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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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賢姬
1962~
1. 개요
2. 생애
2.1. 요약
2.2. 어린 시절
2.3. 공작원 시절
2.4. KAL기 폭파 이전
2.6. 사건 이후, 도주와 체포
2.7. 한국에서
2.8. 이후
3. 비판
3.1. 반론
4. 여담
5. 저서


1. 개요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인물이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이후 대한민국에 귀순하였다.

2. 생애



2.1. 요약


1962년 1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본관은 경주 김씨.[1] 아버지가 외교관이라서 상류층 생활을 했다고 하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임지인 쿠바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외교관이 되길 원했으나 남파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7년 8개월간 공작원 훈련을 받았고, 하치야 마유미(蜂谷真由美)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 투입되어 임무를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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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직후 탈출에 실패하자 입 안에 숨겨 두었던 청산가리 앰풀자살을 시도했으나 바레인 경찰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하였는데, 공범 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은 자살에 성공했다. 체포될 때 자살하는 걸 막기 위해 입에 재갈을 물렸다. 테러 후에도 8일간 위조여권을 이용해 일본인으로 위장했지만, 결국 북한 공작원임을 시인하였다.
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안보 강화 등의 이유가 있어서인지 기왕이면 본인을 통해 좀 더 북한 관련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차원에서 '''대북 선전 및 첩보 등을 위해 사면되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죽인 테러리스트인데 처벌이 약한 것에 아쉬워 하는 등 못마땅해 하는 의견도 많다. 사실 858편 피해자들이 김현희와 안기부한테 불편한 감정을 보이면서 진상규명을 요청하거나 858편 사건 관련해서 음모론이 나돌았던것도 사면으로 김현희가 떳떳하게 활동하고 있기에 그런것이다.
1991년에 회고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1992년에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를 출간했다. 글 자체는 본인이 썼으나 실질적으로 두 책 모두 김현희가 직접 쓴 책은 아니고, 소설가 노수민이 대필한 책이다. 책에 나온 모든 내용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그래도 북한의 현실과 김현희의 행적에 관해 확실히 도움은 되는 책들이다. 1997년엔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현재는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회 활동을 하며 방송에 간간이 출연하고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주체사상을 교육받았던지라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고, 통일을 위해서는 뭐든 하는 것이 맞다고 믿었다.[2] 그러나 임무 수행 직후 체포됐을 때 북한 정권은 자신을 버렸고, 테러가 통일에 기여하기는 커녕 남북을 더 이간질하는 행위임을 깨달았으며, 북한 정권이 테러를 통해서라도 남조선 인민을 구제해야 한다는 말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살기 좋은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를 보며 자백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아래에 나오는 그의 모든 생애는 # 그가 지은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고려원)를 참고하여 추가하였다. 제법 볼 만한 책이다. 1급 간첩의 확보가 얼마나 방대한 대북 정보를 알려주는지 여실히 알려주는 책으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북한 사회에 대해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1권 '내 영혼의 눈물'은 동유럽 지역을 돌고 돌아 잠행하다가 858편을 폭파시킨 이야기이다. 일부에서는 이 책에서 나오는 동유럽 지역명이나 호텔명 등 대부분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짜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주로 딴지일보에서 나오는 주장이지만 실제 유튜브에 나오는 다큐맨터리에 보면 비엔나와 바레인에 나오는 호텔은 모두 실존하는 장소이다. 2권 '꿈꾸는 허수아비'에서는 김현희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데, 꽤 부유한 집에서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중요한 관건은 잘 사는 집이니 어렸을 때 뽑혀서 위에서도 나오는 화동으로 남한측 대표에 꽃을 전달했다는 것인데 이것도 진실 공방은 있지만, 북한에서 그녀에 관해 기록말살형에 처해서 김현희가 꽃을 준 것을 부정하려 하기도 하고, 당연하겠지만 김현희의 말은 안 믿으면서 북한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모순이니(...)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아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물론 유족 입장에서는 좀 씁쓸하겠지만... 특히 기존의 어렵게 살던 탈북자가 북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탈북했다는 일반적인 내용 대신, 부유층이며 부러움 하나도 없이 행복했던 이가 간첩이 되어 가고 한국에 귀순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물론 전술했듯이 자서전의 내용이 실제와 다를 수도 있는 만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지만, 대충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KAL기 사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참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2.2. 어린 시절


1962년 1월 27일 평양시 문수구 문수동[3]에서 외교관인 아버지와 개성 출신[4]인 어머니의 딸로 출생하였다.
평양 거주에 아버지가 외교관인지라 말 그대로 금수저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근무하던 쿠바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이고 아버지는 철저하게 미국을 증오했던지라 딸과 함께 바닷가로 놀러가는 날이면 저 멀리 보이는 미국 땅을 가리키며 저기가 미국놈들 땅이라고 알려주면서 반미 사상을 교육시켰다. 어릴 적 그녀는 괴물같이 여겨진 미국 땅을 보고 미국이 무서워 울기도 했다고 한다.
쿠바 거주 시절 한번은 어느 날 역시 북한 간부의 자제로서 쿠바에 살던 짖궃은 남자아이가 그녀를 괴롭히는데, 선인장을 어깨에 때려박아 가시가 박히기도 할 정도였다. 김현희는 안 만나려고 했지만 항상 그녀의 집에 찾아와 놀자면서 괴롭혀대기에 결국 못 이기고 나가 시달림을 받았다고... 중학교 때 북한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때는 김현희에 대한 미안함인지 슬슬 피해 버렸다고 한다.
어렸을 적 쿠바 생활을 꿈같이 행복했던 생활로 회상했는데, 이때 북한이 한창 경제성장을 하던 시절이었다고는 하지만 쿠바의 기본경제 수준이 북한을 크게 앞서던 상황속에서 토지개혁, 국유화, 문맹퇴치, 복지확충 작업을 거치며 쿠바인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북한에 비해 훨씬 높아졌고,[5] 쿠바가 문화적으로 통제일변도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이기는 하지만 해외관광객들이 많이 오고 쿠바인들도 해외로 많이 일하러가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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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자제의 딸이어서 그런지 어린 시절 자국과 타국의 높으신 분들에 꽃을 주는 어린아이인 화동(花童)으로 선발되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일행 중 한명에게 꽃을 주기도 했다. 이후락 일행은 1972년 5월 평양에 밀사로 가서 김일성을 만났고, 김현희는 이때 이들 중 한명에게 꽃을 주었다고 했으니 그의 나이 11살 쯤에 주었을 것이다. 이후 알다시피 이후락은 두달 뒤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김현희가 꽃을(화동 중 1명) 전달한 사실이 추가 발굴사진을 통해 확인되었다.
북한에서는 학생 시절부터 친구들 간에 잘못한 것에 대해 상호비판을 하도록 했다. 때문에 김현희도 누군가 잘못한 아이에 대해 공부할 시간은 없는데 놀 시간은 있냐면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김현희보다도 더 신랄하게 퇴학을 시켜야 한다면서 비판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성인 군인처럼 심하게는 아니지만 외적과 싸워야 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잡다한 훈련을 받았었다. 북한은 남녀 모두 군인으로서 복무해야 하는 만큼 여학생들도 훈련에 참가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들어갔다. 이때 김현희가 보여준 일본어 실력이 인상깊었던 모양인지, 중앙당은 그를 공작원으로 선발하게 된다. 졸업 이후 다른 데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갑작스럽게 중앙당의 소환 명령을 받고, 동료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자리를 떠야만 했다.

2.3. 공작원 시절


이 시점에서 보면 중앙당 소환은 그녀에게 영광이 아닌 인생 최대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초대소라는 곳에서 살면서 공작원 교육을 받게 된 그녀는 집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특별한 휴가 없이는 갇혀 살아야만 했다. 초대소에는 식모라는 아주머니가 있어 김현희의 생활을 도와주고 때로는 그가 자유주의(상부의 관리를 피해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는 행위)를 해서 집에 다녀오도록 눈감아 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훈련을 받은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공작원 훈련을 해 나갔다.
김현희의 부모에게 있어서도 김현희를 잘 볼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매우 고통받아야 했다. 중앙당이 알아서 김현희를 먹여살리고 결혼까지도 시켜준다고 했지만 항상 김현희가 그리웠던 어머니는 중앙당 지도원에게 "우리 현희는 언제 (집에) 보내주나요?"라고 애원하기도 했고, 아버지도 술에 취해 "우리 현희는 언제 시집보낼거요?"라고 따지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앙골라에서 근무하다가 4.15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온 날 그녀도 집에 휴가를 얻어와서 아버지를 만났지만, 아버지는 김현희를 애써 외면하고 손도 잘 잡아주지 않았었다. 결국 그날 밤 김현희가 자유주의로 집에 찾아가 아버지에게 따졌더니, 아버지는 "'''이제 너와 정을 떼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서 그랬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즉 김현희의 부모는 김현희가 중앙당에 소환되었다는 것이 어떤 슬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초대소에는 김숙희라는 동료가 있어서 그와 함께 말동무를 하며 지냈고, 또 리은혜(타구치 야에코)라는 납북 일본인인 일본어 교사도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김현희가 리은혜에게 배운 것은 일본인으로서 완벽하게 행동하는 일본인화를 시키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서의 생활 방식, 사용하는 제품 등에 대해 일일히 다 배우게 되었다. [6]
리은혜는 자식을 남긴 이후 남편과 이혼한 뒤 어느 날 북한 배에 의해 납치되어 북한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고국과 가족을 못잊던 그녀는 항상 눈물로 나날을 지내어야 했다. 리은혜는 남의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실제로 북한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 좋으니 일본인에 대해 나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현희는 한국에 온 이후 리은혜가 석방되기를 기원했지만, 북한은 이미 리은혜가 교통사고로 죽고 홍수로 묘실도 없어졌다고 둘러댔다.
김현희는 자신이 집에 찾아왔을 때 외면을 한 아버지에 대한 야속함과 막내동생 범수가 피부암으로 죽고 동생인 현옥의 남편이 과로로 죽은 것에 대한 슬픔, 어깨에 난 예방접종으로 인한 흉터를 성형수술 하려다가 오히려 더 크게 흉터자국이 남은 부작용[7]으로 인한 여러 일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일본어로만 대화하는 것에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김현희는 중국어도 공부하면서, 김숙희와 함께 중국 광저우, 마카오에 현지 실습을 가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경험도 해 보았다. 현지인들은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인처럼 살아가는 김현희를 보고 완벽한 중국인이 되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몇몇 남자들은 김현희를 보고 결혼하고 싶어할 정도였지만, 공작원이었던 김현희는 그들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국에서 김현희 혼자만 급하게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대외정보조사부장이라는 자가 초대소에 와서 임무를 부여하려고 했다.
김현희는 자신이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침투해서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활동하는 임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2.4. KAL기 폭파 이전


1987년. 김현희는 KAL기 폭파 정식 공작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인 대한항공 858편 KAL기를 제끼는 것이었다. 당시 KAL기를 폭파하기 위해 구성된 일행은 안내조인 최 과장과 최 지도원, 공작조인 김승일과 김옥화(김현희의 가명)로 구성되었다.
10월 7일 혼자만 즉각 복귀하라는 지령을 받고 북한에 귀국한 김현희는 그날 원래 묵고 있던 초대소를 옮겨서 그날 밤 9시 동북리 2층 2호 초대소 응접실에서 김승일, 안내조원들과 대외정보조사부장을 만나 부장에게서 어떤 임무를 받을지를 지시받았다. 워낙 극비에 부쳐질 정도로 일급 비밀 임무라 초대소 아주머니조차 응접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부장은 KAL기를 제끼는 임무를 부여했다. 남조선이 88 올림픽을 통해 남북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책동을 꾸미고 있어 이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 직후 공작대원들은 최 지도원으로부터 독약 앰풀을 지급받았는데 이 앰풀은 최악의 경우에 비밀 보장을 위해 사용, 즉 자결하는 데 쓰이는 것이었다. 담배로 위장한 것이었고 자결의 이유는 KAL기 폭파 사건의 주범이 북한으로 탄로나는 것임을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침투해 스파이로 활동하던 공작원이자 할아버지인 김승일은 언젠가 위장병을 크게 앓아 병원에서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치료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여전히 많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시시때때로 약을 챙겨서 먹었어야 했다. 김현희는 허약해진 김승일을 보고 늙은 환자 돌보는 게 내 임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나약했던 그가 공작원으로 발탁된 이유는 서울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는 등 각종 여러 공작원 활동을 바탕으로 한 노련한 경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현희를 비롯한 공작원들은 1987년 11월 12일 평양을 떠나 소련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일본인 부녀 관계로 위장, 김승일은 하치야 신이치로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로 위장하였다. 김승일은 좌석에 앉은 승객이 김현희에게 물어보자 "구라파에서 열리는 과학자 대회에 가는데 이젠 늙어서 마지막 여행이 될 거 같아 막내딸을 데리고 갑니다"라고 둘러대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들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이동하여 헝가리 주재의 다른 북한요원의 집에서 6일간 머문 이후, 11월 18일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비엔나의 호텔에서 6박 7일간 머무르면서 그동안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위장용 티켓과,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또 다른 티켓 한 장을 구매하였다. 이후 24일에 베오그라도에 도착하여 4박 5일간 묵은 공작조는 11월 27일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찾아와 그들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장치 등을 건네받았다.
김현희 일행이 받은 폭탄은 라디오로 위장한 폭탄과, 그로 인한 폭파 위력을 극대화하는 액체 폭약이었다. 폭파용 라디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로서 작동 9시간 뒤에 폭발하도록 되어있는 고정 위치에 스위츠를 놓아 타이머를 설정하는 방식이고, 액체 폭약은 술병으로 위장한 것인데 라디오 폭탄 옆에 두어 폭발 위력을 시너지로 높이는 역할을 하는 폭약이었다.
다음 날 공작조는 바그다드 공항으로 떠났다. 김승일이 지적한 대로 바그다드 지역은 전쟁 지역이라 적합한 노정이 아니라고 부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장은 자기 역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무시할 뿐이었다. 결국 걱정한대로 바그다드 항공 일대마다 검문소에서 아주 철저하게 검문을 하는데, 라디오 밧데리는 비행기에서 소지할 수 없다면서 압수해서 그들이 내리자 돌려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예 밧데리 자체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내버리기까지 했다. 이때 김승일이 밧데리를 다시 꺼내어 라디오에 넣고 소리가 나는 것을 들려주며 순수한 라디오라고 항의하면서 결국 밧데리를 돌려받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때 승무원이 자기 책임에 끝까지 엄격하게 충실하지 않은 점은 무고한 115명의 사상자를 낳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2.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8일 밤 11시 30분경 김현희, 김승일 공작조원들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KAL 비행기에 탑승한다. 김현희의 회고에 따르면 비행기 안에는 서양 여성 승객 한 명을 제외하고 승무원, 고객들을 포함해 전부 한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승일은 라디오를 꺼내 방송을 틀어본 뒤 9시간 후 폭발하도록 하는 알람 스위치를 설정하고 비닐백 속에 넣었다. 원래 폭탄 조작은 김승일이 하되, 김승일이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김현희가 대신 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강심제까지 먹으면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물론, 당시 그들에게 죄책감이 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발각되지 않고 임무를 끝내려는 두려움과 초조함만 일었을 뿐이다.
그 직후 비행기에 탑승한 그들은 자신들이 앉은 7B, 7C 좌석 위의 선반에 9시간 후 터지도록 타이머가 설정된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요원들은 아부다비에서 내려 도피계획을 세웠다.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편 비행기는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해 김포로 향하는 비행기였다. 문제는 그 비행기 안에는 미국, 소련인지 유럽인지는 모르지만 서양 여성도 타고 있었다. 만약 소련인이었으면 당장에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파탄날 것은 너무나 안 봐도 뻔했다.
이후 비행기가 아부다비에 도착하자 그들은 폭탄이 들어있는 짐을 놔둔 채 비행기에서 허겁지겁 내리다시피 했다.

2.6. 사건 이후, 도주와 체포


원래대로라면 공작조는 아부다비에서 내려 자신들이 구매했던 암만-로마행 비행기를 바로 갈아타고 로마로 탈출한 뒤, 비엔나에서 재접선하기로 약정된 최 과장 일행과 만나서 안내조의 지시에 따라 평양으로 복귀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되었다면 김현희는 지금까지 평양에 계속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공항 안내원의 항공권 제시 요구였다.''' 공항에서 항공권을 걷어들이는 예는 김현희의 노정에서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으며, 평양에서의 노정 연구 때조차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에 김현희 일행은 당연히 크게 당황했는데, 만약 타고 온 바그다드발 비행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암만-로마행 항공권을 제시할 경우 그 당장에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술했듯이 바그다드를 비롯한 중동 일대가 전쟁 중이라 검문도 다른 곳에 비해 엄격하게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곳인데, 이러면 당연히 테러리스트로 지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실제로 왜 바레인을 선택했고 어떤 면에서 의심을 두려워 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결국 김현희 일행은 할 수 없이 바레인행 항공권을 제시했으며 일행은 로마행이 아닌 바레인행을 선택하였다.
그들이 만약 로마행 탈출에 성공했다면 이미 비행기가 터지기 직전에 로마로 피신해 비행기가 폭발했다고 해도 중동과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테고 그래서 북한의 소행도 숨길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어찌 알았다 해도 이미 일행은 평양으로 탈출에 성공한 직후일 테니 북한 입장에서 걱정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레인으로 가게 되면 그 사이에 타이머가 지나 비행기가 폭발해서 수사가 시작되면 자연히 자신들이 묵고 있는 바레인도 추적이 이루어질 것이니 결국 꼬리가 잡히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바레인에 도착했을 때는 일요일이었고, 김현희 일행은 바레인도 안심이 되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려 했지만 그날은 일요일이라 항공사도 쉬고 있어서 예약이 불가능했고 다음날인 월요일은 이미 매진이어서 그 다음날 8시 30분에 떠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렇게 다음날 바레인의 리젠시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머무르던 일행의 방에 오후 5시 무렵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김현희는 너무 놀라서 바나나를 먹다가 떨어뜨릴 정도였다. 재밌게도 이 증언은 영화인 마유미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나왔다(...). 김현희 일행이 놀랄만도 한 게 김현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들이 여기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번 전화가 반복해서 오고, 급기야는 한국대사관 성원까지 방을 방문했다. 김승일은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말로 묻는 물음에 대해서도 못 알아듣는 척해서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시피 했다. 그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방콕 도착 전에 실종되었는데 당신들은 행운이라면서 언제 어느 곳으로 떠나는지 물어보았는데 이것은 한국대사관 성원이 그들을 의심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성원이 가버린 뒤(어쩌면 다른 안 보이는 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호텔 종업원까지 동태를 살피러 오는 등 김현희는 그날 밤을 김승일은 자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면서 밤을 한잠도 못자고 지새워야 했다.
이튿날인 12월 1일 해가 김현희 일행, 더 나아가 북한의 죄상을 낱낱이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해가 환하게 밝아왔다. 김현희 일행은 허겁지겁 호텔을 나왔고 그대로 공항으로 향해서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본 항공사 직원이 말했다.

좃토 맛테 구다사이. 시라베누 모노가 아리마스카라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조사할 것이 있기 때문에...''')

유창한 그 일본어 소리에 김현희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그 옆에서는 일본인 성원이 여권을 회수해서 어딘가로 가는 것이었다. 아마 여권을 조사하러 이동한 듯 싶었다. 일행의 여권은 북한에서 일본 여권과 똑같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일본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들 앞에 있는 일본 성원이 그 전문가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로마행 비행기는 출항해 버리고, 두 사람은 다 끝났다는 절망감에 온몸을 떨게 되었다.
이윽고 여권을 회수한 동양인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하길, 나는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인데 이 여권 중 하치야 신이치의 것은 진짜여서 다른 곳으로 여행 가능하지만 마유미의 것은 위조여권이기 때문에 마유미는 일본 비행기로 일본에 돌아가서 일단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8] 이 말을 듣는 순간 김현희는 귀가 멍멍해지고 눈이 캄캄해져서 더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말은 그녀에게 자살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김승일은 이미 최후를 직감하고는 독약 앰풀을 깨물어 자살할 각오를 하고, 김현희에게 행동을 같이할 것을 촉구했다. 정체가 드러난만큼 살려고 애쓰면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직후 경찰들이 한번 검문을 했지만 담배로 위장한 독약 앰풀을 바로 눈치채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현희가 이를 손에 들자 경찰들은 놀라 바로 압수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거의 뺏길 뻔한 것을 어찌 깨물기는 했지만 재빨리 빼앗기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9] 김승일은 김현희가 쓰러지자 곧 자기도 앰풀을 깨물었고, 평소 약했던 그는 목숨을 잃었다.
이후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는 어떻게든 자살하려고 별별 방법을 간구해 보다가 영국인 핸더슨이 근무하고 있는 경찰서로 옮겨졌고, 그곳에서부터 김현희는 중국인으로 위장, 행세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으로 위장한 이유는 이미 일본 여권이 위조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 물론 중국인 동료를 보증받지 못한 핸더슨 일행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었다. 원래 위조된 일본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의 수법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여[10] 결국 이를 받아들여져서 하치야 마유미를 최대한 빨리 국내로 압송할 수 있었다.
한국은 그를 압송하기 위해 대한항공 DC-10 특별기를 보내었으며 안기부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또 청산가리를 깨물 것을 막기 위해 입에 이와 혀를 분리시켜 침도 삼킬 수 없게끔 만든 플라스틱 재갈을 물렸다. 다만 본인은 청산가리가 아니라 혀를 깨물 것을 막기 위해 재갈을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고, 바레인 경찰에서도 준비하지 못한 것을 준비한 한국 특무들의 주도면밀함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김현희는 눈을 콱 감고 앞으로 겪게 될 심문과 고문에 대해 흐느껴 울었다. 눈을 뜨면 특무들이 별별 말을 다 던질 것 같아 감고 있었다. 김현희가 공항에 내렸을 때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무려 남산 조사관에 도착할 때까지 감고 있었다고. 얼마쯤 지나 누군가가 그의 손을 펴면서, 훈련을 받은 손인데 오래 지나면 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에 김현희는 안 들키기 위해서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11]

2.7. 한국에서


12월 15일 밤 바레인에서 출발해 안기부의 본부가 위치한 남산 조사실에 도착한 그녀는 일본인으로 위장할 경우 위조 여권이라는 것이 이미 들통났기 때문에 먹혀들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부득이하게 가난한 중국인 고아로 행세했다.
당시 김현희를 감시하던 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 수갑도 채우지 않고, 또 협박과 고문도 하지 않고 그저 사실이 탄로나게끔 유도하면서 심문을 해 나갔다. 남조선에 대해 자신을 매우 고문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서움을 품고 있던 김현희는 남조선 경찰들의 친절이 바레인에서의 친절과는 또다른 친절이었고, 남조선 특무들은 친형제같은 마음으로 있는 정성을 다했다고 느꼈다고 한다.
김현희는 처음에는 자기가 북한 사람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기려 했으나, 자기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온갖 증거들이 나오면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커피를 후후 불며 마신다는 말에 커피를 화장실에 갖다 버렸다. 근데 이는 한국말을 알아들었다는 증거로써 당시 특무들은 눈치채지 못한 척 했지만 사실은 이조차도 다 눈여겨 보고 있었다. 즉 못 알아듣는 척 하고 그냥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야 했다. 또한 완벽한 중국인 고아로써 행세하기 위해 김을 종이 태운 것이라고 능청을 부렸지만, 나중에 자기가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는 말이 빌미가 되어서 일본 사람들이 매우 즐겨먹는 것이 김이라고 핀잔을 얻어맞았다. 사실 일본 안 가본 중국인이라고 해도 김을 모르는 중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뻘짓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중국어를 하는 수사관으로부터 심문을 받을 때 수사관이 동료들에게 얘가 자꾸 거짓말한 한다고 수군거리자 김현희는 (한글은 아닌 중국어로 항의하긴 했지만)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냐면서 발끈하자 수사관이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한 줄 알고 그렇게 흥분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드는 걸 즐기듯이 껄껄 웃자 김현희는 아차 싶어서 자신의 결정적인 실수임을 알아차렸다. 또 일본에서 살았다는 증언에 TV 상표를 말해보라고 하자 급한 나머지 진달래라고 해버리자 "그건 북한제 TV야 이 사람아"라고 하면서 딱하다는 듯이 또 웃었고 김현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그 직후 모든 심문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수사관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모순되는 증언을 끈질기게 지적하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사족이지만 김현희는 말문이 막혀서 둘러댈 말이 안 나오거나 자기 처지가 한스러울 때, 또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서 울고 또 울었는데 최종 자백을 할 때까지 울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 울었다. 남산에 처음 올 때부터 수없이 운 횟수를 따지면 열 번도 더 넘을 듯하다. 이쯤 되면 그냥 안습해 보인다. [12]
김현희는 수사관들과 함께 첫 서울 구경도 하고 그 직후 이렇게 모든 증거들이 나오면서 나중에는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기 정체를 숨기고자 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게 된다. 연좌제 국가인 북한이 만약 자기가 범행을 인정한다면 북한이 즉시 자기 가족들에게 죄를 물을 것은 너무나 뻔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전향하자 김정일은 북한에 남아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13] 지금도 김현희는 죽기 전에 부모님을 만나는게 소원이 될 정도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고 한다.
김현희는 자신의 행적이 탄로나기 바로 직전 수사관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 구경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때 단 한번의 외출이 그의 굳은 심지를 한방에 흔들어놓는 계기가 된다. 김현희는 북한에 살면서 당연히 남조선이 가난하고 부패한 자본주의 국가인 줄로 알았지만 서울 구경을 하면서, 수없는 자동차의 행렬(그것도 전부 한국인들이 운전하고 있었다)과 끝없는 빌딩들을 보며 한국의 엄청나게 잘사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게 되었다. 김현희는 직후 심문으로 모든 것이 탄로났지만 가족을 염려했던 탓에 입을 바로 열지 못했다.
하지만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에 관해 양심을 지킬 것을 호소하는 수사관의 호소와, 나이 많이 먹은 수사관이 자신을 마치 아버지가 딸을 대하듯이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에 감동한 김현희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마침내 12월 23일 그날 밤 김현희는 자신의 모든 범행에 대해 모두 시인하고, 수사관에게 자신의 모든 행적에 관해 밤늦게까지 진술하였다.
사실 수사관들도 가족이 있던 사람들이라 김현희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문제는 김현희가 저지른 일의 정당성부터 따지고 생각할 문제였다. 김현희는 자기 가족의 일이 수사관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도 내색만 안할 뿐 실상 김현희를 안쓰럽게 여겼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며 틈이 나는대로 바깥 구경을 시켜주면서 바람을 쐬게 해주었다. 처음 서울 구경만으로는 한국이 잘 사는 사실을 반신반의했던 그녀는 여기저기를 구경하면서 점차 사실을 믿게 되었다.
다음해인 1월 15일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자회견이 열려서 그들에게 모든 전말을 공개했다. 김현희는 가족 문제로 괴로워하던 참이라 처음에 공개를 안하려다가 한다고 했다가 당일날 안 하겠다고 했지만, 수사관의 간절한 요청에 결국 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시무룩해하는 김현희를 위해 어느 날 남서울대공원에 갔을 때 김현희가 좋아하자 특무들도 같이 좋아했다. 김현희는 자신을 그들이 맡아야 할 짐으로 그들이 여기거나 의무 때문에 대하겠거니 하고 처음엔 여겼지만 결국 진심으로 자신을 챙겨주려는 마음임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1990년 3월 27일 김현희는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추후 음모론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자 일종의 살아있는 증거로 남겨 두려는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김현희로부터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4월 12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재량으로 전격 사면을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했고) 이후 본인의 회고록을 저술하기도 하고 가끔씩 안보 강연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등 현재는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2.8. 이후


1997년 12월 29일 자신의 경호를 맡았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다. 4년 연상의 정모 사무관은 2년 전 김현희가 그에게 "You는 왜 결혼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고, 이에 정모 사무관은 김현희에게 "You에게 마음 뺏겨 정신이 없다.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못할 것 같다"면서 사랑을 고백했다. 이에 김현희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김현희와 결혼하려면 사표를 내야 한다는 안기부의 지침에 따라 정모 씨는 결혼 직전 사표를 제출하였다.#
결혼 이후 아들과 딸을 각각 한 명씩 낳았다고 한다. 이후 맨 위에 나온 마유미의 삶 인터뷰에 출연하는 등 가끔 인터뷰나 강의에 참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3. 비판


김현희가 귀순하고 회개를 한 부분은 응원받아야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가 저지른 악행들 자체가 지워질 수는 없다. '''김현희는 엄연히 무고한 사람을 115명씩이나 죽게 만든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이다.'''[14]
옹호하는 측에서는 김현희는 북한 사람으로서 적국의 사람들을 죽인 것이니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는데, 이 115명의 사람들은 군인 출신도 아니며 정치, 사상, 이념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나라까지 땀흘려 일하다가 이제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을 가지고 귀국하던 노동자, 즉 민간인들이었다. 현대에서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 학살은 절대 금기시되는 전쟁 범죄이며, 이를 어길 시 제네바 협약을 비롯한 각종 군법에 의해 전범으로 처벌된다.
2009년에 김현희가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납북 일본인 가족과 만나고 납북자 인권에 대해 언급을 하는 활동을 했는데 김씨가 유족들에게 사과는 하지 않은 채 납북자 인권을 말하는데 대하여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구제적인 증거를 제시해 폭파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 기사에 따르면 유족들은 88 올림픽 직전 김현희 씨의 참회 기자회견을 TV에서 보기는 했지만 직접 사과를 받아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김현희가 '가짜 공작원'설을 언급하며 방송에 자주 출연하자 유족들은 크게 분노했다. 유족들은 김 씨의 '가짜몰이'에 대해 반박을 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김 씨가 직접적으로 사과한 적도 없고 의문점에 대해 답변한 것 하나 없으면서 이제와서 자신들을 좌파 종북으로 몰아간 이유가 뭐냐고 맹공했다. #
김현희가 돈까지 벌면서 방송도 하고 책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비난은 클 수밖에 없다. 결국 115명을 죽여놓고 먹고 살 돈을 번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상규명대회와 추모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김현희는 참석하지 않았다. #
김현희가 가장 크게 비판받는 것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지속적으로 종북좌파로 매도했다는 것이 이유이다. # 이는 자신이 한 회개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테러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그랬다쳐도, 감히 피해자를 상대로 가해자가 자의로 이런 악랄한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될 뿐이다. 때문에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한 테러범인데도 혼자 살아남아 반공투사 마냥 활동하는 김현희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엄연한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치 좌파 정권의 부당한 탄압을 받은 피해자로 행세하면서 유가족들을 종북으로 모는 것에 대해서는 여론의 반감이 심할 수밖에 없으며, 테러 이상으로 그가 가장 욕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굳이 살아있는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만 시켜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죄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음모론과는 별개로 '김현희 덕에 선거에서 이겼으니 고마워서 사면해준 것'이라고 비꼬는 의견도 상당하다. 실제 사면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김현희의 감형안도 거론되긴 했었으나, 수감 중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고 관리가 어려우며 감형 후 다시 사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세 가지 이유로 사면이 되었다고 한다. 교도소보다는 정보기관에서 평생 관리하는게 훨씬 확실하다는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수십년간 수감되던 비전향 장기수들도 아직 남아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테러가 비전향보다 그 죄질이 가벼웠는지는 의문이며 더불어 비슷하게 출소한 김신조의 경우 사람을 죽이기 않은게 확인되었는데 김현희가 과연 김신조 정도로 죄질이 약했는지도 의문이다.
결국 언론에 나타나서 국민과 유가족의 어그로를 끌지 말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진정한 사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사람을 그리 죽여놓고 정권의 비호하에 살아났으면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나 댓글이 수시로 나온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김현희가 폭파범이기 때문에 김현희의 반공투사 코스프레에 대한 비판이 합리적인 것이다. 설사 이 사건 자체가 국정원의 날조여서 방조 등의 역할이었더라도, 국민적 비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3.1. 반론


물론, 김현희가 유족을 상대로 한 참회와 진상규명에 적극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비판 여론을 한꺼번에 전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일 수 있다. 기사에 따라 물론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도 있지만, 큰 사실로 부풀려서 과장한 것도 있고 그가 하지 않은 것들을 왜곡한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김현희는 개신교에 귀의하면서 교회에서 간증을 하기도 하고, 인세 8억 5천만 원을 유족들에게 내놓으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 즉 김현희가 용서를 받고자 하는 사례도 많지는 않지만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사형 당할 김현희가 갑작스레 사면된 이유는 '''그녀 자체를 살아있는 증거'''로 남기고자 했던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판단 때문이다. 김현희가 재판 받을 당시에 이미 안기부 측에서 운동권을 중심으로 '김현희는 가짜'라는 내용의 음모론이 퍼지는 것을 것을 감지했었으며, 대통령의 재량으로 김현희를 사면시켜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안보강연 등의 활동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만약 정말 안기부가 그녀를 이용해서 조작을 하려 했다면 차라리 사형 집행을 서둘러 해서 영원히 입막음하는 게 훨씬 더 완벽했다.[15] 만약 당시 김현희가 곧바로 사형되었다면 음모론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변형되어 퍼졌을 것이다. 오히려 이건 정말 음모론 중에서도 탄탄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여 미궁으로 빠지고, 북한의 테러라고 믿는 쪽과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믿는 쪽이 극심한 대립을 하며 사회 혼란만 가중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혼란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도 사건이 더더욱 입에 오르내리며 유가족들은 더더욱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현희의 증언이 없었으면 종북주의자들은 더욱 날개를 달아서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북한의 소행을 전면 거부했을 것이며, 북한의 만행은 영원히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김현희가 강연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쥐 죽은 듯이 지내기만 하는 것도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MBC가 2003년 PD수첩에서 비행기 폭파 사건에 대해 김현희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을 밝혔는데, 이에 대해 "내가 가짜면 대한민국이 KAL 858기를 폭파한 테러국이 되는 것이고 테러를 한 당사자 북한은 누명을 쓰는 것이 된다"며 "진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강조했고, 또 '가짜 김현희 논란'은 "국가문란이나 이적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며 "그때 의혹 제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때 김현희는 적극 자신이 가해자임을 용기 있게 밝혔으며, 덤으로 그때 김현희는 그 방송으로 인해 주거지가 공개되며 겪었던 고충에 대해서도 토로했는데, 그는 "당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기자들이) 집을 습격했다. 주변환경과 집이 다 공개됐는데, 그건 한마디로 테러였다", "한 살과 세 살이 된 두 아이들 업고 집을 나와 10년간 추방생활을 했다"고 당시의 고통을 밝혔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뒤늦게라도 이런 (방송 출연) 자리를 만들어 준 MBC에 감사하기도 했다.#
또 음모론에 관해서도 정면으로 돌파했는데, 김현희가 북한의 간첩이 아니며, KAL기 폭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한 날조극이라는 음모론에 맞선 것이다.
결국은 그녀가 용기 있게 직접 유족들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진정으로 진상규명과 유족들을 위한 행보를 보여야 비로소 그가 응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족과 네티즌에 따라 여전히 그녀를 용서 못할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반성을 하는 것과 안 하고 변명만 늘어놓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김현희 본인이 전적으로 죄를 참회하고 유족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새사람이 되길 결심한다면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도 그를 이해하고 용서해 줄 것이며, 결국 김현희도 마음은 아름답지만 북한에 의해 조종당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동정론이 형성되어서 이제는 김현희도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4. 여담


태영호와 같은 학교 동문이라고 한다.#
체포 당시 얼굴이 공개되자 폭탄 테러범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곱상한 외모에 "예뻐서 죽이기 아깝다"는 얼빠진 여론이 있었고, 이후에 사면된 것도 예뻐서 살려준 것이라는 저질 음모론이 한동안 돌았다. 이원복의 만화에서도 이 음모론를 꼬집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참고로 이때 압송되는 김현희의 모습은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백 명을 살해한 공작원이라길래 험상궂은 인상을 생각했던 국민들은 의외로 곱상한 김현희의 모습에 놀라 '죽이긴 아깝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훗날 이 반응을 전해 들은 김현희는 "북한에서였다면 요물이라고 더 잔혹하게 죽였을 텐데..."라며 희한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5. 저서


  •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
  •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1992)

[1] 여담이지만 김현희 남편의 고향, 즉 김현희의 시댁도 경주시에 있다.[2] 그러나 이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게 만든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고 그 자신도 범죄살인자라는 낙인을 평생 갖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조차 독립군이 일본 민간인들을 상대로 학살하는 것은 금기시 될 정도로(일본 제국 수뇌부를 향한 쪽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어떤 경우로든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북한을 무조건 옹호하는 종북주의자들에 대해 북한 정권이 이렇게 잔인하다는 반박으로 될 수 있다.[3] 다만 실제 문수구역은 1983년에 폐지되었다. #[4] 당시 북한에서는 친일파, 남로당과 함께 개성 출신은 불순분자로 여겨져 사회 진출에 안 좋은 영향을 받았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개성은 38선 이남에 위치해서 한국 땅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차별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 그래서 아버지가 아내에게 "당신 옛날에 개성 출신이었다며" 하자 어머니가 "내가 개성 출신이어서 당신 출세에 지장을 주는가"라고 말했다고. 김현희는 어릴 때 그에 대해 의아해 했지만 한국에 온 이후 그 의문을 풀게 되었다.[5] 사실 1950년대에도 쿠바의 경제상황은 나쁜것은 아니라서 이미 1958년도에 컬러TV방송을 시작했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을 앞섰지만 빈부격차가 극악해서 하루벌어하루 사는 빈곤층이 총 인구의 40%에 달했다.[6] 영화 마유미에서는 리은혜가 일본인은 음료를 마시면서 입가심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근데 정작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할 때는 그놈의 습관 때문에 입가심을 또 하는 바람에, 수사관으로부터 일본인은 입가심을 안한다고 핀잔을 맞는다.[7] 경제며 의료시설이 낙후된 북한에서 성형수술이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결국 임무를 마치고 오면 전문 의사를 데려다가 치료해서 완전히 흉터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치료는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 와서 받게 되었다(...).[8] 그런데 신이치의 여권도 위조인데 왜 마유미만 발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판에서는 신이치가 실제 일본 사람으로부터 진짜 여권을 빌려서 쓰는 걸로 나온 걸로 봐서 이렇게 했을 경우는 발각되지 않았을 수 있다.[9] 청산가리라는 네임드급 맹독성 물질을 바로 뺏기긴 했다지만 살아남은 것이 용하다. 아예 섭취조차 못 했거나 했어도 치사량에 훨씬 못 미치는 양이던 모양이다. 다만 떠도는 카더라에는 3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있고, 담당 의사가 "쟤 쇼하는 거야"라고 슬쩍 흘렸다는 음모론도 있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지 멀쩡하게 자살에 실패했다.[10] 게다가 하치야 신이치, 즉 김승일의 허파에 박혀있던 2ml짜리 유리 파편은 1974년 다대포에 침투했다가 자결한 북한 공작원들의 부검에서 나온 청산가리 앰풀의 파편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의 치아는 북한에서만 쓰는 방식인 납으로 이를 땜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음모론자들은 1972년에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청산가리 앰풀을 소지한 적이 있는데 청산가리 앰풀이 뭐가 북한의 수법이냐고 주장했다. 청산가리 자살수법이 북한의 수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부검 결과 나온 청산가리 앰풀 파편이 북한산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건데 기초도 알아먹지 못한 무식한 음모론이라 하겠다.[11]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는 김현희가 한국말을 알아듣는지 시험하려는 것이었고, 수사관들은 못 눈치챈 척 했지만 사실 다 눈여겨보고 있었다.[12] 바레인에서 한국으로 압송될 때 수사관이 그를 보고 "그런 끔찍한 일을 한 사람이 겉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지 않아?"라고 하자 이를 속으로 의아히 여긴 김현희는 암호인 줄 알고 나중에 친해진 수사관한테 물어보다 수사관이 책을 사다주며 알려준다. 북은 옛날에도 동화책이 있었지만 김정일이 등장한 이후 다 없어지고 혁명을 찬양하는 노래만 살아남게 된다. 나중에서야 조금씩 동화책이 나오지만 한국의 것에 비해 좋을 리는 없었다.[13] 이는 1995년 성혜랑이 아들 이한영과의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전향한 김현희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다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고 김현희를 교육한 노동당 조사부 간부들까지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김현희의 육촌 친척까지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14] 스티븐 유, 신창원이랑 비교해본다면 오히려 그들은 억울한 측면도 있다. 물론, 스티븐 유는 남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인 병역문제에 있어서 최악의 선택을 해서 괘씸죄로 인해 지금까지도 입국금지를 당하고 있다. 김현희에 비한다면 정말 새발의 피수준도 안된다. 신창원은 절도와 탈옥으로 인하여 무기징역을 당했다. 신창원도 엄연히 사람을 죽인게 아닌데도 성폭행범보다도 더 심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 권력의 유무가 결국은 김현희와 저들의 차이라고 봐야 한다.[15] 수지 김 사건 또한 기본적으로 피해 당사자인 김옥분이 사건 당시 이미 윤태식에 의해 살해되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고, 국내에서 접근이 어려운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인 데다 오로지 윤태식의 진술만으로 증거가 시작되기 때문에 조작이 쉽게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