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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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단
3. 전개
4. 절정
5. 결말
6. 의의
7. 관련 문서


1. 개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하여 설정된 대한민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오늘날 배타적 경제수역과도 비슷한 개념인데, 실상은 영해로서 선포된 것이다. 이승만은 이 경계선이 평화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그에 따라 '평화선'으로 명명하였다. 해외에선 평화선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승만 라인으로 불린다.

2. 발단


1945년 8월,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고 도쿄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남한이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인것처럼 일본 역시 이를 기점으로 미군정의 통치 아래 놓였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운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미군이 주력이 되어 항복을 받아냈으니 승전국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정부는 어디까지나 연합군사령부의 보조기관일 뿐이었다.[1] 사실 일본군은 만주 전쟁을 통해 내려온 소련에게도 투항을 했었으나, 사전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소련 서기장 스탈린의 합의 때문에 '일본은 미국에게 넘겨주겠다' 라는 결정에 따라 일본 본토는 조선이나 독일과 달리 몽땅 미국 지배하에 놓였다.
연합군사령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를 발령하며, 전후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독도를 분리시켰다. 여기다 더해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에 따라 아예 일본 선박의 독도 인근 해역의 출입을 금지했다. 더군다나 1948년 8월 15일,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될 때까지, 일본은 그때까지도 미군정의 통치 하에 있었다.
러일전쟁 개전 때부터 독도를 자국령으로 인식하던 일본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으나, 주권 없는 행정부만으로 백인 쇼군의 통치 아래에서 행정처리를 집행하는 상황에 놓인 일본으로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독도 우표를 붙여 들어오는 대한민국의 우편물에 독도 부분을 먹칠하여 반송(...)시키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한국 어민들은 일본 선박의 통행이 금지된 해역에서 마음껏 어로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일본 어민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진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여전히 독도 인근 해역에 출입했고, 한국 어민들도 출입하면서, 이 시기에 양국 어민들 간의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그렇게 일본은 독도와 동해 수역을 멀거니 바라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됐지만...

3. 전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정부의 권능을 되살려냈다. 1951년 9월 강화조약이 서명되고 1952년 4월 28일부로 발효, 일본의 주권이 회복된다. 그전까지 미국의 명령 앞에 숨죽이고 살던 일본이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 역시 강화조약의 발효에 의거 무효화될 예정이었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무단 침공에 정부가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다시 한만국경 언저리까지 수복했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서울 뺏기고 평택 언저리까지 밀렸다가 겨우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외교 전문가이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강경한 반일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미국 체류 시절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특성과 진주만 공습을 예견한 바 있고, 그래서 누구보다 일본의 팽창을 경계하고 바짝 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당시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쳐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아시아 지역에서 대한민국은 일본과 맞붙게 되었는데, 한국대표팀이 일본 땅을 밟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대표팀의 출전 포기를 감독에게 권유할 지경이었다. 당시 감독은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을 헤엄쳐서 건너오겠다고 약속하자 출국을 허락, 2경기를 모두 원정에서 치루는 악조건에도 일본을 1승 1무로 제치고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 쾌거를 이룬다. [2] 참고로 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도 원래는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예선전을 할 예정이었는데, 이승만 본인이 일본 대표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의 예선전을 모두 치러야 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외교에 임할 때 약해빠진 한국이 숙여봤자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즈려밟힐 뿐이라는 생각으로 없는 살림에도 대단히 공세적인 방식을 선호했다.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빼앗겼을 때조차, "대한민국 정부를 돕기 위해 일본군이 지원된다면 어떤가?"라는 질문에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일본군부터 물리치고 볼 것"(왜관 발언)이라고 일말의 타협도 내비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절박한 상황에서도, 1033호 각서의 철폐는 이승만에게 심각하게 인식되었다.
1033호 각서 철폐를 부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은 1951년 9월이었고 이듬해 4월 발효될 예정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발효를 석 달 앞 둔 1952년 1월, 평화선의 설정을 선포한다. 명분은 "한일간 평화유지를 위해".
그런데 평화선의 선포는 국제법상 폭거에 가까운 조치였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이었으나, 20배인 60해리를 영해로 선포했다. 전쟁 중이지만 미국으로서도 도저히 용인하기 힘든 조치였기에, 선포 한달 뒤인 2월 12일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씹었다.
일본으로서도 당연히 피꺼솟할 일이었으나, 주권이 회복되려면 석 달이나 남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1월 24일 "영해는 공동으로 논의해야 하는 것", 1월 28일 "독도를 평화선 내에 포함한 것은 영토 침략"이라는 먼 산 메아리스런 성명만을 내놨을 뿐(...).
그해 4월, 드디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일본 역시 대응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의 대응은 상당히 소극적인 것이었는데, 어업 지도선이 독도에 들어와 독도의 일본 주소를 적은 나무 팻말을 꽂아두고 왔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여, 팻말을 뽑고 10월에 해군을 동원해 일본에 대해 실력 행사를 감행한다. 해군 등 가용한 모든 해상 전력을 동원,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때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3백 척이 넘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고, 4천명에 육박하는 일본인이 평화선 침범 혐의로 대한민국 형무소에 구금 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44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3] 여기에 보태 전쟁이 끝난 1955년에는 해양 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선박 나포에 더더욱 힘을 쏟는다.

4. 절정


도쿄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있었으므로, 전쟁중인 한국에게 압력을 행사할 로비는 일본에게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산군 막느라 정신없던 연합군사령부는 일본의 계속된 항의에도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내놓는다. 그리고 유엔군사령부[4]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는데, 바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이른바 '클라크 라인'을 선포한 것이다. 해상을 통한 북한군의 침투 및 밀수활동을 막기 위해 조치된 경계선인데 이는 사실상 평화선과 경계가 일치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강 평화선과 비슷한 구조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미국한테 제대로 물을 먹은 것이었다.[5]
8월 15일 항복한 이래로, 미국에게 대들 생각을 할 수 없던 일본은 일단 한발짝 물러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협상에 돌입한다. 형무소에 갇힌 4천 명 가까운 일본인의 석방을 두고 교섭에 나섰다. 이승만은 평화선 침범 혐의로 한국 형무소에 구금된 일본인들을 석방했고, 일본 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한국인 약 5백 여명이 일본 영주권을 부여받으며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은 석방되는 일본인들에게 "평화선을 침범하여 체포되었음"이란 문구가 적힌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간접적으로나마 일본도 평화선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만 석방되었지 일본선박은 석방되지 않았다. 나포된 일본선박은 새롭게 창설된 해경과 민간에 불하되어 국가 자산으로 쓰였다. 참고로 나포된 일본 선박은 약 300척 이상에 달했다. [6] 그리고 이 기간 내내 한국 어민들은 일본 선박의 출입이 통제되는 60해리 수역에서 단독으로 어로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 정부는 평화선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1956년 4월 13일,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외무대신이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해도 되느냐”는 질의에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7]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한국은 독립국가로서 주권행위를 한 것이고…일본이 그 주권행위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대놓고 인정할 수는 없으나, 잠자코 침묵할 수 밖에 없던 당시 일본의 처지를 보여준다.#[8][10]

5. 결말


대한민국 부근 60해리 해역이 모두 대한민국 영해라는 주장은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국제법상 3~12해리가 영해인데 20배가 넘는 해역이 공해도, EEZ도 아닌 영해라니(...) 끝까지 국제적으로 관철시키기에는 무리가 컸다. 결국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고, 한일간 외교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국제법에 의거한 영해 및 어업에 관련된 수역이 일본과의 협상에 따라 새로 지정된다.1965년 타결된 한일어업협정에 의거, 12해리를 자국의 EEZ로 선포하기로 한일 양국이 합의한다. 이렇게 근 10년 가까이 일본 선박의 출입을 막으며, 한국 어민들 단독으로 동해 60해리 수역에서 어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평화선이 철폐되었다. 평화선의 철폐와 한일어업협정의 조인과 함께, 일본은 대한민국에 9천만 달러를 어업협력자금으로 공여했다.
그러나 한국과 국교를 맺기 직전인 1965년 4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독도)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 한다."라는 문서를 보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도 결코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11]

6. 의의


영해로서의 평화선은 독도를 확실하게 지켜냈다는 결과를 안겼다. 일본이 계속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고는 있지만 당장 어느 나라가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 제6조에 '이 지령 가운데 어떠한 것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 언급된 여러 작은 섬들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 합의문에는 아예 독도(Takeshima)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함으로써(초안에는 한국 측, 일본 측 오락가락 옮기다가 결국 삭제한 것이다.) 한국의 독도 주권은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또한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몰래 한국에 보여주며(연합국은커녕 일본에게도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에게 독도를 포기할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다.[12] 이렇듯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이 위태로울 때 직접, 실력 행사를 통해 수호하며 일본에게 충격을 안김으로써 더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식시킨 것이다.
영해로 선포함에 따라, 한국 어민들도 폐지되기까지 근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어로 활동에 있어 굉장한 혜택을 봤다. 원칙적으로 일본 어선의 접근이 금지됐으니까... 비록 나중에 어로 활동과 관계된 한일 어업 협정을 체결했고, 1998년 일본이 한일 어업 협정을 파기했고, 김대중 정권은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때도 어업 협정을 통해 한일간 독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또한 독도의 영유권과 연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13] 이 공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이것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당연히 일본 극우에서는 독도 떡밥 관련해서 매우 치를 떨고 있는 사안이기도 해서, 독도 문제들로 싸울 때 이때 당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평화선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이승만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이라 인식하고 있다. 정작 한국에서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결국은 무력화시키기까지 한 일로 친일에 가까운 쪽으로 여겨지는 것과는 정반대.
여담으로 60해리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를 조금 넘는다. 독도처럼 자연섬이긴 해도 무인도의 경우 영해의 기점이 되는지 여부가 분쟁이 있을수 있으나[14], 60해리를 영해로 설정해버리면 명백한 영해의 기점인 울릉도 때문에 그런 논란과 아무런 관련없이 독도 주변까지 영해가 된다. 애초에 60해리로 결정한 기준이 독도때문임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7. 관련 문서



[1] 한때 대한민국의 신군부 시절을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이 일본에서 노년층을 상대로 컬트적 인기를 끈 적 있다. 그들이 젊은 시절 경험한 도조 히데키의 군국주의 정부와, 뒤이은 미군정을 연상하며 군사정권의 암울한 분위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나(...).[2] 그리고 일본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까지 예선에서 대한민국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거나 지지리도 복도없어서 월드컵 본선을 밟아보지 못한다.[3] 이 부분은 현재까지 일본 네티즌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고 있다. 한국이 침략해서 일본 어부들을 죽이고 독도(다케시마)를 점령했다고 인식하는듯. 한술 더 떠서 일본 방송에서는 독도 거주민으로 날조까지 해놨다. [4] UN의 전신이 바로 2차대전 당시 연합국이다. 한국전쟁 개전과 함께 UN사무총장에게 UN기를 인수받으며 연합군사령부는 유엔군사령부로 승계되었다.[5] 물론 당시 일본은 지금의 일본과는 차이가 컸다, 당장 미국에게 선빵을 날린지 얼마 안된 전범국이자 미국의 대공습으로 나라 자체가 절단이 나 석기시대로 돌아가버린 때였기에 지금처럼 발언권이 크지가 않았다. 물론 그건 북한과 전쟁하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지만.[6] 이승만이 일본을 적성국으로 인지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냉전시기 적성국이었던 중공 군용기가 한국측으로 날아와 귀순했을 때, 조종사는 대만으로 인도하고 기체는 한국이 먹었다. 돌려달라는 중공의 요구는 가볍게 씹혔으며,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 때까지 적성국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7] USS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인물이자 윤봉길 의사에 의해 다리짝이 날아간(...) 바로 그 인물이다.[8] 이영훈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로 비로소 독도대한민국의 영토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9] 이영훈은 석도가 일본 학자들 주장대로 '관음도'라고 보고있다.[10] 그런데 정작 이영훈 본인은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 "한국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에 제시할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주장한바 있다.#. 게다가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석도'가 독도라는 한국 정부 및 연구자들의 주장도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이영훈의 자가당착이 드러나는데, 이영훈의 논리대로라면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도 아니고 '석도'도 독도[9]가 아니므로 한국의 '고유영토론'도 '무주지 선점론'도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영훈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운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미 군정에 의해 일본이 주권을 상실한 틈을 타 일본 영토를 침략으로 강제로 빼앗은 것이 된다. 이 행위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비난한 ‘반일 종족주의’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질 나쁜 사례 아닌가? 그러나 이승만 비판에 대해선 가장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그가 여기에 대해선 말이 없다. 오히려 그걸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추켜세우는 등(물론 이것은 좌우 막론하고 이승만의 중요한 업적이 맞다. 그러나 좌우 어느 쪽이든 이것이 남의 영토를 침략으로 빼앗은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모순된 발언을 하고 있다.[11]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29쪽[12] 미국이 이런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한국전쟁의 전개양상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대한민국이 전세에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해석이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공산군에 의해 수세에 몰리며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할 때에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곤 했다.[13] 독도가 EEZ 안에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의견도 있고 외환위기 시절이다 보니 일본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정권이 몸이 달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14] 현재에도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독도의 경우 EEZ의 기점은 될 수 없어도 영해의 기점은 된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2019년 러시아 비행기에 경고사격을 가한 사건에서도 독도를 기점으로 한 영해와 영공을 침범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