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한국
1. 개요
한국에서의 포경(捕鯨) 역사에 대한 내용 및 현재 상황에 대한 문서.
2. 한국에서 고래의 용도
고래기름, 고래고기, 고래수염 획득이 주 목표였다.
3. 포경사
3.1. 고대
반구대 암각화에 사냥감으로서 묘사된 고래가 다수 존재해 선사 시대부터 고래를 사냥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포경은 이누이트들이 하는 것과 흡사하게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만으로 들어오는 고래를 작살로 포획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
3.2. 중세
경주시 서봉총 발굴 결과 1,500년 전 신라 지배층들도 고래고기 요리를 먹었음이 유물로 발견되었다.
고려에서도 고려사를 살펴보면 동해안에 접한 동계[1] 와 경상도을 중심으로 고래기름 등 부산물이 유통된 기록이 있어, 고래 사냥이 어느 정도는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작은 배와 그물을 이용한 사냥이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계속된 이웃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중세에 들어서는 고래잡이가 활발하게 이뤄지진 않았다. 고려시대 이후로 불교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채식이 장려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래는 먹을 게 못 된다 보는 시각이 있었다. 한민족은 가야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현대 이전에는 대개 내륙 분지를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농본주의를 중시했다보니,[2] 육류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 등 육상 동물의 고기가 친숙했다.
또한 관에 의한 극심한 수탈 때문에, 고래를 잡는다 해도 주민들은 얻는 것이라곤 없이 가혹한 노역에만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닷가에 죽은 고래가 공으로 밀려온다고 해도 어민들이 나서서 도로 바다에 갖다 버리는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만일 관청에서 먼저 알게 되면 어민들을 부려 기름을 뽑아 막대한 이득을 취하면서도 어민들에게는 아무 대가도 주지 않기 일쑤였다.
다만 고대 이후로도 고래를 잡은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양천포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일대이다. 잡힌 위치와 기름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서해에서 강물을 타고 올라온 상괭이였던 것으로 보인다.큰 고기 여섯 마리가 바다에서 조수(潮水)를 타고 양천포(陽川浦)로 들어왔다. 포(浦) 옆의 백성들이 잡으니, 그 소리가 소[牛]가 우는 것 같았다. 비늘이 없고, 색깔이 까맣고, 입은 눈[目] 가에 있고, 코는 목[項] 위에 있었다. 현령(縣令)이 아뢰었더니, 그 고기를 가져다가 갑사(甲士)에게 나누어 주었다.
-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1405년) 11월 20일 임자 3번째 기사 -
3.3. 근대
처음 한국 연해에서 근대적 포경을 한 것은 서양인들이었다. 서구 열강들은 동해를 제집 안방마냥 돌아나니면서 동해에서 고래를 포획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난파한 포경선 선원들이 조선 당국에게 구조되어 청나라로 송환되기도 했다. 1855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난파한 미국 포경선 선원들이 청나라로 송환된 사례가 조선과 미국과의 첫 접촉일 정도. 다만 조선은 선원들이 미국인인 줄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체적으로 처음 근대적 포경사업을 제안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1882년, 일본에 수신사 일원으로 따라갔던 김옥균은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포경 산업을 보고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겸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하게 되었다. 다만 김옥균이 이런 외직을 받게 된 이유는 포경업에 관심을 가져서뿐만이 아니라, 갑신정변 이전 근대화를 이끈 과정에서 민씨 정권의 견제를 받아 사실상 축출된 것도 있었고[3] ,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고[4] 이후 조선의 포경업은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을 벌인 끝에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된다.
1901년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인들이 운용하던 포경선은 대개 포획선이 49톤, 해체선이 60톤/87톤이었다. 가장 큰 배는 450톤의 저장선 <카메란>호. 일본인들이나 영국인들의 포경선도 100톤 대를 넘지 않았고, 그나마 육상해체장의 설치로 인해 모든 배는 포획선으로만 사용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 포경업은 일본인들의 독점이었다. "조선"의 포경선은 12척으로 제한되었으며, 당연히 전량 일본인에게만 조업이 허용되었고 선박의 크기는 80~120톤, 재질은 강철선이었다. 헌데 여기서 포경허가를 받은 포경선의 선적은 모두 일본에 있었으며, 단지 조선 해역에 근거지를 두고 출어할 뿐이었다. 즉 소유주가 한인이든 일인이든 "조선 포경선"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다만 1940년에 밍크고래 전문사냥 면허가 7건 발급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20톤 규모의 목선이 쓰였다. 일본인들이 잡은 고래 수는 막대해서, 1941년부터 44년까지 4년간 일본 동양포경주식회사가 동해에서 잡은 고래만 6천578마리에 달한다. 다만 이 모든 고래가 전부 돌고래가 포함되지 않은 대형 고래인지, 조선 연해에서 잡았는지는 확인이 필요.
3.4. 현대
해방이 되고 나자 일본인들은 물러갔고, 일본인 포경회사에 하급 직원으로 근무하던 한국인들의 손으로 포경업이 재개된다. 밑천이 된 포경선은 일제강점기 시기 받지 못한 체불임금 대신 일본까지 건너가서 받아낸 50톤급 목조 포경선 2척이었다. 이 두 척이 최초의 '''한국 선적''' 포경선이다.
해방 이후 포경사업은 대체로 영세했다. 100~120톤은 되어야 상업적으로 수지가 맞는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하나, 한국 포경선 척수가 가장 많았던 1966년에 존재하던 포경선 27척의 평균 크기가 55.3톤이고, 50톤~100톤 범주에 있는 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큰 배로 275.7톤이나 되는 강철제 배가 있었는데 이 배는 평화선을 넘었다가 나포된 '''일본제 포경선'''이었다.[5] 이 배를 빼면 가장 큰 배가 82톤.
이후 포경선 척수는 감소하고 크기는 증가하지만 포경이 끝날 때까지도 100톤을 넘는 포경선은 건조되지 않았다. 당연히 주요 포경국들이 거의 다 실시한 남빙양 포경선단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6]
다만 이 소규모 포경산업에서도 일본으로의 수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0년대에 나온 당시 포경 관계자의 인터뷰에 따르자면, 남양에서 들어오는 고래고기는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본 시장에서 주로 가공용으로 소비되고 한국산 고래고기는 신선해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한국 포경선이 가장 멀리 나간 사례는 딱 한 번, 일본에서 300톤급 트롤 어선을 구입하여 포경선으로 개조한 뒤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출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수지가 맞지 않아 한 번으로 포기했고 이후 단 한 번도 원양포경은 실시되지 않았다. 그 뒤로 포경이 국제적으로 금지될 때까지 한국 포경은 연안포경에 머문다.
1985년 11월 1일부로 포경이 완전히 금지될 때까지 한국 포경업의 근거지는 울산광역시 장생포와 방어진 지역이었다. 서해에서도 포경이 이뤄지긴 했지만 중심은 어디까지나 울산. 울산에 남아있던 마지막 포경선 20여 척은 10월 31일까지도 출어를 시도했으나, 하필 늦은 태풍이 오는 바람에 마지막 출어를 하지 못했다. 남아있던 포경선 중 3척은 북태평양 명태잡이로 업종을 전환하고 목선 5척은 어초 용도로 침몰되었다.
포경 금지 이후에도 고래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울산이다. 전국 타 지역 포구에서 고래가 우연히 혼획되면 불법포경이 아닌지 해경의 조사를 받은 뒤에 일단 울산의 고래고기 식당으로 보내질 정도. 때문에 지금도 울산광역시와 장생포는 다방면에서 고래를 컨셉으로 관광상품으로 미는 중이고 후술할 포경 재개 찬성론도 울산 지역 차원에서 특히 많이 나오는 편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은 미국에 수산물을 수출하는 나라 중 해양포유류 혼획 위험성이 ‘높음’으로 분류된 몇 안되는 나라이다. 국내에서 혼획·좌초되는 고래류의 수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 혼획 관련 자료를 제출하는 나라들 평균의 100배(IWC 평균 20마리, 한국은 약 2000마리)에 달한다. 국내에서 포경이 금지됐지만 혼획·좌초된 고래고기의 판매와 유통은 금지돼 있지 않아 아닌척 고래를 잡아들이고, 이를 유통할 수 있는 경로가 합법적이기 때문. 제도적으로 혼획인지 포경인지 확인을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제도 하에서도 우연히 혼획된 개체 2000마리는 확연한 이상 수치이다. “연간 고래 2000마리 죽음 방치하는 한국, 일본 남획에도 항의 어려워”[7]
다만 위에서 말하는 타국가의 혼획량은 걸러 듣는게 좋다. 당장 상술한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연간 30만마리의 고래(Cetaceans)들이 혼획되는 걸로 추정하고 있으며 또한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수산양식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의 한국은 전세계 해면어업을 통한 어획량이 전세계 어획량중 1.57%를 차지한다. 그걸 감안하면 평균혼획량의 100배라고는 절대로 할수 없다. 다만 밍크고래의 혼획률은 주지할만한게 밍크고래가 어획되는 국가가 5개국(그린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일본, 한국)인데 이중 한국만이 포경을 하지 않는 국가다.
4. 현재 시점에서의 고래 유통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를 지키고 있으며 우연히 혼획[8] 된 고래만을 식용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불법 포경을 방지하기위해 혼획된 고래라도 해양경찰의 확인을 받아야 유통 할 수 있으며 2011년부터 고래 유통증명제가 시행되고 있다. 이때부터 2017년까지 혼획된 고래는 총 12,818마리라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제한으로 고래고기 가격이 폭등하면서 고래가 '''바다의 로또'''라고 불리고, 불법 포경의 유혹이 더욱 강렬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죽은 혼획된 고래는 해경의 조사를 받는 등의 절차를 받으면서 고기의 신선도가 실시간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더욱 신선한 고래고기는 비싸져버리는 것.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에 따르면 고래 유통증명제 시행 직전인 2010년에는 연간 400마리의 고래가 유통됐고 혼획되는 70~80마리를 빼고 나머지는 불법 포경이나 밀수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불법 포경은 대개 손작살로 이루어지며, 바다 위에서 해체까지 마친 뒤 고기를 자루에 담아 불법으로 육지로 반입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고래를 그물 속으로 몰아넣어 혼획을 가장하는 경우도 있다.
2018년 2월 15일자 보도를 보면 고래보호운동기구인 핫핑크돌핀스는 "혼획되는 밍크고래는 연 80여 마리인데 유통되는 양은 240마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밍크고래 1마리당 나오는 고기 양을 500kg~1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혼획되는 고래들 대부분이 이 정도 크기인 듯하다.
5. 포경 재개?
한국은 상업 포경 재개에 대하여 적극적 반대도 찬성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굳이 적극적으로 포경 재개를 주장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몰매를 맞으며 맹비난 받을 필요는 없으나, 포경 재개 시 한국의 몫은 챙기겠다는 방침.'''
2010년 제62회 국제포경위원회(IWC) 연차 총회에서 포경 금지 완화에 대한 논의가 있으나 합의는 실패했다. 상기 회의에서 한국은 잠재적 포경국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국제여론의 뭇매를 각오하고 포경을 강행할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지만, 포경이 허용되면 한국도 지분을 얻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임을 확인하였다. 욕먹기는 싫으나 필요할 때는 챙길 건 챙기겠다는 매우 현실적인 입장이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선 예전부터 포경을 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나 노르웨이처럼 근대 이전부터 대대적인 수준의 포경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남종영 저 "고래의 노래" 참조.) 고래기름, 고래수염 등도 석유와 같은 대체품으로 대체된지 오래이고 고래고기의 수요도 많지 않다. 수요가 적으니 공급도 적어서 고래 관련 산업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상황. 위의 불법 포경이나 고래고기의 가격 폭등의 문제도 한국의 수산업 경제의 규모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다. 즉 현대 한국 사회는 일본처럼 포경에 목매달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고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상업 포경을 적극 추진하지는 않되 재개시 한국의 쿼터를 확보하겠다[9] 는 것뿐이고, 실제 포경을 재개할지의 여부는 국내 여론을 취합 후에 결정하겠다고 한다.
2012년 7월 4일 '''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에서 한국 정부 대표단이 26년만에 포경 재개를 선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 정확히는 재개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재개 허가를 신청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허가될 경우 다음해 6월에 최종 결정한다고 했다.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국내외적으로 비난 여론이 높자 2012년 11월 28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정부가 과학 포경을 철회하고 비살상 과학조사로 전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밝혔으며, 그린피스에서도 한국 정부가 국제포경위원회에 과학 포경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였다. #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 사실상 포경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1] 지금의 강원도 영동 지역[2] 현대 한국의 대표적 항구도시 부산조차도 전근대시대의 중심지는 내륙 분지에 위치한 동래였고, 부산포는 동래에 부속된 항구였다.[3] 비슷한 시기에 박영효는 광주 유수로 좌천되었다가 거기서 근대화된 군대를 양성하려는 게 또 들켜 그 군대는 민씨 정권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4] 덕분에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김옥균은 집 밖을 나오지 않고 입으로만 고래를 생산한다"라는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5] 이승만 정부시기에 나포된 일본선박들은 해경이나 민간에 불하되었다.[6]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일본 연안에서 사용되는 연안포경선의 경우에도 1921년에 이미 평균 크기가 108톤이었다. 1951년에 36척의 일본 포경선은 평균 307톤이었고, 470톤과 270톤의 두 가지 사이즈가 주로 많이 쓰였다. 남빙양 포경선단의 경우 최소 7,8천톤에서 1,2만톤에 달하는 포경모선과 200~500톤대의 부속포경선이 활동했으므로, 포경산업의 규모에서 한국은 일본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7] 상괭이또한 현재 멸종위기 보호동물로 지정되었으며, 멸종등급상 취약종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엄격히 포획 및 사냥 등이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8] 쉽게 말하자면 고기잡이 그물에 '''우연히''' 걸려 익사한 것. 그러나 혼획을 악용한다는 환경단체의 지적을 받고 있다.[9] 상업 포경 막바지 시기에는 국가별로 포획 가능한 고래의 마릿수를 정한 쿼터가 배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