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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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景福宮 慈慶殿
조선시대 궁궐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이다.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던 곳이다.
위치는 교태전의 동북쪽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이름은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던 창경궁 자경전에서 따왔다. '자경(慈慶)' 이란 말 자체는 ‘자친(慈親), 그러니까 (왕의) 어머니가 복(慶)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경복궁의 침전 중 고종 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2. 역사
조선 초기에는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 자미당(紫薇堂)이란 침전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고 270여 년간 방치 상태로 있다가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때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가 머물 곳으로 지었다.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했으나 불과 3년 뒤(...) 다시 불 타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았고, 이후 몇 번의 수리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 정면 10칸, 측면 4칸의 1층[1] 이다.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2] 2개를 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4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다. 남면과 서쪽 면의 겉 모습을 보면, 마루에는 머름만 달려있지만 온돌방에는 교창과 머름이 다 있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천장은 우물 반자[4] 로 막고 단청을 모로단청[5] 으로 칠하여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뽐냈다.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모두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다. 서쪽 방의 경우 대청 쪽의 2칸을, 동쪽 방의 경우 1칸을 남, 북 축으로 뚫어서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서쪽과 동쪽의 끝 칸은 누마루로 조성했으며 서쪽 누마루는 후술할 부속건물 복안당과, 동쪽 누마루는 청연루와 통한다.
-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6] 양식에다 안쪽으로 완자 장지문을 설치한 모습으로 되어있다. 온돌방 내부도 완자 장지문으로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4. 부속 건물
4.1. 청연루
景福宮 淸讌樓
자경전 동쪽에 딸려 있는 누마루이다. 이름은 ‘맑고(淸) 한가함(讌)’ 또는 ‘조촐한(淸) 연회(讌)’라는 뜻이다.#
원래 세종 때에 지었으나 그 때는 자미당과 나란히 있었던 누각의 모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부인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는 등의# 활동들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옛 자미당 터에 자경전을 크게 지으면서 청연루는 자경전의 누마루가 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자경전과 같다.
자경전 본채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남쪽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 튀어나와있으며 남향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부분에 1단짜리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으며 기단 윗 부분은 전돌로 깔았다. 그리고 사다리꼴 모양의 긴 화강석 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건물을 구성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3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교창을 설치하지 않고, 아래에 머름을 둔 뒤 띠살 창만 설치하였다. 기둥은 각 기둥이고, 마루 밑 동쪽 면에는 초록색 나무 문짝을 달아 협경당 마당과 연결시켰고, 북쪽 면에는 붉은 나무 문을 설치하여 자경전 동쪽 온돌방의 아궁이를 땔 수 있는 함실로 갈 수 있게 하였다. 실내 천장은 우물반자,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있고 모든 칸이 다 뚫려있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
4.2. 복안당
景福宮 福安堂
자경전 북서측에 있는 부속 건물. 동향이다. 이름은 ‘복(福)되고 편안(安)하다’는 뜻이다.
(좌향 기준)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짜리 건물이었고 자경전 본채 쪽으로 온돌방이 4칸, 대청이 2칸, 툇마루가 2칸이었으나 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을 더 지어서 현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다. 그래서 후에 지은 온돌방 부분은 기존 복안당과 양식이 조금 다르다. 지붕과 기단도 기존 복안당보다 낮고 용마루, 추녀마루, 내림마루의 마감 양식도 다르며[7] 원래 복안당은 공포가 있으나 새로 지은 부분은 공포가 아예 없는 민도리 양식이다. 그래도 팔작 지붕 양식과 각진 기둥, 교창을 설치한 것은 같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기존 건물과 증축 부분에 각각 1개 씩 놓았으며 주춧돌 사이를 장대석이 아닌 벽돌과 사고석으로 마감하였다.
동쪽 측면 모습은, 온돌이 있는 칸의 외벽을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벽을 둔 모습으로 마감했으며 마루(대청, 툇마루) 칸의 외벽은 전면창호를 내었다. 새로 증축한 온돌방의 경우 가장자리 칸의 외벽만 기존 복안당 온돌방 외벽처럼 만들었고 다른 한 칸의 외벽은 대청처럼 전면 창호로 되어있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서쪽 측면 모습도 동쪽과 비슷하지만 대신 모든 온돌방 외벽을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을 낸 모습인 것이 다르다. 모든 마루 칸 겉면을 전면창호에 위에 교창, 아래에 머름을 둔 모습으로 만들었다.
4.3. 협경당
景福宮 協慶堂
자경전 · 청연루의 동쪽에 위치한 부속 건물. 남향이다. 역사는 자경전과 같다. 이름은 ‘함께(協) 경사(慶)를 누린다’는 뜻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 총 12칸 규모로 건물 앞 쪽에 담장과 쪽문을 세워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건물 남쪽 가장자리에만 툇마루가 있고 나머지 동, 서, 북쪽에는 없으며 그 중 대청 쪽 툇마루는 밖으로 드러내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총 2칸의 온돌방이 각각 있으며 온돌방 사이 가운데 2칸은 대청이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 마루는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온돌방 내부에는 완자 장지문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각기둥이고,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8] 끝을 둥글린 물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3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교창을 설치하지 않고, 아래에 머름을 둔 뒤 띠살 창만 설치하였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으로 쌓았고 기단 윗 부분을 전돌로 놓았다. 계단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놓았으며 주춧돌 사이를 장대석이 아닌 벽돌로 마감하였다. 동쪽 측면은 툇간 부분을 제외하고 벽과 창으로 마감하였다.#
5. 꽃담과 굴뚝
자경전은 위에 언급했듯 대비가 사는 곳이다. 구중궁궐 한복판에서 겉은 화려해보여도 속은 많이 외로웠을, 더군다나 (별 일이 없는 한) 평생 한 곳에서 살아야했던 대비를 위로하려는 뜻인지 자경전의 담과 굴뚝은 굉장히 아름답다. 그것도 그냥 예쁘게 만든 게 아닌, 상서로운 기운과 장수를 상징하는 문양들로 조성하여 깊은 의미까지 담았다.
5.1. 꽃담
자경전 담장은 꽃담으로 유명하다.
3단의 사고석 위에 벽체가 있고 그 위에 기와가 올려져있는 전형적인 궁궐 담장의 모습이다. 하지만 벽체는 주황색 벽돌과 삼화토로 마감하여 따뜻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이 벽돌 색은 서울특별시에서 ‘꽃담황토색’이라 하여 '서울의 10대 대표 색' 중 하나로 꼽아 현재 서울택시의 색으로 쓰인다.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북쪽 담장을 먼저 보면, 가운데엔 사선인 만자문(卍字紋)과 귀갑문[9] 이 있고 그 사이마다 문자 모양의 벽돌이 있으며 그 위, 아래는 무시무종문이 있다. 이런 장식은 중간에 동향하고 있는 작은 쪽문에서 끝나며 이후 서쪽 방향으로 계속 길이쌓기를 한, 별 무늬없는 담장으로 쭉 이어지다가 자경전 전체 영역의 서쪽 담장에서부터 다시 보인다. 문자는 자경전 영역의 동북문 서쪽부터 나타나며 ‘성(聖)’, ‘인(人)’, ‘도(道)’, ‘리(理)’이다.
서쪽 담장 안쪽을 보면, 대각선으로 만든 무늬틀과 귀갑문틀, 그리고 문자 벽돌들의 4방을 무시무종문이 마치 감싸는 것처럼 보이게 놓았으며 각 무늬 틀 사이마다 6개의 잎을 가진 작은 꽃을 넣었다. 그리고 각 틀 사이의 벽돌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안쪽 담장의 글자는 천(千), 귀(貴), 만(萬), 수(壽)이다.
그리고 이 담장의 진수는 바로 서쪽 담장의 외벽이다. 벽체 사이마다 흰 강회로 만든 사각형의 틀을 놓고 그 틀 안에 꽃과 나비, 대나무, 국화와 석류, 모란 등의 문양을 집어넣었으며, 위 아래로는 벽돌로 무시무종문을 만들어 넣었다. 장식 틀 사이사이에는 역시 벽돌로 전서체 양식의 ‘낙(樂)’, ‘강(彊)’, ‘만(萬)’, ‘년(年)’, ‘장(張)’, ‘춘(春)’자와 만자문, 그리고 귀갑문과 격자무늬를 장식해 넣었다. 또한 귀갑문의 가운데와 격자무늬 사이에는 6개의 잎을 가진 작은 꽃을 넣었다.
각 담장의 글자들을 종합하면 ‘성인도리천귀만수낙강만년장춘(聖人道理千貴萬壽樂疆萬年張春)’이다. 즉 대비가 ‘성인(聖人)의 도리(道理)를 지키고 부귀(貴)하시며 만수무강(萬壽)하시고 즐거움(樂)과 정정함(彊, 春)을 오랫동안(萬年) 누리시라(張)’는 뜻이다.
5.1.1. 꽃담 엉터리 복원
2020년 10월 19일, 6.25 전쟁 전후로 자경전 꽃담을 복원할 때 엉터리로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은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와 함께 꽃담의 과거 사진을 확보하여 지금의 꽃담과 비교한 결과, 아예 벽화가 빠져있거나 틀린 글씨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화재청은 이후 계획을 잡아 수리에 나서겠다고 답했다. 과거의 답답한 문화재 행정의 단면이 두드러지는 면이다.
5.2. 굴뚝
굴뚝은 아미산 굴뚝과 더불어 '''우리나라 굴뚝 중 최고의 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자경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이 굴뚝은 너비 381㎝, 높이 236㎝, 두께 65㎝로, 담장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만들었다.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주황색 벽돌을 37단 쌓은 뒤, 그 위에 마치 실제 한옥처럼 소로, 도리, 서까래 등의 부재들을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기와를 올린 뒤 연기가 빠져나가게 흙으로 구워 만든 배출구를 10개 놓았다. 이 배출구가 꼭 집처럼 생겼기에 연가(煙家)라고 부른다.#
제일 아래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에는 십장생과 포도, 연꽃, 대나무, 백로 등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회칠을 하였다. 그리고 맨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또는 도깨비)의 얼굴을, 그 양 옆에는 학을 새겨 놓았다.# 이런 상서롭고 장수를 상징하는 무늬들을 장식함으로써 대왕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유리 지붕을 덧씌우고 굴뚝 앞에 철제 기둥과 난간을 설치하여 외부인의 접근을 금지하였다. 그래도 멀리서나마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자.
6. 여담
- 2011년부터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자경전 다례체험 프로그램을 매년 여름[10] 과 가을[11] , 총 2번을 열고 있다. 인원은 20명이고 1부와 2부로 나누는데, 1부를 1시에서 2시까지, 2부를 2시 반부터 3시 반까지 각각 한 시간 씩 진행한다. 1부는 전원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한 인원만 받고 2부는 10명은 사전예약, 나머지 10명은 현장접수를 받아 진행한다.# 예약은 네이버에서 할 수 있다. 관심있는 위키러들은 시간날 때 한 번 체험해보자.
7. 대중매체에서
[1]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2] 소 혀 모양의 부재.[3]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4]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5] 끄트머리만 칠하는 단청.[6]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7] 기존 건물은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 용두, 4개의 잡상을 올렸으나 추가로 지은 부분은 기와로 덮고 취두만 올렸다.[8] 소 혀 모양의 부재.[9] 거북이 등껍질 무늬.[10] 보통 5월 ~ 7월.[11] 보통 9월 ~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