지켜보았다.[3]
그런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개최되는 와중에 열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DJ정부 말기의 게이트[4]와 낮은 투표율[5]로 참패한 반면 이회창이 이끄는 한나라당은 대승했다.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노무현 후보는 당내에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특히 영남권 승리를 이끌겠다며, 지방선거를 낙관하여 후보 재신임까지 거론하는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 당시기사
그 결과, 한때 40%를 넘었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전 직하하여 이회창 후보에게 역전당했고 급기야 큰 차이로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월드컵 버프를 받아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정몽준이 새로운 대선 후보로 떠오르면서,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3. 진행


전국적인 노풍이 몰아치면서 국민경선에서 승리하고 지지율이 압도적인 1위로 나오자 노무현은 스스로 '영남권에서 광역단체장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 재신임을 받겠다'면서 지방선거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이 때만 해도 후보 공천만 잘 한다면 노무현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부울경 세 곳 중 하나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의 복원(정확히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을 내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 경제위기를 초래한 과거세력과의 타협으로 비쳐지면서 논란에 휩싸이는 일명 YS시계 파동[6][7][8]으로 지지율이 주춤했고, 노무현의 자신감과는 달리 한나라당의 (구)민주계와 재야출신들이 움직이지 않으면서[9] 범보수 진영의 분열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영남권에서 거물급 인사 공천에 실패하면서 말 그대로 완패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새천년민주당에서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라"면서 노무현 후보 사퇴론이 등장하였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당은 6월 18일 최고위원·상임고문 연석회의, 19일 당무회의를 연달아 열어서 ‘만장일치로 노무현 후보 재신임’을 결정하고 8.8 재보선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 때만 해도 후보사퇴론을 끝까지 주장하는 의원들은 몇몇에 불과했고, 지방선거 참패는 노무현 후보보다는 김대중 정부의 친인척비리, 측근비리 문제와 월드컵으로 인한 저조한 투표율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경선에서 이인제를 지지했던 동교동계를 포함한 당 주류들도 "노무현이 마음에 드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국민경선을 통과한 후보인데 이렇게 떨구면 누구를 세우느냐?"식의 입장을 보였다. 한마디로 대안부재론에 가까웠다. 이인제는 국민경선 막바지에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면서 음모론을 들고 나오다가[10] 안먹히니까 후보를 사퇴하고 칩거하던 상태라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러면 당시 민주당의 대권후보군 중에선 지금 당장은 지지율이 떨어져 있지만 영남표를 일부라도 가져올 수 있는 노무현이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월드컵이 4강이라는 기적적인 성적을 올리면서 끝났다. 월드컵은 6월에 마무리됐지만, 그 여파는 엄청나서 7월, 8월까지도 전국민과 모든 미디어가 월드컵 4강에 도취된 분위기였고, 당연히 월드컵 개최의 주역인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인기가 대폭발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8.8 재보궐 선거는 6월 지선에 이어 또 한 번 한나라당의 압승, 새천년민주당의 참패였다. 재보선이 치러진 15군데 국회의원 선거구에서 한나라당은 비호남 13곳에서 승리했고, 민주당은 본진인 호남 2군데에서 이기는데 그쳤다.[11] 특히 서울과 부산에선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간의 득표율 차이가 20%가 넘는 곳들이 속출했다. 원래 재보선은 투표율이 낮고, 하늘이 무너져도 투표하는 노년층 고정표가 많은 한나라당이 유리하다. 더구나 이때는 모든 국민들과 미디어가 아직도 월드컵에 취해 있던 때라 재보선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날짜가 혹서기에 피서철이라서 더더욱 민주당이 불리한 선거였다. 게다가 선거 당일에는 폭우까지 쏟아졌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참패는 참패고, 지방선거 직후부터 "재보선은 나를 중심으로 치르겠다"고 공언해 온 노무현 후보에 대한 불신이 쌓여갔다. 민주당이 노무현한테 가진 가장 큰 기대감 그리고 노무현 본인이 내세운 장점은 영남표를 일부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막상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선 딱히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노무현 대신에 정몽준을 후보로 세우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단 월드컵의 대성공으로 정몽준의 인기는 대폭발했고, 아직 대선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았는데 이회창-노무현-정몽준 3자 여론조사에선 정몽준이 이회창과 1위를 다투고 여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아예 미디어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3위로 추락한 상태였다. 이런 정몽준의 진로를 두고 무소속 출마, 신당창당 정계개편, 민주당 입당과 후보교체 등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신문정치면을 뒤덮기 시작한다.
민주당 내에서도 노무현 후보사퇴론, 후보교체론이 공공연히 터져 나왔고 한화갑 대표를 위시로 한 당 주류도 수수방관하며 딱히 막지 않았다. 동교동계 입장에선 그동안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마음에 안들어도 겉으로는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젠 정몽준이라는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후보 사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민주당 바깥에선 노사모유시민 등 친노무현계 인사들,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이 주축이 되어 8월 28일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 바로 개혁국민정당을 꾸린다.[12]
노무현이 사퇴하지 않자 '중도개혁포럼(중개포)'을 중심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37명의 의원들은 10월 4일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결성하고, 그중 17명은 11월 4일 아예 탈당했다. 전국구 의원이던 장태완, 박상희, 최명헌 등은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니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당 지도부에 "나를 출당해달라"고 요청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13] 이들은 당내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위한 사퇴를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공공연히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노무현을 디스하고, 타 당 후보인 정몽준을 찬양하기도 했다.
후단협의 회장은 김영배 의원이었지만[14], 실질적으론 부회장을 맡은 김원길 의원이 핵심 인물이었다. 김원길 의원은 특히 기업인 출신으로 대선 후원금 등 각종 자금줄을 쥐고 있는 인사였기에 김원길의 이탈은 노무현 진영에 큰 타격이었다.
그런데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당 주류 및 최대주주였던 동교동계의 중진들은 이런 사태를 말리기는커녕 수수방관했다. 그리고 이것이 2003년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의 분당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이 된다.[15]
한편 후단협과는 별개로,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던 차기 대권주자로 불리던 김민석이 정몽준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당을 탈당하여 당 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는 안그래도 새천년 NHK 사건으로 비판에 직면해 있었던 386세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주었으며, 김민석은 이 때문에 철새정치인으로 제대로 찍혀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데다 2008년에는 최고위원 2위로 부활하였음에도 정치자금법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수년간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원외 민주당을 창당하며 떠돌다가 2016년이 되어서야 겨우 돌아와 민주연구원장을 지냈고, 제21대 총선을 통해 18년[16]만에 겨우 원내에 복귀한다.[17]

4. 단일화 수용



2002년 11월 이들의 단일화 요구에 노무현 후보가 결국 단일화를 받아들였고,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가 여론조사 방식으로 실시되어 노무현이 승리하여, 단일화가 성공하자 대부분의 후단협 의원들은 이에 승복하여 복당했다. 그리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흔하디 흔한 민주당의 계파 갈등이었다. 하지만 후단협 의원 중 김원길박상규, 원유철 등은 아예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복당했다. 결국 이 세 의원은 단일화라기보다는 노무현이 싫어서 후단협 활동을 한 것이고, 노무현이 여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자 아예 한나라당으로 전향하여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5. 원인


이 사태의 발단을 굳이 따지면 김대중이 정권교체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행한 '''묻지마 영입'''이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에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보수우파의 상징인 마거릿 대처를 연구하였고, 귀국한 뒤에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면서부터 기존의 동교동계 혹은 민주당계와는 매우 이질적인 구 여권 정치인, 군 장성, 경제관료, 기업인들을 대거 영입해서 자신에게 덧씌여진 급진 이미지를 희석화하면서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권교체를 위해서 정치노선이 이질적인 김종필과도 손잡은 DJP연합으로 1997년 15대 대선에서 승리했고, 그 이후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에서 의원 수십명을 빼오고[18], 이인제의 국민신당과 합당을 하는 등 구 여권 정치인과 관료들을 무차별적으로 긁어모았다.
물론 이런 묻지마 영입은 양날의 검이었다. 일단 이념을 떠나서 지역연합인 DJP연합 자체가 동상이몽으로 취약했다.[19] 하지만 DJ의 국민회의는 소수 집권세력이었기에 JP의 충청 세력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20] 오랜 기간의 군부독재 때문에 야당은 오직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투쟁정당이었지 차분히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정당, 수권정당이 되기에 인재풀이 너무 모자랐다. 이런 인재풀 부족 현상은 2016년 20대 총선부터 급격히 해소되기 시작했지만 당시는 사회적으로도 보수정당의 영향이 워낙 강력한 시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일단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정치노선, 이념, 과거 경력 같은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전문성, 대표성이 있다고 하면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것이다.[21][22][23] 김대중 본인의 지도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세력 때문에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 평민당 시절부터 모여왔던 DJ계의 외연확장을 목표로 다양한 인사[25]들을 끌어모았고 이 사람들이 집권 후에 청와대, 내각, 집권당, 산하 공공기관과 공기업에 다수 포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어모은 사람들로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의 다른 계파인 동교동계[26]나 재야세력[27]과는 달리 정치인으로써 시베리아에 가까웠던 야당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경선 이후 노풍이 불 때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뭐든지 참을 수 있다는 자세로 가만히 있었지만, YS시계 파동과 지방선거 참패로 노풍이 꺼지고 이회창 대세론이 형성되면서 대선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거기다 8.8 재보선에서도 참패하자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민주당 전체를 짓눌렀고, '''정권 재창출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6. 단일화 이후


우여곡절 끝에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상당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김원길박상규, 전용학[28], 강성구 등의 인사들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장났다. 참고로 후단협의 주도자는 김원길이었다. 김원길 의원은 후단협 좌장으로서 기자들에게 "어떻게 이룬 평화적 정권교체인데 독재세력인 한나라당에게 줄 수 있냐"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후단협의 순수성을 강변해 오더니만, 정작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자 대선을 20여 일 앞둔 11월26일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보다 더 안정돼 있다"며 한나라당으로 날아가서 비웃음을 얻었다.
훗날 송영길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은 이런 김원길에 대해 상당히 유감이 많았던 듯 하다. 노무현이 후보 시절 단골 이발관에 갔으나 김원길이 앉아있는 걸 보고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에 김원길이 한나라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하자, 김원길 의원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던 윤후덕 보좌관과 최종환 비서관은 김원길 의원의 잘못된 선택을 용납할 수 없다며 사표를 쓰고 뛰쳐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일하게 되었고, 각각 훗날 국회의원과 파주시장으로 당선되는 등 정치 인생이 잘 풀렸다.
하지만 한나라당 입당파 중에 원유철은 2004년에 낙선했지만, 김문수 경기지사의 아래에서 경기도 부지사를 하다가 2008년 국회에 복귀해 20대까지 당선되어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지내는등 나름 중진급의 정치인이 되기는 했다. 새천년민주당에 계속 남아있다가 노무현의 편에 서서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탈당파 후단협 의원 김덕배, 송석찬, 설송웅[29], 송영진은 당원들의 반발로 불출마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단협이었지만 탈당하지 않은 박병석열린우리당에서도 계속 살아남아서 국회 부의장까지 했고, 결국 제21대 국회에서 6선에 성공하여 국회의장까지 되었다. 사실 의외로 살아남은 인사는 많다. 홍재형 의원도 같은 루트를 타서 국회 부의장을 끝으로 정계 은퇴 했다. 민주정의당 출신의 김명섭은 공천을 받았으나 탄핵 역풍이라는 유리한 조건에서도 한나라당고진화에 밀려 낙선했다.[30]
그외에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한 후단협 인사들도 대부분 낙선했으며 듣보잡이 되었다. 다만 열린우리당이 망하고 새천년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하는 과정에서 부활한 인사도 여럿 있다. 17대에서 낙선한 여수시 기반의 김충조 의원은 18대에 비례대표로 부활했고, 송훈석 의원, 이용삼 의원도 탄핵 역풍으로 낙선 후 다음 총선에서 같이 부활했으나 이용삼 의원은 임기중 위암으로 별세하는 비극을 겪었다. 17대 총선에서 살아남은 담양, 장성 기반의 김효석 의원은 구 민주계로서 18대 총선 때 지역구 의원으로서 부활했다. 제19대 총선에서 강서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김성태 의원에게 패해서 정계은퇴했고, 제19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으며,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는 대한석유협회 회장까지 지냈다. 김충조 의원은 지역구 공천에서 떨어지자 다시 탈당했고 19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후단협 입장에서 보면, 후단협은 DJP 연합처럼 원칙에는 어긋난 행위였으나, 당시 여권의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긴 했다. 정몽준이 단일화를 명분으로 사퇴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후단협 의원들은 스스로 악역을 맡았고, 일부 후단협 인사들이 실제로 한나라당으로 전향하는 등 불순한 목적도 있었지만, 어쨌든간에 결과적으로는 여권의 승리의 필요악이었다. 물론 그 후단협 모임이라는 것이, 한번 와해되기 시작하자 고급 음식점을 돌던 모임이 식사비 분담 문제로 국회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모이는 신세가 되었고, 심지어 "누가 배신할지 몰라 매일 서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라고 스스로도 자조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지만 말이다.
특히 후단협 사태의 백미는 여론조사를 통해 노 후보로 단일화된 뒤 벌어진 억측과 배신, 생존 투쟁이었다. 김영배 의원 등 민주당에 복당[31]한 12명은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 회복 1등 공신은 비난을 무릅쓰고 단일화를 외친 자신들이라며 억지 논리를 펼쳤다. 심지어는 뒤늦게 대통령 선거전을 돕겠다며 1천만원씩 특별당비까지 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단협 소속 수도권의 한 의원은 동료들과 약속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특별당비를 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후단협 출신 동료들로부터 "저만 살려고 치사하게 처신한다"는 소리를 듣는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남겼다.

7. 명단



7.1. 구 여권(한나라당, 문민정부) 출신


  • 강운태(광주 남, 초선)
  • 김기재(전국구 15번, 재선)
  • 김명섭(서울 영등포 갑, 재선)
  • 박종우(경기 김포, 재선)
  • 설송웅(서울 용산, 초선)
  • 송영진(충남 당진, 재선)
  • 송훈석(강원 속초 - 고성 - 양양, 재선)
  • 원유철(경기 평택 갑, 재선)[32]
  • 유재규(강원 홍천 - 횡성, 초선)
  • 이용삼(강원 철원, 화천, 인제, 양구, 3선)
  • 이희규(경기 이천, 초선)
  • 최명헌(부회장)
  • 홍재형(충북 청주 상당, 초선)

7.2. 경제인 출신


  • 곽치영(경기 고양 덕양 갑, 초선)[33]
  • 김윤식(경기 용인 을, 초선)[34]
  • 김효석(전남 담양 - 곡성 - 장성, 초선)
  • 남궁석(경기 용인 갑, 초선)
  • 박상희(전국구 9번, 초선)

7.3. 전문가 영입


  • 강성구(경기 화성 - 오산, 초선)[35]
  • 김경천(광주 동, 초선)
  • 박병석(대전 서 갑, 초선)
  • 박병윤(경기 시흥, 초선)
  • 장태완(전국구 3번, 초선)
  • 조한천(인천 서 - 강화 갑, 초선)
  • 전용학(충남 천안 갑, 초선)[36]
  • 최영희(전국구 2번, 초선)

7.4. 1997년 이전 영입


  • 고진부(제주 서귀포 - 남제주, 초선)
  • 김덕배(고양 일산 을, 초선)
  • 김원길(서울 강북 갑, 3선, 후단협 부회장)[37]
  • 박상규(인천 부평 갑, 재선)[38]
  • 장성원(전북 김제, 재선)

7.5. 동교동계/舊 민주계 출신


  • 김영배(서울 양천 을, 6선, 후단협 회장)[39]
  • 김충조(전남 여수, 4선)
  • 송석찬(대전 동, 초선)
  • 이윤수(경기 성남 수정, 3선)
  • 정철기(전남 광양 - 구례, 초선)
  • 최선영(경기 부천 오정, 재선)

8. 참고



9. 유사사례


  • 2012년 11월 :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민주통합당내에서 정대철, 김덕규, 박상천, 조재환 前 의원과 박광태 前 광주시장 등 동교동계와 구민주계, 이부영, 장세환, 조배숙 前 의원 등 경선 과정에서 비문(비문재인) 캠프에 있었던 인사들과 비주류 인사인 이종걸, 송호창 의원이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를 지지했다.[40]# 그 외에 평생 김대중을 따라다니던 동교동계 중진인 김경재, 한광옥이윤수, 설송웅, 박상희 등의 전직 민주당 의원들이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아예 진영을 옮겼다. 참고로 김덕규, 새누리당에 입당한 한광옥은 정통민주당을 창당해서 민주당을 정통으로 엿먹인 이력이 있다.[41][42]
  • 2015년 ~ 2016년 : 문재인이 대표를 맡고 있던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안철수-김한길을 비롯한 분당파는 후단협과 거의 똑같은 행동을 했다. 먼저 안철수가 여름부터 당내에서 치킨게임을 하면서 일요일마다 기자회견을 자청, 언론플레이를 통해 문재인을 계속 비난하면서 "개혁성이 모자라다", "혁신전대를 개최해야 한다"며 실질적으로 문재인의 대표 사퇴를 요구하는 식으로 어거지 주장을 펴다가 탈당. 이어서 당내에 남은 안철수-김한길 계파의원들은 깔끔하게 탈당하지 않고, 당내에서 계속 분란을 일으키다가 1주일 간격으로 계속 순차적 탈당을 하면서 문재인에 대한 비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와중에 후단협 일부 계파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경태가 탈당파 주류와 떨어져 새누리당에 입당한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당무거부로 구설수에 오른 이종걸 원내대표나 박영선, 정성호, 노웅래 등의 비주류 인사들은 잔류했다.
  • 2016년 ~ 2017년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다수의 자유한국당과 소수의 바른정당으로 갈라졌다. 5월 유승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바른정당의 일부 의원(장제원, 김성태 등)이 본진인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해서 홍준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애초에 뜻이 있어서 새로운 당을 찾아간게 아니라, 국민의 비난을 일단 피하기 위해, 바른정당으로 가서 박근혜의 새누리당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려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대선날까지 유승민 옆에 있어주지 않은것. 일부 동정론이 있었지만 결과는 보수층이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에 골고루 찢기는 참사가(...) 일어난다.
  • 2017년 10월 : 옆나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극우 성향인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희망의 당을 창당하고 민진당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호헌 리버럴 성향 의원들을 압살하려고 개헌파만 공천하고 자민당과 연정할 수도 있다고 밝히자, 이에 분노한 호헌파 유권자들이 에다노 유키오에게 호헌파 정당으로 분당하자고 요청했고 에다노는 이를 받아들여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에다노가 유세 과정에서 인기를 끌고 일본 공산당도 호헌파를 제1야당으로 만들기 위해 입헌민주당과 적극적인 연대를 하면서, 비록 자민-공명 여당이 개헌선을 유지했지만 호헌파들이 대거 살아남아 입헌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었다. 결국 희망의 당은 해체되었고 구 민주당계 의원들이 국민민주당과 무소속 회파를 만들어서 독립하였으며, 코이케의 색채를 지워내는 등 일본 야권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 2017년 ~ 2018년 : 이번에는 2015~16년에 새정치민주연합을 휘젓고 나간 이들이 만든 국민의당에서 분당사태가 일어난다. 19대 대선 당시 대선후보였었던 안철수가 전당대회를 통해 대표직에 올랐고, 나락까지 떨어진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철저히 실패하였다. 그러자 안철수 대표는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기에 이르는데, 이에 극렬히 반발한 다수의 동교동계를 포함한 호남 의원들이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을 창당했고, 탈당했던 일부는 무소속으로 잔류했다. 잔류한 이들은 바른정당과 신설합당의 방식으로 합당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였다.[43] 바른정당도 이대로 가면 당이 궤멸될 거라는 위기감에 합당을 추진하였지만, 남경필, 박인숙 등이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고, 오세훈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잔류하였다가 10달이 지나서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 2018년 4월 이재명이 지방선거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였으나, 친문 사이트들은 혜경궁 김씨, 이재명 일베 가입 등을 구실로 거기에 불복하고 이재명의 신상을 털면서 내부총질을 일삼고 있다. 이에 '그래도 민주당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권리당원에서도 이재명이 경합으로 이겼으니 그만 승복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반이재명 문빠들은 '이재명은 아무리 봐도 17대 대선 당시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라며 당선된 이명박의 민주당 버전이라서 힘을 가지면 문통과 민주당에 내부총질을 하고 사고를 칠 암세포니 절대로 민주당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 어떻게든 사퇴시키고 문제가 없는 후보가 나와야 한다. 설령 남경필이 재선하더라도 내부의 암을 적출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반발 하면서 일간지 1면에 '혜경궁 김씨는 누구입니까'라는 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여기에 당 지도부가 이재명을 보호하자 벌써 차기 대권주자한테 줄대냐고 반발하는 터무니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자신들의 작태를 방어하기 위해 이런저런 되도 않는 이유를 대지만 결국 이번 공천에 반발하는 이유가 이재명이 자신들의 계파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이 세력들은 이재명이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어 업무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음해와 공격을 지속하며 속좁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심지어 이재명을 같이 까지 않는다고 민주당의 지도부 인사들과 원조 친문인사들까지 소위 '찢빠'라며 몰아세우면서 이재명을 출당 시킬 수 있다고 말한 김진표를 당대표로 지지하지만[44] 결과는 이해찬의 압승에 호남 당원들이 지지하는 송영길에게도 밀린 3위로 탈락했다. 이런 행태는 어쨌든 상당수가 승복(?)한 후단협보다도 훨씬 퇴화한 행태이다. 오죽하면 이들을 똥파리라는 명칭으로 혐오하고 비판하겠는가? 게다가 2019년 이후에는 이들 또한 이정렬계 vs 반이정렬계로 나뉘어 극심하게 계파투쟁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들 세력이 전체 민주당 지지자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당을 여러모로 시끄럽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니 민주당으로서는 이들을 적절히 솎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5월 16일에 이재명은 1심에서 혐의점이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똥파리들은 여전히 '2심, 3심이 있다'면서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이번 무죄판결[45]로 그들의 조금 남아있던 명분도 모두 허물어졌다. 2심에서 유죄가 나왔지만, 각계 각층의[46] 탄원서가 빗발치고 있어 대법원의 판결이 주목되고 있다.[47] 결국 대법관 다수 의견으로 무죄취지 파기환송 됐다.
  • 2020년 민생당으로 바뀌기 전의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셀프제명을 통해 탈당 후 미래통합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행위를 실제로 시전했다가 서울남부지방법원 민사합의51부에서 탈당 결정의 효력은 무효라는 판결을 받은 적이 있으며, 법원은 이들의 셀프제명 행위에 대해 중대하고도 명백한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 사태로 인해 신용현 의원이 공천취소를 받고, 일부 의원이 민생당 탈당 후 미래통합당으로 이동하여 공천을 받았으나 양 당원 모두와 국민들에게서 공천절차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 특히 임재훈 의원의 경우 안양시 동안구 을에 출마한 심재철 의원 지지를 선언하면서 동 지역구에 후보를 낸 민생당에 당적을 둔 채 미래통합당 후보 캠프에 합류하는 [48] 상황이 펼쳐졌는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에서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임재훈을 필두로 한 친안철수계 8명은 전원이 21대 총선에서 생환하지 못했다.

[1] 당원이 아니더라도 선거인단 신청을 통해 누구나 경선투표를 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그 이전까지는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당내경선이었는데, 그 대의원은 바로 당총재와 지도부 그리고 현역 지역구 의원들이 내리꼽은 인사들이 태반이었다. 즉 몇몇의 계파 좌장들이 공천권과 돈을 무기들이 당을 주무르던 시대였다. 제왕적 총재니 보스정치니 하는 표현은 이런 현실에서 나온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조폭을 동원해서 반대파 계열 대의원들을 협박하고, 행사장에 못들어오게 봉쇄하는 각목전당대회도 많았고, 그 뒤에도 노골적으로 돈봉투를 뿌리는 동원경선이 횡행했다. 어쨌든 이런 국민경선제 때문에 당내 세력이 거의 없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떠오를 수 있었다.[2] 단 오늘날 민주당계 정당에서 시행중인 국민경선처럼 신청만 하면 모두가 경선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민주당원과 일반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맞추기 위해 신청자 중 추첨을 통해 선거인단을 선발하였다.[3] 참고로 경선 시작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던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달랑 한명이었다. 그만큼 노무현은 당내에서 세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경선 초반에 지지층이 겹치던 재야출신 김근태가 처참한 득표율을 보이자 자진사퇴하였고 개혁성향 의원들이 노무현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사실 경선직전 까지도 노무현+김근태 후보 단일화 논의가 있었으나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4] 2000년 총선 패배와 함께 아들 세 명(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모두 연루된 소위 홍삼 게이트 비리로 대통령의 레임덕이 극심했기 때문에 사실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었다.[5] 투표율이 낮으면 보수정당에 유리하다는 것은 정설이고 이때는 심지어 월드컵이 진행중이었다.[6] 노무현은 김영삼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 김영삼이 야당 총재 시절 선물했던 시계를 내보이면서 "그 때 총재님께서 주셨던 시계를 아직도 차고 있습니다."라는 대사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방송에 나가자 경제위기를 초래한 김영삼에게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면서 역풍이 불었다.[7] 사실 이 자리에는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박종웅 의원이 배석했는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여기 박 의원을 저한테 주십시오. 제가 부산시장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1987년 민주화세력의 복원이란 명분으로 박종웅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구 상도동계 세력을 자기쪽으로 끌어와서 한나라당의 분열을 유도하고 부울경 지방선거에서 선전한 다음에 그 기세를 타고 대선도 이긴다는 큰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YS시계 파동으로 역풍이 불자 영남 상도동계가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구상은 무산되었다. 결국 영남쪽 상도동계 세력들은 열린우리당 창당때도 거의 합류하지 않았다.[8] 이 때 노무현의 구상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훗날 노무현의 친구인 문재인이 18대, 19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 상도동계 일부가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였고, 그리고 문재인은 재수 끝에 대권을 잡게된다.[9] 당시 이회창의 당장악력은 확고했다. 이회창은 아마도 전두환 이래 민정당계 정당을 가장 확고히 장악했던 (민자당 시절 김영삼조차도 민정계의 몽니에 힘들어할 정도였다) 당대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에 노무현 집권후 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김영춘 조차도 2002년 12월까지 이회창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도왔다. 이들 중 일부는 이회창이 물러난 이후에야 '독수리 오형제'(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라는 이름으로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야 참여하게 된다.[10]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콕 집어 말은 안 했지만 DJ의 손을 의미한다. 요컨데 김대중의 의중이 이인제에게 없기 때문에 이미 노무현 당선 시나리오가 다 있다 이런 얘기.[11] 전북 군산 강봉균, 광주 북 갑 김상현[12] 개혁당은 이때부터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밀려날 경우에 대비해서 만든 피신처라는 주장이 많았다.[13] 그리고 의원직 유지를 위한 출당요구는 바른미래당에서 구 국민의당계, 구 바른정당계 의원들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한다.[14] 김영배는 "노무현으로부터 설렁탕 국물 한방울 얻어먹지 못했다"는 "국물론"을 설파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친노세력은 이들 후단협 및 동교동계를 "국(궁)물세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2015년 새정연 분당사태 시절에 후단협과 비슷한 행태를 보인 국민의당 분당세력을 "국(궁)물당"이라고 부르는 시초가 되었다.[15] 노무현이 후단협에 의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축출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노무현이 대선에 후보로 출마할 수 있도록 2002년 8월 범친노세력인 김원웅 의원(한나라당에서 탈당)과 유시민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하여 새천년민주당 바깥에서 노무현을 지원했다. 즉, 이 정당은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낙마했을 때, 말을 갈아타기 위해서 당 밖의 친노세력이 만든 멀티 정당이었고, 노무현 당선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이에 흡수되었다.[16] 서울시장을 출마를 위한 2002년 사퇴.[17] 물론 훗날까지 김민석은 자신이 총대를 매고 단일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른 의원과 일절 상의 하지 않은 단독행동(...)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정치생명을 걸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정말 정치 생명이 반 이상 날아가게 되었다. 민주당 당내에서도 범동교동계를 이루던 호남계 세력이 안철수를 따라갔다가 몰락하고 친노-친문 세력이 주류가 되면서 그에 대한 비토가 상당하지만, 2010년대 후반 언론과 팟캐스트에 자주 등장해서 특유의 말빨을 내세워 여권 논객으로 활약하면서 어느정도 희석된 듯.[18] 1998년 지방선거 이후로 한나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국민회의로 입당하여 DJP연합은 과반을 확보한다.(여권, 집권 6개월여만에 과반의석 확보)[19] 당시 기본 논리는 아렌드 레이파트가 제시한 ‘협의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였다. 소수당끼리 고립을 피하기 위해 연립해 집권하자는 논리.[20] 1998년 당시 국회 내 의석수에서 한나라당이 다수였다.[21] 더욱이 당시에는 진보언론이 한겨레, 월간 말 두 개밖에 없었고, 조중동 및 공영방송 체제의 거대 보수언론의 독점체제가 자리잡은 언론 환경은 항상 여당중심 위주의 보도를 하는 등, 극심히 편파적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기울어진 운동장보다도 훨씬 더 불리한 환경이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김대중이 이룬 정권교체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걸음 더 성장시켰다는 일반적 평가를 보면, 어느 정도 합리화가 가능하다.[22] 예를 들어 이헌재 같은 경우 1997년 당시 이회창에 줄섰음에도 김대중이 자민련 인사인 김용환의 추천을 수용하여,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만으로 금융감독위원장으로 발탁하여 IMF 극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도 신용불량자 관련 종합대책을 내놓는 등 위기상황에서 소방관 역할을 했다. 이런 무리수 없이 소수파 정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당인 국민회의를 소위 "정도"대로 이끌었다면 집권은 아예 어려웠을 것이고, 집권후에도 전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정운영이나 필요한 개혁조치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23] 20년 후인 201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거의 대등하게 보수세력과 대결한 것, 2017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압도적으로 보수진영을 리드하고 있는 것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7년의 정권교체에 맞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의 이런 "묻지마 영입"은 단기적으로 후단협이라는 부작용도 만들어 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민주세력의 집권능력의 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재영입 기조는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강화하면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직계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의 역량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24] 소설가로 1996년 송파을에 국민회의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 본인은 흑역사가 아니라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한다고...[25] 김대중이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영입한 집단을 말한다. 이때 여권출신 및 김한길, 김진명[24], 추미애, 정동영, 김민석 등등을 영입했다.[26]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김경재, 김홍일 등.[27] 김근태, 박영숙, 이우정(1923) 등. 1988년 이후 김대중은 매번 선거때마다 재야출신들을 꾸준히 영입했다.[28] 후단협을 하는듯 하다가 가장 먼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후 후보 단일화 이전에 가장 먼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김원길과 박상규는 단일화 이후 입당한다.[29] 설민석의 아버지. 여담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그와 대적했던 사람이 현 행정안전부 장관이다.[30]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이 목소리를 드높이면서 당지도부와 충돌하던 고진화 의원은 대선 시즌에 자기당 후보인 이명박이 아닌 문국현을 지지하는 바람에 18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잘렸다. 애초에 고진화는 정치노선으로 보면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당계 정당에 훨씬 가까웠다.[31] 후단협 등의 영향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탈당인사들의 복당에 대하여 엄격하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국민의당 열풍이 꺼지고 21대 총선에서 구 국민의당 의원들이 민주당에 복당하겠습니다(...)라는 공약을 내걸자 아예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당 차원에서 복당불허를 공식화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 구 국민의당계에 대한 감정은 정의당 일부 의원들과 비견될 정도로 극히 안 좋다.[32]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복당. 2015~2016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미래통합당 5선 의원[33]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국회의원직 상실.[34]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 2003년 12월 국회의원직 상실.[35]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36]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37]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38] 2002년 16대 대선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39] 2003년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게 생기자 결국 자진사퇴했다.[40] 그러나 후에 이종걸, 송호창은 더불어민주당에 남아서 안철수와 거리를 두게 된다.[41] 한화갑은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으나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새누리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42] 그러나 설송웅의 지역구였던 용산구의 진영 의원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으로 소속을 옮겼다.[43] 그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및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지 못한 기초의원, 자치단체장 후보들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바른미래당에 공천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폭망했다. 광역, 기초의원 비례득표가 오히려 정의당보다 못할 정도.[44] 참고로 김진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부터 계속 민주당에서 활동했지만 관료 출신의 보수성과 개신교 관련 논란 때문에 민주 진보 지지층 사이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순전히 이재명을 탈당시킨다는 말에 극문들이 몰린 거다.[45] 항소심은 1심에서 적용된 증거와 증인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46] 심지어 자유한국당 소속인 권영진 대구시장도 탄원에 동참하였다.[47] 다만 대법원은 표면적으로는 여론이 아닌 법률심이다.[48] 게다가, 임재훈은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조직본부에 있으면서 후단협 결성을 눈앞에서 지켜본 바 있으며, 후단협도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는 형식적으로라도 결과에 승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