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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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영환(高英煥)
'''출생'''
1953년 7월 14일
북한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
'''본관'''
제주 고씨
'''국적'''
대한민국
'''학력'''
평양외국어대학 불어
'''직업'''
연구원, 전 외교관
'''소속'''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 연구위원)
'''가족'''
아내 김재숙, 딸 1명[1], 아들 1명
1. 소개
2. 생애
3. 여담
4. 경력


1. 소개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2]으로, 북한에 있었을 때 정무원 외교부에서 과장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외교관을 지내다가, 1991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TV조선이나 YTN의 시사 프로그램의 북한 전문 패널로 자주 출연한다. 과거 추적 60분에도 북한군 문서 관련으로 출연한 바 있다.
공개 활동을 하는 북한 출신 외교관으로는 고영환이 최초이다. 프랑스어에 매우 능통하여 김일성, 김정일의 통역도 맡았다.

2. 생애


자강도 강계시[3] 서산리에서 당의 간부급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휴전 직후 아버지의 인사 이동으로 개성시로 이사하여 주로 자란 곳은 개성이다.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로, 그리고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교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 후 당의 간부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평양외국어혁명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놓은 외고와 비슷하다) 불어과에 전국에서 모인 4,000명 중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80명에 들어 합격했다. 졸업 후에 1972년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4]에 진학하여 괜찮은 성적으로 5년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졸업하였다.
1979년부터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으로 첫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근무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의 열렬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남북통일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점차 외교관 생활을 하다 보니 북한 정권의 실상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고 그토록 미워했던 한국 외교관도 같은 동포로서 생각하며 적대감이 많이 누그러지고 남한의 경제 발전을 느끼게 되면서 고영환은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혼란을 느끼면서도 일은 제법 잘하였는지 주 자이르[5] 대사관 3등 서기관과 북한 정무원 외무성 아프리카 담당국 지도원 과장, 주 자이르 대사관 1등 서기관을 거쳐 주 콩고 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하는 등 승진은 다른 동기들보다 빨리 한 편. 그 과정에서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하지만 계속 해서 북한 체제의 모순성을 계속해서 자각하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자본주의 경제의 급성장을 보며 체제에 대한 극심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6] 그런 상황에서 차우셰스쿠의 처형 장면을 보며 "우리 조선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라고 말을 하다가 동료 외교관이 "김일성도 저리 될 수 있다."라는 말로 왜곡하여 평양에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북한 당국이 고영환에게 소환 명령을 내리자[7] 신변 위협을 느껴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8] 탈출 과정에서 강가에 옷가지를 벗어두면서 자살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 후에 국경을 넘어 콩고 인접 국가[9]로 가서 아프리카의 유력한 정치인 친구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여 2달 동안 은신하며 지내게 된다. 그 후 아프리카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생각치 않았으나 친한 성향의 아프리카 친구가 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였다. 그 후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날은 1991년 5월이지만 망명 기자 회견은 그 해 9월에 하였다. 처음에는 가족의 신변때문에 언론에 발표하지 않고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안기부 요원이 언론에 발표하자고 설득해서 결국은 4개월 후에 망명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망명 초기에는 심적 고생이 대단히 많았다. 북한 특성상 망명한 외교관의 친족들은 당연히 수용소로 보내버렸으며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우 괴로운 나날을 보냈었다.[10]
세월이 약이라고, 그리고 주위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박태준 회장 등의 응원을 받으면서 힘을 내고 1993년 2월 15일 7살 연하의 의상 디자이너 김재숙 씨와 결혼하면서 점차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국정원 산하의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 임명되어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상임 연구원으로 승진되었고, 2016년 1월 1일자로 부원장직에 재직하다가 현재는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북한에서 겪었던, 들었던 이야기와 외교관으로써의 술회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탈북하기 까지의 과정을 담은 저서인 '평양25시'라는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3. 여담


  • 북한에 있던 시절 김일성에게 상당히 호감을 받고 있었는데 국내에서 공부하였음에도 외국어를 참 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홍삼 열뿌리를 선물해주기도 하였으며, 김영남 외교부장에게도 "국내에서 공부했는데도 이리 외국어를 잘하는데 뭣 때문에 자꾸 외교관들 유학 보내달라면서 달러를 달라고 하느냐?"면서 핀잔도 주었다고 한다.[11]
  • 망명의 이유는 1등 서기관 근무 중 소련의 개혁과 개방,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총살, 독일의 통일을 보며 많은 충격을 느끼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 혼란 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말들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에 들었고, 곧이어 보위부의 체포조가 자이르로 도착하기 1시간 전, 제3국으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 탈북 과정에서 고영환은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배우기로는 해외에 나와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다 중앙정보부 특무인 줄로만 알았기에 눈만 마주쳐도 몸을 벌벌 떨면서 달아났고, 입국 직후에도 정보기관에서는 자신의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부터 시작하리라 여겼다.

  • 이북에 있을 가족들의 신변 때문에 처음에는 언론공개를 꺼렸으나 안기부 요원의 설득으로 공개 활동에 나서게 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큰 충격으로 와닿았는데, 김정일이 가장 총애했던 사람이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분노하여 고 씨의 가족과 친척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수용소에 붙잡혀 가던 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밤새워 오열했다고 한다.
  • 북한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태영호 공사와 자주 통화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태영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청원과 태영호의 경호를 보호해달라는 청원이 같이 올라오는 것에 대해 태영호가 어리둥절해하자 여러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며 돌려보내기를 바라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도 그 이상으로 있으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김일성의 프랑스어 통역관을 지냈는데, "비동맹국 흡수와 관련한 정책 제의서"를 적었고 이를 대견하게 본 김정일에게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 프랑스어 통역을 맡으면서 같이 김일성의 지하 벙커에도 들어가보고 김일성의 비행기, 특급 열차, 요트 같은 것을 모두 타 보았다고 한다.
  • 외교관으로서 80여개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본인이 평하기로 북한만큼 폐쇄적인 나라는 없다고 평하였다.
  • 여러모로 북한 세뇌교육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본인은 김일성이 진짜 하느님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자기가 처음에 김일성 곁에서 통역을 수행하러 주석궁에 갔을 때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통역을 못해서 죽을까 엄청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김일성을 가까이서 보자 배도 나오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목 뒤에 있는 혹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걸 봤는데 그게 좀 깼는지 그때부터 김일성도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 처음에 한국에 올 때 한강의 기적을 보고 대단히 감동하면서도 자신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하면 아직도 냉전시대 사고에 젖어 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서 이 부분은 실망했다고 한다.
  • 인생에서 죽을 뻔한 적이 총 3번 있었다. 첫번째는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든 액자의 먼지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액자를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유리만 깨지고 사진 자체는 멀쩡해서 다행히 살아남았다. 두번째는 조선로동당 주관 정신교육시간때 있었다. 이 당시 "남조선에는 600만의 매춘부와 60만의 에이즈 환자가 존재한다."는 간부의 말에 한 동료가 "아니, 1,800만 여성 중에 600만이 매춘부이고 60만이 에이즈에 걸렸는데 어떻게 그런 곳이 아직까지 존속을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고영환은 이 말을 듣고도 당에 보고하지 않아 수용소로 갈 뻔하다 15일 동안 온갖 반성문을 쓰면서 자아비판을 한 끝에 용서를 받았다.[12] 3번째는 망명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해서 죽을 뻔 했다.

4. 경력


'''1979년 6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
'''1980년 2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
'''1985년 2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지도원
'''1987년 1월'''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 담당 과장
'''1988년 11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참사관
'''1989년 11월'''
콩고 주재 대사관 참사관
[1] 딸은 서울 모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며, 아버지를 이어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2] 원래 없던 직책이었는데, 2016년 직제 개편을 시행하면서 부원장직이 만들어져서 초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3] 이북5도위원회의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4]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는 강명도 씨가 같은 과 6년 후배이며,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가 같은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다.[5]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이다[6] 본인이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북한과 친한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이고 남한과 친한 나라들은 부유한 나라였다는 점이라고.[7] 명목상으로는 국제회의에 프랑스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 공항에서는 보위부를 체포조로 보냈었다.[8] 훗날 강적들에 나와서 언급하기로는 자신이 탈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사의 안색을 본 후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사가 고영환에게 북한에 들어가라는 말을 잔할 때 대사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9] 본인이 외교분쟁의 소지가 있어서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 않음[10] 외교관이 됐을 때 가장 옆에서 기뻐해주었던 어머니는 수용소에 끌려간 후 사망했는데 이를 듣고 한참을 오열했다고 하며 지금도 어머니 생각이 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11] 본인은 이 때 김영남한테 내리갈굼을 당할 줄 알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고 하였다.[12] 사실 이 때 동료가 말한 것 중 김씨 부자에 관한 얘기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김씨 부자 얘기가 나왔었다면 그 자리에서 끝났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