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신왕

 


'''백제 제19대 건길지'''
'''久爾辛王 | 구이신왕'''
'''시호'''
구이신왕(久爾辛王)
'''성씨'''
부여(扶餘)
''''''
구이신(久爾辛) / 기(奇)(?)[1]
'''왕자'''
부여비유(扶餘毗有)(?)[2]
'''부왕'''
전지왕(腆支王)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생몰연도'''
음력
? ~ 427년 12월
'''재위기간'''
음력
420년 3월 ~ 427년 12월 (8년)
1. 개요
2. 생애
3. 치세
4. 목만치의 전횡?
5. 생몰년도에 대한 의문점
6.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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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9대 국왕이자 건길지.

2. 생애


전왕 전지왕의 맏아들로 약 8년간 재위했으나 즉위와 사망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427년 12월 사망했다고 하는데 송서에서는 425년에 이미 비유왕이 국왕에 등극한 것으로 나오며 반대로 일본서기에서는 구이신왕 사후 개로왕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나와서 여러모로 혼란의 도가니.

3. 치세


구이신왕을 단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왕들 중 개루왕, 사반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 침류왕, 삼근왕, 혜왕, 법왕과 더불어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를 모두 뒤져서 업적을 정리해도 A4 용지 1페이지조차 채울 수 없는 왕들 중 하나다. 그나마 위의 왕들 중에는 재위 기간이 1~3년밖에 안 되는 왕들도 있는데, 구이신왕은 재위 기간이 8년이나 되지만 남은 기록이 너무 적은 데다가 그마저도 사신무역 기록을 빼면 없다. 기록말살형이라도 당했나 싶을 정도로 기록이 없어 어떤 왕이었는지 자세히 알기 힘들다. 송서에도 아예 서차가 누락되어 있는데, 비유왕이 재위 기간이 긺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서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년도는 429년으로 구이신왕이 사망한 428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일본 기준으로는 비유왕이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어쨌든 비유왕으로 승계되는 과정이 정상적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구이신왕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 다른 하나는 백제의 국왕 재위 기간 계산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비유왕 2년이 이듬해인 428년이므로 백제에서는 왕이 죽으면 바로 그 달부터 다음 왕의 재위 기간을 계산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4. 목만치의 전횡?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구이신왕의 기록 양이 적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문구가 《일본서기》에 있다. 구이신왕은 전지왕이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이 때문에 목만치라는 인물이 국정을 장악했고,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과 놀아나며 구이신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국내나 중국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백제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나마 가장 자세하다. 실제로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면 허수아비 왕이었을 것이다.

5. 생몰년도에 대한 의문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지왕의 재위 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4년(구이신왕 5)에 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3] 반면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개로왕의 즉위 원년이 429년(비유왕 3)으로 기록되어 있어, 구이신왕의 생몰 연대에 차이가 보인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구이신왕 본기'''
一年春三月 구이신왕이 즉위하다
八年冬十二月 구이신왕이 죽다
이게 끝. 재위 8년간 왕위에 올랐고 사망했다 빼면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이 없다. 삼국 중 특히 백제는 기록이 너무 없는데 구이신왕도 예 중 하나이다.

[1] 박호균은 저서 『칠지도 명문』에서 구이신을 줄여서 기(奇)라고 적었다고 주장하였다.[2]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3] 송서 권97 이만열전 백제편 “소제 경평 2년(424년), 영이 장사 장위를 보내 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쳤다. 少帝景平二年,映遣長史張威詣闕貢獻。” 여기서 ‘영’이 바로 백제왕 여영, 즉 전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