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만경전
1. 소개
景福宮 萬慶殿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대왕대비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2. 역사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 대비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 왕대비 효정왕후와 대비 철인왕후 중 누가 머물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873년(고종 10년)과 1876년(고종 13년)에 걸친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내전 권역 화재에도 무사했기 때문에 한동안 고종이 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 곳에서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를 열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사라진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자재로 쓰이면서 사라졌다. 만경전 건물은 현재 창덕궁 경훈각이 되어 있다.
3. 특징
※ 현재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만경전의 사진과 《북궐도형》, 《정해진찬의궤》[1] 에 실린 《만경전도》의 모습을 토대로 적었다.
- 기단은 4벌대의 장대석으로 놓았으며 3단짜리 계단을 정면에 3세트를 놓았다. 기단의 전면부 양 옆 역시 계단으로 되어있는데 따로 둔 게 아니고 기단 자체를 계단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중에서도 물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그리고 4개의 잡상과 토수를 놓았다.
- 정면 9칸, 측면 4칸의 총 36칸으로 정면 기준 양 끝 칸은 누 마루가 1칸 씩[2] 구성되어있으며 누 마루 밑의 기둥 사이마다 나무 판문으로 막아놓았다. 누 마루 안쪽에 온돌방 2칸을 두었고[3] 양 온돌방 사이에 대청 3칸[4] 을 두었다. 정면의 가장자리 칸은 툇마루이나 뒷면의 가장자리는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단, 대청과 연결된 뒷면의 칸은 툇마루이다. 이러한 구조는 같은 대비전이자 한 때 왕이 머무르는 곳으로 쓰였던 자경전과 흥복전과 비슷하다. 그리고 동남쪽 끄트머리 칸에 동쪽 행각과 연결된 복도를 설치했다.
- 여느 궁궐의 침전처럼 건물의 사방으로 행각이 둘러싸고 있으며 총 7개의 문이 있었다. 남쪽에 양화문(養化門)과 광의문, 동쪽에 함춘문(咸春門)과 인양문(寅陽門), 북쪽에 평재문(平在門), 그리고 서쪽에 의춘문(宜春門)과 경성문(景成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