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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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羲東
1886년 3월 11일 ~ 1965년 10월 22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동양화가이자 서양화가. 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춘곡(春谷). 국민의당 이상돈 국회의원의 외조부이며, 둘째 숙부가 정미칠적 및 경술국적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고영희이다.#
2. 생애
1886년 한성부 북부 광화방 화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서 고영철(高永喆)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영철은 역관으로서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려 지냈고, 이러한 성향은 고희동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1899년 13세의 나이로 관립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대한제국의 궁내 프랑스어 통역, 문서 번역을 담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어나자 진로를 전환하여 동양화가가 되었다. 처음으로 미술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서양화가 아닌 전통회화 세계로, 도화서 소속으로 어진을 그리기도 했던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미술을 배우게 되었다. 관직을 그만두고 1909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일본에 최초로 서양 미술이론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 밑에서 그림을 배웠고, 그 이후 1915년 3월 29일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보성학교, 중동학교의 교원으로서 유화를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때 가르친 제자로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 화가 도상봉, 간송 전형필이 있었다. 특히 간송 전형필을 위창 오세창에게 소개하면서 간송이 문화재 수집의 길에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당시 작품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18년 분가하면서 원서동에 집을 지었다. 이때 직접 집을 설계했는데, 이것이 바로 등록문화재 84호 고희동 가옥이다. 또한, 1918년 일본인 서양화가로 조직된 조선미술가협회에 대항해서 조선인 화가들의 모임인 서화협회를 결성하여 스승 안중식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서화부문 총무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다음해 안중식이 3.1 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쇠약해져 작고하면서 회장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후 1921년부터 1936년까지 '협전'을, 그리고 서화협회 소속 회원들의 전시 서화협회전을 15회 개최하면서 미술운동을 전개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서 동아일보 창간호를 디자인했는데, 이때 강서대묘의 고구려 벽화를 참고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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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27년, 서화협회전에 한국화를 내면서 한국화로 회귀했다. 이 당시에는 동양화 기법들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화의 색채감과 명암법을 받아들여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그 당시 민족 정기의 상징으로 각광받던 금강산에 대한 그림을 비롯한 여러 풍경화들을 그렸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193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서화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는 어디에도 그림을 출품하지 않았다.
8.15 광복 이후 고희동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으로 추대받아 취임했지만 첫 회의에 불참했고, 정치적 색채를 전혀 초월하여 중립과 순수예술 파지의 태도로써 나아가자는 주장 아래에 세워진 조선미술가협회가 결성되면서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조직하여 4년간 회장으로 있었다. 또한 1949년 2월에는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이후에도 속칭 국전의 심사위원을 계속해서 맡았다. 그리고 국전 제1회에서 제7회까지 계속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당시 가톨릭 성화를 주로 그린 화가 장발과 함께 김일성의 납북 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납치 위기에 인다. 그는 막내딸의 집으로 몸을 옮겼다가 인민군에게 납치당할 위기를 맞은 후 승려로 변장하여 서울 근교의 절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9.28 서울 수복과 함께 부역자 심사의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A, B, C로 부역자를 나누었는데, 이때 서화협회를 함께 만든 김진우가 서대문 형무소에 부역자로 수감되었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한, 둘째 손자가 인민군에 끌려가 목숨을 잃는 일도 일어났다. 그리고 이후 국방부 종군화가단 창설을 주도하였다. 1.4 후퇴 당시 부산으로 옮겨가 영주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초대 예술원장이 되었다.
1953년에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이 되었다.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 공로상)을 수상하였고 한편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국가보안법 개악반대투쟁위원회 발기인,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961년 1월부터 부터 1962년 7월까지 MBC 사장을 했다. 이후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0월 22일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