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마 후미오

 


'''일본 중의원 (나가사키 2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4대
규마 후미오'''

'''제45대'''
후쿠다 에리코
'''일본국 초대 방위대신
(きゅう((ふみ(
규마 후미오
'''
'''이름'''
규마 후미오 ((きゅう((ふみ()
'''출생일'''
1940년 12월 4일 (84세)
'''출생지'''
나가사키현 미나미타카키군 가즈사마치 (現 미나미시마바라시)
'''학력'''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가족'''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슬하 2남 2녀
'''정당'''

'''의원 선수'''
'''9''' (중)
'''의원 대수'''
36, 37, 38, 39, 40, 41, 42, 43, 44
'''지역구'''
나가사키 2구
'''약력'''
농림성 공무원
나가사키현청 직원
나가사키현의회 의원
나가사키현 제2구 중의원
방위청 장관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리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방위청 장관 (아베 신조 1차 내각)
방위대신
1. 개요
2. 생애 및 정치 활동
3. 발언
4. 소속 정당
5. 기타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나가사키현 제2구 중의원, 방위청 장관, 초대 방위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1940년 나가사키현 가즈사마치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중학교 직원이었다. 나가사키현립 코카 고등학교,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농림성(지금의 농림수산성)과 나가사키현 현청에서 근무한다. 1971년 나가사키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나가사키현 제1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소선거구제 개편 이후에는 나가사키현 제2구에 출마해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기 전까지 중의원을 역임한다. 또한 아소 다로가 주도한 정치 그룹인 시시노회에 가입한다. 누카가 후쿠시로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가려자 반대하기도 했다.
중의원 시절에는 운수정무차관, 자민당 국회대책 부위원장, 자민당 부간사장 등의 직책을 거쳐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는다. 이후 자민당에서 간사장 대리, 총무회장 등의 당직을 맡다가 아베 신조 1차 내각에서 다시 방위청 장관을 역임한다. 그러다가 그가 방위청 장관을 역임하던 2007년 1월 경에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되면서 마지막 방위청 장관이 된 것과 동시에 초대 방위대신이 되었다. 하지만 후술할 원폭 관련 발언 논란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지역구인 나가사키현 제2구에서 민주당이 여성 자객으로 공천한 정치 신인인 후쿠다 에리코[1]에 밀려 낙선하고, 이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한 것에 이어 다음해인 2013년에 정계를 은퇴, 같은 해에 욱일대수장을 수여받는다.

3. 발언


이시하라 신타로아소 다로만큼은 아니지만 이 사람도 알게 모르게 비정상적인 발언들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많다.
  • 2006년 12월, 방위청 장관 재임 시절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석해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설명한답시고 “나도 오키나와를 가장 먼저 점령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 2007년 4월 17일, 나가사키시 시장 선거 기간 당시 나가사키역 부근에서 선거 운동을 하던 이토 잇쵸 당시 나가사키시 시장이 야쿠자 저직원이 쏜 총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심정지 상태였던 이토 시장에 대해 “만일의 사태는 생각해선 안된다. 투표일 3일 전의 시점을 지나버리게 되면 다른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되어 일본 공산당 후보가 이기게 된다.”라는 말을 했다. 당시 시장 선거 투표일이 22일이었으니 사건이 벌어진 17일 기준 투표일까지 5일 남은 상황이었는데, 투표일을 3일 남겨 둔 시점까지는 다른 후보로 교체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먹이며 그 이상 시간이 지난 뒤에 죽으면 다른 후보로 교체하지 못해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는 얘기를 사경을 헤매고 있는 후보에게 말한 것이다. 이에 당시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인 자민당에서도 규마의 발언을 비판했다. 결국 이토 시장은 다음날인 18일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2]
  • 2007년 6월 30일, 한 대학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원폭 투하 측의 논리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3] 당연히 여당 내에서도 비판을 받게 되어 규마 본인은 사과 및 발언 철회를 했으나, 이후에도 피폭자 단체들은 물론 나가사키현 현지사, 현의회, 나가사키시 시장, 시의회 등 나가사키의 지역 정치인들에게도 항의를 받았다. 결국 이 발언으로 인해 규마는 방위대신 직에서 물러난다. 관련 기사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1 -
정계 입문
정계 은퇴

5. 기타


[1] 1980년생으로, 선거 당시 28세였다. 다시말해 딸 뻘되는 사람에게 진 것이다(...).[2] 이토 시장의 빈 자리는 그의 사위가 추가 입후보를 통해 출마했다. 그런데 이것을 타우에 토미히사라는 나가사키시 시청 직원이 가족세습이라고 비판하며 시장 선거에 추가 입후보를 통해 출마했는데, 선거 결과 그 시청 직원이 0.5%p 차이로 시장에 당선되는 대이변을 기록했다. 이후 타우에 시장은 4선을 기록해 현재까지 나가사키시 시장으로 재임 중이다.[3] 일본이 원폭을 어쩌다가 받았는 지를 생각하면 망언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규마는 원폭 피해 지역 중 하나인 나가사키현이 본인의 지역구다.