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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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8대 감독 최강희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2. 선임과정
조광래 감독 경질 이후,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의 운명은 쿠웨이트전 단 한 경기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 확정이 결정되는 벼랑 끝 상황이었다.
삿포로 참사와 레바논 쇼크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조광래 감독은 결국 레바논 쇼크의 책임을 지고 2011년 12월 7일 전격 경질당한다. 최종 예선도 아닌 3차 예선에서 만에 하나 3차 예선 최종전인 쿠웨이트에게 패배한다면 최종예선도 못 밟고 월드컵 진출이 좌절될 상황이었고, 당시 국대의 상황을 보면 쿠웨이트전도 전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FC 바르셀로나식 패스축구를 모토로 내세웠던 조광래호가 좌초하면서 외국인 감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이 맡기 싫다고 누차 거절했던 최강희 감독이 조중연 축구협회장의 강권에 못 이겨서 부임한다. 잘 나가는 현역 프로팀 감독을 대표팀으로 빼오는, 그것도 본인이 싫다는데 연줄로 찍어누른 것이다. 조중연이 울산 코칭스태프일 때 최강희가 선수였다. 즉 사제지간. 게다가 축협 국가대표 규정에 협회가 감독으로 선임한 스태프의 구단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기이한 규정이 있다.
이렇듯 축협은 최강희에게 감독직을 억지로 떠맡기는 '''막장스런 행정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광래 감독의 해임부터 최강희 감독의 선임까지 아무런 계획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었다.국가대표 축구단 운영규정 제11조 2항-협회는 1항의 선임된 자가 구단에 속해 있을 경우 당해 구단의 장에게 이를 통보하고, 소속 구단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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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감독직을 극구 고사하던 최강희 감독은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고 자신은 2013년 6월 최종예선이 끝나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고 공언하며 대한축구협회를 당황케했다. 그리고 "그동안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을 밖에서 지켜보면서 대표팀 사령탑은 절대적으로 외국인 감독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본선에서는 외국인 감독으로 가야한다면서 의견을 피력했고, 최종예선 도중에도 자신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하는 도중에 외국인 감독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도 꾸준히 했다. 결국 약속은 지켰지만 스스로 예선용 감독이라고 못을 박음으로서 전술과 선수운용에서 제한과 선수단 해외파들의 장악을 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독의 임기를 시한부로 못박아 둔 것은 대한축구협회의 전시행정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최강희 감독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8회 연속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18일 지역예선 경기를 모두 마치고 이전부터 공언한 것처럼 최강희 감독은 사의를 밝혔다. 최강희호의 최종 전적은 7승 2무 5패(공식전 5승 2무 2패).[1]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컸는데, 최종전인 이란전에서 최강희 본인도 이란의 케이로스 감독에게 수모를 당하는 한 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서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을 대비하게 되었다. 조광래호에 비해 선수 기용의 폭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다양한 선수를 기용했지만 월드컵을 1년 앞둔 시점에서도 정성룡[2] 빼면 뚜렷한 주전도 없는 팀이 되었다. 조광래 1년 6개월, 최강희 1년 6개월, 본선 감독 1년 이렇게 '''4년 허송세월'''을 확정지은 셈이다.
이 팀을 돌이켜보면서 되짚지 않을 수 없는 건 해외파들의 SNS 트위터 항명 파동이다. 조광래 감독의 엘리트 해외파 신뢰에 반비례하여 최강희 감독의 원칙은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국내파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최강자라는 걸 증명하려고 했고,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하는 해외파들을 경쟁체제로 돌리고 파벌로 갈라진 대표팀을 봉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래호에서 해외파 우대에 젖어 이에 불만을 가진 기성용, 윤석영, 김영권 등의 항명은 여러모로 파벌 논란을 일으켰다.
홍명보호의 월드컵과 슈틸리케호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현재, 명백하게 감독의 책임이 절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광래, 홍명보, 슈틸리케 감독과는 달리 최강희 감독은 최소한 자신이 공언한 약속[3] 은 지켰고 부임 과정에서 축협의 외압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경기력 면에서는 앞선 두 감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다만 본인도 애초에 자신은 대표팀 감독은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했었고 퇴임 이후에도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좋은 감독이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해당 기사 또 처음에는 자신은 대표팀 감독에 맞는 그릇이 아니라며 대표팀 감독직을 고사했던 인물인지라 발언의 신빙성도 있는 편이다.
3. 활동
3.1. 2012년
3.2. 2013년
4. 평가
4.1. 본선진출 성공
수많은 불협화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희 감독은 한국을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있으나, 이러한 자신감이 생겨난 것은 겨우 1998년 월드컵 때 정도였다. 이당시 차범근 감독의 대표팀은 압도적인 성적으로 예선을 돌파하였고, 그 이후 2002년에는 개최국 특전, 2006년, 2010년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진출하였으나 경기 내용을 살펴 보면 결코 쉽게 통과하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애당초 본선 진출은 무조건 한다라는 생각 자체가 근거없는 자신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2018 월드컵 예선에서 중국, 카타르 등에 패한 슈틸리케호의 더욱 완벽한 실패에 따라 그래도 최강희 감독의 경우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재평가를 받기도했다.
최강희 감독은 자신이 취임 초기에 천명한 내용, 본선진출의 성공. 그리고 그 이후 퇴임을 확실하게 지켰다. 이 결과 덕분에 다음 감독으로 부임한 홍명보 감독은 본선 진출과정을 신경 쓸 필요없이 자유롭게 대표팀을 리빌딩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를 증명하듯 홍명보 감독은 총 14회에 달하는 A매치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승률은 겨우 25%밖에 되지 않는 역대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월드컵 이전까지는 퇴임 여론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4.2. 대표팀 선발의 원칙 성립
조광래 감독의 전술은 2014년 월드컵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스리백 전술로 인하여 다시 재조명받으며, 재평가받을 수 있다. 특히 현 국대 감독들 중 최고 승률이었으며, 취임 초기나 중기의 경기력은 상당히 좋았다는 점은 재평가를 통해 호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광래 감독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다름 아닌 선수 선발의 문제였다. 바로 주전 우선론이다.[4] 조광래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 발밑의 기술이 좋고 머리가 좋은 선수를 선호한다는 원칙 아래에 이러한 성향이 가장 가까운 선수들을 철저히 우대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A매치 훈련 과정에서 조광래호는 1군과 2군이 나뉘어 훈련을 받고, 국내파 선수들 중 K리그 득점왕이었던 유병수의 경우 교체 투입되었다가 바로 다른 선수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K리그 팬들은 조광래 감독의 자질에 대해서 비난하였고, K리그 출신 선수들의 모터베이션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이 하단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월드컵까지 기간이 오래 남아있는 시점에서 스스로 가용 자원을 제한시켰고, 이후 가용 자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때 대응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터진 것이 레바논 쇼크. 돈에 맞춰 제한된 선수를 고용하여 운영하는 클럽팀이나, 클럽팀을 무시하고 합숙훈련으로 선수 관리하던 시절의 국가대표팀에서나 가능한 운영방식이었다.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에 들어오자 마자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이 무너진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대표팀 축구팬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사실들 중 하나가, 월드컵은 결코 1년마다 열리는 리그 경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표팀은 유망주를 발굴하고,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다. 대표팀은 그 시점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모집해서 최고의 팀을 만드는 장소다. 당연히 치열한 포지션 경쟁과, 조합의 가능성을 두고 선수를 선발하는 것이고 그 원칙은 아무리 스타 선수라 하더라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최강희 감독은 이 원칙을 그대로 들이 밀어 대표팀을 운영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광래 감독에게 우대를 받던 선수들, 이른바 런던 올림픽 세대라 불리는 선수들이 SNS 항명 파동을 벌이는 등 멘탈레기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은 끝까지 지켜졌고 그 결과 국내 K리그 선수들의 불만이었던 대표팀 선출과정에서의 불이익 역시 크게 줄어들게 된다. 문제는 이 불합리가, 홍명보호에서 전혀 생각도 못한 형태로 부활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6]
또한, 대표팀은 그 시점에서 최고의 실력을 낼 수 있는 인물들을 뽑아 팀을 만드는 자리다. 유럽의 경우 팀은 2년 주기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바로 중요 이벤트라 말할 수 있는 유로와 월드컵을 주기로 해서 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시안컵과 월드컵이 비슷한 간격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지만, 이는 어느정도 통용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4년이라는 주기는 팀을 만들고 계속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해당 선수의 소속팀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 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조광래 감독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비판되는 점이 너무 초반에 베스트 일레븐론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무려 월드컵 본선이 4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말이다. 그 4년 사이에 주전 공격수가 2~3년 동안 선수구실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미드필더의 핵심이 살인태클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데도 조광래호는 철저한 베스트 일레븐 위주의 팀운영을 가져갔고 플랜B의 마련에 이상하리만치 소홀했다. 이러한 조광래 감독의 방침이 단적으로 드러난 예가 바로 목발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이청용을 쿠웨이트전에 소집을 고려하겠다는 인터뷰였다. 결국 그 쿠웨이트전은 최강희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폼이 떨어진 조광래호 주전들의 자리를 이동국이나 이근호, 김두현, 한상운 등 조광래호에서 외면받던 선수들이 흠잡을데 없이 메꾸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조광래 감독의 경우 자나깨나 바르샤식 패스 축구, 점유율 축구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 약체라는 레바논에게도 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점유율 축구의 몰락은 2014 월드컵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축구는 갈수록 전술의 변화가 빨라지며, 이 때문에 같은 전술만 고집하면 이내 다른 팀에게 전술이 다 파악되어서 결국 통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당장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두 줄 수비의 창시자 디에고 시메오네의 AT 마드리드가 리그 한번 우승한 이후 아직도 리그나 챔스 우승 트로피를 못 들어올린 것이나, 위르겐 클롭의 게겐 프레싱조차 몇년이 안되어 같은 분데스리가 팀들에게 플레이가 파훼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반면에 최강희 감독은 베스트 일레븐에 집착하기보다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기용하여 실험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비록 애매모한 스타팅 라인업으로 뚜렷한 주전이 없었다든지 그 과정에서 경기력이 평가절하 되었다든지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막장스런 경기력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본선에 진출해서 약속은 지켰다.
최강희 감독이 처음부터 대표팀 감독 연임을 할 생각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후임 감독을 위한 선수 자료를 준비했다고 볼 수도 있다.
4.3. 총평
조광래 감독 경질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조중연 회장이 개인 연줄까지 내세우면서 설득 끝에 겨우 최강희 감독을 선임, 결국 우여곡절 끝에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반발이 심했음에도 최강희 감독을 그대로 연임시킬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3연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 1위로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면 아마 축구협회에선 언플과 회유 로 온갖 구실을 붙여서 하기 싫다는 최강희 감독을 본선까지 끌고 가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3연전을 엉망으로 치른 게 오죽하면 최강희가 일부러 그랬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7]
이는 최강희만 탓하기보다 협회의 그릇된 운영 방식에도 분명한 비판이 가해져야만 한다. 당장 예선전이 한참 진행 중인데 대안도 준비 안 해놓고 일단 감독부터 날려놓고 다급해지니까, 본인이 하기 싫다는 최강희 감독을 인맥빨로 강제로 국대 감독에 눌러앉혔다. 당시 최강희는 전북 감독 자리에 애착심을 보이면서 국대 감독 자리를 영 내켜하지 않았으나, 사방에서 압력이 들어오자 예선까지만 국대를 맡겠다는 시한부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 이 시한부 조건이란 게 '난 진짜 진짜 하기 싫다. 그러니 제발 시키지 마라'라는 식의 아주 완곡한 표현이었으나, 멍청한 축협은 이 말도 안되는 조건을 덜컥 수용하면서 상황이 더 꼬여버린 것이다. '''도대체 전 세계 어느 나라 축구 대표팀이 예선용 감독 따로, 본선용 감독 따로 기용을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처음부터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8]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사태는 최강희 감독이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이 훨씬 더 큰 '''총체적 난국'''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축구협회는 그 다음 러시아 월드컵까지도 이러한 근시안적 졸속 행정을 되풀이했고, FC 코리아로 대표되는 극성 축구팬들은 위와 같은 국가대표 감독의 고충을 모르고 1년짜리 단기 부임한 감독만 닥달하는 과정이 최강희가 부임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되풀이되고 있다.[9][10]대표팀에 대한 나의 생각은 0%였다. 갈려면 그때 갈 수 있었다. 0.1%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왜 그때 안 갔겠는가? 2002년 박항서 감독, 2003년 쿠엘류 감독 밑에서 코치를 하는 동안 느꼈다. 대표팀은 내가 올 곳이 아니고, 다시는 맡아선 안된다는 걸. 대표팀 감독은 비즈니스와 정치를 해야 할 때가 더 많다. 난 그거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감독은 선수들과 늘 부대끼고, 그들을 관찰하고 특징을 파악해 맞는 옷을 입히는 거다. 그런데 대표팀에 가면 한 달에 겨우 사나흘 훈련하고 나머지 시간엔 K리그 보러 다니고 모여서 회의만 한다. 선수들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하다. 대표팀에서 무슨 닥공을 하고, 패스 축구, 템포 축구를 하나? 사흘 준비하면 하루는 회복 훈련, 하루는 전술 훈련과 스피킹 게임하고, 다음 날 경기 뚝딱한 뒤 끝나면 짐 싸서 각자 잘 가~ 하고 헤어진다. 그런데 감독은 끊임없이 언론에다가 자기가 그 사흘 동안 뭘 했는지를 내놔야 한다. 이런 축구를 추구하고 이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뻥을 치는 거다. 큰 대회 전까지, 혹은 장기 합숙 훈련을 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다. 한국 축구의 현실이 선수들 모아서 사흘 훈련하고는 세계적인 팀들과 경쟁하는 건 어렵다. 이젠 아시아 내에서 격차가 줄어서 예선도 아슬아슬하다. 근데 팬들의 눈높이는 저만치 올라가 있다. 누가 "당신 대표팀 감독인데 축구 색깔이 뭐냐"고 묻길래 난 살색이라고 답했다. 장기 소집이라면 모를까 짧게 소집해서 색깔 내는 건 어렵다. 내가 지향하는 것과 스타일이 달랐다. 죽을 거 알고 그 자리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게 거부하고 밀어냈는데 2011년 12월에는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수 시절 스승이었던 조중연 전 회장과의 의리로 볼 수도 있다. 그 분에게 빚진 은혜도 갚아야 했다. 그리고 내 의지만으로 뿌리칠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결국 봉동이장이 서울로 압송돼갔다.
- '''서호정의 킥오프'''에서 발췌
최강희 감독의 발언에서 알다시피 애초에 대표팀과 클럽팀은 명백히 다르다. 대표팀은 클럽팀에 비해 같이 모여서 훈련하고 경기를 치르는 횟수가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전술을 실험하고 개발하는 일은 클럽팀에 비해 훨씬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북 팬들[11] 과 비난 여론[12] 에 떠밀려 퇴출이나 사임하는 형태가 되기는 하였지만 최강희 감독은 자신의 말을 지켰고, 전북으로 다시 돌아갔다. 애당초 최강희 감독은 자신의 원칙, 어디까지나 예선 과정만 자신이 맡겠다는 점을 계속해서 어필하였다. 그 전에 3차 예선 쿠웨이트전도 원래는 조광래 감독이 맡았어야 했던 경기이고 조광래가 팀을 문제없이 잘 이끌었다면 중도에 경질될 일도, 최강희가 원치 않게 감독직을 맡을 일도 없었다. 그리고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이후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좀 무시무시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최종예선도 못 가고 탈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쿠웨이트전까지는 조광래 감독에게 맡겼어야 하고 그 후에 잘못되어서 경질해도 후임 감독은 신중하게 선임했어야 했다. 한국 대표팀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국 대표팀도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을 데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최종예선도 못 가보고 3차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강희 감독은 일단 자기가 하겠다는 선까지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본격 시력저하 전문 급의 경기력과 리더십 부재, 선수들과의 갈등과 전술의 부재 등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좋은 감독은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상술한 브라질 월드컵 이후 서호정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했고. 그래서 축구팬들은 알게 모르게 '''국가대표팀 감독''' 최강희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고 한다. 당장 싸움이 붙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력이 얽혀서 개판이 나기 때문이다.
- 전북빠(최강희 감독을 빼냈다는 이유로)
- 케이리그빠(국내파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 이동국빠(박빠들의 어그로 등 때문에)
- 홍명보까[13] (엔트으리 때문에)
- 기성용까(SNS 사건 때문에)
- 일부 일베충(기성용이 전라도 출신[14][15] 이라는 이유로)
- 김현회빠(한국 축구를 위해 용기있게 내부고발을 했다는 이유로)
- 동정론(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정치적 이유로 강제로 끌려온 감독, 1년만 맡을테니 후임자를 찾으라는 요청에도 축구협회가 후임자 물색에 소극적이었던 부분, 그 와중에 통제되지 않는 선수단 등)
- 기성용빠[16] (최강희호의 성적도 좋지 않고 전술도 안 좋았는데 충분히 무시받을 만하다는 이유로)
- 해축빠(국내파가 형편없기 때문에)
- 박주영빠(해외에서 뛰고 있는 한국 대표 공격수를 지지하는 이유로[17] )
- 홍명보빠(2002년의 영웅이며 올림픽 동메달의 성과가 있다는 이유로)
- 국축까(해외파가 우월하게 때문에)
- 야빠(그냥 축구를 까려는 이유로)
- 대다수 일베충(야갤의 영향으로 국축까가 많기 때문에)
- 김현회까(한국 축구의 인재를 망치려고 한다는 이유로)
- 무능론(이유가 뭐가 되더라도 일단 국가대표팀을 맡으면 최선을 다 했어야 했는데 시작부터 시한부 선언을 한 부분에 대한 무책임, 전술적 부족함과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점 등[18] )
그리고 이때의 인상이 아직도 해축빠들에게 크게 남았는지 현재 기성용을 필두로 해외파들의 시대가 열린 지금은 최강희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더욱 커져서 나무위키에도 최강희 문서가 어떠한 인물들에 의해 지나친 비난이 쓰여지기도 하는 등, 최강희는 현재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5. 전적
'''결과 : 총 14전 7승 2무 5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