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휘/클럽 경력
1. 프로 데뷔 이전
1981년 7월 8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에서 태어난 곽태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멀리뛰기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왜관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축구에 흥미를 느꼈고 아버지인 곽인호 씨에게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곽태휘의 말을 들은 곽인호 씨는 곽태휘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남들에 비해 너무 늦은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부가 없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등교를 거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곽 씨는 아들의 강한 고집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곽 씨는 초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열린 축구 대회에서 왜관 지역 대표로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농사일을 하고 있던 곽태휘의 할아버지는 곽 씨가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했고, 곽 씨는 결국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기에 곽 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아들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곽 씨는 곽태휘의 전학을 허락했고 부자는 곽 씨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1997년 7월 14일의 일이었다.
당시 대구공고는 중학교 축구부가 없어서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선수를 육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구공고로 찾아온 곽태휘 부자에게 곽병유 감독은 '축구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졸업할 때까지 경기에 못 나갈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부자는 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며 간절하게 부탁했고 곽태휘는 우여곡절 끝에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에서 곽태휘는 금세 곽병유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기본기는 부족했지만 180cm라는 큰 키와 빠른 스피드는 충분히 대성할 재목이었다. 여기에 곽태휘의 성이 자신과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항렬로 자신의 손자뻘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면서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애착을 느꼈다.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합격점을 주었고 곽태휘는 마침내 축구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곽병유 감독에게 겨울 내내 특훈을 받은 곽태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데다가 평발이라는 불리한 조건까지 있었지만 그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특히 높이뛰기 선수 생활을 통해 익힌 점프력과 큰 키는 곽태휘에게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그에게는 큰 시련이 닥쳤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2월, 곽태휘는 전지훈련에서 충주상고와 연습 경기에 출전했다. 빗속에서 그라운드를 누비던 곽태휘는 경기 도중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상대 선수가 찬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했다. 서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일어나던 도중이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에 젖은 공은 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그라운드에 쓰러진 곽태휘는 왼쪽 눈의 망막이 찢어졌고 경기 다음 날에 전안방출혈 증세까지 나타났다. 곽태휘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12시간 동안 망막박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곽태휘의 왼쪽 눈은 '''실명을 피하지 못했다.''' 망막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회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곽태휘가 왼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알아볼 수 없는 뿌연 윤곽의 물체들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곽태휘의 소식을 접한 지인들은 그에게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 학교를 1년간 쉬고 복학한 곽태휘는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 훈련을 거듭했다. 부족해진 원근감과 균형감각은 한 템포 빨리 움직이고 한발 더 뛰는 성실함으로 메꿔나갔고 3학년때 찾아온 허리디스크 역시 꾸준한 노력으로 이겨냈다. 투혼을 불사른 끝에 곽태휘는 성장을 거듭했고 고등학교 졸업 직전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포항 스틸러스 등 여러 팀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고민에 빠진 곽태휘는 스승 곽병유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곽태휘의 고민을 들은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중앙대학교를 추천했다. 팀의 명성을 좇기보다는 대학에서 기본기를 쌓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한 곽태휘는 실력을 인정받아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런 곽태휘를 눈여겨 본 팀은 K리그의 안양 LG(현 FC 서울)였다. 안양 LG는 곽태휘가 중앙대를 졸업한 후 바로 프로로 데려가겠다면서 입단 제의를 했고 곽태휘는 안양의 제안을 수락했다. 꿈에 그리던 K리그 입성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이던 2004년, 또다시 곽태휘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3년간 상비군으로 활약했던 올림픽 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올림픽 본선 출전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 어깨 근육 부상까지 겹치면서 곽태휘는 선수 생활을 접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곽태휘는 부상을 털고 복귀하는 데 성공했고 2005년에 FC 서울에 정식으로 입단한다. 실명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프로 데뷔에 성공한 것이다.
2. FC 서울 (2005~2007)
2005년 FC 서울에 입단한 곽태휘는 리그컵에 주로 출전하며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다. 비록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곽태휘는 3년 간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해 58경기를 치르며 조금씩 프로 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2006년에는 여자친구 강수연 씨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2007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곽태휘는 본의 아니게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서울은 아시안컵에서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김진규 영입을 원하고 있었고 김진규의 소속 팀 전남 드래곤즈는 김진규를 보내는 대신 곽태휘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는 곽태휘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던 서울에서 밀려나듯이 나가는 것도, 수도권을 떠나 지방인 전남으로 가는 것도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팬들의 주목을 받는 프로선수가 아니라 일반 회사원이나 학생도 경북사람이 호남으로 가는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못 이해하겠으면 지금 호남에 있는 아무 편의점이나 가서 경상도 사투리를 시원하게 뱉어봐라 바로 느낄것이다. 차별을 하거나 위해를 가한다는것이 아니라 영남사투리 자체를 신경쓰고 거북해한다. 이걸 극복한것은 양준혁이나 곽태휘같은 천재들만 가능한 영역이라고 볼수있다. 지역드립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
3. 전남 드래곤즈 (2007~2009)
하지만 전남 드래곤즈행은 오히려 곽태휘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다. 당시 전남을 지휘하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든 곽태휘는 주전 자리를 단숨에 꿰차게 되었고 전남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2007 FA컵 결승전에서 곽태휘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만한 활약을 펼친다. 2-2로 경기가 팽팽하게 전개되던 결승 1차전 후반 42분, 곽태휘는 페널티 지역 정면에서 오른발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이 골로 전남은 1차전에서 극적인 3-2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2차전에서도 전남은 곽태휘의 활약 속에 승리를 거두며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전남 감독을 지내며 그를 눈여겨 본 허정무 감독의 부름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기 시작해 조광래호를 거쳐 최강희호까지 꾸준히 부름을 받았다. 다만 유리몸이 항상 문제였는데 2008년 한 해에만 2번이나 수술대에 오르는 등 전남에서는 2시즌 반을 뛰는 동안 한 시즌을 온전히 치른 적이 없었다. 2011년 울산 입단 이전까지는 K리그에서의 족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서울에서는 유망주 및 백업 수준이었고 전남에서도 2007년 FA컵 결승에서 골을 기록해 우승에 기여한것이 다였다. 전남 드래곤즈가 하위권을 탈피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2009년에는 한 시즌내내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4. 교토 상가 FC (2010)
2010년에는 일본 J리그의 교토 상가 FC로 이적했으나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부상으로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5. 울산 현대 (2011~2012)
2011년에는 울산 현대로 이적한 후 김호곤 감독의 베스트 일레븐만 주구장창 돌리는 전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상 없이 한시즌을 소화하면서 리그컵 우승과 K리그 정규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에는 수비수인데도 팀내 득점 1위를 차지한적도 있다(.....)[1]
그리고 AFC 챔피언스 리그/2012년에서도 울산의 중심으로 맹활약하였고, 특히 결승전에서는 헤딩 선제골까지 기록하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위 사진이 바로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
그렇게 울산에게 우승컵을 안겨 준 후...
6. 알 샤바브 FC (2013)
2013년 1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바브로 1년 6개월간 이적이 확정되었다. 이적료는 약 21억 원.
7. 알 힐랄 FC (201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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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7일 알 힐랄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로 곽태휘는 오는 2015년 6월까지 알 힐랄 소속으로 뛰게 된다.
2014년 10월 1일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알 힐랄이 알 아인을 상대로 1승 1패 골 합계 4:2를 기록하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1990년대만 해도 '''아시아의 깡패'''로 군림하던 알 힐랄이었으나, AFC 챔피언스 리그 체제로 개편한 이후로는 처음 결승이었고, 곽태휘 개인으로선 2012년 울산 이후 2년만에 다시 한번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다만 팀은 결승에서 서울을 꺾고 올라온 웨스턴 시드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맹활약으로 인해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베스트 11 중 한국인은 곽태휘 한명 뿐이었다.
한편 소속팀인 알 힐랄 FC와의 계약이 2016년 여름에 만료되고 친정팀 FC 서울로 복귀했다.
8. FC 서울 (201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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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6년 7월 7일, 황선홍 감독의 부름으로 친정팀 FC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계약기간은 2018년 말까지로 8일 실시하는 메디컬 결과에 따라 정식 입단이 확정되게 된다.기사 다만 한가지 변수가 있으니 바로 '''나이'''. 계약이 만료되는 2018년에 곽태휘는 만 37세다. 관리시스템과 스포츠 의학이 발달한 현대 축구에선 자기 관리만 잘 하면 못 뛸 나이는 아니지만 필드 플레이어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연령인 건 분명하다.
곽태휘의 이적 전까지만 해도 FC 서울의 부주장은 유현이었으나, 오스마르의 결장 시 곽태휘가 주장 완장을 차고 나온다.
일단 선수 본인은 2018년 월드컵 출전이란 동기가 뚜렷한 만큼 이를 위해 자기 관리를 해 나갈 것이다. 서울이야 그 정도 비용이 아쉬울 구단도 아니고 라커룸 리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인 데다 당장의 수비 불안을 해결하는 게 급하니 추진한 영입이다. 황선홍 부임 초기에는 최용수 시절의 기조를 이어받아 스리백을 쓴 서울이지만 장기적으론 곽태휘를 중심으로 한 4백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에만 참가하고 있으며, 명단에는 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26R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선발 출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모습이었으나 후반 45분 심판의 어이없는 오심으로 시즌 첫경기에서 퇴장당했다. 패널티 박스 안에서 상태 크로스를 저지하다 허벅지에 공을 맞았는데 손에 맞았다며 패널티 킥과 경고를 줘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영상을 보면 팔에 닿지 않은 게 아주 잘 보인다. 다행히 상벌위에서 이 점을 참작해 퇴장으로 인한 출장 정지와 제재금을 감면하여 다음 경기에 나설수 있게 되었다.
8월 24일 ACL 8강 1차전 산둥 루넝과의 홈 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산둥의 공격수 그라치아노 펠레를 꽁꽁 묶는 활약을 펼쳤다. 시즌 후반기에는 오스마르, 곽태휘 둘 다 발이 느려 발 빠른 크랙에게 손쉽게 돌파당하는 취약점이 두드러지면서 오스마르가 중원으로 올라가고 김남춘과 중앙 수비진을 구성했다. K리그 클래식 스플릿 마지막 라운드 징계로 심판 매수로 인해 승점이 삭감되어 승점이 동률이 된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전북을 꺾고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도 곽태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7시즌을 앞두고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ACL 경기를 치루면서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더욱 느려진 발과 공격수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공중볼 경합의 강점도 사라졌다. 수비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이지만, 집중력에 심각한 문제까지 드러내고 있다. 1차전인 상하이 상강과의 경기에서는 실점에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발이 빠른 우레이에게 드리블과 침투를 허용했고, 2차전인 우라와 레즈와의 경기에서 최악의 폼을 보이면서 5골 실점에 모두 관여했고 경기 도중 부상까지 당해 한동안 출전을 못하게 되었다. 4월 18일 FC 안양전에 부상 복귀 했으나 경기력은 계속 별로였고 여름쯤에 들어서는 폼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봐야 미달이기 때문에 계속 뒷공간을 털려 팬들의 암을 유발시키는 중이다. 그리고 8월 5일, 25라운드 대구 FC 원정에서 대구의 모든 골장면에 관여하면서 2-2 무승부를 만들며 서울의 리그 상위권 도약에 제동을 걸어버렸다.
이쯤되면 안나와야 하는게 맞는데 그럼에도 계속 기회를 받는 이유는 '''빌드업''' 때문. 서울의 빌드업 리더를 살펴보면 14시즌까진 김진규가 후방에서 빌드업을 도맡아 수행했다. 김진규가 노쇠화한 15시즌에는 오스마르와 박용우가 돌아가며 쓰리백의 중앙에 서서 빌드업을 수행했다. 김진규가 떠나고 박용우가 부진한 16시즌에는 오스마르가 빌드업 리더를 맡다가 곽태휘가 영입되자 나눠 맡았다.
문제는 17시즌. 오스마르와 곽태휘를 함께 쓰면 순발력이 너무 떨어져서 뒷공간을 감당할 수가 없다. 또한 오스마르를 내리면 그만큼 중원이 헐거워진다. 하지만 팀내 젊은 센터백인 황현수, 김원균은 발이 빠르고 경합능력은 좋지만 빌드업 능력이 없는 전형적인 파이터형이다. 6월 21일 대구전이나 8월 12일 수원전에서 증명되었듯이 이 둘을 세워놓으면 수비진에서 패스가 안올라오고 뒤로 물러나며 의미없는 패스만 반복해 양 풀백의 전진도 어려워지고 공격속도가 둔화되어 롱볼 의존도가 올라간다. 백업인 김원식은 역시 빌드업 능력이 전무하며 앞의 둘에 비하면 발까지 느려 황선홍 체제의 빠른 템포 축구에 적응못하고 있다. 곽태휘가 빌드업이 뛰어난 선수는 절대 아니지만 짬밥이 있고 킥력 자체는 좋다보니 오스마르를 센터백으로 내리지 않는 이상 곽태휘보다 발밑 좋은 수비수가 없다.[2]
문제는 작년보다 더욱 떨어진 체력과 집중력 때문에 발빠른 크랙 보유한 팀들 상대로 쓰기엔 부담스럽고 일주일 정도 휴식을 주지 않으면 폼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 결국 이 문제는 9월 13일 이웅희가 전역하면서 해결되었다. 이웅희가 복귀 하자마자 황현수와 투 파이터 조합으로 중앙 수비진을 구성하고 빌드업은 오스마르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려가서 맡으면서 곽태휘는 밀려났다. 이후론 후보 명단에 간간히 이름을 올렸다.
팬들 사이에선 심우연이 나갔으니 수비 시키지 말고 공격수로 돌려서 심우연처럼 타워 역할이나 맡기자는 의견이 많다.
18시즌 초반에는 이웅희에게 밀렸으나 이웅희가 강원전 자책골 이후 황선홍의 눈 밖에 나고 전 시즌 주장답게 다시 주전으로 발 돋움한다.
하지만 나올때마다 느린 발로 수비 불안에 기여하고 있으며 장점으로 꼽혔던 빌드업과 헤더 역시 평범한 수준이다.
5월 12일 강원FC 와의 경기에서 헤딩으로 시즌 첫 골을 기록하였다. 김원균과 함께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계속해서 주전 센터백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부상 루머가 있는 이웅희를 제외한다고 쳐도 지난해 K리그 베스트11 후보였던 황현수, K리그1 팀 주전에 있었던 김동우(축구선수), 김원식 등 30대 초반이나 20대인 경쟁자를 모두 넘고 37세의 나이로 주전을 지키는 것은 어찌됐건 대단한 일. 하지만 이후 김동우와 김원균에게 밀려 8월 중순 현재 대기명단에도 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18시즌 종료후 자유계약으로 풀렸다. FC 서울이 재계약을 제안할 가능성은 없고, 나이를 고려하면 은퇴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2년 계약으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는 경남 FC로 이적했다.기사
'''"다행히 강등 위기에서 벗어났고 선수들이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 팀을 떠나게 돼 마음이 놓인다. 서울이 잘 되길 바란다."''' _곽태휘, 경남 이적 후 첫 인터뷰
9. 경남 FC (2019~2020)
창단 첫 ACL 진출권을 얻은 경남 입장에서는 나이가 많더라도 ACL 우승(울산)과 준우승(알 힐랄) 경험이 모두 있는 곽태휘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선수 입장에서도 11위를 하고도 보강할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스쿼드 정리조차 똑바로 안 해 센터백 머릿수만 넘쳐나는 팀보다는, ACL 출전권이 있음은 물론이요 박지수의 이적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도 보다 수월하게 뛰어들 수 있는 팀에서 선수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게 백번 낫다.곽태휘는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선수다.'''
김종부 경남 감독
2019년 3월 12일 조호르 다룰 탁짐과의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전, 경남 데뷔전이자 ACL 복귀전을 치렀다. 후반전에 전매특허인 세트피스 제공권을 활용하며 코너킥 헤딩 골을 성공시켜 경남 데뷔골을 넣었지만, 센터백 파트너 송주훈의 핸드볼 파울로 PK 실점을 허용하며 팀은 1:1 무승부에 그쳤다.
A매치 휴식기 이후로는 리그에서도 꾸준히 주전으로 출전하고 있다. 4라운드 대구 FC전에서 발리슛으로 골을 넣을 뻔 했으나 조현우의 슈퍼 세이브에 막혔다.
5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전에서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전반전에 코너킥 상황에서 자책골을 넣었고, PK까지 내주며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경기를 어렵게 끌고 간 원흉이 되었다.[3] 이 경기에서 경남이 3:3으로 비기고도 상대 골키퍼 송범근의 슈퍼 세이브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승점 2점을 날린 것과 다름없다.
2019년 4월 17일 포천시민축구단과의 FA컵 32강전에서 쿠니모토의 코너킥을 헤더로 연결, 시즌 2호 골을 성공시켰다. 이 골이 결승골이 되어 경남은 부천을 2:1로 제압하고 16강에 진출했다.
전북전 이후로 수비력 문제가 계속 지적받으면서 주전 경쟁에서 점점 밀려나는 모양새다. 현재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아예 명단 제외되고 있다.[4]
13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전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선발 풀타임 출전하였으나 4실점을 허용하는 처참한 수비력을 보여 주며 패배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몇몇 장면에서 간간히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경기 전체로 봤을 때 오랜만에 출전한 송주훈-곽태휘 조합의 경기력은 재앙 수준이었고, 특히 김신욱의 두 번째 골 장면에서 곽태휘의 수비를 본 경남 팬들은 단체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이후로는 다시 명단 제외되고 있다. 곽태휘와 더불어 환장의 듀오를 결성한 송주훈도 경기 못 나오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명단에는 드는데, 곽태휘는 그야말로 안습 수준. 게다가, 애초에 곽태휘는 ACL용 영입이었는데 리그뿐 아니라 ACL에서도 출전을 못 하고 있다.
이후 송주훈의 중국 이적과 백포에서 백쓰리로 바뀐 전술적 변화로 주전으로 뛰고 있다. 경남의 20경기 무승행진의 원흉이기도 하였고 노쇠화로 인해 스피드와 대인 수비에서 약점을 보이며 다시 후보로 밀려났다. 강등권 사투를 벌이는 지금은 김종부 감독의 이광선 쉬프트 때 주로 투입되어 15분 정도 수비진을 지키는 편이다.
20시즌에는 1경기에도 출장하지 못하였고,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1] 이때는 아직 김신욱이 완전히 각성한때가 아니었다.[2]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빌드업 잘한다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한국 기준이다. 세계무대 기준으로도 수준급의 빌드업 능력을 갖춘 수비수는 홍명보 이후론 없다.[3] 다만 자책골은 송주훈의 머리에 맞은 공이 가만히 있던 곽태휘의 몸에 맞고 들어간 것이라 곽태휘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냥 운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PK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4] 박지수의 이적과 대체 자원으로 온 송주훈의 부진과 부상, 이광선의 부상으로 경남 센터백에 가용 자원은 거의 없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기용하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명단에서 제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