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위크 칸

 


'''원 추존 황제'''
'''定宗 | 정종'''
'''몽골 제국 제3대 대칸'''
'''ᠭᠦᠶᠦᠭ ᠬᠠᠭᠠᠨ | 귀위크 칸'''
'''묘호'''
'''정종(定宗)'''
'''시호'''
간평황제(簡平皇帝)
'''칸호'''[1]
귀위크 칸
貴由汗(귀유한)
ᠭᠦᠶᠦᠭ ᠬᠠᠭᠠᠨ
''''''
보르지긴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
귀위크[2]
貴由(귀유)
ᠭᠦᠶᠦᠭ
'''부모'''
부황 태종 보르지긴 오고타이
모후 소자황후 나이만 퇴레게네
'''생몰 기간'''
1206년 ~ 1248년 4월 (42세)
'''재위 기간'''
1246년 8월 24일 ~ 1248년 4월[3] (1년 8개월)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가계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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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몽골 제국의 제3대 카간.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간평황제(簡平皇帝). 휘는 귀위크. 오고타이 칸의 맏아들로 여러모로 문제아라는 평가만 받고 있었으나... 최근에 재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할아버지 칭기즈 칸 시절부터 몽골의 원정에 참전하면서 경험치를 쌓았고, 아버지 오고타이 칸의 집권기에는 포선만노[4] 정벌과 서방 원정[5]에 참전했다. 서방 원정의 지휘권은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바투주치인 울루스의 군대를 지휘했고 귀위크는 중앙 울루스에서 파견된 군대를 지휘했다. 이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원정대의 총사령관은 바투였으나, 실제로도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했냐는 것에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존재한다.
서방 원정에서 귀위크는 바투와 갈등을 빚은 끝에 오고타이의 호출을 받아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6]. 어찌 되었든 소환당한 귀위크는 아버지 오고타이에게 개발살이 나고 원정군에 귀환하려 했는데... 그 사이 오고타이가 죽었다. 오고타이가 죽을 당시에 몽골 고원에는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왕공들이 없었던 터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귀위크가 그 중 가장 먼저 도착하여 대칸에 오르는데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오고타이가 죽은 뒤에 정권을 장악한 것은 귀위크의 친모, 오고타이의 여섯번째 아내이자 나이만족 출신인 퇴레게네 카툰이었다. 퇴레게네는 자신이 특히 사랑한 아들 귀위크의 즉위[7]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바투가 귀위크에 대한 지지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았으나[8] 귀위크는 모든 몽골 왕공들의 지지를 받아 1246년 대칸에 즉위했다. 바투와 귀위크는 서로를 싫어했지만 바투는 최소한 귀위크를 대칸으로 존중해 주었다.
이때 귀위크는 몽골 왕공들에게 대칸은 이후로 그 자신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맹세를 요구했고,[9] 왕공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대칸으로는 고작 2년 동안만 집권했지만, 그 기간 동안 급진적으로 대칸의 왕권 강화 정책과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한 결과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 비록 생전에는 그에게 대항한[10] 몽골 귀족들이 없었으나, 그의 사후 바투를 주축으로한 몽골인들은 오고타이의 후손이 아닌 툴루이 칸의 장남 몽케를 대칸으로 옹립한다. 이 과정에서 오고타이계 왕공들은 귀위크 즉위시의 다짐을 환기시키며 이를 반대하였다. 몽케 지지파는 이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는 못 했으나, 힘으로 반대파의 주장을 뭉갰다.
포악했으나[11] 정치적으로는 감각이 있었다.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퇴레게네 카툰의 정책 중에 몽골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과감히 철폐하기도 했고, 몽골 제국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여러 부족들의 분쟁에 적절하게 대처했다.
기존에는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그의 행적에 비해 지나치게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의견이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 유난히 귀위크 칸이 당대 이슬람계, 그리고 몽골계에서도 대단히 악평을 받았다는 것. 귀위크 칸은 친족이 권력을 이용하여 지나친 행위를 일삼자 이것을 막기 위해 나름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정적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후대의 칸들이 툴루이 계열의 후손으로 추대되면서 악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케의 시대 이후로 몽골 제국의 서부는 차가타이 계통, 동부는 쿠빌라이 계통이 다스렸음을 생각하면, 왜 몽골계 사료와 이슬람계 사료들이 귀위크에 적대적인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다만 차가타이 계통이나[12] 기독교계 기록들은 그나마 귀위크에게 적대적이지 않은데, 차가타이 계통은 본디 오고타이 계통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고, 기독교계 기록들은 툴루이계 왕공들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1248년, 귀위크 칸은 바투를 몽골로 소환했다. 대칸이 불렀다고 수행원들만 데리고 쫄래쫄래 갔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 것을 잘 알고 있는 바투는 대군을 이끌고 왔다. 귀위크도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였다. 내전이 벌어질 뻔 했지만, 귀위크가 행군 도중 사망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귀위크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지나친 음주에 의한 건강 악화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다른 설은 암살설인데 툴루이의 처였던 소르칵타니 베키가 미리 바투에게 경고를 하여 그가 미리 자객을 보내 죽였다는 이야기다. 훗날 몽케가 칸 자리에 오르는데 바투가 지대한 지원을 해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귀위크는 유럽 원정을 재개하기를 원했지만 대칸에 오른지 2년만에 죽으면서 이루지 못했다. 귀위크 사후 몽골 제국이 서방 원정보다는 남방 원정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서유럽은 안전하게 되었다. 또한 귀위크 사후 바투 계열은 몽골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3. 기타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지상의) 모든 위대한 울루스(를 지배하는) 사해의 군주의 칙령.

이것은 대(大)파파(Papa-i kalan:교황)에게 보내는 명령이다.

알고 깨달을지어다.

짐은 협의한 연후에 캐랠(Karal:왕)의 지방들에 복속의 요청을 보냈노라.

만약 짐의 말이 도달하거든 대(大)파파인 너는 캐랠들과 모두 함께, 너 스스로 짐의 어전에 와야 할 것이다.

야사(yasa:법령)의 모든 명령을 그때 네게 들려줄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대는 내가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너희들 자신을 알리고 요청을 보냈다.

이러한 너의 요청을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또 한 가지.

그대는 전갈을 내게 보내기를 "(당신은) 마자르(Majar)와 키리스탄(Kiristan) 지방들을 정복했다. 나는 경악했다. 당신에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라고 했다.

너의 말도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주의 명령(farman-i khuda)을 칭기스 칸과 카안(Qu'an:우구데이 칸)은 두 지방에게 모두 듣도록 보냈다.

주의 명령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만심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사신들과 일치(Ilchi:사신)들을 죽였다.

(그래서) 그 지방들과 주민들을 오랜 주(khuda-i quadim)는 죽이고 절멸시킨 것이다.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만의 힘만으로 어떻게 (적을) 죽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도(tarsa)이다. 주를 숭배하고 눈물을 흘린다." 라고 한다면,

주께서 누구를 징계하고 진실로 누구에게 은총을 내리실지, 네가 말하는 것이 (그대로 되리라고) 네가 어찌 아느냐?

주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지방들이 짐에게 복종케 하였노라.

짐이 생각건대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너희들이 옳은 마음으로 "복속(il)하겠습니다.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너 스스로 캐랠들을 지휘하여

모두 다 함께 복속하며 짐의 어전으로 오도록 하라.

너의 복속은 그 때 짐이 알리라.

만약 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짐의 명령을 어긴다면, 너희들을 짐은 반역자(yaghi)로 알 것이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도 알려주리라.

만약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주께서 아시는 것을 짐이 어찌 알겠는가?

-로마 교황청 비밀서고에 보관된, 1246년 11월 카르피니를 통해서 구육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친서. 김호동 교수 역.#

넷상에 떠도는 엉터리 번역본 때문에 세간에는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서 '종교를 강요하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교황은 서신에서 '1.침략행위를 그만두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 2.헝가리를 침략한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귀위크는 답장에서, '네 요구를 둘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 헝가리인들은 칸에게 복종하라는 신의 명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우리에게 정복되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는 요지의 내용을 펼쳤다.
반면 넷상에 떠도는 번역본은 내용에 많은 왜곡이 가해졌다. 기독교의 하느님과 탱그리를 동일시하고 있는 원문과 달리 '너희 신'과 '우리 신'을 구분하는 내용을 날조해서 '서양'과 '동양'의 대립구도를 과하게 강조하는 동시에, 귀위크가 동유럽 침략은 신의 뜻이었다며 강짜를 부리는 부분은 삭제하고 오히려 기독교 세력을 종교를 강요한 가해자로 표현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우월한 몽골인들에게 당해도 싼 열등한 문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넷상에 떠도는 번역본을 가지고 서양문명(?)에 대한 동양문명(?)의 우위를 주장하거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데 자제해야 할 것이다.

4. 가계


  • 황비 : 원비 멸아걸씨(元妃 蔑兒乞氏)
  • 황후 : 불명
  • 황후 : 불명
  • 황후 : 흠숙황후 알올립씨(欽淑皇后 斡兀立氏)
    • 장남 : 홀찰 태자(忽察 太子)
    • 차남 : 뇌홀 태자(腦忽 太子)
  • 황후 : 내만진 황후 내마진씨(乃蠻眞 皇后 乃馬眞氏)
    • 3남 : 남평왕 화홀(南平王 禾忽)
  • 황비 : 불명
    • 장녀 : 고창공주 파파합이(高昌公主 巴巴哈爾) - 역도호화적합아적근(亦都護火赤哈兒的斤)에게 하가.
    • 차녀 : 조국대장공주 엽리미실(趙國大長公主 葉里迷失) - 조충양왕 군불화(趙忠襄王 君不花)에게 하가.

5. 대중매체에서


[image]
징기스칸 4 PK에서는 시나리오 3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71 / 73 / 67로 일반 장수라면 준수한 급이지만 제국의 칸이라기에는 좀 심심하다. 그 대신 일러스트는 일족에서 손꼽히는 꽃미남(...). 시나리오 3에서 몽골 제국을 컴퓨터에 맡겨 놓으면 이벤트를 통해 바투와의 대립을 보여주고, 오고타이 사후 칸에 즉위하지만 최후에는 바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6. 둘러보기



'''우구데이 칸국의 역대 칸'''
초대 오고타이 칸

'''2대 귀위크 칸'''

3대 카이두 칸
언어별 표기
한국어
귀위크 칸
중국어
貴由汗
일본어
グユク・カン
몽골어
ᠭᠦᠶᠦᠭ ᠬᠠᠭᠠᠨ
Гүюг хаан
영어
Güyük Khan

[1] 몽골식 군주 칭호[2] 표준국어대사전 표기[3] 즉위한 연도가 1246년인 것은 귀위크 칸의 어머니인 퇴레게네 카툰이 1246년까지 섭정했기 때문이다.[4] 蒲鮮万奴. 금나라의 장군. 몽골의 공격으로 금이 허약해지자 반란을 일으켜 만주 지역에 대진국(大眞國)을 세웠다.[5] 각 울루스의 장자들이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고 하여 '장자 원정'이라고도 칭한다.[6] 원조비사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지만, 해당 구절은 후대에 더해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7] 오고타이가 후계자를 두었으나 사후에 무시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후일 쿠빌라이 칸도 오고타이가 후계자를 두지 않아 난리가 났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8] 단, 바투는 자신의 형제들을 몽골 고원으로 보내 귀위크의 즉위식에 참여시켰다. 특히 바투의 형, 주치의 장자 오르두는 즉위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고. 바투가 귀위크가 즉위한 쿠릴타이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위크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주장하는 것은 오해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오고타이가 오르두 말고 바투를 유럽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삼은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유럽은 몽골에서 가장 먼 지역으로 깁차크초원을 지나서 위치하는데, 이는 칭기스칸의 분배에 따르면 장남 주치 가문이 관할해야 할 곳이다.) 또한 귀유크와 바투 사이에 대립은 상황적으로 봤을 때에 폭발 직전이였다.(귀위크가 죽기 직전에 바투와의 만남시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였는데, 만나기 직전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확실하게는 알 수는 없지만 상호 간에 내전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였다.) 또한 바투는 유럽원정군을 자신이 계속 손에 쥐고서 반환하지도 않았으며, 귀위크 사망 이후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대칸에 옹립하였다. 그렇다면 바투가 직접적인 반발을 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때까지 아직도 생존한 칭기스칸의 아들 차가타이가 귀위크를 지지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차가타이는 칭기스칸 생존시에도 법을 담당하면서 신망을 받던 인물이였으며, 오고타이 등극시에도 적극 지지하여 많은 우대를 받았는데, 이 인물이 귀위크를 지지하였기에 바투로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귀위크칸이 차가타이가 사망 이후에 그가 지명한 후계자가 아닌 자기 입맛대로 후계자를 세우면서 귀위크가 사망할 때에는 오고타이家가 대칸의 자리를 빼앗긴 상황과도 연결 될 수 있다.[9] 칭기스 칸이 오고타이 가문에게 영원한 왕권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존재한다.[10] 정확히는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몽골 귀족이 없었다. 툴루이계 왕공들과 갈등을 빚었거나 바투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고 아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귀위크의 생전에 저들은 대칸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11] 칭기스 칸이 고문을 법령으로 금지한 걸 깨고 모후 퇴레게네가 신임했던 무슬림 노예 출신의 파티마란 여인을 고문했다. 그야말로 같은 몽골인들에게도 욕먹을 짓을 한 인물. 세금을 무겁게 거두는 바람에 피지배 민족들의 증오를 받기도 했고.[12] 당장 티무르만 해도 바예지드 1세와 서신을 교환하며 신경전을 벌일 때 몽케를 찬탈자로 격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